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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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변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시호는 충무()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 이정()과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장군으로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이백록(祿)이 조광조() 등 지치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위로 희신()·요신()의 두 형과 아우 우신()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요()·순()·우()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鹿)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또,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滿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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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인 창신도()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우리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와타나베()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가토()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 지금)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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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西)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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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 목포의 )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에서 “공()은 명장보다도 성자()이다. 신묘불측()이 오직 지성측달()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장군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 현충사가 입사()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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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구포시장. 맛집

부산여행"구포시장. 맛집." 6·25 전쟁 피난 시절이 낳은 돼지국밥과 밀면도 부산의 대표음식이다. 
돼지 사골을 이용하여 육수를 내고 소주, 된장, 생강을 넣어 돼지 냄새를 억제하면서 독특한 맛을 낸 돼지국밥은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의 ‘신창 국밥’, 북구 구포동의 ‘덕천 고가’,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 박가 국밥’ 등이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국물 맛을 자랑한다. 쇠뼈, 사골, 돼지 뼈, 닭 뼈나 소고기 양지육, 사태육을 고아 이용한 육수에 고명으로는 돼지고기 편육, 무 초절임이나 무김치, 오이 절임이나 생채, 완숙 달걀과 지단채, 배, 다진 양념을 얹는 밀면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의 ‘춘하추동’, 연제구 연산동의 ‘가야 할매 밀면’ 등이 맛집으로 유명하다.
부산에는 ‘골목’, ‘거리’ 등의 이름이 붙은 음식점 밀집 지역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피난 시절 먹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지는 곰장어구이는 자갈치와 온천장의 곰장어 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싱싱한 낙지를 사용하고, 고운 고춧가루를 넣어 우러나오는 국물 맛이 담백하고 깨끗하여 낙지 특유의 맛을 맛볼 수 있는 부산 낙지볶음은 자유 시장 근처 조방 낙지 거리에서 맛볼 수 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재첩 거리에는 
낙동강 하구둑으로 인해 재첩 채취가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할매 재첩국’, ‘하동 재첩국’, ‘아지매 재첩국’ 등의 재첩 요리 전문점이 남아 있으며, 속풀이 해장국으로 즐겨 먹는 뽀얀 국물에서 우러나오는 재첩국의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부산 의 중구 부평동 돼지 족발 골목, 
초량 돼지갈비 골목,  
해운대 소고기 국밥 거리 등도 대표적인 밀집 지역이고,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중구 남포동 고갈비 골목과 남구 문현동 곱창 골목도 음식점 밀집 지역으로 유명하다.또한 부산에는 전국적 인지도를 자랑하는 대표 맛집들도 많이 있다. 
지방 음식의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동래 파전으로 유명한 ‘동래 할매 파전’ 은 100여 년 동안 동래 파전의 맛을 지키고 있는 부산 민속 음식점[현 부산 향토 음식점] 제1호이다. 

구포 국수의 대표 맛집 
‘구포 촌 국수’, ‘이가네 구포 국수’, 부산 회국수의 대명사 ‘남포동 할매 회국수’, 완당의 대표 ‘원조 18번 완당’ 등은 다른 지역에서는 맛 볼 수 없는 부산의 맛을 보여 준다. 부산의 자연을 그대로 담아내는 맛집들은 산성 마을의 염소불고기와 함께 500년이 넘도록 누룩을 발효시키는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하면서 제조한 ‘민속주 1호’로 등록된 산성 막걸리를 함께 맛 볼 수 있는 산성 마을의 ‘산성집’, ‘산성 창녕집’, ‘현대 가든’, 신선하고 보기 좋은 갑각류와 어패류, 향신채를 넣고 고추장으로 양념하여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 맛을 낸 해물탕을 맛 볼 수 있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의 ‘안양 해물탕’, 사하구 괴정동의 ‘대티 물꽁’, 중구 보수동의 ‘물꽁집’ 등이 유명하다. 

부산 아귀찜의 대표 맛집인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의 ‘옥미 아구찜’, 항상 구할 수 있는 신선한 복어와 다른 지역에 비해 뛰어난 제독 기술이 강점인 부산의 복어요리 맛집 해운대의 ‘금수 복국’, ‘원조 할매 복국’, 남구 대연동의 ‘초원 복국’, 기장군 기장면의 ‘가마솥 생복집’, 일광면의 ‘일광 대복집’ 등과 낙동강의 향토 음식인 붕어찜 맛집 ‘민물 가든’도 부산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음식점이다. 
부산은 동해와 남해에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낙동강의 풍부한 수량이 기름진 농토를 만들어 농산물도 넉넉하게 생산되므로, 부산의 향토 음식은 농수산물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앞으로도 부산의 바다와 강, 산과 들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산물들은 지나치게 유동적인 사회 구조와, 다양한 식문화의 공존이라는 위기를 새로운 식문화 창조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배경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양산,김해,물금,진해.창원,마산,울산.기타 인근도시 에서도 많이들 오시죠. 

구포시장,
추천음식통닭' 상호 = 하림.  
장날이면  많이들 찾는 통닭, 닭이 알맞게 튀겨진것이 여느통닭 보다 입에 착 감긴다고들하죠, 또는 붙는다고도하고요. 표현을 하자면 이쪽에가갑습니다. 자주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어느가계는 좀 먹다보면 벆벆하게 도 하고 한두점 먹으면 그만 손이안가는 집들도 있곤하죠. 잘튀기면 물리지도 않고 술술 잘넘어 가곤 합니다. 소개 하는데는 후자쪽이구요. 입에는 좀 잘 맞는다고 할까요. 저가 입이좀 까탈 서럽기로 도좀 소문이 났는데(지인.친구들) 깔끔하게 한마리 먹으도 무난합니다. 많은 지인,친구 들에게 건 하곤 합니다. 

구포시장.1

구포시장."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포구로 내륙과 해안에서 생산된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렇게 모인 물산이 낙동강을 따라 멀리 안동까지 오갔다. 
