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왕검, 檀君王儉.
단군(檀君) :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우신 분.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檀君)의 아버지라고 하는 신화상의 인물.
기원전 2333년 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의 부족들을 모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함. ‘단군왕검’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은 종교적 지도자,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라는 뜻.
고조선의 창업왕인 단군에 관한 신화
이칭별칭 | 기타 천왕(天王), 기타 신웅(神雄), 기타 단웅천왕(檀雄天王) |
---|---|
유형 | 인물 |
시대 | 고대/초기국가/고조선 |
성격 | 단군(檀君)의 아버지 |
성별 | 남 |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해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내려온 후 사람이 되길 바라는 곰이 시련을 잘 견디고 웅녀가 되자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하늘을 숭배하는 새로운 지배층이 원래부터 살고 있던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함께 나라를 세웠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하늘을 숭배하는 새로운 지배층이 원래부터 살고 있던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함께 나라를 세웠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조선은 정치적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배자가 같은 제정 일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하늘신의 자손이라는 선민 의식도 담겨 있다.
내용은 7개의 이야기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①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
②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는 것.
③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④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한 것.
⑤ 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사람의 몸으로 현신한 환웅과 혼인한 것.
⑥ 그 부부가 낳은 아기를 이름지어 단군왕검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⑦ 그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지하고 있지만,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와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실제로 ①에서 ③까지는 별로 다를 바 없으나, ④와 ⑤ 사이에서 크게 달라진다.
≪삼국유사≫의 웅녀가 사라지고 그 대신 환웅의 손녀가 등장한다.
환웅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한다.
이어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했고, 그가 조선의 지경에 의지해서 왕이 되었다고 ≪제왕운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④∼⑤에서는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가 ⑥∼⑦에서는 다시 이들 문헌 사이에 크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변화가 많은 ④∼⑤부분을 두고 이들 문헌의 기록을 대비시켜보면, 적어도 주어진 겉문맥상으로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단군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물인데도 한쪽은 곰이 화신한 여인이고, 다른 한쪽은 신이 화신한 여인이다.
단적으로 ‘동물(곰)/신’의 대립이 두 기록 사이에 있게 된다.
이 ‘동물/신’의 대립은 다시 ‘지상/하늘’이라는 양분적 대립을 함축할 수 있다.
다 같이 단군의 어머니이면서도 ≪삼국유사≫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남계)의 가통(家統)에 혼인해 들어온 여성임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 그 자체의 혈통에 딸린 여인이다.
전자가 가통 바깥이라면 후자는 가통 안이다.
말하자면, 양자 사이에는 ‘바깥 존재/안의 존재’라는 대립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가 지닌 ‘안/밖’의 대립을 존중한다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도 당연히 서로 다른 대립성을 보이게 된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의 뒤를 이은 부계의 3대인 데 비해, ≪제왕운기≫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계로서는 4대째에 속하는 여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왕운기≫는 단군을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통의 5대째 외손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 문헌 사이에서 ‘3대 부계/5대 모계’라는 대립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부계(남계)를 따른 3대에 걸친 일종의 신통기(神統紀), 곧 신족보(神族譜)가 기술되고 있음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모계(여계)를 따른 5대에 걸친 신족보가 기술되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이들 문헌 사이에는 이야기토막 ④와 ⑤를 두고 ‘동물(곰)/신’, ‘안/밖’, ‘부계 3대/모계 5대’라는 대립적인 양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보다 불과 십여 년 늦게 간행된 책이다.
그 짧은 시기 사이에 이만큼 큰 변화를 지닌 신화가 전승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려 때 와서 이미 단군신화의 서사구조상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 ‘곰(동물)/신’, ‘안/밖‘, ’부계/모계‘라는 대립은 보통 차이가 아니며, 의미작용이 거꾸로 뒤집힐 만큼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겹의 대립 가운데서 ’곰/신’ 사이의 대립은 비교적 쉽게 조정될 수 있다.
≪삼국유사≫의 “곰이 약을 먹고 사람 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
”와 ≪제왕운기≫의 “신의 손녀가 약을 먹고 사람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라고 하는 이 두 표현 사이에는 기층적인 공질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
공질성은 곰도 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착안함으로써 얻어내게 된다.
이로써 양 기록의 문제된 부분에 담겨 있는 공통의 기층을 요약하면, “사람 아니던 존재가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얻어 여자가 된다.”와 같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공질의 기층을 가진 게 사실이라면 ‘곰/신’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약을 먹고 변신해서 혼인함으로써 단군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없다.
시베리아 및 극동의 북부지방에 깔려 있던 이른바 곰신앙을 고려한다면 ‘곰/신’의 대립의 조정은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두 기록 사이의 대립의 조정은 여기서 그치고 만다.
