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일 일요일

고추장 의종류와 방법.

마늘고추장"
하지(夏至) 전에 연한 마늘을 캐서 담근다 하여 여름고추장이라 하며, 가을의 장선고추장과는 약간 다르다.

담그는 방법은
보릿가루를 떡 찌듯이 쪄서 더울 때 잘 풀어 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다음, 곱게 찧은 마늘을 섞고 하룻밤 쟁였다가 다음날 계핏가루와 꿀을 섞어 항아리에 담고 봉해 둔다.
담근지 4∼5개월 후에는 먹을 수 있는데, 1년쯤 지나면 마늘이 삭고 잘 익어서 빛깔도 곱고 맛도 좋아진다.

찹쌀고추장"
찹쌀고추장은 멥쌀고추장이나 보리 또는 밀가루고추장에 비하여 보드랍고 찰기가 있으며 윤기가 흐른다.

담그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끓여서 식힌 물에 거즈나 베주머니에 넣은 엿기름을 담가 우러나도록 하고, 찹쌀가루를 끓는 물에 반죽하여 큼직하게 경단처럼 빚어 끓는 물에 삶아 건진다.
삶아 건진 경단이 대충 식었을 때 메주가루와 고춧가루 엿기름물을 농도를 맞추어 붓고 으깨는데, 이 때 찰떡이 엿기름과 메주가루의 효소로 인하여 삭아서 잘 풀어진다.
경단을 삶은 물은 설탕을 넣고 끓여서 고추장 반죽에 약간만 부어 뭉근하게 만든 다음 하루쯤 그대로 둔다.
다음날 소금으로 짠 듯하게 간을 맞추어 잘 섞어서 항아리에 담고 꽃소금을 얹은 후 망사로 싸서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아 두고 2∼3일에 1번씩 햇볕을 쬐도록 한다.

둘째 방식은 찬물에 엿기름을 담가 우린 다음 고운 체로 받쳐 엿기름물을 만든다.
여기에 찹쌀가루를 풀어 주걱으로 저으면 가루가 삭아서 멀건 물이 되었을 때 불에 올려 놓고 팔팔 끓인다.
끓인물이 한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춧가루·메주가루·소금을 넣고 잘 저어 항아리에 담아 꽃소금을 얹고 망사로 싸서 햇볕에 놓고 익힌다.
예전에는 찰떡을 방망이로 저어 으깨느라고 노력을 많이 기울였으나, 지금은 엿기름물을 진하게 풀어서 붓고 삭히는 방법을 터득하여 손쉽게 담그고 있다.
찹쌀가루를 끓는 물에 익반죽하는 것은 찬물로는 반죽이 잘 엉겨붙지 않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고춧가루는 되도록 곱게 빻은 것이라야 고추장이 곱게 된다.

호박고추장'
늙은 호박에 엿기름물을 우려 넣고 달인 뒤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담그는 전통고추장이다.
호박이 여무는 11월 무렵에 많이 담그는데, 매콤하면서도 구수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별미고추장이다.
엿기름은 물에 타 여러 번 주물러 건더기는 꼭 짜서 버리고 맑은 국물만 걸러 엿기름물을 만든다.
호박은 씨를 빼고 껍질을 벗겨 얄팍하게 썰어 엿기름물을 붓고 뭉근한 불에서 묽은 엿처럼 될 때까지 조린다.
찹쌀가루를 함께 넣어 조리기도 한다.
호박이 조려지면 한김 나간 뒤 메줏가루를 섞어 완전히 식혀 곱게 빻은 고춧가루를 넣고 소금을 조금씩 넣으면서 간을 맞춘다.
고추장이 다 되면 항아리에 담고 햇볕을 쪼이면서 6개월 가량 숙성시킨다.
달달한 맛을 더하기 위해 조청이나 황설탕을 넣기도 한다.

