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7일 화요일

고조선과 한의 전쟁. Han conquest of Gojoseon.

고조선과 한의 전쟁,  Han conquest of Gojoseon.

고조선의 멸망.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를 바탕으로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예요. 
2천 년의 역사를 가지며 발전해 오던 고조선에 기원전 194년,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이 연나라에서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위만을 고조선에 살게 해 주었는데, 그가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된 거예요. 
위만이 왕이 된 이후의 고조선을 위만 조선이라고 해요.

위만 조선이 강국으로 성장하다
고조선은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이를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어요. 
위만은 우수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경 지대의 이민족들이 고조선 쪽으로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영토를 넓히는데 노력했어요.

고조선은 한반도 남쪽의 부족국가 진의 특산물을 중국의 한나라에 가져다 파는 중계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어요. 

고조선은 한나라와 진의 중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이 과일과 술 등 특산물을 직접 한나라에 가져가는 것을 막았지요. 
결국 이러한 고조선의 태도가 한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어요.

무제가 고조선 침공을 명하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동북아시아의 최대 강국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특히 제7대 황제인 한 무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고 있었어요. 
이때 남쪽의 진이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려 했는데,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이를 막고 못하게 했어요.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왕에게 남쪽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라고 했지만, 우거왕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섭하를 죽여 버렸지요. 
이에 노한 한 무제는 양복과 순체 두 명의 장군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고조선을 침범하여 공격하게 했어요. 
이때가 기원전 109년이지요.

성 문을 굳게 닫고 항전하다
그러나 우거왕은 용감하게 한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어요. 
한나라 장군 양복이 7천여 명의 군사로 왕검성 공격에 나서자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나서 무찔렀지요. 
그 후로도 우거왕은 왕검성을 굳게 닫고 몇 달을 버티며 항전을 계속했어요.

금방이라도 고조선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침공해온 한나라 군대는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고조선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나라 장군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심각한 의견 대립이 생겼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급히 보내 사태를 수습하게 했어요. 
공손수는 일단 모든 책임을 좌장군 양복에게 돌려, 그의 군대 통솔권을 몰수하는 한편, 양복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어요. 
양복의 군대를 누선장군 순체의 휘하에 보내어 순체가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했어요.

공손수의 사태 수습으로 한나라 군대의 사기는 한층 높아졌어요. 
순체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왕검성을 공격했어요. 이렇게 한나라 군의 공격 수위가 높아지자, 
고조선을 이끌고 있던 지배층들도 끝까지 한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과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자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면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내부 분열 속에 왕검성이 함락되다


그러자 이들 중 한음과 왕겹은 몰래 도망쳐 한에 투항했어요. 
왕검성에 남아 있던 삼도 기회를 엿보다가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지요.
한나라의 군사력에 겁이 난 위만 조선의 재상 노인과 한음, 대신 삼과 장군 왕겹 등이 한나라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어요. 

우거왕은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지요.

왕검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어요. 
우거왕의 대신인 성기가 왕검성 문을 굳게 닫고 끝까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나라는 왕검성을 함락하기 위해 우거왕의 아들 장강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 조선의 백성들을 설득하여 끝까지 항전하던 성기를 죽이게 했어요.

기원전 108년 대제국 한나라의 침공에 1년간이나 버티며 항전하던 고조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조선이 있던 자리에는 한나라가 세운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군현이 설치되었다.
고조선은 멸망했지만 고조선 사람들은 중국의 지배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틈만 나면 한나라 군사들을 고조선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투쟁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의...


부여 사람들의 생활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와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어요.
부여의 건국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기원전 2~4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바로 전에 세워져 약 600년 동안 있었어요.
부여와 여러 나라들
부여와 여러 나라들
부여는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관리가 있었어요.
이 높은 관리들은 말, 소, 돼지, 개 등 가축 이름을 붙인 관직명(마가, 우가, 저가, 구가)을 갖고 있어요.
가축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을 보아 부여는 농업보다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4명의 가는 각각 한 지역을 맡아 다스렸어요.
그 지역을 ‘사출도’라고 해요.
부여의 왕은 사출도를 다스리는 부족장들이 뽑았어요.

