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탈무드Talmud. 1


탈무드Talmud.


탈무드를 읽기 위해서는 탈무드에 나오는 많은 현자와 현자 간의 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성전 멸망 이후부터 예후다 하 - 나(약 220 C.E.) 시대까지 살았던 현자들을 타나임(tannaim)이라고 한다. 아람어로 타나(teni 또는 tena)는 가르친다는 뜻으로 타나임은 가르치는 사람들(선생)이라는 뜻이다. 타나임 이후(즉, 예후다 하 - 나시 이후)부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완성되기까지(약 500 C.E.) 활동한 현자들을 아모라임(amoraim)이라 부르는데, 이는 '말하다'라는 뜻의 아마르(amar)에서 파생되어, '말하는 사람' 또는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타나임은 팔레스타인에서만 활동하였고, 아모라임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아래 도표는 주목할 만한 타나임과 아모라임을 발췌한 것이다.

유대교인들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다.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랍비가 말하면 제자들이 듣고, 그 제자들이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일련의 연결고리를 통해 전달되는 조상들의 법과 전통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전통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무함마드 사후 그와 동시대에 있었던 사람들과 이들에게서 구전을 받은 제1세대, 그리고 제1세대에게서 전해들은 제2세대 사람들이 구전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유대교의 탈무드는 미쉬나(Mishna)와 게마라(Gemara, 설명을 한 각주, 주후 300~400)로 구성되어 있다. 미쉬나는 글로 된 율법이나 구전 율법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게마라는 다른 여러 의견들의 분석을 통해 율례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탈무드는 모세 율법에서 시작하였으며, 크게 바벨론 탈무드(500~700)와 팔레스타인 탈무드(500)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이 중 대체로 바벨론 탈무드가 더 정확하고 폭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무드는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사법(종자, 과일, 풀, 나무 등과 관련), 절기(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금식 등 명절 및 종교일과 관련), 여성(형제의 부인, 서원, 간통, 이혼법 등 약혼, 혼인, 이혼과 관련), 손해(보상, 태형, 맹세, 우상 숭배 등 민사와 형사법과 관련), 성별(제물, 헌물, 첫 출생 등 제사법과 관련), 정결(옷과 집, 가구, 한센씨병 등 정결법) 등을 다룬다. 이처럼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규정해주고 있다. 또한 탈무드는 전통과 관례와 법규, 판결 그리고 모세법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유대의 구전법(Oral Law)은 대개는 모세 오경을 해설한 미드라쉬(Midrash)와 랍비 율법의 판례인 할라카(Halakah), 그리고 속담이나 비유, 이야기들을 구약에 비추어 해설한 학가다(Haggadah)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쉬나가 집대성된 이후 약 2세기 반에 걸쳐 미쉬나에 대한 주석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미쉬나에 대한 주석을 게마라(Gemara)라고 한다. 게마라의 어원인 게마르(gemar)는 아람어로 '완성한다' 또는 '배운다'라는 뜻으로, '전통을 배우는 것' 또는 '전통적인 가르침'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전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 성문화된 토라의 '완성'으로 볼 수 있다. 미쉬나와 미쉬나에 대한 주석인 게마라를 합쳐 탈무드라고 부른다(미쉬나+게마라=탈무드). 탈무드라 하면 '행하는 것'(maase)과 비교된 개념으로 '공부하는 것' 혹은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탈무드는 5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집대성된 예루살렘 탈무드〔Talmud Yerushalmi, 예루살렘에서 집대성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타인 탈무드(PalestineTalmud)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와 6세기 초에 바빌로니아에서 집대성된 바빌로니아 탈무드(talmud Bavli)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탈무드'라고 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가리킨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난이하다.

