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일요일

제주도 [Jeju Island, 濟州島], 1

제주도 [Jeju Island, 濟州島], 1
이칭별칭유형시대성격위치인구면적행정구역도·시·군청소재지꽃나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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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영주
지명/행정
현대
제주특별자치도 북부
45만 9876명(2015년 현재)
978.32㎢
4읍 3면 19행정동(40법정동) 96행정리(84법정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광양9길 10(이도2동)
수선화
왕벚나무
휘파람새
제주도 북부에 위치한 시.
동쪽과 서쪽 및 북쪽은 바다에 면하고, 남쪽은 한라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서귀포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08′∼126°58′, 북위 33°16′∼34°00′에 위치한다. 면적은 북제주군과 통합되어 978.32㎢이고. 인구는 45만 987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3개 면, 19개 행정동(40개 법정동), 96개 행정리(84개 법정리)가 있다.
일도(一徒)1·일도2·이도(二徒)1·이도2·삼도(三徒)1·삼도2·도남(道南)·용담(龍潭)1·용담2·용담3·건입(健入)·화북(禾北)1·화북2·삼양(三陽)1·삼양2·삼양3·도련(道連)1·도련2·회천(回泉)·봉개(奉蓋)·용강(龍崗)·아라(我羅)1·아라2·월평(月坪)·영평(寧坪)·오등(梧登)·오라(吾羅)1·오라2·오라3·연(蓮)·노형(老衡)·해안(海安)·외도(外都)1·외도2·내도(內都)·도평(都坪)·이호(梨湖)1·이호2·도두(道頭)1·도두2동 등 40개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시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2동에 있다.
남쪽으로는 한라산 정상 분수계를 경계로 서귀포시와 접하고 있는 행정시이다. 현재의 제주도는 2006년 7월 1일 이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의하여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가 출범하게 되어, 기존의 4개 시·군 7읍 5면 31동 체계는 2행정시와 7읍·5면·31동 등 43개의 하부지역단위로 행정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는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완성하기 위한 법제도적 실천전략으로, 특별법에 근거한 국방·외교 등 국가존립사무 이외의 행정과 경제의 단계적인 자치권 확대를 통한 균형발전과 효율성 증대를 목표로 하는 행정시스템을 말한다. 이 섬이 가지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정학적 이점, 내륙지방과는 다른 고유의 문화를 경쟁력으로 하여 행정도 중에서 인구는 가장 적으나 가장 큰 권한을 가진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새로이 태어나게 되었다.
핵심사업으로는 국책사업으로 영어전용타운조성 추진과 교육경쟁력 강화, 도 전역의 국제회의도시지정(2006년 9월), 의료관광기반조성 등 국제화를 위한 제도개선 및 투자환경조성이 주요 내용이다. 대한민국의 도(道) 중에서 유일하게 철도와 고속국도가 없으며, 자치도로 개편되면서 일반국도가 지방도로 바뀌었다.

자연환경

지형
시가지를 중심으로 한 시의 지세는 전체적으로 북저남고와 동고서저를 나타낸다. 산지항에서 삼의악까지 나타나는 계단상의 지형을 보면, 제1단은 산지천계단(표고 0∼20m), 제2단은 시민회관계단(표고 40∼60m), 제3단은 시청계단(표고 50∼80m), 제4단 법원계단(표고 90∼140m) 등이다.
이들 계단상의 지형은 간헐적인 지반의 상승과 해식에 의해 형성된 대지(臺地)로 아라초등학교를 기점 하여 남쪽으로는 급속한 경사를 보인다. 중산간지대와 해안지대에는 광활한 용암평원이 발달해 있다.
산·계곡
이들 산악지형과 용암평원에는 장구목오름(長項, 1,810m)·큰드레오름(斗星峰, 1,628m)·어승생오름(御乘生岳, 1,169m)·사라봉(沙羅峰, 148m)·별도봉(136m) 등 35개 정도의 측화산이 분포한다.
강·하천
시가지의 주요부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은 산지천 하구부의 저지대로서 이 산지천은 시 남쪽의 삼의악과 서삼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산지항으로 흘러든다.
