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목요일

자낭균류,Ascomycetes , 子囊菌類.

누룩곰팡이, green mold.


누룩곰팡이 자낭균류 누룩곰팡이속에 속하는 생물로 많은 종류가 있다. 
여러 가지 물질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여 성장할 수 있으며, 이 중에는 공업에 이용되는 것이 많다.
유성 생식을 할 때는 다세포인 균사체로부터 길쭉한 장낭기와 장정기가 이웃하여 생기며 이들이 서로 얽혀 접합한다. 
그 후 주변의 균사가 이것들을 둘러싸면서 작은 공 모양의 작고 노란 자실체를 만든다. 여기에서 분지되어 나온 장낭사는 불규칙적으로 자라 자낭을 만들므로, 자실체 속에는 자낭이 분산되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자실체가 성숙되면 자낭벽은 녹아 없어지고, 자낭 포자가 자실체 안에서 유리되는데, 자낭 포자는 주위의 균사 조직이 붕괴되면 살포된다. 무성 생식에서는 균사체에 분생 포자 자루가 생겨 그 끝에 분생 포자가 만들어진다.

누룩곰팡이의 일반적인 번식 방법은 바로 이러한 무성 생식으로, 무성 생식 세대의 것을 '아르페르길루스'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무리인 푸른곰팡이에서는 무성 생식 세대의 것을 '페니실리움'이라고 한다.

자낭균류 누룩곰팡이과의 곰팡이를 일컫는 말로 주로 쌀누룩이나 보리누룩을 만드는 데 쓰인다.
누룩곰팡이를 대표하는 누룩곰팡이속(Aspergillus)에는 50여 종이 알려져 있다. 흰색, 검은색, 갈색 등 다양한 색을 갖는다. 대부분 무성생식을 한다. 

꼿꼿이 선 균사의 잔가지 끝에 둥근 정낭()이 생기고 여기에 가늘고 긴 병 모양, 구형, 곤봉형 등의 잔가지가 빽빽이 나며 그 끝에 포자가 생기면서 이루어진다. 개개의 포자는 대략 구형이지만 포자가 차례차례로 자라기 때문에 긴 사슬이 되어 그 끝에서 분산한다. 

발육 적온은 37℃, 생성되는 유기산()은 코지산·글루콘산 등이고, 효소는 아밀라아제·말타아제·인베르타아제·셀룰라아제·이눌리나아제, 그 밖의 단백질분해효소 등이다. 간장과 된장을 비롯한 각종 양조, 유기산 발효, 펙틴이나 녹말분해효소와 같은 효소제품제조 등 각종 발효공업에 다양하게 이용된다. 

이 중 아밀라아제의 작용, 즉 녹말을 설탕으로 분해하는 힘을 이용하여 청주·감주·간장·된장 등의 누룩제조에 사용한다. 각각 용도에 따라 특수한 품종이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누룩곰팡이(A.oryzae)는 쌀의 녹말을 당화시키며, 아스페르길루스 웬티이(A. wentii)는 대두를 가공하는데 사용된다. 

이 외에 검은곰팡이(A.niger)는 강한 효소를 갖고 있으며 음식이 부패할 때 발생하고, 아스페르길루스 푸미가투스(A.fumigatus), 아스페르길루스 플라부스(A. flavus) 등은 널리 토양 속에서 분리되는 분사상균으로 종종 새에게, 드물게는 인체의 내장에 들어가서 아스페르길루스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불완전균아문 불완전사상균강의 1속. 많은 종류가 토양에 분포하며 식품, 저장곡류, 섬유제품 등에서도 발생한다. 호건생균(A. glaucus), 호열균(A. fumigatus), 사람 및 동물의 누룩곰팡이증균(A. fumigatus), 누에의 갈강()병균(A.flavus) 등 특수한 생태를 보이는 것도 있다.


A. flavusA. fumigatus는 기회감염균으로 사람의 피부, 폐, 기관지, 외이도() 등을 침범하는 경우가 있다. 
약 190종이 포함되며, 분생자머리의 색조, 분생자구조 등이 군(groups)으로 분류하는 중요한 분류형질이 되고 있다. 
페니실륨속처럼 1985년 ‘군’으로 대체하여 ‘아속, 절’ 방식을 사용했던 분류체계를 정비하였다. 유성세대로는 ChaetosartoryaEmericellaEurotium 등이 있고, 폐자낭각을 형성하며 부정자낭균류(강) Trichocomaceae과에 속한다.

시트르산 · 글루콘산(A. niger), 이타콘산(A. terreus), 누룩산, 말산(A. favus) 등의 유기산, α-아밀라아제(A. oryzae), 글루코아밀라아제(A. usamii), 다카디아스타아제(A. oryzae), 프로테아제(Aspergillus spp.), 산성셀룰라아제(A. niger), 리보핵산가수분해효소 T1,T2(A. oryzae), 핵산가수분해효소 S1(A. oryzae) 등 각종 효소의 생산원으로서, 또 술, 된장, 간장(A. oryzae) 등에도 이용되고 있다. 
A. flavus의 아플라톡신(특히 B1은 강력한 발암성이 있음), A. versicolor의 스테리그마토시스틴 A. ochraceus의 오크라톡신 등 곰팡이독의 생산종도 있다.
Emericella nidulans (무성세대 A. nidulans)의 영양균사는 다핵으로 쉽게 헤테로다핵체를 형성한다. 유성생식 결과로 적갈색의 자낭포자와, 무성생식에 의해 단핵 · 녹색의 분생자가 생긴다. 야생주는 최소배지에서 증식하고, 영양요구성 돌연변이주를 얻을 수 있다. 