약고추장"
쇠고기를 다져서 볶은 후에 꿀을 넣어 만든 볶은 고추장이다.
밥이나 비빔밥을 먹을 때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 여름철 별미이다.
쌈밥은 일반 백성부터 임금님까지 별식으로 즐겨 먹었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상추쌈차림’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채소와 약고추장, 쌈장, 장조림, 병어감정, 보리새우볶음, 장똑똑이 등을 찬으로 곁들였다.
조리시에는 쇠고기를 다져서 양념하여 국물 없이 볶은 다음 도마에 놓고 다시 한 번 곱게 다진다.
뚝배기에 고추장, 볶은 고기, 물 등을 넣고 한데 섞으면서 볶는다.
걸쭉해지면 꿀을 넣은 다음 잣을 넣고 조금 더 볶는다.

엿고추장"
멥쌀에 엿기름물을 섞어 엿을 고은 뒤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어 담그는 고추장이다.

약고추장,
엿꼬장이라고도 하며 육회, 비빔밥 등의 소스, 국수와 나물 등을 무칠 때 많이 쓴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붓고 여러 번 주물러 건더기는 꼭 짜서 버리고 맑은 물만 체에 걸러 놓는다.
멥쌀은 깨끗이 씻어 푹 불렸다가 시루에 넣고 고두밥을 쪄서 한 김 나간 뒤에 엿기름물을 부어 삭힌다.
고두밥이 걸쭉하게 삭으면 솥에 담아 엿이 될 때까지 뭉근한 불로 달인다.
엿이 고아지면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나무주걱으로 잘 섞어 소금을 조금씩 넣으면서 간을 맞춘다.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양지바른 곳에서 숙성시킨다.
달콤한 맛과 윤기를 더하기 위해 고추장이 익은 뒤에 물엿, 황설탕, 참기름 등을 섞기도 한다.
전라도 전주와 경상도 진주 지방에서 많이 담근다. 
보리고추장"
보리쌀을 갈아 띄운 것에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소금으로 간하여 담그는 전통고추장이다.
빛깔이 곱고 맛이 구수하여 여름철에 쌈장으로 먹거나 오이, 고추 장아찌 등을 박아 먹는다. 충청도에서 주로 담근다.
음력 2월 무렵 보리쌀을 깨끗이 씻어 말렸다가 거칠게 빻는다.
보리가루에 엿기름물을 섞어 잠시 불렸다가 푹 쪄낸다.
널찍한 그릇에 널어 담고 천을 덮어 하루 정도 훈훈한 곳에 둔다.
이튿날부터는 좀더 두꺼운 이불 등을 덮어 끈적한 진이 나도록 5일 가량 발효시킨다.
적당히 발효되면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잘 섞어 소금, 간장으로 간을 맞추며 설탕을 넣기도 한다.
항아리에 담아 고운 고춧가루나 웃소금을 뿌린다. 뚜껑에 망사천을 씌워 양지바른 곳에 두고 숙성시킨다.
고추장이 충분히 삭은 뒤에 먹어야 제맛이 난다.
잡냄새를 없애고 새콤한 맛을 내기 위해 소주를 넣어 담그기도 한다.


밀가루고추장"
가장 일반적인 고추장으로서 밀가루풀을 엿기름물과 섞어 삭혀 담그는 것과 밀가루를 푼 엿기름물을 삭힌 뒤 달여 담그는 것이 있다.
앞의 것은 찌개를 끓이거나 장아찌를 박아 먹고 뒤의 것은 달큰한 맛이 강해 조림이나 무침에 넣어 먹으면 좋다. 밀가루에 물을 섞어 풀을 쑤어 60℃ 정도로 식힌다.
엿기름을 따듯한 물에 풀어 잠시 두었다가 주물러 건더기는 짜 버리고 엿기름물은 가라앉힌다.
밀가루풀과 엿기름물을 섞어 30분 정도 삭힌다.
단 맛이 돌면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어 고루 저은 뒤 소금을 조금씩 넣어가며 간을 맞춘다.
다른 방법은 엿기름물에 밀가루를 풀어 60℃ 정도의 온도에서 삭혀 약한 불에서 맑은 빛을 띨 때까지 조린 뒤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어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다된 고추장은 항아리에 담아 웃소금을 뿌린 뒤 망사천을 씌워 햇볕을 쬐어 숙성한다.
고추장에 엿기름을 넣으면 달큰한 맛이 나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 