rabbi/랍비"
 유대교의 율법교사에 대한 경칭.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님’(요한 9:2)이라는 뜻의 헤브라이어로, 라보니(rabboni)라고도 한다(요한 20:16). 이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되었고,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제도로 정착되었다. 랍비가 될 사람은 구약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랍비교육과정에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도력 배양을 위한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능은 유대교 내의 다양한 분파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유대인들 사이에도 정통파 ·보수파 ·개혁파가 있어 분파마다 랍비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
일반적인 기능과 역할은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며, 각종 교육활동에 폭넓게 참여한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관여하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일부 랍비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시간제 봉사직으로 랍비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공식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 공동체 내에 의식을 행할 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 랍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14세기 이후 랍비들에게 봉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생활에 구애받을 경우 그 직책수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랍비라는 경칭으로 부르는 것을 경고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참교사이며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었다(마태 23:7~8).
Ben Judah Gershom/ 게르솜"
유대인 교육자. 독일 마인츠에서 랍비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탈무드》교수법을 처음으로 유럽에 도입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라베누 게르숌이라고도 한다. 독일 마인츠에서 랍비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독일과 프랑스에 사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사회문제에 대해 진력하였다. 교사로서는 바빌로니아와 팔레스티나의 회당에서 쓰는 《탈무드》 교수법을 처음으로 유럽에 도입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탈무드 평주()》를 많이 남겼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유배된 자들의 빛’이라고 불렸다.

탈무드를 읽기 위해서는 탈무드에 나오는 많은 현자와 현자 간의 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성전 멸망 이후부터 예후다 하 - 나(약 220 C.E.) 시대까지 살았던 현자들을 타나임(tannaim)이라고 한다. 아람어로 타나(teni 또는 tena)는 가르친다는 뜻으로 타나임은 가르치는 사람들(선생)이라는 뜻이다. 타나임 이후(즉, 예후다 하 - 나시 이후)부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완성되기까지(약 500 C.E.) 활동한 현자들을 아모라임(amoraim)이라 부르는데, 이는 '말하다'라는 뜻의 아마르(amar)에서 파생되어, '말하는 사람' 또는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타나임은 팔레스타인에서만 활동하였고, 아모라임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아래 도표는 주목할 만한 타나임과 아모라임을 발췌한 것이다.

타나임 의 현자.

타나임
세대현자기타
나시현자들
0

시몬 하짜딕

안티고누스 쏘코
요시 벤 요에제르
요시 벤 요하난
여호수아 벤 페라히야
니타이 하 - 아르발리
예후다 벤 타바이
시몬 벤 쉐탁
쉐마이야
아브탈리온
힐렐 하자켄
샤마이 하자켄
1
라반 가말리엘 하자켄 = 라반 가말리엘 1세
라반 시몬 벤 가말리엘(라반 가말리엘 2세)
힐렐학파와 샤마이 학파
예루살렘+야브네(약 10~90 C.E.)
아카비야 벤 마할랄렐
하니나 세간 하 - 코하님
랍비 네훈야 벤 하 - 카나
나훔 하마데
랍비 짜독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
랍비 엘리에제르 벤 야콥
랍비 하니나 벤 도사
하나니아 벤 히즈키아 벤 가론
나훔 이쉬 김조
아키바 벤 메할렐
랍비 하니나 싸간 하코하님
2
라반 가말리엘 2세
랍피 파피아스
야브네(약 90~130 C.E.)
랍비 도사 벤 하르키나스
랍비 엘리에제르 벤 힐카누스 = 랍비 엘리에제르(미쉬나에서)
랍비 여호수아 벤 하나니아 = 랍비 여호수아(미쉬나에서)
랍비 요시 하 - 코헨
시몬 벤 나타나엘
엘아자르 벤 아라크
랍비 엘리에제르 벤 아자리아
랍비 엘아잘 벤 짜독
아바 사울 벤 바트닛
슈무엘 하 - 카탄
시몬 하파콜리
벤 파투리
랍비 엘라자르 하모다이
랍비 레비타스 이쉬 야브네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 = 랍비 이스마엘
랍비 아키바 벤 요셉 = 랍비 아키바
랍비 타르폰
랍비 일라이
아퀼라스
랍비 요하난 벤 토르타
파포스 = 파포스 벤 예후다
랍비 요하난 벤 누리
랍비 요시 하 - 겔릴리
랍비 엘아자르 히스마
랍비 요하난 벤 베로카
랍비 시몬 벤 나노스
랍비 요시 벤 도르마스킷
랍비 하니나 벤 테라디온
랍비 엘아자르 벤 파르타
라브 예후다 바르 바바
랍비 요시 벤 키스마
시몬 벤 아자이
시몬 벤 조마
엘리샤 벤 아부야
랍비 하니나 벤 가말리엘
랍비 하나니아 벤 예후다
랍비 시몬 벤 타르폰
랍비 엘아자르 벤 예후다
시몬 하팀니
하나니아 벤 하키나이
랍비 히드카
랍비 예후다 벤 바티라(베테라)
랍비 하나니아
3
라반 시몬 벤 가말리엘 2세
랍비 요시야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예루살렘 바깥 지역으로 옮김.
[예] 우샤, 베이트 쉐아림, 지포리, 티베리아
아바 하닌(혹은 하난)
랍비 메이르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혹은 벤 요하이)
랍비 요시 벤 할라프타
랍비 예후다 일라이
랍비 느헤미야
랍비 엘아자르 벤 샤무아
랍비 엘리에제르 벤 야콥
랍비 요하난 하 - 산데라르
랍비 엘리에제르(혹은 엘아자르) 벤 랍비 요시하 - 겔릴리
랍비 여호수아 벤 카르하(또는 코르하)
랍비 엘아자르 벤 짜독 2세
랍비 요시 벤 야시안
랍비 이스마엘 바노 쉘 랍비 요하난 벤 베로카 아바 사울
랍비 하나니아 벤 아카비아
랍비 하나니아 벤 아카시야
이시 벤 아카비아
랍비 네호라이
르우벤 벤 이스트로벨리
아바 요시 벤 도스타이
4
랍비 예후다 하 - 나시( = 라비)
랍비 도스타이 바르 야나이