하구에서 다른 하천과 달리 경사급변점이 없어 근대 이전부터 주요 하항의 역할을 한 특이한 하천이다. 이외에 화북천(禾北川)·병문천·한천(漢川)·도근천·외도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이 있는데, 이들 모두 강우시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들이다.
기후
기후는 한반도보다는 해양성기후를 나타내나 일본보다는 대륙성기후를 보여 전체적으로 온대해양성을 띤다. 북부가 바다로 열려 있어 동계계절풍이 탁월하여 바람이 많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많은 지역이다. 연평균기온 14.7℃, 1월 평균기온 4.8℃, 8월 평균기온은 25.8℃이며, 연강수량은 1440㎜이다.
역사
고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인접한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에서 황곰·붉은사슴·노루 등의 뼈가 발견된 것을 볼 때, 이 지역에서도 발굴될 가능성이 크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고인돌·즐문토기·무문토기·석부·마제석도 등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제주시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초반부터 집단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삼성혈(三姓穴)에 얽힌 신화는 선사시대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발상지이자 개국의 성지로서 고(高)·양(良)·부(夫)의 세 신인(神人)이 이곳에서 솟아 나와 수렵생활로 연명하다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제주시는 탐라국(耽羅國)의 중심지이며 관문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76년(문주왕 2) 탐라국이 백제에 방물을 바쳤다. 이후 백제를 섬기다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신라에 입조, 복속되었다.
한편,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당시 왜와의 사신 왕래와 문물교류의 기사도 보여 고대의 탐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925년(태조 8)에 탐라는 처음으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2년 후인 938년에는 탐라왕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입조함으로써 고려의 조공국이 되었다. 1105년(숙종 10)에 이르러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직접 관할 하에 들어갔다.
1153년(의종 7)에 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고종연간에 탐라가 제주로 개명되었고, 부사 및 판관을 두어 행정을 관장하였다. 1271년(원종 12)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주에서 약 2년 반 웅거하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이를 토벌하였다. 이후부터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다.
1276년(충렬왕 2)에는 원나라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1294년에 고려는 원나라에 탐라를 돌려주기를 요구하여 고려에 환원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목호(牧胡)의 난으로 또 다시 탐라[만호]라는 관리에 의해 관할되다가 1367년 고려의 요청에 의해 완전히 고려에 귀속되었다. 1374년 탐라에서 발호하던 목호들은 최영(崔塋)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었다.
조선시대
1402년(태종 2)에 오랫동안 전래되어 오던 성주(星主)·왕자의 칭호가 폐지되어 성주가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가 우도지관으로 개칭됨으로써 종전의 토관직(土官職)이 없어지면서 제주지배층이 없어졌다.
1416년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이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가 두어지고, 산남은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이 정의현(旌義縣), 서쪽이 대정현(大靜縣)으로 구분되어 현감이 다스렸다.
1609년(광해군 1) 김치(金緻)가 판관으로 있을 때 동서 방리를 설치하고 약정(約正)을 두었다. 제주목에는 중면·좌면·우면, 정의현에 좌면·중면·우면, 대정현에는 우면·좌면을 두었다가 뒤에 제주목의 좌면이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나뉘고, 우면도 그렇게 나뉘었다. 현재의 제주시 지역은 제주목의 중면에 해당된다.
근대
1894년 갑오개혁의 여파로 종래의 지방제도는 모두 폐지되었고 23개의 부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는 제주부로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의 세 군을 제주부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1896년 8월 전국이 도·부·목·군으로 구분되면서 제주도는 제주목으로 개칭되어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1908년에 목사가 폐지되고 부가 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제주목이 폐지되고 제주군이 되었다. 1909년에 대정군과 정의군이 폐지되어 제주군에 흡수됨으로써 제주도는 1개 군 12개 면 167개 리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제주시 지역은 이때 제주군 중면이었다.
1913년중면이 제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제주도의 군제가 폐지되고 도사제(島司制)가 실시되면서 도사가 경찰서장까지 겸하게 되었다. 1929년 당시의 제주면내의 호구수는 8013호, 인구는 3만 5,013인이었다. 1931년제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46년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되었고, 1955년 9월 1일에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62년 1월 1일에 14개 행정동이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23일에 일도동이 일도1동·일도2동으로, 이도동이 이도1동·이도2동으로 오라동이 오라동·연동으로 분리되었다. 1983년 10월 1일에 삼도동이 삼도1동·삼도2동으로, 1985년 10월 1일에 용담동이 용담1동·용담2동으로 분리되었다. 2005년말 현재 19개 행정동과 40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에는 주민투표를 통해 제주시와 북제주군,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을 통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안이 확정되었으며, 2006년 7월 1일부터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에 따라 제주시는 북제주군을 통합하여 광역 행정시로 편제되었다.