고구마고추장"
삶은 고구마에 엿기름물을 섞어 삭힌 뒤 달여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섞어 담그는 고추장이다.
전통고추장의 하나로서 경상도 산간지방의 화전민들이 담가 먹었다.
엿기름가루를 물에 넣고 조물조물 주물러 건더기는 꼭 짜 버리고 맑은 국물을 걸러 엿기름물을 만든다.
고구마는 껍질을 벗겨 푹 삶는다.
고구마가 뜨거울 때 곱게 으깨 30℃ 정도로 식혀 준비해둔 엿기름물을 붓는다. 뚜껑을 덮어 따뜻한 곳에 놓고 12시간 가량 삭힌다.
삭힌 고구마를 솥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뭉근한 불로 끓여 묽은 엿이 되도록 조린다.
뜨거운 김이 나간 뒤 메줏가루와 곱게 빻은 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을 조금씩 넣어 간을 맞춘다. 망사천을 씌워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쪼이며 숙성시킨다.

무거리고추장"
메주가루를 만들고 남은 찌끼인 무거리와 보릿가루, 엿기름가루, 고춧가루를 섞어 담그는 전통고추장으로서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보리를 가루내어 묽게 죽을 쑤고 메주 무거리를 섞어 반죽을 한 뒤 엿기름가루를 넣어 하루 정도 삭힌다.
무거리 삭힌 것에 거칠게 빻은 고춧가루를 넣고 소금을 조금씩 넣어 저어가며 간을 맞춘다.
고추장을 항아리에 눌러 담고 4~5일 정도 익히면 먹을 수 있다.
고추장을 풀어 고기, 두부, 파, 마늘 등을 넣고 끓이는 국, 찌개나 나물 무침, 생선 조림용으로 많이 쓴다. 

떡메주고추장"
떡메주가루와 찹쌀떡, 고춧가루를 넣고 담그는 전통고추장이다.
전라도 순천 지방에서 많이 담그며 빛깔이 곱고 독특한 향과 감칠맛이 난다.
떡메주는 메주콩과 쌀가루를 쪄서 메주를 빚어 발효시킨 것으로 8~9월에 만들어 30~40일 동안 발효시킨다.
메주가 발효되면 곱게 빻아 말려서 잡냄새를 없앤다.
고추장은 10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담그는데, 추울 때 담가야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고추장을 담그기 전날 물을 끓여 떡메줏가루를 풀어 둔다.
찹쌀은 6시간 이상 불려서 쪄낸 뒤 절구에 넣고 찧어 인절미를 만든다.
인절미에 준비해둔 메줏가루 물을 조금씩 넣어 걸죽해질 때까지 삭힌다.
인절미가 삭으면 곱게 빻은 고춧가루를 넣고 나무주걱으로 저어가며 2~3일에 걸쳐 소금과 간장을 조금씩 넣어 간을 맞춘다.
완성된 고추장은 항아리에 담아 6개월 가량 양지바른 곳에서 숙성시킨다.

대추찹쌀고추장"
찹쌀에 엿기름물을 넣어 삭힌 것에 대추를 넣고 달인 뒤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섞어 담그는 과일고추장이다.
대추가 들어가 영양가가 높고 달큰한 맛과 향이 난다.
찹쌀은 곱게 빻아 체에 내려 놓는다.
엿기름은 물에 담가 불렸다가 여러 번 주물러 건더기는 꼭 짜서 버리고 맑은 국물만 체에 걸러 놓는다.
대추는 깨끗이 씻어 1~2 시간 동안 푹 삶아 씨와 껍질만 남도록 체에 으깨어 거른다.
엿기름물에 찹쌀가루를 넣어 잘 푼 뒤 불에 올려 따뜻하게(약 45℃) 데워지면 불을 끄고 약 30분 동안 삭힌다.
찹쌀풀이 삭으면 대추 걸러낸 것을 넣고 조린다.
여기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어 잘 섞은 뒤 소금을 조금씩 넣어가며 간을 맞춘다.
항아리에 담고 뚜껑에 망사천을 씌워 양지바른 곳에서 수 개월 동안 숙성시킨다.
찹쌀가루로 경단을 만들어 대추와 엿기름 달인 물에 치대어 풀어 넣기도 한다. 