랍비 시몬 벤 예후다
아하이 바르 요쉬아
랍비 야콥
솜쿠스(벤 요셉)
랍비 이쯔학
랍비 요시 벤 키페르
랍비 도사
도스타이 바르 예후다
랍비 엘아자르 벤 라쉬비
랍비 핀하스 벤 야이르
랍비 이스마엘 바르 요시(혹은 요셉) 벤 할라프타
랍비 이스마엘 베라비 요시
랍비 메나켐 바르 요시 벤 할라프타
랍비 요시 벤 예후다(벤 일라이)
랍비 예후다 벤 라키쉬
랍비 엘아자르 벤 예후다
랍비 시몬 벤 엘아자르(벤 샤무아)
랍비 요시 벤 메슐람
랍비 나탄 바블리
랍비 엘아잘 하카팔
아바 엘아자르 벤 감라
랍비 시몬 바르 요시 벤 라콘야
랍비 시몬 벤 메나시아
랍비 마나
랍비 예후다 벤 테마
5
랍비 가말리엘 3세
랍비 히야

바르 카파라
랍비 시몬 벤 할라프타
레비 바르 시시
랍비 시마이
랍비 바나(바나이야 혹은 베나이야)
랍비 요나탄 벤 암람
랍비 요시 벤 사울
랍비 예후다 벤 나코사
라브 후나

탈무드Talmud.

탈무드Talmud.