이 종으로 양생식환 외에 준유성생식환이 G. Pontecorvo(1956) 등에 의해 발견된 이후에 유성생식이 나타나지 않는 종에서도 유전자분석이 가능해졌다. 붉은빵곰팡이도 유전자미세구조체세포재조합, 헤테로다핵체형성 등의 유전생화적 연구재료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누룩곰팡이, 검정곰팡이 등이 속하는 자낭균. 술, 된장, 간장 등의 발효에 이용되거나 단백질 소화제를 생성하는 유익한 균도 있지만 아스페르질루스증을 유발하거나 맹독 아플라톡신을 합성하는 균도 있다. 누룩 곰팡이 로 영어로 알려진 코지 일본 : 햅번 : 코지 ) , A는 사상 균류 (A  중국과 다른 동아시아 요리에 사용)을하는 발효  만들기위한 간장 과 (포함 된장 된장 ), 및 또한합니다,

saccharify 쌀, 기타 곡물 과 감자 의 결정에 알코올 음료 등 huangjiu ,  , 막걸리를 하고,shōchū . 기르기 의 A.의 도열병 균은 적어도 2000 년 전에 발생했습니다. A.의 도열병은 또한 생산에 사용되는 쌀 식초 . 보리 코지 (麦麹) 또는  코지 (米는麹)을 발효시켜 만든 입자 와 oeryzae 아스 금형. 에이지 Ichishima 토호쿠 대학은 호출 코지 곰팡이는 "국가 곰팡이"( kokkin 때문에 만들기위한뿐만 아니라 그것의 중요성, 일본의 양조 협회의 저널을) 코지 에 대한  양조를,뿐만 아니라 만들기위한 누룩을위해 된장 , 간장 , 

다른 전통 일본 음식의 범위. 그의 제안은 2006 년 사회 연례 회의에서 승인 되었지만, 일본 원산이 아니며 중국에서 수입 된 일본 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Red kōji-kin "은 별도의 종, Monascus purpureus 입니다. 

자낭균류의 누룩곰팡이과에 속하는 1속. 푸른곰팡이의 근연으로 자연계에 널리 분포하고 토양, 공중, 식품 등으로부터 분리된다. 
촌락은 균종에 의해 백-황록-적갈-흑색 등 여러가지다. 
병족세포로부터 분생자병이 바로 서 그 선단은 팽대하여 정낭으로 되는 점이 푸른곰팡이와 다르다. 

분생포자는 단포로 정낭상의 경자의 첨단에 연쇄상으로 착생한다. 
분생포자의 형상은 구형 또는 원형을 보이고 그 표면은 종에 의해 평활 또는 돌기가 있다. 
본 속에는, 유성세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 종도 있고 Aspergillus속은 불완전균류로서의 무성세대에 주어진 속명이다. 

본 속의 유성세대의 속명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 자낭균의 EurotiumSartoryaEmericella속 등의 여러가지 속에 연결된다. 
누룩곰팡이속으로서, 현재 약 160종이 알려지고 있고, 기준종은 A. flavus이다. 

예로부터 A. oryzae, A. niger 등은 발효식품의 유용균으로 강력한 아밀라아제 및 프로테아제를 생산하므로 우리나라의 양조공업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반면 그 보편성으로부터 푸른곰팡이와 같이 주요한 식품 오염균이기도 하다.  
A. glaucus 군 등은 호침투압성 곰팡이로서 저장곡류의 주요 유해균이다. 
A. flavus, A. parasiticus 중에는 발암성이 강한 마이코톡신(mycotoxin) 생산균이 포함되어 주목되고 있다. → 곰팡이독

포자(:홀씨. 을 하기 위해 형성되는 생식세포)로 번식하며, 다른 유기물을 분해하여 영양을 섭취하고 가는 실 모양의 균사()를 지닌 하등 균류().
곰팡이류 가운데는 수중생활을 하면서 진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조균류(), 육상생활을 하되 주머니 속에 포자를 생성하는 자낭균류(), 담자기( 말단에 생기는 세포)에 포자를 생성하는 담자균류(), 유성생식법이 잘 밝혀져 있지 않은 불완전균이 있다.

대부분의 곰팡이류는 현미경적 크기를 하고 있으나, 고등한 종류 가운데는 버섯류와 같이 자실체(가 빽빽하게 모여서 생긴 영양체)가 발달하여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것이 있다. 하등한 곰팡이는 주로 무성포자에 의하여 번식을 하는데, 육상생활을 하는 고등한 곰팡이류는 분생자()나 분절자()가 무성포자로서의 구실을 한다.