유물·유적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용담동·도련동·삼양동 등지에 지석묘(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호)가 산재해 있다. 용담동선사무덤유적(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0호)이 발굴되어 무문토기·마제석기·철제장검(鐵製長劍)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지로는 이도동에 제주성지(濟州城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호)와 화북성지(禾北城址)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삼양동의 불탑사오층석탑(佛塔寺五層石塔, 보물 제1187호), 만수사(萬壽寺)와 해륜사(海輪寺)에 있는 복신미륵(福神彌勒,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1호) 2기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용담동에 제주향교(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호)가 있다. 이는 1827년(순조 27)에 목사 이행교(李行敎)가 용담동 현 위치에 이건한 것으로, 대성전·명륜당·계성사(啓聖祠) 등의 건물이 있다.
이밖에 건입동에 모충사, 이도동에 삼성사 등이 있으며, 삼도동에는 제주목관아지(사적 제380호)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이도동의 삼성혈(사적 제134호)과 삼도동의 관덕정(觀德亭, 보물 제322호)이라 할 수 있다.
삼성혈은 고·양·부 세 신인이 땅속으로부터 솟아나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이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탐라 개국의 신화가 얽힌 곳이다.
또한, 아라동의 목석원(木石苑,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5호)·문경공고조기비(文敬公高兆基碑,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8호),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송시열(宋時烈) 등 교학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하던 이도동의 오현단(五賢壇,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1691년에 판관 김동(金凍)이 삼도동에 이건한 향사당(鄕社堂,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6호), 화북동의 삼사석(三射石,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호)·해신사(海神祠,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2호)·화북비석거리(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0호) 등이 있다.
이밖에 일도동에 용방록(龍榜錄,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0호)·연방록(蓮榜錄,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1호)·급제선생안(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2호)·연동에 탐라지도 및 지도병서(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일도동에 제주3읍도총지도(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이도동에 홍화각기(弘化閣記,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5호)와 제주의 특이한 석상인 돌하르방(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2호) 21기가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민속예술품으로서 애호를 받고 있다.
이밖에 망건장(網巾匠,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탕건장(宕巾匠,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제주칠머리당굿(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등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초가(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 3·1·3·4·5·6·47호), 제주도의 와가(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4·1호)와 같은 민속자료들도 있다.
용담동에 수근연대(修近煙臺,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8호), 화북동에 별도·화북연대(別刀·禾北煙臺,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9호)가 소재하며, 천연기념물로는 봉개동의 왕벚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159호), 아라동의 제주시 곰솔(천연기념물 제160호), 제주의 제주말(천연기념물 제347호) 등이 있다.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도련동의 도련귤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0호), 영평동의 영평조록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1호), 아라동에 무환자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3호), 이도동의 청귤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2호), 삼도동의 녹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4호) 등도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1392년(태조 1)에 창건된 용담동의 제주향교가 있다. 그밖에 서원으로는 1665년(현종 6) 최진남(崔鎭南)이 설립한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다.
학당으로는 1534년(중종 29) 목사 심연원(沈連源)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을 비롯하여 장수당(藏修堂)·남학당(南學堂) 등이 있었다. 서당으로는 1736년(영조 12)에 김정이 세운 삼천서당(三泉書堂)을 비롯하여 작은 서당들이 여러 마을에 산재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윤원구(尹元求)가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중등교육기관인 사립 의신학교(義信學校)가 최초이다. 제주공립보통학교는 제주북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의신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제주공립농업학교로 되었다. 여성교육기관은 1909년 제주천주교회 라쿠르(具瑪瑟)신부가 세운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가 최초이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7개교, 중학교 30개교, 고등학교 20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으며, 대학으로는 제주대학교·제주국제대학교·제주한라대학교 등이 있다.