책은 유대교의 율법서", 전통적 습관, 축제 ·민간전승 ·해설 등을 총망라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유대교에서는 《토라(Torah)》라고 하는 ‘모세의 5경’ 다음으로 중요시된다.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것(4세기 말경에 편찬)과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것(6세기경까지의 편찬)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혹은 ‘예루살렘 탈무드‘라 부르며, 후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라고 부른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책이다. 서기 70년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로마 제국의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유대인들은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탈무드를 구상하게 되었다. 흩어져 있던 가르침들을 하나의 책으로 완성한 것이 미슈나인데, 이는 토라(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토라의 실생활 적용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책이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신앙과 민족정신의 원천이며 이들의 탁월한 교육과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 바탕이 되어 왔다.
탈무드" 의 내용은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500년에 걸쳐 약 1000년 동안 구전되어 오던 것을 2000여 명의 학자들이 10년 동안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탈무드』에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 문화적 자산이 들어 있다. 그 분량도 방대해 총 20권에 1만2000페이지 정도인데 250만 개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졌고, 무게가 75킬로그램이나 된다 방대하다.
탈무드 의 성립은 유대인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깊게 연계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토라(율법)를 받고, 그 가르침을 여호수아에게 전했고, 여호수아는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최고회의의 학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그 가르침을 전했으며, 에스라(Ezra)와 같은 학자들이 그것을 일반 백성에게 가르침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 오게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책이다. 서기 70년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로마 제국의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유대인들은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탈무드를 구상하게 되었다. 흩어져 있던 가르침들을 하나의 책으로 완성한 것이 미슈나인데, 이는 토라(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토라의 실생활 적용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책이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신앙과 민족정신의 원천이며 이들의 탁월한 교육과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 바탕이 되어 왔다.
유대인들이 흩어진 곳곳에서 수많은 랍비들이 나타나 제각각 가르침을 펴게 되자, 유대교는 여러 작은 집단으로 분열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 랍비 아키바(Akiba)가 나타나 랍비들의 가르침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고, 아키바의 뒤를 이은 랍비 유다 하나시(Judah ha-Nasi)의 편집 작업을 거쳐 서기 200년 무렵 완성되었다. 이것이 유대교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된 『미슈나(Mishnah)』다.
미슈나 는 ‘구전 토라’인데, 기록된 토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토라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미슈나』가 편찬된 후 수 세기 동안, 예루살렘과 바빌론 두 곳에서 『미슈나』 본문에 해석을 덧붙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덧붙여진 해석을 ‘게마라(Gemara)’라고 한다. 바로 이 미슈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탈무드』라고 하는데, 5세기 무렵에 완성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작업한 『탈무드』가 예루살렘 탈무드 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포괄적이다. 보통 탈무드 라고 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 를 말하고 있다.
유대인의 신앙과 민족정신의 원천이며 뛰어난 교육과 탄탄한 경제활동을 가능케 해 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위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탈무드 는 구약성서의 사상과 이념을 상속받고 종교예배, 의식, 도덕, 법률, 신앙, 사회행동 등 인간 생활 전체를 규제하고 있다(김찬국, 1974). 유대교에서는 종교와 도덕이 절대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모든 생활의 지침과 방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삶의 지침은 유대교의 윤리와 덕행을 형성하고 있는데, 탈무드 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의 유대인 학자였던 랍비 엡스타인(Isidore Epstein)은 그의 저서 『유대교(Judaism)』(1959)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람은 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살기 위해 필요한 물질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건 거래에서 나쁜 거래를 해서는 아니 되며 정당한 노동 대가가 노동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와 동등이 보장되어야 하며 개인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를 구제해야 한다. 그 구제 행위에 부정이 있어서는 아니 되며, 인간의 의로운 행위는 동물에게까지 미쳐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도로 인종과 종교의 차별 없이 남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지식의 근본이요, 올바른 행동을 위한 첫출발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탈무드 는 위와 같은 윤리적 가르침 외에 처세 관련 재치 있는 실용적 메시지도 많이 들어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
“한 부모는 열 명의 자녀를 보살필 수 있다. 하지만 열 명의 자녀가 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가난한 사람을 칭송하는 부자는 사기꾼이며, 자신의 가난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은 저열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가 진짜로 돈을 갚을 수 없음을 알았다면 그의 집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순간순간 신을 찬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신을 찬양하고 있는 동안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을 가장 참지 못한다.”
“글을 쓰는 것은 수표를 끊는 것과 같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서도 글을 쓰는 것은 은행에 잔고가 없는데 수표를 끊는 것과 같다.”
“그저 책을 이리저리 운반하고만 있는 당나귀와 같은 학자도 있다.”
“내게 여가가 있으면 공부하겠소’ 하고 말하지 마라. 그런 사람들은 결코 여가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자를 판단하는 데에는 세 가지 척도가 있다. 요리, 옷, 남편이 그것이다. 이 셋은 모두 여자가 만드는 것이다.”
유대민족의 정체성"
유대인은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함락 직전에 놓이게 되었을 때, 유대인이 제시한 항복 조건은 단 하나, 학교를 계속 유지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학교에서 성서와 『탈무드』를 가르치며 유대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왔다. 『탈무드』는 또한 수천 년간 유대의 민족정신을 이어 가며 유대민족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가정교육의 교재기도하다. 유대인의 교육 방식은 철저한 논쟁과 토론이다.
수많은 논쟁과 토론의 기록이다. 탈무드 는 마지막 페이지가 비어 있는 책이다. 처음 출판할 때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페이지는 늘 백지로 남겨져 있다. 그 자리에 자신의 견해를 써 넣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탈무드 는 완성된 책이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책이다.
경제에 강한 민족이다. 유대인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 민족)로 살면서도 단단한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상업 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펼쳐 나갔다. 『탈무드』는 무역, 부동산, 상행위, 계약 이행 등 유대인의 광범위한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국제법 같은 기능을 했다. 그것은 유대인과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인과 국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상거래 활동도 규정했는데, 비유대인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이 더 크다.