구포는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잘 살려 크게 번영했던 곳이었으며, 감동창이라는 조창이 있어 세금으로 낼 곡물이 집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구포의 번영은 수로 교통에서 육로 교통으로 바뀌는 20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이 구포역을 지나면서 여전히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구포는 해방되기 전까지 영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구포는 주변으로 밀려났고, 구포시장도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성쇠를 함께했다. 
오늘날 구포시장은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조화를 이루며 여전히 큰 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구포의 정기시장은 장날이면 3~5만 명이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상설시장 역시 750여 개의 점포를 통해 고객을 맞고 있다. 2011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고 ‘정()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구포는 오랫동안 동래에 속한 곳이었으나, 부산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과거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나루터였으며, 조선시대 좌이면이었던 구포는 오늘날 구포동이 되었다.
구포()는 인근에 있는 범방산 줄기가 거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구포의 어원에 대해 두 물이 만나는 곳 또는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큰 나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도 있다.이런 탓에 구포에는 유난히 거북이 들어간 이름이 많다. 구포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이 노래는 〈구포선창노래〉의 노랫말이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온 배가 구포나루터에 도착하면 배에 실려 있는 나락을 주변에 있는 정미소로 나르고, 한편으로 정미소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싣던 구한말의 노동자들이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랫말에는 과거 구포나루터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구포는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해 부산으로 흘러드는 낙동강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은 영남 지방 전역을 두루 거치며 흐른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배들이 낙동강의 중류인 상주와 안동에서 구포를 오갔다. 흔히 말하는 낙동강 700리길은 바로 이 물길이다. 육로보다 수로를 통해 더 많은 물자가 운송되었던 조선시대에 구포는 유통의 중요 거점이었다. 게다가 구포는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끝에 위치해 해운의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포는 영남 지방에서 생산된 물자는 물론 내륙으로 갈 해산물 같은 물자가 모이는 집산지였다. 이런 이유로 구포나루터에는 노랫말처럼 항상 돛단배들이 행렬을 지어 드나들었다. 
낙동강을 통해 내륙으로 보내는 물산은 우선 육로를 통해 구포로 모였다. 그러면 그 화물은 배에 실어 삼량진이나 왜관 등지로 보내졌다. 이와 반대로 안동에서 내려오는 배들은 낙동강 유역 여러 곳에서 모인 벼를 싣고 구포로 내려왔다. 그 벼들은 곧바로 정미소로 보내졌다. 곡물 생산이 적었던 구포에 정미소가 많고 정미업이 발달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통해 편찬한 《택리지》(1751)에 따르면 18세기 중반까지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는 김해의 칠성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낙동강 하류의 수로가 홍수로 자주 침수되면서 오늘날처럼 구포-사상-하단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낙동강의 본류가 되었다. 이 때문에 김해의 칠성포는 뒤로 밀려나고 하단과 연결되어 해상 교통에서 우위에 있던 구포가 낙동강 하류를 대표하는 중심 나루터로 발전하게 된다. 즉 18세기 후반부터 구포나루는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구포가 크게 발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조창이었다. 조선시대에 조창이 있던 곳 대부분이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감안하면 구포 인근에 조창이 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구포와 가까운 조창은 감동창이었다. 
감동창은 조선시대 가장 남쪽에 있는 조창이라고 해서 남창이라고도 불렸으며, 그 후 감동창이 있던 마을은 남창리가 되었다. 감동창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1682년 숙종 연간이다. 감동창은 정부에 내야 하는 전세()와 대동미를 저장했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는 기능을 하던 조창이었다. 따라서 경상도 각지에서 옮겨진 물자를 보관하고, 거기서 부산좌수영 등에 필요한 군수미와 포목 등을 지급하기도 했다. 감동창이 있던 곳은 현재 부산지하철 3호선 구포역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창이 있어 물자가 모여들고,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객줏집과 주막이 성행했다. 자연스럽게 교역의 중심인 시장 역시 크게 발달했다. 구포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은 17세기인 숙종 연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18세기의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에도 동래 읍내장(2, 7일)을 비롯해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동래에 개설되어 있다고 나온다. 구포장의 장날은 3, 8일로 당시 행정의 중심지인 동래의 상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구포장은 낙동강에서 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터와 골목에서 장이 섰다. 
19세기의 기록을 보면 구포장의 장날이 되면 100여 척의 배와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구포장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시장과 관련된 20세기의 특징 중 하나는 교통의 변화였다. 기존의 수로 중심에서 철도와 도로의 부설로 인해 육로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구포장의 경우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구포역이 생기면서 과거의 번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김해와 연결하는 구포교가 1932년에 건립되는 등 구포는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따라서 시장 또한 변함없이 번창했다. 
구포장이 가장 번영했던 때는 〈구포선창노래〉가 불리던 구한말에서 해방까지였다. 이때 구포장 일대는 영남 최고의 시장으로 우뚝 섰다. 부산의 일본영사관이 1904년에 편찬한 《경상도 사정()》이라는 책자에 “부산에서 내륙으로 수송할 화물이 이곳의 배에 실려 각지로 보내진다. 인구가 매년 증가해서 부산항 개항 때 한산한 어촌이었던 이곳에 200호, 1,500명이 거주하며 3, 8일 장날이 되면 상가로 처마를 이을 정도로 북적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구포장은 육로와 수로의 요충지라는 이점을 활용해 화물의 집산과 교역지로 발달했다. 또한 기존의 농산물과 해산물에 더해 포목을 비롯해 석유, 소금, 명태 등의 상품을 취급했다. 또한 구포장에는 많은 객주들이 몰려들었고, 이런 배경 속에서 1908년에 구포주식회사라는 금융기관이 있었다. 
객주와 인근 지주 등 70여 명이 자본금 2만 5,000원으로 세운 것이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기원이며, 이후 1912년 6월 일본 자본이 아닌 민족 자본으로 세운 구포은행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구포장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의 특성을 활용해 1919년 3월 29일 장터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 정오에 농민과 상인, 노동자로 구성된 20~30대 청년 1,200여 명이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을 주동한 주도자가 붙잡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부터 구포시장에서는 그때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3월에 구포장터 3․1운동 재현 행사가 시행된다. 이렇게 저항이 심했던 것은 낙동강 하류의 상업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제가 행한 수탈의 집중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근의 김해평야 등지와 경북 내륙에서 실려 온 많은 벼가 구포의 정미소들에서 가공되어 일본으로 실려 갔는데, 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이다.