정지뜰고추장"
강원도 원주의 정지뜰 지역에서 만들어 먹었던 고추장으로 강원도 원주의 토속음식이다.
정지뜰고추장은 조선시대 강원 감영에서 해마다 한번씩 궁중에 진상되어 수라상에 오른 것이다.
원주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농산물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재래식 방법으로 고추장을 제조하여 그윽한 향기와 특유의 감칠맛이 난다.
정지뜰은 넓은 뜰 한가운데 봉천냇물이 흐르고 서쪽에는 백운산이 남북으로, 동쪽에는 치악산이 남북으로 위치해 있다.
내리쬐는 태양광선과 좋은 토질, 우거진 송림에서 풍기는 냄새와 송홧가루의 영향으로 이곳에서 만드는 고추장은 독특한 맛이 난다.
예로부터 원주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토산물인 정지뜰고추장을 선사했다고 하며, '다른 지역에서 아무리 잘 담근 고추장라도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담근 고추장 맛을 따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요리법 정지뜰고추장의 재료는 메주가루, 찹쌀가루, 고춧가루, 엿기름가루, 소금, 물 등이다. 1) 찹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하고 떡을 빚은 후 가마솥에 물을 붓고 삶는다.
2) 삶은 찹쌀가루 반죽을 방망이로 치대면서 고춧가루, 메주가루, 엿기름가루, 소금을 넣고 골고루 섞는다.
3)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1년 이상 숙성시킨다. 팥고추장" 콩, 팥, 흰무리로 메주를 만들어 담그는 전통 고추장이다.
멥쌀은 가루로 빻아 흰무리를 쪄 놓는다.
팥과 콩은 불순물을 가려내고 깨끗이 씻어 푹 삶은 뒤 곱게 찧는다.
흰무리, 팥과 콩 찧은 것을 섞은 뒤 주먹 크기 만큼씩 떼어 동글납작하게 메주를 빚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햇볕에 말린다.
메주 표면이 마르면 서로 닿지 않게 하여 따뜻한 곳에 둔다.
일주일 정도 지나 메주를 꺼내 햇볕에 바짝 말린 뒤 곱게 빻아 메줏가루를 만든다.
찹쌀을 깨끗이 씻어 된 듯하게 죽을 쑤고 한 김 나가면 메줏가루를 섞어 하룻밤 둔다.
이튿날 고춧가루를 넣고 고루 섞으면서 소금을 조금씩 넣어 간을 맞춘다.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웃소금을 뿌린 뒤 뚜껑에 망사천을 씌워 양지바른 곳에서 2~3개월 이상 숙성시킨다.

수수고추장"
수숫가루로 죽을 쑤어 메줏가루, 엿기름가루, 고춧가루를 섞어 담그는 전통고추장이다.
수수는 곱게 빻아 가루를 내고 소금을 물에 풀어 맑은 웃물만 떠놓는다.
소금물에 수숫가루를 풀어 된 듯하게 죽을 쑨다.
수수죽이 따뜻할 때 메줏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하루 정도 삭힌다.
죽이 삭으면 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을 조금씩 넣어 간을 맞춘 뒤 항아리에 담고 웃소금을 뿌린다.
항아리 뚜껑에 망사천을 씌워 낮이면 햇볕을 쪼이고 저녁에는 두껑을 닫아 숙성시킨다.

고추장.kochujang, hot pepper soy paste

고추장kochujang, hot pepper soy paste 정의"

고추장은 제조방법에 따라 재래식과 개량식으로 구분된다.
재래식 고추장은 발효과정에서 누룩곰팡이(Aspergillus)·거미줄곰팡이(Rhizopus)·털곰팡이(Mucor) 등의 야생곰팡이와 고초균(Bacillus subtillis) 등의 야생세균을 이용하며, 개량식 고추장은 황국균(黃麴菌, Aspergillus oryzae)을 순수 배양한 코지(Koji)를 이용해서 만든다. 

메줏가루에 질게 지은 밥이나 떡가루, 또는 되게 쑨 죽을 버무리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어서 만든 장. 