그밖의 주요 시설로는 1957년에 설립된 제주도립도서관과 1984년에 개관한 우당도서관, 그리고 2001년 개관한 국립제주박물관이 있다. 향토문화제인 한라문화제를 비롯하여 각종 예술·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입춘굿을 들 수 있다. 입춘춘경(立春春耕)이라고도 불리던 이 굿은 관무(官巫) 합동의 신년 풍농제인 동시에 놀이였는데, 1920년경 전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굿의 연희모습을 기록한 문헌과 노인들의 제보를 종합해보면 대략적 윤곽을 재구성할 수 있다.
입춘이 되기 전 도내의 무당(심방) 100여 명이 주사(州司)에 모여 나무로 소를 만드는 등 굿 준비를 한 뒤 입춘날이 되면 굿패의 행렬이 무극(舞劇)을 벌이며 관덕정을 향해 행진한다. 이때 행렬의 맨 앞에는 악대가 가고, 목우(木牛)를 끄는 심방이 그 뒤를 따른다.
목우에는 쟁기를 매어 호장(戶長)이 밭갈이 모습을 하며 쥐고 가고, 그 다음에는 무악대(巫樂隊)·광대·농부 역을 하는 씨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가장인들이 위치하고, 이어서 100여 명의 심방패들이 춤을 추며 뒤따른다.
굿패들은 관덕정 광장에 이르면 굿판을 벌인 뒤, 민가의 낟가리를 몇 개 뽑아 와서 결실상황을 보아 새해의 풍흉을 점치고 객사의 잡귀를 쫓고 동헌에 이르러 다시 큰 무극을 벌인다. 무극의 내용은 호장이 목우로 밭을 갈면 씨할아버지가 씨를 뿌리고 새로 분장한 자가 날아다니며 씨를 주워 먹으면 사냥꾼이 나타나 새를 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어서 가면으로 분장한 처·첩이 등장하여 투기하여 싸우면 남편이 이를 조정하는 장면들을 벌여 웃음판을 자아낸다. 이렇듯 농경장면과 농부의 가정생활을 가면극으로 벌인 다음 굿패들은 각 관아와 창고 등을 두루 돌며 축사(逐邪)의 굿을 하게 된다.
입춘굿이 거행될 때는 목사 이하 각 관원들이 배석하고 구경하러 나온 일반인들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탐라시대부터 시작된 탐라입춘굿놀이는 지난 1999년에 복원되어 입춘을 전후해 해마다 열리고 있으며 제주시의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밖에도 이와 유사한 무당굿놀이로 영감놀이·세경놀이 등이 전승되고 있다.
남성들이 주관하여 유교식으로 지내는 포제(?祭)와 여성들이 주관하여 심방을 불러 행하는 당굿이 병존하고 있다. 포제는 정월 첫 정일(丁日) 마을의 포제단에서 ‘포신지위(?神之位)’라고 쓴 지방을 놓고 돼지 한마리와 갖가지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지낸다. 이 포제는 현재도 거의 마을마다 행해진다.
제관은 삼헌관(三獻官)과 집례(執禮)·대축(大祝) 등 12제관으로 구성되며, 한문으로 된 홀기(笏記)에 따라 향교의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듯 진행된다. 당굿은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 마을의 본향당에서 거행되는데, 점차 그 규모가 작아져 근래는 간단한 기원형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다만, 건입동의 본향당인 칠머리당굿만은 여전히 큰 규모로 행해져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의 대표적 설화로는 지명전설인「아흔아홉골전설」과 인물전설인「고전적전설(高典籍傳說)」을 들 수 있다.
아흔아홉골은 제주시 서남쪽 해안동경(海安洞境)에 있는 산이다. 밭고랑처럼 뻗어 내린 기봉들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골짜기가 아흔 아홉 개가 있다 하여 아흔아홉골이라 부른다.
만약 이 골짜기가 하나만 더 있어 백골이 되었다면 제주도에도 호랑이·사자와 같은 맹수와 큰 인물이 날 것인데, 한골이 모자라기 때문에 맹수가 나지 않고 왕과 같은 큰 인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전적은 현종 때 이호동(梨湖洞)에서 자란 사람으로 명도(明道)의 문하에서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했던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서자태생이어서 심지어 명도로부터도 서자의 차별을 받았다. 뒤에 명도가 죽자 좋지 못한 자리에 정혈을 잡아 그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지리에 신안(神眼)을 가진 고전적이 골랐으니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동문인 소두산(蘇斗山)이 목사로 와서 이를 알고는 고전적을 하옥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소목사가 인통을 세 번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은 고전적 밖에 없었다.