정기시장이었던 구포시장이 상설시장으로 변한 것은 1932년의 일이었다. 현재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는 구포시장의 장터는 1932년 당시 구포의 면장이었던 장익원 씨가 습지였던 땅을 매립해서 내놓아 마련된 곳이다. 새 장터에는 목조건물과 노점이 들어섬으로써 상설시장이 되었고, 3, 8일 정기시장과 함께 열리고 있다.새 장터는 지금의 덕천역 건너편에서 개설되었다. 그러자 옛 장터의 상권이 몰락했고, 평당 20원 하던 땅값이 1원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반대로 새 장터는 수십 배나 땅값이 뛰었다.새 장터에 모여든 상인들은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야시장을 개장했다. 
1934년 경부선 선로 주변에서 장터까지 70여 개의 등을 켜고, 야시장을 개설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구포시장은 장터를 옮기고도 번영을 구가할수 있었다고 함.
구포시장 . 이웃시장과비교표. 1930년대 말 구포시장과 주변의 시장
1930년대 말 구포시장과 주변의 시장
시장 이름위치장날연 거래액
구포장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
3 ,8일
336,650원
하단장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1, 6일
13,200원
덕두장
김해군 덕두리
5, 10일
75,845원
녹산장
김해군 녹산면 송정리
4, 9일
35,450원

빅토리아 폭포.

빅토리아 폭포.
아프리카 남부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을 가르며 인도양으로 흘러가는 잠베지 강 중류에는 폭 1,676m, 최대 낙차 108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빅토리아 폭포가 있다. 멀리서는 치솟는 물보라만 보이고 굉음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원주민인 콜로로족은 빅토리아 폭포를 ‘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툰야’라고 불렀다. 이 폭포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18 73) 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불렀다.  
홍수기인 2~3월에는 분당 약 5억 리터의 물이 쏟아질 뿐만 아니라 갈수기인 10~11월에도 분당 1,00 0만 리터의 물이 쏟아진다. 빅토리아 폭포는 중생대 1억 8,000만 년 전에 분출하여 형성된 현무암 대지의 균열에 잠베지 강물이 흘러들면서 지속적으로 지표를 깎아 내어 형성되었다. 그 형성 과정이 조금 복잡하지만 빅토리아 폭포는 현무암과 사암의 차별 침식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빅토리아 폭포 하류의 현무암 협곡에서는 강폭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좌우로 꺾인다. 이는 과거에 있었던 폭포의 흔적이다. 빅토리아 폭포는 두부침식(頭部浸蝕)을 계속하면서 상류 쪽으로 전진하고 있는데, 지금의 빅토리아 폭포는 여덞 번째 폭포라고 한다. 빅토리아 폭포 주변 지역의 동물군들은 독자적인 종으로 진화했는데, 이는 폭포가 진화의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폭포들 중 하나다. 폭이 2㎞를 넘어서기도 하는 잠베지(Zambezi) 강의 강물이 요란스럽게 현무암 협곡 아래로 떨어지면서 20㎞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의 물안개를 일으킨다. 모시 오아 툰야 폭포(빅토리아 폭포) 국립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폭포들 중 하나가 있다. 폭포와 관련된 협곡은 강물에 의해 깎아져 내린 지형의 좋은 예에 속하는데, 이곳의 단단한 현무암들은 침식작용을 일으키는 강물에 의해 지금도 계속 깎여 나가고 있다. 짐바브웨의 보호구역은 삼림 보호구역을 제외하고 1,846,700㏊에 이른다. 이 공원은 잠비아에 있는 담브와(Dambwa) 삼림 보호지역에 접해 있다. 폭포가 공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일반적으로 2월이나 3월 잠베지 강의 수량이 많아질 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 동안 잠비아의 레인보 폭포(Rainbow Falls)는 99m 높이에서 1,708m 폭으로 분당 500,000,000ℓ의 강물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수량이 줄어드는 11월에는 분당 약 1,000,000ℓ의 강물이 폭포로 흘러내린다. 또한 강물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여러 개의 분리된 폭포들을 이룬다. 모시 오아 툰야 폭포(빅토리아 폭포) 국립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폭포들 중 하나가 있다. 폭포와 관련된 협곡은 강물에 의해 깎아져 내린 지형의 좋은 예에 속하는데, 이곳의 단단한 현무암들은 침식작용을 일으키는 강물에 의해 지금도 계속 깎여 나가고 있다. 