탈무드 는 유대교의 경전"
유대 인이 아니어도 평생 한 번쯤은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에요. 탈무드에는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거든요. 탈무드는 랍비들이 만든 유대교의 경전이다. 이 책에는 유대 인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적혀 있읍니다. 안식일에 지켜야 할 일이나 먹을 수 없는 음식도 탈무드에 나와 있어요. 또 유대교의 축제, 성경의 해설도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을 알리는 데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는 율법 규칙을 엄격하게 서술한 '할라카'이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예를 통해 설명한 '하가다'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탈무드는 주로 하가다를 모아서 만들었다. 하가다는 어려운 성경 이야기를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아름다운 전설처럼 설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종교 책인 탈무드가 세계적으로 읽히는 비결이다.
율법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랍비들의 이야기도 나와 있어요. 그래서 탈무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랍비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해설을 붙인 유태교의 율법 및 전설집.
탈무드는 유태교와 유태인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와 같은 고정된 의미의 성전이 아니다. 오히려 탈무드는 종교·법률·철학·도덕에 관해 실시된 심포지엄이며 이 심포지엄은 지금까지 2,000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라는 말은 원래 「연구」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1, 200년 전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63권이나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무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편찬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새로운 말, 새로운 견해가 첨가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흔히 「랍비」(rabbi, 지역 카운슬러이며, 재판관이며, 교사의 역할도 하는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토론하여 얻은 토론의 중요한 내용들이 이 탈무드의 내용이 된다.
유대교인들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다.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랍비가 말하면 제자들이 듣고, 그 제자들이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일련의 연결고리를 통해 전달되는 조상들의 법과 전통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전통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무함마드 사후 그와 동시대에 있었던 사람들과 이들에게서 구전을 받은 제1세대, 그리고 제1세대에게서 전해들은 제2세대 사람들이 구전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유대교의 탈무드는 미쉬나(Mishna)와 게마라(Gemara, 설명을 한 각주, 주후 300~400)로 구성되어 있다. 미쉬나는 글로 된 율법이나 구전 율법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게마라는 다른 여러 의견들의 분석을 통해 율례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탈무드는 모세 율법에서 시작하였으며, 크게 바벨론 탈무드(500~700)와 팔레스타인 탈무드(500)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이 중 대체로 바벨론 탈무드가 더 정확하고 폭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무드는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사법(종자, 과일, 풀, 나무 등과 관련), 절기(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금식 등 명절 및 종교일과 관련), 여성(형제의 부인, 서원, 간통, 이혼법 등 약혼, 혼인, 이혼과 관련), 손해(보상, 태형, 맹세, 우상 숭배 등 민사와 형사법과 관련), 성별(제물, 헌물, 첫 출생 등 제사법과 관련), 정결(옷과 집, 가구, 한센씨병 등 정결법) 등을 다룬다. 이처럼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규정해주고 있다. 또한 탈무드는 전통과 관례와 법규, 판결 그리고 모세법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유대의 구전법(Oral Law)은 대개는 모세 오경을 해설한 미드라쉬(Midrash)와 랍비 율법의 판례인 할라카(Halakah), 그리고 속담이나 비유, 이야기들을 구약에 비추어 해설한 학가다(Haggadah)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구’, ‘학습’, ‘교훈’, ‘교의’()라는 뜻. 유대인 율법학자의 구전()과 율법 해설을 모은 저작물 모음집. 즉, 성경 시대 이후의 유대교 랍비들이 약 8세기에 걸쳐(B.C. 300년경부터 A.D. 500년경에 이르기까지) 구두로 전달하고 발전시켜 온 유대인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생활 전반에 관한 구전 율법의 집대성을 말한다. 탈무드는 일종의 본문()에 해당하는 ‘미쉬나’(mishnah, 반복)와 주석()에 해당하는 ‘게마라’(gemarah, 보완, 완성)로 이루어져 있다.
‘미쉬나’는 모세 율법(Torah)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전적 해답을 수록한 것으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즉 기록된 율법에 대하여 판례집과 같은 성격을 띤다. 성경에서 ‘유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쉬나’를 뜻한다(막 7:3). ‘미쉬나’는 6개의 주요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제1편은 ‘종자’ 곧 농업과 십일조 및 예물에 관한 규정(11장), 제2편은 ‘축제’ 곧 안식일과 유월절 등의 축제(12장), 제3편은 ‘부녀’ 곧 부인이나 이혼 및 결혼 그리고 서원 등(7장), 제4편은 ‘손해’ 곧 민형사 관련 법(10장), 제5편은 ‘성물’ 곧 성전 기물 및 제물(11장), 제6편은 ‘청결’ 곧 의식적 부정과 그에 따른 회복(12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게마라’는 구전 율법인 미쉬나에 대해 랍비가 주석, 해설했을 뿐 아니라 부가적인 내용을 추가하고 확대 강화한 것이다. 따라서 ‘미쉬나’보다 몇 배의 분량이었으며, 당시 통용되던 아람어로 기술되었다. 탈무드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는데, 후자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더 권위가 있고 분량도 많다.