그 해몽으로 인해 소목사는 크게 출세를 하게 되어 그 보답으로 고전적을 불러 전적이라는 벼슬을 주게 되었다. 고전적에 얽힌 일화는 이 밖에도 도처에 많이 전해오고 있다.
또 용담동의 수근동(修根洞) 마을에 배가 큰 정서방이 살았다. 그는 장수가 될 인물이었지만 큰 배를 채우지 못해 바다에 빠져 자진하자, 또한 이 장수를 태울 용마가 바다에서 나와 울다가 도로 들어가 버렸다는「말머리전설」이 있다.
겨드랑이에 날개 돋친 아들을 낳아 역적으로 몰릴 것을 염려하여 날개를 끊는 순간 벼락이 쳐서 집터가 못이 되고 말았다는 도두동의「벼락구릉전설」이 있다.
그리고 제주도 곳곳의 지맥을 끊어 샘물을 없애고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였다는 중국의 지관 고종달에 대한 전설 등이 있다. 그밖에「설문대할망전설」·「용연전설(龍淵傳說)」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는「오돌또기」·「이야홍」 등 몇 개의 유희요가 있으며, 대다수는 농업, 어업 그리고 수공업과 관련되어 전승되는 노동요이다.
주요 노동요를 보면「밭 밟는 노래」·「김매는 노래」·「타작노래」·「맷돌노래」 등 농업노동요와, 어업에 관련된「해녀노래」·「뱃노래」 등의 노동요, 「망건노래」등 관모공예(冠帽工藝) 수공업노동요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벌채와 관련된 「나무 베는 노래」·「나무 켜는 노래」·「꼴 베는 노래」 등이 있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마소의 방목이 성행하였고, 이로 인해 관모공예의 주재료인 말총·쇠꼬리털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양태·망건·갓모자·탕건 등의 공예가 부녀자들의 부업으로 성행하게 되었다.「양태노래」·「탕건노래」·「망건노래」는 부녀자들이 모여 앉아 관모를 짜면서 생활감정과 작업을 노래한 여성노동요이다.
「망건노래」를 들어보면 “이맹긴(망건)아 이맹긴아/ 육장(한달 六場) 시백인맹긴// 이연이연 이여도라/ 이연맹긴 아나지라// 정의좁에도 눈이나잇나/ 둑에도 눈이 나잇나// 이연이연 이여도라/ 이연맹긴 아나지라// 장 닮은 씨아방에/ 암 닮은 씨누이에//……양지(얼굴)박박 얽은놈아/ 주리주리 밴놈아// 이연이연 이여도라/ 이연이연 이여도맹긴// 밥상받고 타령을말라/ 너의각씬 암서라(줄달음쳤더라)……”와 같이 부른다.
지금은 이들 작업이 사라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그 노래도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산업·교통
농경지 총면적은 58.7㎢로 대부분 과수원을 포함한 밭으로 이용된다. 과수원의 생산물은 감귤·키위·단감 등 과실류 생산의 비중이 큰데, 특히 밀감의 생산면적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식량작물의 면적은 밀감 재배면적의 약 절반에 불과하다.
주요 농작물은 맥류·두류·서류·잡곡 등이다. 식량작물의 생산이 낮아진 것은 제주도 일원에 걸쳐 1960년대에 밀감원의 대대적인 개원과 함께 주작물이었던 조와 고구마를 재배하지 않게 되면서 나타났다. 특히 주식량이었던 조는 현재 거의 재배되지 않고 있다.
2차산업으로는 음식료품업과 출판·인쇄 및 기록매체업에 관련된 업체가 주를 이루며, 최근에는 IT산업의 비중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앞으로 소형선박제조, 골프·낚시용구, 보석가공업 등의 관광레져스포츠 관련 공업의 성장이 기대되고 있다.
제주시는 예로부터 제주도의 대외 교역중심지였으며 또한 지역 내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다.