유성포자도 진화의 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포자주머니나 자낭 또는 담자기를 지니는 자실체에서 생성되며, 둥근 모양에서 타원형 등을 하고 있다. 곰팡이는 많은 종류가 수중에 적절히 적응되었기 때문에 수중생활이나 습도가 많은 곳에서 잘 생육한다.

주로 유기물을 분해하여 에너지원으로 하기 때문에, 흙속에서도 잘 자라고 종류에 따라서는 각종 생물의 몸에 기생하여 병원균으로서의 구실도 하므로, 생태계의 균형 유지에도 이바지한다. 고등식물에 주로 기생하며 병원균으로 잘 알려진 것으로는 녹병균·깜부기균·횟가루병균 등이 있으며 곡식류의 생산에 큰 피해를 준다.

동물이나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것으로는 체내 호흡기에 감염하여 아스페르길루스증을 유발하는 아스페르길루스 퓨미가투스 같은 것이 있다. 인체 표면에 기생하는 피부감염균으로서는 백선균()을 비롯하여 기계버짐균·무좀균·티눈균 같은 것이 있으며, 칸디다증세를 유발하는 효모균의 일종인 칸디다균도 잘 알려진 피부질환 병원균이며 현재 4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작은 동물인 곤충류나 기타 하등동물에 기생하는 곰팡이 가운데는 동충하초류()처럼 매미유충이나 노린재 성충에 잘 기생하는 것, 라볼베니아처럼 땅장벌레 체표면에 기생하는 것, 엔토모프토라와 같이 파리에 기생하는 것, 트리코마이세스처럼 각다귀유충·장구벌레유충·파리유충의 장 속에 기생하는 것도 있다.

곰팡이류의 방제법은 이들의 진화과정이 서로 크게 다르므로 일률적이며 공통된 방법을 찾아보기 어렵다.일반적으로는 곰팡이류의 생육에 적합한 환경조건 가운데서 습도나 온도조건, 또는 영양분의 공급을 물리적·화학적으로 부적합하게 하는 방법이 권장된다.

보통의 경우 습도나 온도조절로써 이들 곰팡이류의 생육을 억제할 수 있다. 냉장고나 냉동고를 사용하거나 건조기 또는 건습기를 사용한다.음식물의 경우 소금절임[]·설탕절임 등의 가공법이 유효하다. 장마철에는 천연섬유제의 의류나 가죽제품 등에도 많은 곰팡이가 자라서 품질을 손상시키게 하는데, 이러한 경우 건조한 곳에 저장함이 중요하다.

섬유의 경우에는 깨끗하게 세탁을 하여 저장하는 것도 영양원을 차단하므로 효과적이다. 화학적 방제법으로서는 묽은 황산동용액이나 여러 가지 피리미딘(Pyrimidine) 유도체로 된 방미제()를 쓴다.인간에 의하여 이용되는 곰팡이에는 누룩곰팡이·효모균·푸른곰팡이 등이 있다. 누룩곰팡이는 곡물을 당화시키는 작용이 있어 오래 전부터 술을 빚는 데 이용되어 왔다.

우리의 식생활에 필수적인 장류도 누룩곰팡이나 효모균을 이용한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왔다. 장의 맛을 결정짓는 데는 부착되는 곰팡이의 종류가 중요하여, 요즈음 인공적으로 배양하여 이용하고 있다. 푸른곰팡이는 페니실린이라는 항생물질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자낭균류,Ascomycetes , 類.

유성생식으로 자낭에 자낭포자를 만드는 균류. 현재 2,720 속 28,000종이 알려져 있다. 단세포의 효모균류를 제외하고는 영양체는 대개 격벽을 지닌 균사를 형성한다. 
유성생식에 의해 자낭 내에 자낭포자를 생성한다. 
균사는 균사조직을 만들고 자낭을 함유하는 자실체를 형성한다. 

무성생식은 일반적으로 분생자에 의한다.
자낭균류에는 자낭과를 형성하지 않는 원자낭균강, 자낭자좌 중에 2중벽의 자낭을 형성하는 소방자낭균강과 각종 자낭과 중에 1중벽자낭을 형성하는 것이 있다. 

1중벽자낭을 갖는 것에는 폐자낭과 중에 구형의 자낭이 산재하는 부정자낭균강, 자낭각내에 원주상의 자낭이 병렬한 핵균강, 자낭반()의 내표면에 원주상의 자낭이 병렬된 반균강, 자낭각을 갑충류 등의 몸 외 표면에 착생하는 충생자낭균강이 있다. 
자낭균류에 속한다고 추정되지만 자낭 형성이 미지인 것도 많으며 이것은 불완전균류로 취급하고 있다.

묵을수록 조은, 전통 장.

묵을수록 조은, 전통 장.

전통장,  발효 식품.(콩으로만든발효식품)


콩을 발효시켜 만든 장은 우리나라 음식의 제 맛을 내는 대표적인 조미료예요. 그래서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할 만큼 장을 중요하게 여겼고, 장 담그는 데도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어요.
음식 맛은 장맛이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이 속담은 장이 음식 맛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간장, 된장, 고추장은 우리나라의 전통 조미료라고 할 수 있어요.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칠 때 장을 넣어 음식 맛을 내었지요. 그리고 한 집안의 음식 솜씨를 장맛으로 판단하였어요. 우리 조상들은 장맛이 바뀌면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장을 소중하게 보관했어요.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고 날마다 장의 상태를 살폈지요. 또한 금줄이나 하얀 종이로 만든 버선을 거꾸로 붙여 놓으면 장맛을 망치는 잡신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장을 만드는 기본 재료는 콩과 소금이에요. 예로부터 ‘밭에서 나는 고기’로 여겨진 콩은 단백질이 풍부한, 몸에 좋은 식품이지요. 콩을 발효시켜 만든 간장, 된장, 고추장은 오래 묵을수록 맛이 더욱 좋고 건강에도 좋아요.