짐바브웨의 보호구역은 삼림 보호구역을 제외하고 1,846,700㏊에 이른다. 이 공원은 잠비아에 있는 담브와(Dambwa) 삼림 보호지역에 접해 있다. 폭포가 공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일반적으로 2월이나 3월 잠베지 강의 수량이 많아질 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 동안 잠비아의 레인보 폭포(Rainbow Falls)는 99m 높이에서 1,708m 폭으로 분당 500,000,000ℓ의 강물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수량이 줄어드는 11월에는 분당 약 1,000,000ℓ의 강물이 폭포로 흘러내린다. 또한 강물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여러 개의 분리된 폭포들을 이룬다. 강물은 폭포 아래에서 일련의 좁은 협곡으로 흘러드는데, 폭포가 생성되기 시작하던 초기에 이 협곡들은 서로 이어져 있었다. 2,000,000년 전에 마카디카디 판(Makgadikgadi Pan) 지역이 융기한 후, 잠베지 강이 이곳의 현무암을 깎아내면서, 작았던 균열들이 커지고 움푹 들어간 협곡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전의 7개 폭포가 현재 폭포 아래에 있는 7개 협곡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강물이 협곡 아래로 흘러들면서 짐바브웨의 악마의 폭포(Devil's Cataract)가 새로운 폭포로 줄어들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두드러진 식물은 모파인(mopane) 숲에서 자란다. 그밖에 작은 규모의 티크 (teak) 와 미옴보(miombo) 숲, 잠베지 강을 따라 좁은 띠를 이루며 펼쳐진 하천 숲이 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폭포수의 물방울이 닿는 지역 내에 생긴 하천 ‘우림(rainforest)’이다. 이 우림은 사암 충적토 위에 단속적으로 형성되는데, 숲의 취약한 생태계는 풍부한 물과 물보라 기둥 때문에 야기되는 높은 습도에 의지해 유지된다. 수종이 많은 이 숲에는 몇몇 초본 종(herbaceous species)도 자란다. 동물상(動物相, fauna)과 관련해서는, 잠베지 국립공원에서 발견되는 코끼리 떼를 꼽을 수 있다. 코끼리 떼는 강의 수위가 낮아지는 건기 때 잠비아 본토와 섬들 사이의 강물을 가로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동물분포"
얼룩말(zebra), 흑멧돼지(warthog), 기린, 강멧돼지(bushpig), 하마뿐만 아니라 물소(buffalo)와 누(wildebeest)의 떼들도 폭포 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버빗원숭이(Vervet monkey)와 차크마개코원숭이(chacma bab o on)는 흔히 볼 수 있으며, 사자와 표범도 가끔 발견된다. 타이타매(Taita falcon), 먹황새(black stork), 검은독수리(black eagle), 송골매(peregrine falcon), 말똥가리(augur buzzard)는 계곡에서 번식한다. 빅토리아 폭포는 잠베지 강의 상류와 중류에 서식하는 어류에게 지리적 장벽이 된다. 폭포 아래의 하천에는 39종의 어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사람들의거주?
공원 외곽의 폭포 지역에서는 최근에 이주해온 사람들과 오랫동안 거주해온 사람들이 섞이면서 혼합 민족 구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3,000,000년 전 호모 하빌리스(Home habilis)의 석제 도구들이 폭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중석기시대에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발견된 무기와 장신구, 채굴 도구들은 석기시대 후기에 사냥과 채집을 하던 공동 집단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후 약 2,000년 전, 그들을 대신해 철기 도구를 사용하는 농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가축을 기르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이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폭포에 속한다. 폭이 2㎞를 넘어서기도 하는 잠베지 강의 강물이 요란스럽게 현무암 협곡 아래로 떨어지면서 20㎞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의 물안개를 일으킨다.  1934년, 빅토리아 폭포 보호법령(The Victoria Falls Reserve Preservation Ordinance)에 의거해 폭포 지역의 보호를 책임지는 빅토리아 폭포 관리위원회(Victoria Falls Executive Committee)가 설립되었다. 
폭포의관리"
1948년에 국가 기념물 위원회(National Monuments Commission) 가 빅토리아 폭포 관리단(Victoria Falls Conservancy Committee)을 설립하고 보호구역을 송그웨(Songwe) 계곡 하류로까지 확대했는데, 이는 1949년에 법으로 확인되었다. 1953년에 식민지 총독이 만든 빅토리아 폭포 위탁단체(Victoria Falls Trust)는 1972년 2월 25일 법령 No.44에 의거해 국립공원으로 선포될 때까지 이 지역의 관리를 맡았다. 1972년에 제정된 법령에 의해 이 지역은 국립공원 및 야생동물 보호서비스(National Parks and Wildlife Service)의 소관이 되었다. 공원 안에는 폭포를 비롯해 6개의 국가 기념물들이 있으며, 1989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순대"1

우리고유 의 음식인 순대.기원및 기록.. 
순대의 기원은 동물의 피와 내장을 이용한 음식에서 찾을 수 있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제민요술 ≫에 양의 피와 양고기 등을 다른 재료와 함께 양의 창자에 채워넣어 삶아 먹는 법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에서도 순대가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우리 나라 고서에서 기록을 보면"규합총서" 에 쇠창자찜, "시의전서 書" 에 어교순대와 도야지순대 만드는 법이 있다. 
순대는 돼지창자를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데, 어류를 이용한 순대도 있다. 함경도지방에서는 명태가 많이 잡히므로 명태로 순대를 만들어 먹는다.강원도지방에서는 오징어 몸통 속에 소를 넣어 실로 꿰맨 뒤 삶거나 쪄서 먹는 오징어순대와, 마른 오징어를 하루쯤 물에 불려서 껍질을 벗기고 양념한 밀가루 반죽을 위에 발라서 돌돌 말아 실로 묶어 찜통에 쪄서 먹는 마른오징어순대가 있다. 
마른오징어순대는 경기도지방에서도 만든다. 동태순대는 명태를 하룻밤 절여 입에 손을 넣어 내장을 꺼낸 뒤, 명태 뱃속에 소를 꼭꼭 채워넣고 입을 꿰매서 얼려두었다가 먹을 만큼씩 쪄서 초장에 찍어 먹는다. 마른오징어순대는 반찬이나 술안주로 쓰이며, 돼지순대는 얇게 썰어 국에 띄워 먹기도 한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즐겨 먹는음식의 한종류이기도하다. 
돼지의 창자에다 찹쌀과 야채등에 선지를 넣고 양념을 해서 넣고 양끝을 묶어서 만드는데주재료:
돼지창자 50g, 숙주나물 100g, 배추 50g, 두부 130g(1/4모), 선지 80g, 소금 약간, 물, 적당량  <양념> 된장 6g(1작은술), 간장 3g(1/2작은술), 새우젓 15g(1큰술), 다진 파 14g(1 1/2큰술), 다진 마늘 9g(3/4큰술), 다진 생강 5g(1/2큰술) ,후춧가 1g(1/3작은술) ,참기름 12g(1큰술.조(요) 의순서 배추를 삶아 배추가 물러지면 다지고 물기를 제거한다.  숙주나물은 데쳐 식힌 후 다져 물기를 제거 하고 두부를 으깨어 물기를 제거한다. 골고루 섞어 분량의 양념을 넣은 후 선지와 함께 고루 섞어 속을 준비해 놓고  돼지의 작은창자를 굵은 소금으로 안팎을 골고루 잘 비벼 깨끗하게 씻어 건져 씻어둔 돼지창자에 소를 넣은 다음 공기를 빼고 끝부분을 봉하여 찜통에 찐다. 