상업활동은 조선시대부터 있어 온 정기장이 2·7일에 개장되어 상업활동이 전개되어 왔다. 1945년 해방과 동시 상설시장으로서 동문시장이 생겼고, 1954년에는 서문시장이 개장되었다. 관광지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다른 지방의 재래시장이 쇠퇴하는 것과 달리 제주시의 정기시장은 그 자체가 관광대상이 되기도 하여 아직도 활기를 띠고 있다.
제주시의 상업기능은 특히 동부관광도로와 서부관광도로의 개통으로 산남지방의 상업기능을 흡수하면서 더욱 성장하는 추세에 있다. 1996년에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서 최초로 E마트가 개장됨으로서 제주시의 상업기능은 더욱 강화되었으나, 최근에는 서귀포시에도 대형할인매장이 입지함에 따라 제주시 상권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통의 경우 해안우회도로· 중산간우회도로· 한라산 제1·2횡단도로 등의 도로가 있다. 해상교통은 부산·목포·완도·인천 등지로 카페리호와 일반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며, 항공교통은 국내의 주요 도시와 국제선의 일본·중국·대만 등으로 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관광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에는 일본·중국·대만 등의 주요 도시들을 잇는 국제선과 전국 각지를 잇는 국내선이 갖추어진 국제공항이 있다.
그리고 부산·목포·완도·인천을 잇는 최대의 카페리 항구시설을 갖추고 있어 관광객이 찾아들기에 편리하다. 제주관광의 시작점이며 종착점이 되는 시에는 특급호텔·일반호텔 그리고 여관과 여인숙 등의 관광숙박업소와 관광요식업소, 그리고 관광교통업소 등이 집중되어 있다.
제주시의 관광명소로 용암동굴이나 폭포·온천 등은 없으나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이 있다. 예부터 제주도의 절경으로 영주십경(瀛州十景)이 널리 알려져 왔는데, ① 성산일출(城山日出) ② 영구춘화(瀛丘春花) ③ 귤림추색(橘林秋色) ④ 산포조어(山浦釣魚) ⑤ 고수목마(古藪牧馬) ⑥ 녹담만설(鹿潭滿雪) ⑦ 영실기암(靈室奇岩) ⑧ 정방폭포(正房瀑布) ⑨ 산방굴사(山房窟寺) ⑩ 사봉낙조(沙峰落照) 가 그것이다.
그중 영구춘화· 귤림추색· 산포조어· 고수목마· 녹담만설· 사봉낙조 등 6경이 제주시에 분포하여 자연적 관광자원의 매력을 제고시키고 있다.
용암동 해안의 용두암 이외에도 어리목계곡·아흔아홉골과 선녀폭포·어승생악·무수천·월대·용연 등의 자연경관지가 있다. 해수욕장으로는 이호동에 이호해수욕장과 삼양동에 적외선 치료효과를 내는 검은 모래의 삼양해수욕장이 있다. 레크레이션 관광지로 골프장과 해안 곳곳에 유수한 낚시터가 있으며, 문화의 거리라 할 탑동해안관광지가 있다.
탐라 5000년의 고도로서 문화적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지역 최대의 문화관광지가 된다. 삼성혈·삼사석·고인돌·제주성지·원당사지와 수정사지·산천단·오현단·관덕정·제주향교·향사당·모충사·돌하르방 등의 수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관덕정 인근에 소재한 제주목관아지가 복원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이 소재하며, 아라동에는 기암괴석을 전시한 목석원이 있다. 제주관광민속관과 매년 10월에 열리는 한라문화제에서는 제주의 전통민속이 해마다 재현되고 있다.
제주의 7대 비경(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은 감귤밭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거문오름에서 바라보는 분화구, 서귀포 칠십리 공원에서 보는 천지연 폭포, 섭지코지 촛대바위 일출, 푸른 바다 위의 일출봉과 우도, 지삿개 주상절리와 중문해변 절경, 협재 해변에서의 저녁 노을이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예약을 해야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거문오름'이다. 1일 400명(화요일 휴무)으로 방문 인원을 제한하며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탐방할 수 있다. 전화예약의 경우 방문 2일 전까지 예약을 완료해야 하고, 인터넷 예약의 경우 하루 전까지 가능하다.
