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1일 월요일

강감찬姜邯贊.

강감찬姜邯贊. 고려의 명장.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살았던 인물로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다. 특히 1018년에는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거란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에요. 뛰어난 작전을 바탕으로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답니다. 전쟁 후 도읍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았어요.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별이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아이〉 강감찬 장군의 탄생에 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요. 어떤 사신이 큰 별이 어느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지요.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해요. 훗날 중국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강감찬을 보고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문곡성을 못 본지 오래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문곡성이라는 별이 강감찬 장군 몸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지요. 문곡성은 학문이나 예술을 맡아서 관리하는 별을 뜻해요.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거란의 침입 궁지에 몰린 고려, 회심의 일격을 준비" 거란의 2차, 3차 침입 1010년 거란의 왕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왔어요.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고 있는 양규, 이수화 장군에 의해 발목이 잡히고 말았어요. 아무리 공격해도 고려군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거란군의 시체만 늘어날 뿐이었어요. 현종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자신이 곧 찾아가 신하의 예를 올리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그러자 거란의 성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났어요.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이 끝났어요. 하지만 고려의 왕이 거란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屈辱)1)적인 일이었어요. 현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어요. 거란의 요구 중 첫 번째는 ‘현종이 거란의 조정에 들어와 예를 올릴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을 것’이었다. 거란은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를 핑계 삼아 다시 고려를 침략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고려는 현종이 병이 들어 거란에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며 거부하였고, 강동 6주도 내놓지 않았다.. 다시 거란의 소배압2)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어요.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고려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어요. 거란은 흥화진을 비켜 개경으로 직접 쳐들어갔다. 한편 30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군과 맞서 싸워야 할 강조는 통주에서 거란군에 잡혀 죽고 말았어요. 통주를 무너뜨린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개경을 지키는 군사가 적었기 때문에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어디. 개경을 차지한 거란군은 고려 백성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물건을 빼앗는 등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하였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작전을 짜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고려는 강감찬 장군에게 총지휘를 맡겼어요. 강감찬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무예 솜씨까지 훌륭해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거든요. 이때 그의 나이는 무려 71세였어요.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한 후 명령했어요.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거란, 3차 침입의 기회를 노리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귀주, 바람의 방향이 ?"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람의 방향이 한순간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뀌었어요!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의 화살이 바람을 타고 더욱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사실 강감찬은 날씨를 철저히 예상하고 일부러 남쪽에 진을 친 것이었다. 반대로 거란군의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해 고려군에까지 닿지 않았어요. 비 때문에 시야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고려군의 화살 폭격을 받은 거란군은 결국 달아나기 시작했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니, 전군을 지휘해 거란군을 막으라.” 현종의 명령을 받은 70세의 강감찬 장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적에 맞설 작전을 세웠어요. 강감찬 장군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흥화진(의주)에서 1차 결전을 준비했어요. 거란군은 이 흥화진을 거쳐야만 남쪽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성 동쪽에 있는 강, 대천의 상류를 막아 놓고 1만 2천 명의 군사를 숨어 있게 했어요. 거란군은 고려군을 깔보고 있었어요. 소배압은 고려군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지요. 부하들은 재빠르게 마을로 내려가 소가죽을 구해 왔어요. 강감찬은 소가죽을 꿰어 서로 이어 붙이게 했다. 그러고는 강가 곳곳에 나무 말뚝을 박고 이어 붙인 소가죽으로 흥화진의 강물을 막았다. 소가죽을 찢자, 막혀 있던 강물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거란군을 덮쳤어요. 거란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이용해 고려군은 공격을 퍼부었어요. 이 싸움에서 거란군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고, 승리한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어요. 거란군이 흥화진 강물을 건너다 고려군에게 크게 패하다" 고려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거란군이 건너기를 숨죽여 기다렸어요. 흥화진에 도착한 소배압 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강물을 건너기 시작했어요. 강은 곧 거란의 군사들로 가득 찼지요.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외쳤어요. 고려군은 거란군과 맞서 싸우는 척하다가 흥화진 동쪽에 있는 대천 쪽으로 유인(誘引)했어요. 거란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려군을 쫓다가 대천 한가운데로 들어섰어요. 그러자 강감찬 장군이 신호를 주었어요. 갑자기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고 위쪽에서부터 산더미 같은 강물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내렸어요. 막아 놓았던 상류의 강물을 튼 거다. 