순대는 
짐승(의류도포함)의창자 를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데, 어류를 이용한 순대도 있다. 함경도지방에서는 명태가 많이 잡히므로 명태로 순대를 만들어 먹는다. 강원도지방에서는 오징어 몸통 속에 소를 넣어 실로 꿰맨 뒤 삶거나 쪄서 먹는 오징어순대와, 마른 오징어를 하루쯤 물에 불려서 껍질을 벗기고 양념한 밀가루 반죽을 위에발라서 돌돌 말아 실로 묶어 찜통에 쪄서 먹는 마른오징어순대가 있다. 마른오징어순대는 경기도지방에서도 만든다. 마른오징어순대는 반찬이나 술안주로 쓰이며, 돼지순대는 얇게 썰어 국에 띄워 먹기도 한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즐겨 먹는다,  
쇠창자찜은 
쇠창자에 소를 넣어 창자 양끝을 실로 매어 쪄서 익히는 것이고, 어교순대는 민어 부레에 소를 넣어 삶아 익히는 것이며, 도야지순대는 돼지창자에 돼지피·숙주·미나리·무·두부·배추김치 등을 섞어 만든 소를 넣어 삶는 것이다. 
순대는 
본래 몽고의 음식에서 유래된 우리나라 토종 음식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시기는 과거 고려말 몽고항쟁당시로 추측되며 몽고군이 전투식량으로 돼지 등의 동물내장, 야채등을 넣고 쪄 말린 것에서 유래된 음식이란 학설이 가장 지배적 이며음식은 몽고의 전투식량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재 탄생된 식품이며 우리 토종음식이라 하는 것이 맞는 말이고요.  
식육용으로 도축되는 돼지의 양으로는 순대를 만들만한 양이 되질않거든요. 창자만으로도 만드는 음식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창자와 비슷한 모양을 내는것으로 대체를 하게 되었는데요, 비닐같은 것은 사람이 먹을수 없기때문에 물론 아니구요 이것은 약의 캡슐(쓸기담이나 우루사같은 말랑한 캡슐)과 같은 재질입니다. 이것은 젤라틴 성분으로 만드는데요, 여름에 가끔먹는 콩국에 우묵이라는것을 넣어서 먹는걸 보셨을겁니다. 이 우묵이라는것은 바다에서 나는 우뭇가사리라는 것으로 만드는데 이건 아마 중학교 과학시간에도 나왔던걸로 기억합니다. 우뭇가사리에서 추출한 젤라틴 성분은 약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주먹는 젤리가 젤라틴에다 향과 맛을 첨가해서 만듭니다.) 경화시켜주는 성분을 약간 첨가해서 만드는 겁니다.  물론 약을 만드는데 들어가는것이 몸에 나쁜걸로 만들진 않겠습니다. 모든 순대를 그렇게 만드는것은 아니며 순대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중에는 진짜창자로 만드는 곳도 많이 있읍니다. 

Kimchi Dongchimi.

Kimchi 동치미. 
우리 나라에 고추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김치를 소금에 담갔다. 그러므로 동치미는 가장 먼저 시작된 김치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무를 소금에 절여 구동지()에 대비한다.”는 시문도 동치미나 짠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치미는 겨울저장식품으로 고조리서(調)에 ‘동침()’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치미 만드는 법은 
무우나배추 를 소금물을 부어서 담근다. 이때 생강·파·청각·풋고추를 묶어서 넣는다. 통배추 또는 맑게 거른 육수나 찹쌀 끓인 것을 넣기도 한다. 북쪽지방에서는 동치미국물에 냉면을 말아 겨울의 별미로 즐겼다. 떡을 먹을 때 함께 먹으면 개운한 맛을 주고 소화를 돕는다. 작고 단단하며 매끄럽고 무청이 싱싱하게 달리고 알이 고른 동치미용 무로 골라 잔털을 떼고 솔로 말끔히 씻는다. 껍질은 벗기지 않는다. 
무는 잔털만 떼고 깨끗이 씻어 소금에 굴려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하룻밤 두어 절인다. 
대파는 뿌리를 잘라 내고 깨끗이 씻는다. 
쪽파와 갓은 다듬어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2~3개씩 모아 돌돌 말아 묶는다. 
청각을 깨끗이 씻어 썰고, 마늘, 생강은 얄팍하게 저민다.   
배와 유자, 석류는 씻어 물기를 없앤 후 김칫국물에 향이 우러나도록 껍질 전체를 나무 꼬치로 고루 찔러 준다. 김칫국에 쓸 소금물은 하루 전에 준비한다. 소쿠리에 굵은 소금을 담고 항아리 위에 걸쳐 두고 그 위로 물을 부어 소금이 녹아 내리게 하여 가라앉힌다.  저민 마늘과 생강은 베주머니에 넣어 항아리 바닥에 놓고 무와 부재료(붉은 고추, 풋고추 삭힌 것, 돌돌 만 쪽파와 갓)를 번갈아 가며 켜켜이 담는다. 중간 중간에 배와 유자를 함께 넣어 가며 담고 석류는 반으로 쪼개어 한옆에 놓고 맨 위에 갓을 덮어씌운 후 무거운 돌로 누르고 준비 7의 소금물을 가득 붓는다.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을지문덕.2

을지문덕".
신기한 그대의 작전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한 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한가. 
"우중문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전투에서 개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말머리를 돌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경고성 멘트였어요. 이 시를 본 우중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사들에게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어요.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고구려 군은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여 수나라 군대가 되돌아가는 길목에 있던 살수의 상류를 흙과 돌로 막아 놓고 수나라 군사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나라의 30만 군대는 허겁지겁 후퇴하며 살수에 도착했어요. 강물을 보니 바지를 조금만 걷어 올리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깊이였어요. 언제 어디서 고구려 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의 군사들은 앞뒤 재지 않고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경쟁하듯이 물속으로 뛰어 들었어요. 강의 상류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수의 군사들 대다수가 강물로 뛰어든 것을 보고 막아 놓았던 둑을 터 버렸어요. 수나라 군사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강물을 피하지 못하고 거의 전부가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지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 자가 2,700여 명에 불과했으니, 무려 29만 3천여 명이 물에 수장들 되었고 이 전투가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여기서 문덕의 강력한 잽이 중문에게 날아간다. 