거문오름은 제주의 기생화산 중 하나다. 여기서 '오름'이란 산봉우리의 제주도 방언이다.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북동쪽 바닷가까지 흐른 길을 따라 수많은 동굴들이 형성되었다. 거문오름은 만장굴, 김녕굴 등 20여 개의 동굴을 만들어낸 근원지라 중요하게 여겨진다. 용암동굴의 규모와 길이, 동굴 생성물 등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동굴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되려면 이곳과 비교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거문오름에서 당처물동굴까지 13k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 안에는 뱅뒤굴, 만장굴, 김녕굴 등 크고 작은 동굴들이 이어져 있으며, 그중 만장굴만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만장굴은 총 길이가 7.4km에 이르는데 현재 출입이 허용된 곳은 제2 입구이며, 1km까지만 탐방이 가능하다. 개방 구간 끝에서 볼 수 있는 약 7.6m 높이의 용암석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만장굴  내부
우리들이 보통 알고 있는 동굴로는 석회암의 용식과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석회암동굴, 용암이 흘러 생긴 용암동굴, 해안지대에서 파랑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파식동굴 등이 있어. 이 밖에도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석고동굴, 암염동굴, 절리동굴, 하식동굴, 풍식동굴, 백악동굴 등의 자연동굴이 있으며, 자원 개발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광산굴 등의 인공동굴도 있지.
석회암동굴의 내부

만장굴

萬丈窟천연기념물 제98호,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98호(1962),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2007)
요약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에 있는 동굴.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거문오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용암이 흘러간 자리가 동굴로 만들어졌다. 동굴 내부에 형성된 다양한 용암 흔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초기에는 세계 최장의 용암 동굴로 알려졌으나 여러 번의 실측 조사를 통해 약 7km로 확인되었다. 인접한 김녕굴과 동시에 형성되었으나 중간을 용암이 막아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98호이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도 동북부에 있는 용암동굴. 김녕사굴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는 '만쟁이굴'로 불렸으나, 1946~7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종휴에 의해 지금의 제2입구가 발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학술조사가 실시된 것은 1977년부터이다. 1977~86년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한일합동동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특히 1981년 제2차 한일합동조사에서는 주위에 있는 김녕사굴을 포함하여 전체가 동일한 용암동굴계로서 세계 제일임이 확인되어 국제화산동굴학회의 공인을 받았다.
이후 만장굴의 길이에 대해서는 재조사를 통한 수정이 계속되었다. 1993년 한국동굴학회의 조사보고에서 만장굴의 총 길이를 13,422m라고 알려졌으나, 2003년 문화재청 주관으로 열린 제주자연유산지구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동굴평면도 조사와 현지 측량조사 결과 실제 길이가 7,416m라고 보고되었으며, 이후 이 길이가 공식적인 실측 거리로 인정받고 있다. 관광객의 입장이 가능한 구간은 제2입구에서 약 1km 정도이다.
이 동굴은 신생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걸쳐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으며, 지층은 표선리 현무암층이다. 동굴 내부의 연평균기온은 9~17℃, 습도는 87~100% 정도이다. 굴은 같은 방향으로 2중, 3중의 동굴이 발달해 있으며, 굴 속에는 박쥐·지네·거미류 등의 동물군과 양치류의 식물군이 있다. 거대한 규모의 용암주와 용암종유석·용암교·용암선반 등이 기묘한 현상으로 발달해 있어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다. 2007년 제주도의 다른 자연지형과 함께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만장굴,
탐라국[ 耽羅國 ]
유형시대성격소재지
지명/지명
고대/초기국가
국가, 고대국가
제주도
지금의 제주도에 있었던 옛 나라.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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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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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특별자치도의 이해』(양명철, 대명출판사, 2008)
  • 『통계로 본 제주의 어제와 오늘』(통계청 제주통계사무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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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시오십년사 상·하권』(제주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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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지』(제주도, 1982)
  • 『제주도의 문화유산』(제주도, 1982)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제주도편-』(문화재관리국,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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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민요연구』(김영돈, 일조각, 1965)
  • 제주시(www.jejusi.go.kr)
  •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시 [濟州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탐라국 [耽羅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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