부여는 왕이 다스리는 중심부와 사출도로 이루어진 5부족 나라였던 셈이에요.

부여의 백성들은 ‘하호()’라고도 불렸어요.
하호들이 지은 농사나 목축의 수확은 모두 권력자들이 차지했어요.

"부여에서는 부족장들이 가장 강한 부족의 우두머리를 왕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왕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노예들은 상전()이 죽으면 그 상전을 따라 무덤에 함께 묻히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한 상전의 무덤에 1백 명의 노예가 같이 묻히는 일도 있었어요. 
이러한 장례 풍습을 ‘순장’이라고 해요. 
모두 귀족들의 욕심에서 나온 풍습인데 죽어서도 귀족처럼 노예를 부리며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부여의 법은 아주 엄격했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시키고, 그 가족들은 노예로 삼았어요. 
도둑질한 사람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아야 하고, 남녀 간에 옳지 못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을 시켰다고 해요.

부여에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기는 축제의 날이 있었어요. 
12월에 벌어지는 ‘영고’라는 행사예요. 
영고에는 많은 음식과 술을 준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그 해의 풍년을 감사하며, 다음 해에도 농사가 잘 되길 빌었지요.

고구려의 동맹이나 삼한 등의 제천 행사()는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열리는데 부여에서는 12월에 열렸어요. 
제사가 끝나면 음식과 술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백성들은 여기저기 모여 노래와 춤을 추었지요.

“얼씨구 좋다, 올해도 풍년이오.
내년에도 풍년이다.”

온 백성들이 즐기는 영고 잔치는 며칠 동안 계속 되었다고 해요. 
이 기간 동안 부여의 왕은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기도 하고, 그 벌을 줄여 주기도 하는 등 갖가지 어진 일을 베풀었어요.

해산물이 풍부한 옥저와 동예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했던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예요.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어요. 
힘이 센 고구려에 늘 소금, 어물()등 해산물을 바쳐야 했지요.

옥저는 고구려와 음식, 옷, 예절 등 여러 생활 풍습이 비슷했지만 결혼 제도만은 달랐어요. 고구려에서는 결혼하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살았어요.

옥저에서는 반대로 신부가 11살이 되면 약혼을 하고 신랑이 될 남자 집에 가서 살았어요. 
신부가 다 자라면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예물을 주고 결혼식을 올렸지요. 옥저의 이런 풍습을 ‘민며느리제’라고 해요.

동예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명주와 삼베 등 옷감을 짜는 기술이 발전했어요.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말), 반어피(바다표범 가죽) 등이 유명했어요. 
크기는 작지만 멀리까지 나가는 단궁은 중국에까지 소문이 퍼졌으며, 과하마는 ‘과일나무 밑으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이라는 뜻으로 튼튼하고 순했어요.

동예에는 부여의 영고와 비슷한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어요. 
10월에 열리는 무천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이며 백성들이 1년 중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잔치였지요.

벼농사가 발달한 삼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 고조선 시대부터 있던 진이 있었어요. 
고조선이 멸망한 뒤, 발달된 철기 문화를 가진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 변한, 진한으로 나뉘어 살았지요. 
이 세 나라를 합쳐 삼한이라고 해요.

삼한은 철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어요. 
벼농사를 활발하게 지었지요. 
벼농사에 많은 물이 필요해서 삼한 사람들은 빗물을 저장해 두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어요.

삼한에서도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지요.

삼한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장소를 ‘소도’라고 했어요. 
소도를 아주 신성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이 들어와도 그를 잡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죄인들이 이 곳으로 많이 도망쳐 왔다고 해요.

이 소도에는 신성한 장소라는 표시로 기다란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어요. 
이것이 오늘날 솟대의 기원이에요.

내용 

부여는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관리들이 있었고 왕의 세력은 크지 않았습니다.
부여의 법은 엄격했으며 계층이 분명한 사회였습니다. 
해마다 12월에는 영고라는 잔치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이 즐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의 새로운 나라들 본문 이미지 3

옥저와 동예는 한반도 북쪽의 나라로 옥저에는 소금, 해산물이 풍부했고, 동예에는 단궁,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했습니다.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있었는데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농경 사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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