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가 그것이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알아서 하고,(文),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다 알아서 하는 게지, (理), 싸움에서 이긴 공 높을 수밖에 없겠네, (高), 그만하면 족하니 이제 그치는 게 어떠한지, (止),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멋진 시이다. 이 시를 보고 중문이 답서를 보냈다고 하나 어떤 내용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문덕의 마지막 작전은 이 시에 이어 나왔다. 다시 항복을 가장하고,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인사드리겠다.”라고 하였다. 이미 수나라의 군사는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는 싸울 수 없었다. 더욱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바로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드디어 문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여름에 출정한 전쟁이 어느덧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나라군의 힘이란 힘은 다 빠져 있었다. 
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드디어 살수에 이르고 거기는 수나라 군사의 수장처()가 되었다. 살수는 지금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며, 낭림산에서 발원해 서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구조적으로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강물로 뛰어드는 군사가 한눈에 보여 아주 쉬운 공격목표가 되었다. 
중문과 문술이 끌고 온 군대는 30만 5천 명, 그러나 그들이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오면 들판이나 집안에 있는 곡식들을 적들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전부 불태워 버리고 성에 들어가 끈질기게 버티며 적을 괴롭히는 작전을 주로 썼어요. 이러한 전술을 들판을 텅 비게 만들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해서 ‘맑을 청()’에 ‘들판 야()’를 써서 ‘청야 작전()’이라고 해요. 따라서 어느 나라건, 고구려와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야 했어요. 그런데 수나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첫 전투지인 요동성부터 난관에 부딪혔어요. 4개월 동안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요동성을 점령하려 했지만, 성은 생각처럼 쉽게 함락되지 않았어요. 
추운 겨울은 닥쳐오지, 준비해 온 양식은 달랑달랑하지, 수양제는 다급해졌어요. 그래서 그는 30만의 별동 부대를 재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 했어요. 별동 부대는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란 의미로, 요즘의 해병대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고구려는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어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고구려에는 명장 을지문덕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을지문덕의 생애와 그 공적을 찬양한 이가 신채호였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모퉁이에서, 어떻게 하든 나라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애쓴 신채호는 우리 역사상의 뛰어난 인물을 널리 알리려 애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을지문덕이었다. 
1908년에 간행된 [을지문덕]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자료에서 을지문덕 시대의 정황과 그의 활동을 세밀히 쓴 점 말고도 진정 신채호가 규정한 을지문덕 생애에 대한 한마디 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을지문덕주의’이다. 지금부터 을지문덕이 이룩한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 알아보겠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8천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병사들만 1백만이 넘는데다가 보급을 담당하는 보조인원까지 합치면 족히 300만이 넘는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이번 전쟁을 을지문덕과 자신의 동생인 건무에게 맡겼다. 을지문덕은 적의 주 공격을 육지에서 막는 임무를, 건무는 적의 해군을 막고 수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을지문덕은 비록 고구려군이 숫자는 적지만 반드시 적군을 물리치겠노라고 다짐했다. 598년 수나라 군대를 요하도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서 물리쳤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을지문덕이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두 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뜻깊다. 
첫 번째 인물이 김유신인 것과 견주어, 신라의 김유신이라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라 판단한 김부식의 생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유신만큼 많은 양을 할애하지 않았고, 내용 또한 살수대첩 하나에 국한한 것이므로, 열전으로서의 모든 요소를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는 을지문덕의 생몰연대조차 적혀 있지 않고, ‘그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말로 그 집안에 대한 정보 또한 생략하고 말았다. 그러나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지략이 있고 글 짓는 법까지 알았다.’라고 해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양제()의 요동 전쟁은 출동 병력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컸다.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 좌전에서,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 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을지문덕 주의는 적이 커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고, 적이 강해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적이 사납든지 용맹하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식은땀으로 등이 젖고, 털끝만큼이라도 양보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이로써 동료를 고무하며, 이로써 전국 국민을 흥기 시켜, 그 삶을 조선으로서 하며 그 한 번 숨 쉬고 한 번 먹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한 결과, 마침내 여진 부락을 다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국의 천자를 우리 손으로 거의 사로잡을 뻔했던 것이다.” 대참패를 당한 수나라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613년 봄 두 번째 동원령을 내려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때는 고구려의 안쪽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 내부에서 보급의 핵심을 맡고 있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심각한 균열의 조짐마저 보였다. 
614년의 3차 침공 준비는 더 싱겁게 끝나고 말았는데, 명예회복에 안달이 난 양제가 615년 동돌궐 군대에 사로잡힐 뻔한 일까지 벌어지자 마침내 전쟁을 포기하였다. 이때 양제는 많은 포상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구원병을 모집하는데, 여기에 나중당나라 태종이 되는 16세의 이세민도 달려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은 613년부터 을지문덕의 이름이 더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전공이 없어서 굳이 쓸 까닭이 없었던 것인지, 어떤 몹쓸 음모에 말려 쓸쓸히 죽었던 것인지, 안타깝지만 아무리 상상을 동원해도 그 최후를 알 수 없다. 이 전쟁을 고비로 고구려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양왕의 시대가 굵직한 전쟁에 휘말려, 비록 을지문덕 같은 영웅의 활약으로 자기의 시대는 보전했으나, 그들에게 입혀진 상처 또한 만만하지 않아 고스란히 그 짐은 후대에 전해졌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의 전공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을까. 전쟁을 그만두기로 한 3년 뒤, 곧 618년 3월에 나라 안에 정변이 일어 양제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이세민의 당나라가 섰다. 그래서 신채호는 말하였다. 