음식 맛은 장맛이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이 속담은 장이 음식 맛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간장, 된장, 고추장은 우리나라의 전통 조미료라고 할 수 있어요.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칠 때 장을 넣어 음식 맛을 내었지요. 그리고 한 집안의 음식 솜씨를 장맛으로 판단하였어요. 우리 조상들은 장맛이 바뀌면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장을 소중하게 보관했어요.
간장과 된장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우리의 식탁에 올랐고, 고추장은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온 다음부터 먹기 시작했어요.

간장과 된장

장 담그는 일은 집안의 중요한 행사였어요. 그래서 장을 담그기 전에는 몸을 깨끗하게 하고 행동도 조심하고합니다. 시골에 가면 처마에 매달린 메주를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예) 촌 이나, 팔공산갓바위 약사암 에도 아직 이런방식 을선호하곤하며 된장을 약 일년을 두고 먹곤 합니다. 메주는 콩을 삶아 찧은 다음 네모나게 뭉쳐서 말린 것으로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데 기본 재료가 됩니다. 겨울에 메주를 만들어 처마 밑에 한 달쯤 매달아 두면,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쬔 메주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합니다. 메주에 핀 곰팡이는 장맛을 좋게 하고 영양을 높이는 구실을 해요.

잘 익은 메주를 씻어서 말린 후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어요. 그런 다음 숯, 고추를 띄워 놓아요. 장을 담근 지 40일 정도가 지나면 소금물이 까맣게 되는데, 그 물을 걸러 내서 끓이면 간장이 돼요. 그리고 항아리에 남아 있는 메주를 으깨어 소금을 넣고 한 달쯤 두면 된장이 되는 겁니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좋아지는 간장과 된장은 모두 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암과 같은 질병을 예방하는 훌륭한 음식입니다.
곰팡이·세균·효모 등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유기물이 분해되어 새로운 성분을 합성하는 발효라는 작용을 이용해 만든 식품의 총칭.
미생물의 종류 식품의 재료에 따라 발효식품의 종류는 다양해지며, 복잡한 반응의 결과로 원료에 함유되어 있지 않던 성분들이 생겨나면서 영양가·기호성·저장성이 향상된다. 알콜발효, 젖산발효, 초산발효, 아미노산발효 등 발효균의 종류와 발효조건에 따라 생성물이 달라지므로 식품에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주류, 식초, 치즈·요구르트·버터와 같은 유제품, 콩발효식품, 채소 절임류 등이 대표적인 발효식품에 해당되며 발효차, 발효두부, 발효조미료, 발효빵 등 식품의 가공과정에 응용되기도 한다.

된장, 춘장,
된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중국에서는 ‘춘장’, 일본에서는 ‘미소’ 또는 ‘고려장’이라고 해요. 미소가 고려장이 된 것은 고려 때 우리나라의 된장이 일본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된장은 100% 콩으로 만들어 발효를 시키지만, 춘장과 미소는 쌀가루나 보릿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다.

변천 과정.

여러 가지 발효식품 유형 중 농경 문화권이었던 한국의 발효식품은 된장·간장·고추장·식초와 같은 조미 양념류, 김치·젓갈 등의 찬류, 그리고 곡물발효주를 위주로 발달하였다. 그 중 장·젓갈·술 등의 발효식품에 관한 내용은『삼국지()』「위지()」의 고구려조와『삼국사기()』의「신라본기()」신문왕() 3년(683년)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만으로 당시 발효식품 문화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 사실만큼은 확인시켜 준다.
한국인 주부에게 있어 장과 김치 담그기는 1년 치 식생활을 준비하는 가장 기초적인 임무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또한, 제사와 손님접대를 위해 집집마다 가양주를 담아두었다가 그때그때 쓰임에 대비하는 것도 주부의 막중한 책임 중 하나였다. 1909년 일본에 의해 주세법()이 제정되어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면서 가양주 문화는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한국 장류의 공업화는 한국 거주 일본인과 일본 국내의 군수품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1890년경 인천에 소규모 장류제조공장이 설립된 후 점차 발전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들 공장 중 일부를 한국인이 인수하여 운영함으로써 성장시켜 갔다. 일제강점기에는 장류 담그기와 김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막대한 노동력과 시간, 비용의 집중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관련 산업을 공업화하여 시장체제로 편입시키려 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주거 및 생활환경의 변화와 산업화의 가속으로 점차 집에서 제조하는 비율은 줄어들고 시판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의 주요 발효식품으로는 전통장류인 간장·된장·고추장·청국장 등과 채소류 발효식품이 있고 김치·절임류, 수산물 발효식품인 젓갈류, 그리고 주류와 식초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효식품은 식품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유용한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소화되기 쉬운 상태로 변화한 것이다. 발효에 의해 생성된 유기산은 맛도 향상시키고 장내 미생물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유해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정장작용을 한다.
발효식품이 미생물에 의한 식품성분 변화라는 제조 원리를 알지 못했던 전통사회에서는 발효식품의 맛이 변하는 것은 귀신의 장난이라 여겨 장과 관련된 각종 금기가 많았고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최근의 발효산업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효에서 방식에서 관리·통제하는 방식으로까지 발전해 있다. 원하는 최종 제품이 무엇인지에 따라 미생물을 선택하거나 발효조건을 관리하여 목적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발효식품의 기능성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청국장 환제품 등과 같은 기능성 식품이나 의약품으로 가공하는 산업도 발전하고 있으며, 발효식품에서 기능성물질을 추출하여 신소재로 개발하는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발효& 과정.
발효는 효모의 작용에 의해 알코올이 생기는 현상으로 처음 그 실체가 밝혀진 것은 1857년, 프랑스의 생물학자인 파스퇴르에 의해서였다. 파스퇴르는 산소의 공급이 충분할 때는 효모의 번식이 강화되어 균체가 많이 생기므로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발효력이 좋아진다는 것도 밝혀냈다. 
일반적으로 발효는 '산소가 부족한 혐기 상태에서 일어나는 유기물 분해 현상'을 일컫는다.

