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1일 월요일

강감찬姜邯贊.1 고려 초기에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거란은 세 번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왔다.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싶었던 거란에게 고려가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려는 거란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꼭 싸워서 이겨야 할 송과 친선 관계를 맺고 있었다. 1차 침입은 성종 때인 993년 10월에 있었다. 이때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세워진 나라임을 밝히는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었다. 거란은 괜스레 고려와 싸워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순순히 물러났다. 이후 현종 때인 1010년에도 거란의 침입이 있었다. 뒤늦게 강동 6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개경이 함락되는 등 고려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후방을 공격하는 등 끈질지게 저항하자 강화를 맺고 물러났다. 그리고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이 세 번째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왕이 거란을 방문하는 등 강화 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과 강민첨을 보내 거란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과 흥화진에서 처음 맞섰다. 이때 강감찬은 매우 지혜로운 전술을 이용했다. 그는 흥화진 상류에 쇠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의 주력 부대가 강을 건널 때 갑자기 흘려보냈다. 그리고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초반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거란군은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정면 싸움을 피하고 산간 지역을 통해 개경 근처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당시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전투보다 추위와 굶주림에 더 지쳐 있었다. 게다가 개경의 방비가 워낙 튼튼해 거란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는 거란군이 압록강 근처의 귀주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근처의 성을 지키던 병력을 모두 모아 총공격을 하여 전멸시켰다. 거란의 10만 군사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후 거란은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생각을 버렸으며, 고려와 거란은 화의를 맺었다. 심화"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친 흥화진과 귀주는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에 속한다. 고려는 거란이 다시 침입할 경우를 대비해 이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 기지를 건설한 상태였다. 귀주 대첩은 귀주성 밖의 벌판에서 벌어졌는데,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던 병력과 이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모아 총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고려군의 큰 승리로 끝을 맺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군에 맞서게 했다. 강감찬은 기습과 유인 작전을 적절히 섞는 등 뛰어난 전술로 거란군을 공격해 승리를 이끌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항복하자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잠시 남쪽으로 후퇴하여 시간을 벌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려 현종 때 거란(契丹)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이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은 흥화진(興化鎭)에서 이를 대파하였고, 1019년(현종 10)에 퇴군하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다시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강감찬의 일생을 다소 허구화하여 꾸민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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