강을 건너던 거란군은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거센 물결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이 때 산기슭에 숨어 있던 1만 2천 명의 고려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화살을 쏘아라!” 겨우 물살을 헤치고 나온 거란군 앞에 또 다시 고려군의 화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소배압은 살아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어요. 강감찬 장군은 이미 부하 김종현에게 1만 명의 군사로 개경을 지키게 했어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개경으로 가는 길에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어요. 소배압은 고려군과 싸울 때마다 패배를 당하자, 고려의 왕을 사로잡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나 1만 명의 군사가 철통같이5) 지키는 개경을 점령할 수 없었어요. 결국 개경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후퇴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결코 편하지 않았었을 것이다. 개경에서 소배압을 방어하는데 성공하다 고려군의 기습 작전이 끝나자, 거란의 소배압은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향했어요. 소배압의 생각을 알아챈 강감찬은 미리 군사를 보내 개경을 단단히 지키도록 지시했어요. 소배압이 빠른 속도로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8대 현종은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어요. 거란군이 먹을 양식을 모조리 없애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심산이었다. 소배압은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산으로 도망쳤다. 강감찬 장군은 맞은편 산봉우리에 올라 도망치는 거란군에게 외쳤다. “이제 침략군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겠느냐? 살아 돌아가면 똑똑히 전하거라. 고려를 절대로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에게 크게 승리한 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해요. 10만 대군의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어요. 25년 동안 반복된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침내 고려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강감찬 장군은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개경 주위에 나성(羅城)을 쌓고 국경 주변에 천리장성9)을 쌓자고 주장했어요. 현종 때 천리장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후 10여 년이 지난 뒤에 천리장성이 완성되었다. 1019년 2월 진눈깨비가 종일토록 쏟아지던 날, 거란군은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는 귀주(지금의 평안 북도 구성) 부근에 이르렀어요. 귀주 또한 서희가 빼앗은 강동 6주에 속한 곳이었지요.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부대와 거란의 부대가 맞붙게 된 거예요.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어요. 막다른 길에 몰린 거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했다. 귀주 동쪽 벌판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은 치열해졌고, 어느 나라가 이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요. 이 때 개경을 지키고 있던 김종현의 고려군이 합세했어요. 강감찬 장군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어요. 겨울비가 쏟아지는 날 강감찬 장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어요. 고려군은 적진을 향해 돌격(突擊)6)했어요. 마침내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버티던 거란군도 기세가 꺾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배압이 다시 되돌아가다 마침내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거란군은 너무 먼 길을 달려온 탓에 기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주변 들판의 곡식은 이미 다 불 탄 후여서 먹을 것도 없었다. 거란의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점점 싸울 의지를 잃어갔다. 거란군과 귀주에서 전투를 벌이다. 거란군과 고려군은 옛 발해 땅인 귀주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되었지요. 당시 거란군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고려 조정에서는 강감찬 부대를 도와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부대를 보냈어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되돌아 갈 것이라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작전을 짰다 할 수 없이 소배압은 개경 침략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로 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추격해 대승을 거둔 귀주 대첩" 허겁지겁 달아나는 거란군을 놓치지 않고 강감찬은 추격 명령을 내렸다.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소배압을 비롯해 수천 명에 불과했어요. 이 싸움이 ‘귀주 대첩’이에요. 거란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치욕스런 패배였답니다. 거란과 고려, 더 이상 싸움을 벌이지 않기로 하다 몇 차례에 걸친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거란은 결국 고려 침략을 포기했어요. 고려 역시 거란에 관리를 보내 다툼 없이 가까이 지내자는 화친을 제의했고,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지요. 강감찬이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다 귀주 대첩을 큰 승리로 이끈 강감찬은 고려의 안전을 위해 제대로 된 군사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혹시나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현종을 찾아가 건의했어요. 강감찬의 말을 듣고 현종은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을 것을 지시했어요. 나성은 도시 전체를 이중으로 둘러싼 성을 말해요. 강감찬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어요. 천리 장성은 대략 천 리에 달해 천리 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동해안까지 이르는 긴 성이에요. 1리(里)는 약 392m로, 1000리(里)는 대략 392km가 되지요. 천리장성을 쌓는데 무려 12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렸답니다. 천리장성 덕에 고려가 더욱 안전해지다. 마침내 천리 장성이 완성되자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었고, 북방 민족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신화가 된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 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내용 정리" 거란은 강동 6주를 고려에 내준 것을 후회하고 있다가 강조가 목종을 몰아 낸 것을 핑계삼아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 고려의 현종이 거란을 찾아가 신하의 예를 올리지 않자, 거란의 성종이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거란의 3차 침입으로, 이 때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란은 크게 패했습니다. 거란과 25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뒤에야 고려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북쪽 세력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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