‘안/밖’, 그리고 ‘부계/모계’의 조정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전설에 부계와 모계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될만하나, 어떤 직접적인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단군신화가 전승된 기록으로 평가되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서, 문제된 ④와 ⑤의 이야기토막은 ≪제왕운기≫를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변이에도 불구하고 단군신화는,
첫째,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 비로소 나라를 열고 왕의 자리에 나아간다.’라는 서사진행에 있어서,
둘째, 신맞이굿의 절차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셋째, 신화·전설의 복합체라는 점에서 나머지의 이른바 ‘건국신화’ 또는 ‘왕권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신화들과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이 공통성을 기반으로 해서 시베리아의 무속적 서사시 및 일본의 일부 왕권신화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를 가장 오래된 신화로 잡게 된다면 단군신화가 지닌 세 유형상의 특질을 우리 나라 건국신화들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의 축은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에 있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이 두개의 기본축에 ‘씨족의 건설’을 대입한다면 신라 6촌장의 씨족신화, 기타 여러 후대의 씨족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이 잡히게 된다.
≪삼국유사≫ 혁거세왕조의 기록으로 보아 씨족신화의 바탕 위에 왕권신화가 형성되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왕권신화와 씨족신화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나라/집(가문)’의 대립이 말해주는 차이밖에 없다.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을 기본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단군신화도 그 밖의 건국신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하늘에서 내린 제1세대가 직접 왕국을 건설하지 않고, 제2세대가 건설하게 된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두 세대 위에 하늘의 세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신인 첫 세대는 보내는 사람(파송자) 구실을 하면서 하강하는 자를 도와준다.
첫 세대와 둘째 세대 사이에는 ‘천상의 신/지상의 신’, ‘파송자/파송되어 하강한 존재’라는 대립성이 있게 된다.
이 가운데 둘째 대립은 ‘과업을 위임한 자/과업을 맡은 자’라고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강한 신인 제2세대와 제3세대 사이에는 ‘천왕/왕검’, ‘산 위 신단수 아래의 신시/평양 도읍의 왕국’이라는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천왕/왕검’ 사이에는 ‘하늘/땅’, ‘신성/세속’ 등의 대립이 끼어 있음직한 것이다.
그것은 ‘산 위의 신단수/평양이라는 도읍’ 이외에 ‘신시/왕국’이라는 대립에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환웅은 종교성 짙은 무속적인 통치자였고, 단군은 세속과 관련된 무속적 왕이었다고 구별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쪽에 무당 내지 샤먼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삼국유사≫의 “바람의 신[風神], 비의 신[雨神], 구름신[雲神]등을 거느리고는 곡식과 목숨과 질병과 형벌제도와 선악의 구별 등을 다스리면서 인간세상의 삼백예순 일들을 갈무리하였다.”고 하는 기록대로라면 환웅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이른바 ‘문화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며 제도를 비로소 창조해 ‘자연/문화’의 대립을 인간들에게 주면서 그 대립을 조절한 최초의 존재가 환웅이 되는 셈이다.
그가 다스리는 곳의 중심은 신시라고 불렀다.
종교적 성역이었던 셈이다.
환웅은 천신으로서 다스리되, 산 속 신단수 주변의 성역을 중심으로 한 특정 공동체의 신령이자 제사장이자 통치자였던 셈이다.
그로부터 직접신인 복합관념을 찾아내기는 힘든 일이 아니다.
이러한 환웅에 의해 고조선의 기틀은 이미 잡혀진 것이다.
하늘에서 하강한 제1세대가 직접 지상의 통치자가 된다는 점에서 환웅은 오히려 혁거세나 수로왕에 견주어져도 좋을 것이다.
단군신화를 이야기할 때 이와 같은 기초를 놓은 자로서의 환웅의 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환웅과 단군 사이에는 ‘부/자’, ‘예비자/완성자’, ‘천신/지상원리에 감염된 신격’이라는 세 겹의 대립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3세대는 ‘과업을 위탁한 자·과업을 예비적으로 수행한 자·과업을 마무리지은 자’라는 연속성을 보인다.
나머지 건국신화에서는 단군신화와 같은 하늘의 세대가 보이지 않고, 단군신화에서의 제2·3세대의 기능이 하늘에서 직접 천강한 제1세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는 그 서사구조나 등장인물의 성격에 있어 나머지 건국신화들의 규범형식을 다 갖추고 있거니와, 그것은 고조선이 최초의 왕국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실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우리 나라 서사문학 일반의 3대기의 원형이 되고, 아울러 후대의 각종 마을굿의 원형으로서 마을굿을 통해 되풀이 반복, 실연되면서 이 땅 민속신앙의 지배적 이념구실을 다해온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환웅(桓雄)·천왕(天王)·신웅(神雄) 등으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웅(雄)·단웅천왕(檀雄天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고기(古記)』에 의하면, 하느님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여러 아들 중의 하나라는 뜻)로서 자주 천하(天下)를 차지할 뜻을 가지고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 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 뜻을 알아차린 아버지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이곳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며 교화하였다.