“을지문덕이 갈아놓은 밭에서 이세민이 수확을 거두어들였으며, 을지문덕이 애를 쓴 덕에 이세민이 그 복을 누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 최대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고구려의 영양왕도 수양제가 죽은 6개월 뒤인 9월에 세상을 떴다. 수나라의 군대는 지금의 북경 지방에서 군대를 출발시켰다. 여기서 고구려의 방어선이 있는 요동까지는 무려 2천 리. 을지문덕은 적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아무리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려 싸울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옛부터 만리장성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동은 아주 먼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이 먼 곳에 와서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요동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그때까지 전쟁을 치렀다가는 수나라 군사들이 다 얼어죽기 때문이었다. 612년 1월 북경 지역을 출발한 수나라 군대는 3월 중순 회원진에 이르러서 요하를 건너기 위한 준비를 했다. 고구려군은 요하 동쪽에 방어 진지를 만들고 요하를 건너오려는 적을 맞이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번째 싸움인 요하전투가 벌어졌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을 피하여 요하 하류지역에 서둘러 뜬다리를 만들어 강 동쪽에 대놓고 강을 건너려 했다. 이들을 향해 고구려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다. 고구려 궁수부대는 수나라 1군 총사령관 맥철장을 비롯해서 전사웅, 맹차 등 여러 장군들을 요하싸움에서 잇달아 활로 쏘아 죽였다. 첫 싸움에서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크게 패배한 수나라 군대는 일단 후퇴하고 뒤에 오는 부대를 기다렸다. 이 사이 을지문덕은 방어태세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4월 중순 수양제가 직접 요하 서쪽에 와서 지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적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강을 건너는 작전을 시도하자, 고구려군은 일차 목표인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었던 것에 만족하고 요동성으로 퇴각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적과 싸워 빨리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적군은 요하를 건너자 곧 요동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반드시 고구려를 물리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만든 새로운 무기들을 총동원했다. 높은 요동성을 넘기 위한 운제와 성문을 부수기 위한 충차, 불을 지르기 위한 화차,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발석차 등 최신 무기는 요동성의 고구려군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마름쇠를 성벽 주위에 집중적으로 뿌렸다. 마름쇠는 밤송이처럼 뾰족한 쇠촉이 사방으로 나 있어 보병들이나 기병들이 마름쇠에 잘못 찔리면 큰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적들의 성벽진입을 막는 무기다. 또 성에 접근하는 적군을 향해서 돌덩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포차를 성벽 곳곳에 배치했다. 또한 활을 잘 쏘는 고구려인답게 화살부대가 적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수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무향요동낭사가」라는 노래이다. 농민반란군을 지휘하던 자칭 지세랑이란 자가 지은 노래는 이러하다. 장백산 아래에서 나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 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 노래는 한가롭게 시골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전쟁터에 끌려가 죽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전쟁을 반대하는 당시 수나라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수나라 사람들은 10여 년 전 30만 대군이 고구려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말 타고 활 쏘며 사냥하는데 익숙하고 용맹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공격해 와도 강인한 고구려군의 반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수나라 군대의 요동성 공격을 고구려군은 6월 초순이 될 때까지 잘 막아내고 있었다.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은 고구려의 성을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수나라 군대도 장점이 많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무기와 군용 물자들을 가져왔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성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인 운제, 성문을 부수는 데 이용하는 충차, 큰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발석차 등 다양한 무기도 개발했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가장 큰 힘이었다. 수나라의 대군에 맞선 고구려에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곽, 단결된 고구려인의 마음가짐과 드높은 사기, 그리고 을지문덕이 있었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너무나 잘 싸우고 있었다. 다만 이때 고구려의 요동성주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가 없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이 요동성을 지나 다른 성을 공격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성을 하나도 빼앗지 못하자 잔뜩 화가 났다. “너희 장군놈들이 내가 직접 요동에 오는 것을 반대하더니 너희들의 이런 무능함을 보일까 봐 두려워서 그랬구나. 내가  너희들을  믿고 있다가는 요동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겠다. 당장 고구려 수도로 쳐 들어가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 오지 못할까.” 수양제는 노발대발해서 부하장수들을 다그쳤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보내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직접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수나라 해군은 산동 반도에서 출발해서 평양과 가까운 대동강 입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해군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수나라 별동대는 여러 고구려 성들을 제쳐놓고 오로지 수도인 장안성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오직 장안성만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를 피해 가다 보니 군사들의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자주 끊겼다. 30만 5천의 군대는 1인당 100일 분량의 식량을 각자 가지고 진격했다. 너무 많은 식량을 들 수 없던 병사들은 식량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수나라 군대를 위협하게 되었다. 적들이 압록강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여 언제 어떻게 공격을 할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적진에 사신의 임무를 가지고 방문했다. 을지문덕의 갑작스런 방문에 수나라 장군들은 당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수양제는 일찍이 부하들에게 명령했었다. “고구려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은 왕과 함께 뛰어난 장군인 을지문덕이다. 이 둘은 반드시 사로잡거나 죽여라.”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유사룡이란 자가 사신으로 온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니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을지문덕은 적군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적진을 빠져나왔다. 적장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고서 다시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을지문덕이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뒤도 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우중문은 유사룡에게 소리쳤다. “을지문덕을 네놈 때문에 놓쳤다.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우중문과 함께 별동대를 지휘하던 우문술이 곁에 있다가 우중문에게 말했다. “장군, 우리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소. 이쯤에서 돌아가야겠소.” 장군께서는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적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되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만날 수 있겠소이까. 지금 우리 정예부대로 고구려군을 쫓아가면 분명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우리가 이대로 물러나고 을지문덕을 놓친 일까지 임금이 아신다면 우리는 죄를 받을 것이오.” 우중문이 이렇게 화를 내며 단호히 말하자 우문술도 마지못하여 우중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추격하게 되었다. 『동사강목』에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싸움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이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겨 나라를 잃었던 20세기 초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의병들이 부른 노래에는 을지문덕을 본받자는 내용이 많다. 용진가": "한산도에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수나라 병사) 백만 몰살하오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이처럼 을지문덕은 이순신 등과 함께 외적을 물리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고구려 수도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을지문덕은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에서의 방어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을지문덕은 명림답부 이래 고구려에서 사용해 오던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단 한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도록 전쟁터 주변에 사람들과 먹을 것을 전부 치워 버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오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해졌다. 하나둘 굶주림에 지치기 시작했다. 청야전술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일치단결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과 식량을 전부 성 안으로 옮겨왔고, 적군과 몰래 정보를 주고받는 배신자도 없었다. “자, 빨리 식량과 물건을 성 안으로 옮기자. 적군이 와서 이것을 빼앗으면 적군이 강해지는 것이니 빨리 옮기는 것이 적군을 물리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단결하면 저들을 금방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 을지문덕의 작전에 적극 따라주었다. 만약 백성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다면 을지문덕이라도 적을 쉽게 물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싸움이 있은 후 780년이 지난 어느 날 조선의 창업공신인 조준은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청천강이 바라다보이는 백상루라는 누각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살수의 물이 하늘에 출렁이는데 수나라 백만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이 시를 들은 명나라 사신 축맹은 얼굴을 붉히고 붓을 던져 대답할 시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조준은 시로써 우리 조상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명나라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또한 명나라가 당시 큰 나라라고 해서 조선을 얕잡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예전에 없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것이다. 그럼에도 능히 이를 막아내어 고구려를 보존하고 적군을 물리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을지문덕은 단지 싸움만 잘하는 군인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이 쓴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는 그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가장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여러 글에서 칭송을 받고 있다. 