발효는 인간에게 좋은 면을 주는 미생물 작용이므로 비슷한 과정을 겪는 부패와는 구분된다. 발효가 일정한 온도, 습도, 산도, 영양 성분을 조절하여 원하는 미생물을 다량 자라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면, 부패는 위의 환경 조건이 잘 맞지 않을 때 원하지 않는 미생물이 자라서 발효 과정을 방해한다든가 병원성 미생물이 오염되어 발효 미생물이 생육을 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 고유의 발효식품은 한국 식단에서 단일 식품으로서도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반찬류의 맛을 좌우하는 조미료로 광범위하게 쓰임으로써 전통적인 맛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 발효식품인 김치와 된장은 발효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생리활성물질들을 생성해 내 성인병 예방과 항암에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어 한국 음식문화의 우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곡류가 효모나 세균이 분비하는 효소에 의해 발효되면, 전분은 포도당으로 분해되고 포도당은 여러 가지 중간 물질을 거쳐서 에탄올로 발효되어 술이 된다. 우유의 경우도 단백질을 응고시켜 만든 치즈가 세균이나 곰팡이에 의해 발효되면 향기 좋은 숙성된 치즈를 만들 수 있다. 밀가루 반죽을 효모를 사용해 발효시키면 반죽 사이에 이산화탄소가 발생해 밀가루 반죽 중 전분이 분해되어 부드러운 조직의 빵이 된다. 산업적으로 이용되는 발효 과정은 그 방법에 있어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수소 에너지 발생을 비롯하여, 메탄 발효, 석유 화학 공업을 대치할 수 있는 원료 물질 아세트산, 젖산, 숙신산 등 많은 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데 발효 과정이 이용되고 있다.
산이나 알칼리 분해에 비해 발효는 여러 가지 효소가 복합적으로 유기물에 작용해 발효 과정 중 향미를 갖게 하거나 발효 음식을 씹는 느낌을 부드럽게 만드는 부가적인 장점이 있다. 김치나 치즈, 빵과 같은 발효 음식에 대한 기호는 이와 같은 데서 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생물 자체가 이러한 유기물의 단단한 화학 결합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이 자라면서 외부로 분비하는 효소가 분해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은 1897년 생물학자인 뷰흐너(Buchner)에 의해서였다.

미생물은 말 그대로 아주 작은 생명체로 세균, 효모, 곰팡이로 구분되는데 이에 속하는 일부의 미생물이 발효를 할 수 있다. 유기물은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 원자가 결합되어 있는 물질이다.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곡식의 주요 성분인 탄수화물은 일종의 유기물로 여러 개의 포도당(C6H12O6)이 화학적으로 단단하게 결합하고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학적 결합은 산이나 알칼리에 의해서도 분해될 수 있지만, 미생물이 만드는 효소에 의해서도 분해되는데 이러한 작용을 '발효'라고 합니다.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hyunbong kim님의 실시간 스트리밍

hyunbong kim님의 실시간 스트리밍

서희, 徐熙.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다. 봉산군을 함락시킨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공문을 보내 알렸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건국 75년 만에 고려에게 국운을 위협하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이 찾아온 것이다.