내용"
우리나라 고유의 특수한 장(醬) 제품으로 간장이나 된장보다는 늦게 개발되었다.
간장이나 된장은 상고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측되나, 고추장은 고추의 도입 이후에 개발된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는 고추가 일본에서 도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6세기 말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추장 제조법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1760년경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이므로 고추의 재배파급은 급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메주를 가루로 만들어 체로 친 것 1말,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를 넣고 좋은 간장으로 개어서 담근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고추장보다 고춧가루를 훨씬 적게 쓰고 있다.
찹쌀이나 멥쌀 등 탄수화물 식품이 주가 되는 대신 메줏가루가 주가 되어서 마치 막장과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간장으로 고추장의 간을 맞춘 점도 지금과는 다른 점이다.
 고추장에 참깨를 볶아서 넣거나 별법으로 콩 1말로 두부를 만들어 물기를 짠 다음에 고춧가루·소금물 등을 섞어서 담그는 방법도 소개되어 있고, 말린 생선 조각이나 다시마·미역을 넣어서 맛을 더욱 구수하게 하는 법, 콩 1말을 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다시 끓여서 즙을 빼내고 더운 방에서 3일간 띄운 다음 볶은 콩가루 3말을 섞어 찧어서 고춧가루 3홉과 소금물로 버무려 햇볕에 익혀 만드는 급조 고추장법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고추장 제조법이 다양하게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합총서』에는 삶은 콩 1말과 쌀 2되로 흰무리를 쪄서 함께 찧어 메주를 만든 다음에 띄워서 가루를 내고, 여기에 소금 4되를 좋은 물에 타서 버무린다.
그 다음에 고춧가루 5∼7홉을 섞고 찹쌀 2되로 밥을 지어 한데 섞어 만든다고 되어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수록된 제조법보다 고춧가루의 비례가 많아지고 메주를 만들 때부터 탄수화물 식품인 쌀을 보강하고 있어 제조법이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찹쌀 5되를 가루로 내어 경단처럼 반죽하여 큼직하고 얄팍하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내고, 2되 정도의 메줏가루와 2홉의 엿기름을 체에 밭인 물을 붓고 농도를 맞추어 잘 으깬다. 이 둘을 함께 섞은 다음 고춧가루 3되를 넣어 색을 조절하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만든다. 고추장은 재료와 만드는 법이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다.

재료나 만드는 법에 따라서는 보리고추장· 수수고추장· 무거리고추장· 약고추장· 팥고추장·   고구마고추장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해남· 순창· 진주의 고추장이 유명하다.
특히 순창의 고추장이 유명하다. 

보리고추장은
충청도지방에서 많이 담근다.
보리쌀을 깨끗이 씻어 가루로 빻아 시루에 찐 다음에 끓여서 식힌 물을 이것에 섞고 다시 시루에 넣어 더운 방에 놓고 띄운다.
하얗게 곰팡이가 폈을 때에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항아리에 담는다. 분량은 보리 2말에 고추 10근 정도이다.
보리고추장은 엿기름을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수수고추장은
소금물과 수숫가루로 죽을 쑤고 여기에 메줏가루·엿기름가루·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담근다.

팥고추장은
멥쌀을 흰무리 찌고, 콩과 팥은 푹 삶아 절구에서 응어리가 없도록 찧어 반대기를 만들어 위와 같은 방법으로 고추장을 담근다.

무거리고추장은
메줏가루를 만들고 남은 무거리와 보릿가루·엿기름가루·고춧가루를 섞어 담그는 것으로, 주로 찌개고추장으로 쓰인다.
맛이 새큼하고 달다.

약고추장은
고기를 곱게 다져 갖은 양념을 하여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고추장·파·생강·설탕을 넣고 볶아 만든다.
식은 뒤에 잣을 섞으면 더욱 좋다.

고구마고추장은
삶은 고구마에 엿기름을 넣어 삭힌 것을 삼베자루에 넣어 짜서, 이 물을 엿 달이듯이 졸여서 고춧가루·메줏가루·소금을 넣고 만든다.
주로 경상도지방의 화전민이 담근다.
고추장은 찹쌀·누룩·고춧가루로 만든다.
누룩은 멥쌀 1말에 콩 8되의 비율로 만들고, 쌀은 가루로 만들며 콩은 2일간 찬물에 담갔다가 시루에 콩과 쌀가루를 켜켜로 놓아 쪄낸다.
이것을 절구에 찧어 주먹만하게 빚고 가운데 구멍을 내어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 1개월간 매달아 둔다.
10여 일이 지나면 노랗게 곰팡이가 피었다가 20일쯤 지나면 자연히 본색으로 된다.
이것을 잘게 쪼개어 밤이슬을 맞히면서 말려 가루로 만들고, 다시 5일 동안 건조시킨다. 