나훈아~천리길(데뷔곡)

2017년 12월 11일 월요일

강감찬姜邯贊.1 고려 초기에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거란은 세 번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왔다.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싶었던 거란에게 고려가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려는 거란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꼭 싸워서 이겨야 할 송과 친선 관계를 맺고 있었다. 1차 침입은 성종 때인 993년 10월에 있었다. 이때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세워진 나라임을 밝히는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었다. 거란은 괜스레 고려와 싸워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순순히 물러났다. 이후 현종 때인 1010년에도 거란의 침입이 있었다. 뒤늦게 강동 6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개경이 함락되는 등 고려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후방을 공격하는 등 끈질지게 저항하자 강화를 맺고 물러났다. 그리고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이 세 번째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왕이 거란을 방문하는 등 강화 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과 강민첨을 보내 거란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과 흥화진에서 처음 맞섰다. 이때 강감찬은 매우 지혜로운 전술을 이용했다. 그는 흥화진 상류에 쇠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의 주력 부대가 강을 건널 때 갑자기 흘려보냈다. 그리고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초반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거란군은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정면 싸움을 피하고 산간 지역을 통해 개경 근처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당시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전투보다 추위와 굶주림에 더 지쳐 있었다. 게다가 개경의 방비가 워낙 튼튼해 거란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는 거란군이 압록강 근처의 귀주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근처의 성을 지키던 병력을 모두 모아 총공격을 하여 전멸시켰다. 거란의 10만 군사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후 거란은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생각을 버렸으며, 고려와 거란은 화의를 맺었다. 심화"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친 흥화진과 귀주는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에 속한다. 고려는 거란이 다시 침입할 경우를 대비해 이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 기지를 건설한 상태였다. 귀주 대첩은 귀주성 밖의 벌판에서 벌어졌는데,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던 병력과 이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모아 총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고려군의 큰 승리로 끝을 맺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군에 맞서게 했다. 강감찬은 기습과 유인 작전을 적절히 섞는 등 뛰어난 전술로 거란군을 공격해 승리를 이끌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항복하자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잠시 남쪽으로 후퇴하여 시간을 벌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려 현종 때 거란(契丹)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이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은 흥화진(興化鎭)에서 이를 대파하였고, 1019년(현종 10)에 퇴군하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다시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강감찬의 일생을 다소 허구화하여 꾸민 역사다.

강감찬姜邯贊.