916년 나라를 세운 뒤 938년 ‘요()’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중원 전체를 장악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란은 960년 건국된 송을 압박하며 고려를 위협했다. 송과 거란의 대치상태에서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다. 발해에 대해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펴던 고려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건은 거란이 보내온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함께 보낸 낙타 50필을 굶어 죽게 하는 등 반거란 정책을 분명히 했다.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이던 942년, 서희(942~998)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종 대의 대쪽 재상 서필이었다. 집안도 좋았지만, 열아홉 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고 과거 급제 후 차례를 뛰어 넘어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학문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송이 건국되던 해, 서희는 과거에 급제했고, 12년 뒤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962년, 965년 두 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지만, 한 동안 사신 왕래가 두절되었던 터라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에 송 태조는 이들을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다. 그 동안 고려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서희는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어 그간 외교 사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설명했다. 서희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렸다. 명예직이기는 하나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젊은 시절부터 서희의 외교적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의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막게 했다. 이들은 북계(현재의 평안북도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방어할 준비를 서둘렀다. 성종도 친히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으로 갔다. 이 무렵 소손녕이 다시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귀순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라.”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 지역의 빈해여진과 그 중류지역에 있던 정안국을 멸망시켜버린 요였다. 송도 거란이 차지한 화북의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패했듯이,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였다. 그러나 소손녕의 공문을 읽은 서희는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일단 치고 내려올 것인데 항복하라고 공문을 보내고 기다린다는 데서 뭔가 감지했던 것일까. 송과 대치중인 상태라 고려와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제1차 협상이다. 이몽전이 침공의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다시 한번 항복하라는 뜻을 전했을 뿐 성과 없는 회담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의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할지론()이었다. 무조건 항복하는 것보다는 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성종의 마음이 기울었다. 서경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두었던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적들의 군용으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주어야 하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 민관(, 호조의 수장) 이지백도 이 말에 찬성했다.
고려의 조정이 이런 논의들로 바빠 회답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다시 남하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 대도수()와 유방()이 거란군을 물리쳐 이겼다. 유목민족인 거란의 부대는 고려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어려움을 느꼈던 듯하다. 소손녕은 더이상 진공하지 않고, 다시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고려는 부랴부랴 합문사인 장영()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소손녕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을 보내라며 허세를 부렸다. 제2차 회담은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한 꼴이었다. 성종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장영이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대신을 불러 죽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개성 북쪽 예성강가까지 나아가 서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전송했다.

그렇게 제3차 회담이 시작되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영문으로 갔다.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던 듯 소손녕은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거란의 군사가 가득한 적진에서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는 절하는 것이 예법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손녕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서희는 노한 기색을 보이며 숙소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자리였으나 서희는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결국 소손녕이 서로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하면서 첫 번째 기싸움은 서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서희와 소손녕은 마주서서 서로 읍한 후 당상으로 올라와 서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손녕이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광종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손녕이 제기한 이 물음은 이번 정벌의 명분에 대한 얘기로 ‘누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서희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한치의 틈도 없는 서희의 논리에 소손녕의 말문이 막히면서 고구려 후계론 논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소손녕이 정벌의 본래 목적을 얘기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국교의 회복,’ 그러니까 송나라를 섬기지 말고 거란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 앉혀 혹시 있을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는 것, 그것이 거란의 본래 목적이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그 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희의 탁월함이다. 서희는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소손녕이 회담의 내용을 거란의 임금에게 보내자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그만 철군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다는 답서도 보내왔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국교를 맺어 이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지만,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 삼아 영토까지 얻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실리적으로 성공한 외교라 칭찬받을 만하다.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서희는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성종 15)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사원에 나누어주고 개국사에는 곡식 1천 석을 내렸다. 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는 998년(목종 원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성 베드로 대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1

성 베드로 대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1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고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때마다 보수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도중에 몇 차례의 변형이 있었으나 브라만테의 설계는 막판에 건축 책임자였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다시금 채택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남아 있다.

브라만테가 죽자 건축역사는 라파엘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것을 라파엘로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에게 라파엘로를 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되도록 살리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런 와중에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27년 란체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들의 반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1534년 바올로 3세가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주도하였고 야코포 멜레키노가 조수로 참여하였다.

1546년에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교황 바올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며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였던 안토니오의 설계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대수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수정 보완한 설계도는 초기의 브라만테 정신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재조정하였고 돔을 현재의 모습대로 설계 변경하였다. 돔은 이 대성당의 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하여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에서 1561년까지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자 공사가 잠시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즉위하면서 다시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605년 교황 바올로 5세가 등극하면서 성당의 건축은 다시금 변화를 겪었는데, 신임 교황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지역을 포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한 예술가가 카를로 마테르노이다. 그에 의해 마무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특히 정면공사도 이루어졌다. 마테르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을 철저히 계승했다.

1629년에 마테르노가 죽자 신축 성당의 마무리 작업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당의 바닥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마련된 소성당(Capella)들의 장식을 붉은색 기조의 천연 대리석으로 하여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천재적인 조각가로 평가받고 있는 베르니니가 있음으로 해서 성당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물론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융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베드로 성인과 바올로 성인의 조각상이 건물 앞에 서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회랑을 통과해야 한다.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장엄한 회랑이다.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리석상이 오른쪽에 있다. 이 석상은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반대편에는 1725년에 코르나키니가 만든 샤를마뉴의 대리석상이 있다