중국인들도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것은 뛰어난 을지문덕 때문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이렇게 말했다. 일반 백성들만이 을지문덕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세조의 신하였던 양성지는 1458년 왕에게 국가에서 제사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인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들을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과 함께 살수대첩의 주인공인 을지문덕과 영양왕이 함께 추천되었다. 
숙종 임금은 1680년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을 모신 사당에 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 주기도 했다. 숙종 임금은 특별히 을지문덕의 제사에 많은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또 전설적인 이야기가  한가지 더있다. 을지문덕의 혼자힘으로 이와 같은 승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 군인들과 백성들의 일치단결된 힘이 있었다. 평안도 안주땅의 ‘칠불사 전설’도 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살수대첩은 세계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리여서인지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의 활약도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다. 7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모두 스님으로 가장했다. 아마도 수나라에는 스님이 많고, 스님은 전쟁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수나라 사람들을 속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수의 깊은 물 속을 얕은 개울물처럼 속이려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였다. 이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본 수나라 군사들은 서로들 자기가 먼저 빨리 강을 건너려고 했다.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의 화살과 창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살수를 반쯤 건널 무렵 갑자기 위에서 엄청난 강물이 쏟아져 내려와 많은 병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고, 수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에 고구려 군대가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역사가 단재 신채호는 영양왕이 을지문덕과 함께 병사들을 몰아 수나라를 공격하여 중원땅으로 쳐들어갔으면 천하를 제패할 기회를 얻었을 것인데 못내 아쉽다고 했다. 을지문덕과 고구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을지문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시기도 알 수 없어서 몇 살의 나이에 수나라와 싸웠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612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수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는 것과 전쟁 후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을지문덕의 공로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강대한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으로 30여 년 후에 쳐들어온 당나라 태종의 군대도 여지없이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수양제의 말로’ 이야기에는 이러한 아쉬움이 담겨져 있다. 내용은 이렇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한참 전쟁을 마무리하던 614년 10월 영양왕이 사신을 통해 국서를 수나라 양제에게 보냈다. 이때 사신을 따라갔던 고구려의 용감한 무사가 있어 수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그는 수양제가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를 읽고 있는 기회를 틈타 품속에 넣어 가지고 갔던 작은 쇠뇌로 그의 가슴을 겨누어 쏘아 맞추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수양제는 군사를 돌이켜 퇴각하면서 한탄했다. “내가 큰 나라의 황제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였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이 설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수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고구려 백성들의 수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적군을 물리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후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혹시 전해지는 기록이 없을 뿐 을지문덕이 만리장성을 넘어 수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자료가 없는 한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칠불사 전설은 고구려가 승리하도록 부처님이 스님을 보내 도와주웠고, 고구려에서 부처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일곱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일 을지문덕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수양제가 고구려 백성들을 어떻게 괴롭혔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대운하, 만리장성, 궁궐공사 등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노예처럼 일만 시켰을 것이다. 또한 백제나 신라도 수나라의 위협에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 언제 태어났고, 어떤 성장 과정을 보냈는지가 무척 궁금해요. 하지만 현재로써는 을지문덕이 살수 대첩을 성공리에 이끈 고구려 장군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와 관련된 역사 기록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없거든요. 그가 수나라 장수 우중문을 비꼬면서 쓴 시로 보아 문장과 무술을 겸비한 능력있는 장군이었음을 짐작할 뿐이에요. 한편 일부 학자는 을지문덕을 선비족 출신의 고구려 장군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왜 그러냐고요?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에 을지문덕이 위지문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지’를 선비족의 성인 ‘위지()’로 판단하여 을지문덕을 선비족 출신의 고구려 망명객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우리 민족 외에 말갈, 거란족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또 고구려는 내륙 아시아의 유목 민족들과 꾸준히 교류하였으며, 심지어는 중앙 아시아 지방의 사람들과도 교류를 했어요. 따라서 을지문덕이 순수 우리 민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출신 성분도 모르는 을지문덕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떠받들며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단재 신채호 선생이야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일제 침탈기여서 우리의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조금 엎시켰다고볼수도 있읍니다. 
일부학자들이 그를 선비족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에 그가 정말 선비족이라면, 그때도 왕 침 튀겨 가며 민족의 영웅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너무 민족, 민족 하면 지구촌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왕따만 당한다고. 민족의식도 적당한 선에서 강조해야 진정한 민족의식이지, 너무 지나치면 국수주의가 되어 일본 극우파와 똑같은 놈이 되고 만다고. 을지문덕은 우리 조상들의 행복한 삶을 지켜준 위대한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