강감찬姜邯贊. 고려의 명장.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살았던 인물로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다. 특히 1018년에는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거란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에요. 뛰어난 작전을 바탕으로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답니다. 전쟁 후 도읍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았어요.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별이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아이〉 강감찬 장군의 탄생에 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요. 어떤 사신이 큰 별이 어느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지요.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해요. 훗날 중국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강감찬을 보고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문곡성을 못 본지 오래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문곡성이라는 별이 강감찬 장군 몸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지요. 문곡성은 학문이나 예술을 맡아서 관리하는 별을 뜻해요.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거란의 침입 궁지에 몰린 고려, 회심의 일격을 준비" 거란의 2차, 3차 침입 1010년 거란의 왕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왔어요.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고 있는 양규, 이수화 장군에 의해 발목이 잡히고 말았어요. 아무리 공격해도 고려군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거란군의 시체만 늘어날 뿐이었어요. 현종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자신이 곧 찾아가 신하의 예를 올리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그러자 거란의 성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났어요.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이 끝났어요. 하지만 고려의 왕이 거란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屈辱)1)적인 일이었어요. 현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어요. 거란의 요구 중 첫 번째는 ‘현종이 거란의 조정에 들어와 예를 올릴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을 것’이었다. 거란은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를 핑계 삼아 다시 고려를 침략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고려는 현종이 병이 들어 거란에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며 거부하였고, 강동 6주도 내놓지 않았다.. 다시 거란의 소배압2)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어요.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고려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어요. 거란은 흥화진을 비켜 개경으로 직접 쳐들어갔다. 한편 30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군과 맞서 싸워야 할 강조는 통주에서 거란군에 잡혀 죽고 말았어요. 통주를 무너뜨린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개경을 지키는 군사가 적었기 때문에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어디. 개경을 차지한 거란군은 고려 백성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물건을 빼앗는 등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하였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작전을 짜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고려는 강감찬 장군에게 총지휘를 맡겼어요. 강감찬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무예 솜씨까지 훌륭해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거든요. 이때 그의 나이는 무려 71세였어요.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한 후 명령했어요.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거란, 3차 침입의 기회를 노리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귀주, 바람의 방향이 ?"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람의 방향이 한순간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뀌었어요!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의 화살이 바람을 타고 더욱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사실 강감찬은 날씨를 철저히 예상하고 일부러 남쪽에 진을 친 것이었다. 반대로 거란군의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해 고려군에까지 닿지 않았어요. 비 때문에 시야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고려군의 화살 폭격을 받은 거란군은 결국 달아나기 시작했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니, 전군을 지휘해 거란군을 막으라.” 현종의 명령을 받은 70세의 강감찬 장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적에 맞설 작전을 세웠어요. 강감찬 장군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흥화진(의주)에서 1차 결전을 준비했어요. 거란군은 이 흥화진을 거쳐야만 남쪽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성 동쪽에 있는 강, 대천의 상류를 막아 놓고 1만 2천 명의 군사를 숨어 있게 했어요. 거란군은 고려군을 깔보고 있었어요. 소배압은 고려군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지요. 부하들은 재빠르게 마을로 내려가 소가죽을 구해 왔어요. 강감찬은 소가죽을 꿰어 서로 이어 붙이게 했다. 그러고는 강가 곳곳에 나무 말뚝을 박고 이어 붙인 소가죽으로 흥화진의 강물을 막았다. 소가죽을 찢자, 막혀 있던 강물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거란군을 덮쳤어요. 거란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이용해 고려군은 공격을 퍼부었어요. 이 싸움에서 거란군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고, 승리한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어요. 거란군이 흥화진 강물을 건너다 고려군에게 크게 패하다" 고려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거란군이 건너기를 숨죽여 기다렸어요. 흥화진에 도착한 소배압 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강물을 건너기 시작했어요. 강은 곧 거란의 군사들로 가득 찼지요.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외쳤어요. 고려군은 거란군과 맞서 싸우는 척하다가 흥화진 동쪽에 있는 대천 쪽으로 유인(誘引)했어요. 거란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려군을 쫓다가 대천 한가운데로 들어섰어요. 그러자 강감찬 장군이 신호를 주었어요. 갑자기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고 위쪽에서부터 산더미 같은 강물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내렸어요. 막아 놓았던 상류의 강물을 튼 거다. 