입구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다섯 개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스러운 문(Porta Santa)'으로 성년이 되는 해에 일 년 동안 열린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문에는 16편의 성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또 같은 해에 제작된 '성사의 문' 역시 성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중앙문(Grande Portale Centrale)'으로서 초기부터 있던 문이 있다. 1455년에 아베를리노가 제작한 이 문 위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베드로와 바올로 성인이 부조되어 있다. '중앙문'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이 1977년 교황 바올로 6세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든 '선과 악의 문'으로 오른쪽에는 선한 것을, 왼쪽에는 악한 것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맨 왼쪽의 문은 '죽음의 문'으로 요한 23세 교황이 조각가 만추(Manzu)에게 요청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이 문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그 화려함과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이다. 중앙 통로의 길이가 약 186m, 폭이 140m 높이는 46m이고 중앙의 제대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137m에 이르므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셈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채플, 즉 제대들과 395개의 조각품이 곳곳에 배열되어 있으며, 135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완벽한 미술관인 셈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겨우 25세에 완성한 피에타 상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걸작품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모습의 성모님과 그리스도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귀하고 정결한 동정녀의 영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게 한 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왼쪽 통로를 걸어올라가면 오른쪽에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아르놀포 디 캄피오(1245~1302)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이 성당의 명물로 통한다. 발가락에 입을 맞추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오른쪽 발이 다 닳았을 정도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물로 평가받는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교황 제단의 천개(Baldacchino)가 있다. 역시 최고의 걸작으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천개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금속의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청동을 떼어와야 할 정도였다 한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중앙 제단이 있고 여기서 집전하는 교황의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그렇다. 대성당은 관광하기보다는 순례하는 곳이다. 깊은 명상 속에 간간이 기도를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옮기며 며칠은 보내야 하는 성역이다. 지하의 성인 묘역을 참배하고 두루두루 성화와 성물들을 감상한 다음, 성당 내부의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서 돔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굽이굽이 계단을 돌아 쿠폴라 꼭대기에 오르면 로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름다움이여! 그 영원함이여! 발 아래 찬란하게 펼쳐진 바티칸 정원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시스티나 채플의 벽화, 위대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그림과 조각들, 도처에서 수집해온 보석 같은 문화재들이 박품관에서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환상적인 예술성은 얼마나 대단한가! 이 모든 예술품들이 풍겨주는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바티칸 곳곳에 숨겨진 저 은밀한 보물들을 여기 소개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다. 지면의 부족을 아쉬워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리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다짐하니 마음이 편하다.
로마(바티칸)에 있는 로마 ∙ 가톨릭의 총본부. 32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오랑식()의 바실리카를 건립한 후 15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이를 성 베드로 구() 성당이라 부름. 1502년 브라만테의 안()에 따라 집중식의 신성당이 기공되었으나 설계상의 미비로 인하여 중단하고, 줄리아노 ∙ 다 ∙ 상갈로가 교회의 요망에 응해 장당식()으로 변경했다. 프라 조콘도와 라파엘, 페르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도 각기 안을 제시했으나 모두 채택되지 못하고 1546년 주임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다시 집중식의 안을 설계하여 공사에 착수, 비뇨라가 소() 돔을 부가함. 미켈란젤로 설계의 대() 돔은 1587년~89년에 델라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건조했다. 17세기 초두, 교황 파울루스 5세(Paulus V, 재위 1605~21)가 다시 장당화()를 명해 1607년 설계공모에 의해 마데르나의 정면안()이 당선, 1614년까지 거의 완성함. 1624년에 신랑부()도 완성되고 헌당식을 거행 그후 1656~67년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성당 앞면의 광장을 에워싼 장대한 콜로네이드를 건조, 일세기 반에 걸친 공사를 완성했다. 면적 약 1만 6600㎡, 정면의 폭 71m, 오더의 높이 34m, 입구에서 아프시스까지 183m, 대 돔의 내경 42m, 바닥에서 내각 정상부까지 104m, 지반면에서 돔 정점의 십자가까지 138m로서 세계 최대 최호화 성당건축이라 알려진 이탈리아 ∙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임.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조각작품 『피에타』(1498~1499/1500)와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대천개)가 있음.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12왕조의 것임.
베드로대성당 또는 성베드로대성전·베드로대성전·바티칸대성당·바티칸대성전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15세기에 한 차례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하여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의 중심에 대원개()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브라만테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의 손을 거쳐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Sangallo)에게로 넘어갔다. 상갈로 역시 궁륭(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산피에트로대성당 , San Pietro Basilica, ─大聖堂.

산피에트로대성당 , San Pietro Basilica, ─大聖堂.

베드로대성당
로마(바티칸)에 있는 로마 ∙ 가톨릭의 총본부. 32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오랑식()의 바실리카를 건립한 후 15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이를 성 베드로 구() 성당이라 부름. 1502년 브라만테의 안()에 따라 집중식의 신성당이 기공되었으나 설계상의 미비로 인하여 중단하고, 줄리아노 ∙ 다 ∙ 상갈로가 교회의 요망에 응해 장당식()으로 변경했다. 프라 조콘도와 라파엘, 페르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도 각기 안을 제시했으나 모두 채택되지 못하고 1546년 주임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다시 집중식의 안을 설계하여 공사에 착수, 비뇨라가 소() 돔을 부가함. 미켈란젤로 설계의 대() 돔은 1587년~89년에 델라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건조했다. 17세기 초두, 교황 파울루스 5세(Paulus V, 재위 1605~21)가 다시 장당화()를 명해 1607년 설계공모에 의해 마데르나의 정면안()이 당선, 1614년까지 거의 완성함. 1624년에 신랑부()도 완성되고 헌당식을 거행 그후 1656~67년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성당 앞면의 광장을 에워싼 장대한 콜로네이드를 건조, 일세기 반에 걸친 공사를 완성했다. 면적 약 1만 6600㎡, 정면의 폭 71m, 오더의 높이 34m, 입구에서 아프시스까지 183m, 대 돔의 내경 42m, 바닥에서 내각 정상부까지 104m, 지반면에서 돔 정점의 십자가까지 138m로서 세계 최대 최호화 성당건축이라 알려진 이탈리아 ∙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임.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조각작품 『피에타』(1498~1499/1500)와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대천개)가 있음.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12왕조의 것임.