이 때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호랑이와 곰 한 마리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었다. 그 결과, 곰이 변한 여자(熊女)와 잠시 사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으로 변하게 한 다음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단군신화 중 불교적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환인(桓因)이나, 도교적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풍백·우사·운사 등의 사용이 후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단군신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왕운기』에서도 환인을 상제(上帝)와 함께 석제(釋帝)라고 표현하고 있어 불교의 산스크리트어인 ‘Sakrodevanam Indrah’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석제환인(釋帝桓因)’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단군신화가 불교나 도교가 수용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화 생성 후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이 문자화되면서 후대적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환인이라는 단어는 하늘님·천신(天神)이라는 뜻을 문자화하던 시기에 불교 혹은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내용에 있어서 환웅의 하강은 기존질서에서 일정한 자기위치의 확보가 어려운 존재가 낡은 질서를 탈피하여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이주자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상대적으로 하늘의 능동적인 위치에 의해 삼위태백(三危太伯)이라는 하나의 공간이 선택받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하늘로부터 하강한 수직적 이주자로서 인간세상을 구하겠다는 행위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여 자기확인 작업을 완료하고, 다시 환인으로부터 자기행위의 정통성을 부여받아 신시를 건설하고, 곰과 호랑이에게 통과의례를 부과하여 기존질서·토착문화집단으로 하여금 환웅 자신의 질서에 적응하게 한 뒤에, 단군을 탄생시켜 질적 변화를 꾀하였다.
환웅의 구체적인 성격은 일차적으로 ‘桓’자의 어의와 의미가 하늘 또는 빛(光明)으로 태양신(太陽神) 내지 천신 또는 천왕을 뜻한다.
그리고 ‘雄’은 글자 자체가 수컷을 나타내며, 웅녀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서도 남신(男神)임을 뜻한다.
이처럼 환웅은 하늘〔天〕·빛·남성·부신(父神)의 성격을 가진 존재인데 비해, 곰은 땅〔地〕·암흑·여성·모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환웅은 유목문화집단(遊牧文化集團)을 상징하고, 곰은 농경문화집단(農耕文化集團)을 상징한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환웅은 단군신화 속에서 실질적인 주체자로서 자기의지와 실천력을 바탕으로 새 질서를 창조하였다.
이는 환웅으로 상징되는 문화집단의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정착과정에서 발생한 문화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천제자(天帝子)ㆍ천왕(天王) 또는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계를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三危)ㆍ태백(太伯)이 인간을 홍익하기에 좋은지라.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위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가 신시(神市)를 베풀고 풍백(風伯)ㆍ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穀)ㆍ명(命)ㆍ병(病)ㆍ형(刑)ㆍ선(善)ㆍ악(惡) 등 인간의 3백 60여 사를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설화는 군장(君長)의 계통을 천(天)에 붙이어 그를 신성케 하려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공통된 관념으로 단군이 고대의 군장으로 있을 때의 수호신(守護神 : 종족신(種族神)ㆍ조상신(祖上神))이었던 것을 환인의 예와 같이 윤색한 것이라고 본다.
환웅부족, 桓雄部族.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환웅(桓雄)을 하나의 씨족 내지 부족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주집단으로 토착집단인 웅녀(熊女)집단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건설하며, 환웅집단은 유목집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환웅(桓雄)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인물로서 하느님인 환인(桓因)의 아들이자 조선(朝鮮)을 세운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버지라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신화에 따르면, 환웅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생하는 인간들을 도우려고 비 신[雨師], 구름 신[雲師], 바람 신[風伯],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神), 질병을 관장하는 신(神) 등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신의 도시를 만들었으며, 곰이 여자로 변한 웅녀(熊女)와 교합해 단군왕검을 낳게 했다고 한다.
신화 속의 인물은 보통 어느 한 집단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환웅을 하나의 씨족 내지 부족으로 간주해, 옛 터전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이 그곳의 토착집단과 합세해 평화롭게 공존하기까지의 역사 경험을 환웅의 하강 및 웅녀와의 교합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에 착안해 환웅의 집단을 하늘숭배사상을 가진 유목문화집단으로 이해하고 '환(桓)'이 하늘 또는 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환웅은 태양신 내지 천신(天神)을 뜻하는 셈이다.
이에 비해 곰인 웅녀는 땅[地]·암흑·지모신(地母神)을 뜻하며, 웅녀의 집단은 지모신 신앙을 가진 농경문화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고조선,古朝鮮.
-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