강을 건너던 거란군은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거센 물결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이 때 산기슭에 숨어 있던 1만 2천 명의 고려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화살을 쏘아라!” 겨우 물살을 헤치고 나온 거란군 앞에 또 다시 고려군의 화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소배압은 살아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어요. 강감찬 장군은 이미 부하 김종현에게 1만 명의 군사로 개경을 지키게 했어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개경으로 가는 길에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어요. 소배압은 고려군과 싸울 때마다 패배를 당하자, 고려의 왕을 사로잡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나 1만 명의 군사가 철통같이5) 지키는 개경을 점령할 수 없었어요. 결국 개경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후퇴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결코 편하지 않았었을 것이다. 개경에서 소배압을 방어하는데 성공하다 고려군의 기습 작전이 끝나자, 거란의 소배압은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향했어요. 소배압의 생각을 알아챈 강감찬은 미리 군사를 보내 개경을 단단히 지키도록 지시했어요. 소배압이 빠른 속도로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8대 현종은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어요. 거란군이 먹을 양식을 모조리 없애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심산이었다. 소배압은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산으로 도망쳤다. 강감찬 장군은 맞은편 산봉우리에 올라 도망치는 거란군에게 외쳤다. “이제 침략군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겠느냐? 살아 돌아가면 똑똑히 전하거라. 고려를 절대로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에게 크게 승리한 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해요. 10만 대군의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어요. 25년 동안 반복된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침내 고려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강감찬 장군은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개경 주위에 나성(羅城)을 쌓고 국경 주변에 천리장성9)을 쌓자고 주장했어요. 현종 때 천리장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후 10여 년이 지난 뒤에 천리장성이 완성되었다. 1019년 2월 진눈깨비가 종일토록 쏟아지던 날, 거란군은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는 귀주(지금의 평안 북도 구성) 부근에 이르렀어요. 귀주 또한 서희가 빼앗은 강동 6주에 속한 곳이었지요.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부대와 거란의 부대가 맞붙게 된 거예요.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어요. 막다른 길에 몰린 거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했다. 귀주 동쪽 벌판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은 치열해졌고, 어느 나라가 이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요. 이 때 개경을 지키고 있던 김종현의 고려군이 합세했어요. 강감찬 장군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어요. 겨울비가 쏟아지는 날 강감찬 장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어요. 고려군은 적진을 향해 돌격(突擊)6)했어요. 마침내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버티던 거란군도 기세가 꺾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배압이 다시 되돌아가다 마침내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거란군은 너무 먼 길을 달려온 탓에 기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주변 들판의 곡식은 이미 다 불 탄 후여서 먹을 것도 없었다. 거란의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점점 싸울 의지를 잃어갔다. 거란군과 귀주에서 전투를 벌이다. 거란군과 고려군은 옛 발해 땅인 귀주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되었지요. 당시 거란군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고려 조정에서는 강감찬 부대를 도와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부대를 보냈어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되돌아 갈 것이라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작전을 짰다 할 수 없이 소배압은 개경 침략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로 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추격해 대승을 거둔 귀주 대첩" 허겁지겁 달아나는 거란군을 놓치지 않고 강감찬은 추격 명령을 내렸다.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소배압을 비롯해 수천 명에 불과했어요. 이 싸움이 ‘귀주 대첩’이에요. 거란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치욕스런 패배였답니다. 거란과 고려, 더 이상 싸움을 벌이지 않기로 하다 몇 차례에 걸친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거란은 결국 고려 침략을 포기했어요. 고려 역시 거란에 관리를 보내 다툼 없이 가까이 지내자는 화친을 제의했고,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지요. 강감찬이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다 귀주 대첩을 큰 승리로 이끈 강감찬은 고려의 안전을 위해 제대로 된 군사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혹시나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현종을 찾아가 건의했어요. 강감찬의 말을 듣고 현종은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을 것을 지시했어요. 나성은 도시 전체를 이중으로 둘러싼 성을 말해요. 강감찬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어요. 천리 장성은 대략 천 리에 달해 천리 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동해안까지 이르는 긴 성이에요. 1리(里)는 약 392m로, 1000리(里)는 대략 392km가 되지요. 천리장성을 쌓는데 무려 12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렸답니다. 천리장성 덕에 고려가 더욱 안전해지다. 마침내 천리 장성이 완성되자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었고, 북방 민족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신화가 된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 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내용 정리" 거란은 강동 6주를 고려에 내준 것을 후회하고 있다가 강조가 목종을 몰아 낸 것을 핑계삼아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 고려의 현종이 거란을 찾아가 신하의 예를 올리지 않자, 거란의 성종이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거란의 3차 침입으로, 이 때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란은 크게 패했습니다. 거란과 25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뒤에야 고려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북쪽 세력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이자연 - 망각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