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고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때마다 보수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도중에 몇 차례의 변형이 있었으나 브라만테의 설계는 막판에 건축 책임자였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다시금 채택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남아 있다.
브라만테가 죽자 건축역사는 라파엘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것을 라파엘로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에게 라파엘로를 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되도록 살리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런 와중에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27년 란체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들의 반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1534년 바올로 3세가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주도하였고 야코포 멜레키노가 조수로 참여하였다.

1546년에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교황 바올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며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였던 안토니오의 설계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대수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수정 보완한 설계도는 초기의 브라만테 정신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재조정하였고 돔을 현재의 모습대로 설계 변경하였다. 돔은 이 대성당의 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하여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에서 1561년까지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자 공사가 잠시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즉위하면서 다시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605년 교황 바올로 5세가 등극하면서 성당의 건축은 다시금 변화를 겪었는데, 신임 교황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지역을 포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한 예술가가 카를로 마테르노이다. 그에 의해 마무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특히 정면공사도 이루어졌다. 마테르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을 철저히 계승했다.

1629년에 마테르노가 죽자 신축 성당의 마무리 작업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당의 바닥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마련된 소성당(Capella)들의 장식을 붉은색 기조의 천연 대리석으로 하여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천재적인 조각가로 평가받고 있는 베르니니가 있음으로 해서 성당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물론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융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베드로 성인과 바올로 성인의 조각상이 건물 앞에 서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회랑을 통과해야 한다.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장엄한 회랑이다.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리석상이 오른쪽에 있다. 이 석상은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반대편에는 1725년에 코르나키니가 만든 샤를마뉴의 대리석상이 있다

입구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다섯 개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스러운 문(Porta Santa)'으로 성년이 되는 해에 일 년 동안 열린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문에는 16편의 성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또 같은 해에 제작된 '성사의 문' 역시 성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중앙문(Grande Portale Centrale)'으로서 초기부터 있던 문이 있다. 1455년에 아베를리노가 제작한 이 문 위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베드로와 바올로 성인이 부조되어 있다. '중앙문'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이 1977년 교황 바올로 6세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든 '선과 악의 문'으로 오른쪽에는 선한 것을, 왼쪽에는 악한 것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맨 왼쪽의 문은 '죽음의 문'으로 요한 23세 교황이 조각가 만추(Manzu)에게 요청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이 문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그 화려함과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이다. 중앙 통로의 길이가 약 186m, 폭이 140m 높이는 46m이고 중앙의 제대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137m에 이르므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셈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채플, 즉 제대들과 395개의 조각품이 곳곳에 배열되어 있으며, 135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완벽한 미술관인 셈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겨우 25세에 완성한 피에타 상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걸작품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모습의 성모님과 그리스도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귀하고 정결한 동정녀의 영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게 한 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왼쪽 통로를 걸어올라가면 오른쪽에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아르놀포 디 캄피오(1245~1302)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이 성당의 명물로 통한다. 발가락에 입을 맞추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오른쪽 발이 다 닳았을 정도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물로 평가받는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교황 제단의 천개(Baldacchino)가 있다. 역시 최고의 걸작으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천개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금속의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청동을 떼어와야 할 정도였다 한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중앙 제단이 있고 여기서 집전하는 교황의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그렇다. 대성당은 관광하기보다는 순례하는 곳이다. 깊은 명상 속에 간간이 기도를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옮기며 며칠은 보내야 하는 성역이다. 지하의 성인 묘역을 참배하고 두루두루 성화와 성물들을 감상한 다음, 성당 내부의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서 돔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굽이굽이 계단을 돌아 쿠폴라 꼭대기에 오르면 로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름다움이여! 그 영원함이여! 발 아래 찬란하게 펼쳐진 바티칸 정원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시스티나 채플의 벽화, 위대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그림과 조각들, 도처에서 수집해온 보석 같은 문화재들이 박품관에서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환상적인 예술성은 얼마나 대단한가! 이 모든 예술품들이 풍겨주는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바티칸 곳곳에 숨겨진 저 은밀한 보물들을 여기 소개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다. 지면의 부족을 아쉬워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리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다짐하니 마음이 편하다.
15세기에 한 차례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하여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의 중심에 대원개()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브라만테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의 손을 거쳐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Sangallo)에게로 넘어갔다. 상갈로 역시 궁륭(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그러나, 17세기 초기 신랑()의 전면()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Bernini)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카를로 마데르나(Carlo Maderna)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