찹쌀에 고춧가루, 엿기름, 메줏가루, 소금 등을 섞어 만드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발효식품으로 영양이 풍부하며,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캡사이신(capsaicin)이 식욕을 돋우고 소화를 촉진한다.

고추장은
쌀의 전분질이 분해되어 생긴 단맛, 콩의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생긴 감칠맛, 고추의 매운맛, 소금의 짠맛 등이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생성된 유기산의 신맛과 미량의 알코올이 생성하는 에스테르(ester)의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복합 조미료이다.

고추장은
대개 날씨가 더워지기 전인 3~4월경에 담그게 되는데,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찹쌀고추장· 멥쌀고추장· 보리고추장· 밀가루고추장· 고구마고추장· 수수고추장· 팥고추장 등으로 나누어진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음식의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고추장을 이용하였는데, 찹쌀고추장은 초고추장이나 음식의 색을 내는 용도로 이용하였고, 밀가루고추장은 찌개나 국을 끓일 때에, 보리고추장은 여름에 쌈장용으로 만들어 먹었다.

현대에는 재래식 고추장보다는 밀가루에 황국균을 배양한 코지(Koji)에 고춧가루·소금·물엿 등을 섞어 만드는 개량식 고추장을 주로 이용한다.
고추장을 만들기 하루 전날에 냉수에 풀었다가 다음날 찹쌀떡과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다. 분량은 찹쌀 1말에 누룩 2되반, 고춧가루 4되, 간장 5홉, 소금 2홉의 비율이다. 보통 가을에 메주를 만들어 저장하였다가 봄에 담근다.

고추장은
찌개·매운탕·생채·조림의 양념이나 회·강회의 양념으로 쓰인다.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주므로 생선조림이나 찌개에서는 필수적인 양념이다.
뿐만 아니라, 약고추장과 같이 고기를 넣고 볶은 것은 밑반찬으로도 애용된다. 
여러 맛을 내는 복합 조미료" 고추장은 간장·된장과 함께 우리 고유의 발효 식품으로, 탄수화물의 가수분해로 생긴 단맛과 콩단백 아미노산의 감칠맛, 고추의 매운맛, 소금의 짠맛이 잘 조화를 이룬 복합 조미료이자 기호 식품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으로, 1800년대 초의 『규합총서』에는 순창 고추장과 천안 고추장이 팔도의 명물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월여농가』(1861년)에서는 고추장을 ‘번초장’이라 하였다.
『증보산림경제』(1765년)에는 “콩으로 담근 말장(末醬)가루 한 말에 고춧가루 세 홉, 찹쌀가루 한 되의 세 가지 맛을 취하여 좋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으로 침장한 뒤 햇볕에 숙성시킨다”고 씌어 있어 지금과 비슷한 고추장을 담가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재래식 고추장의 원료는 메줏가루, 고춧가루, 곡물가루, 소금이다.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쪄서 메줏가루를 섞어 당화되어 묽어지면 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숙성시킨다.
지방에 따라 찹쌀 대신 멥쌀, 밀, 보리로 담그기도 했다.

재래식 고추장 만들기"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재래식 고추장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만든다. 대개 간장을 담그고 나서 더워지기 전인 3~4월에 담근다.
어떤 곡물로 담그느냐에 따라 찹쌀고추장, 밀가루고추장, 보리고추장, 고구마고추장 등으로 나뉜다.

고추장용 메주 만들기
고추장용 메주는 콩으로만 만드는 된장용 메주와 달리 콩과 쌀가루를 섞어 만드는데 다른 메주보다 곰팡이가 덜 피게 말려야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고추장용 메주는 쌀가루에 물을 대강 섞어 흰 무리떡으로 찐 다음 무르게 삶거나 쪄낸 콩과 함께 시루에 넣고 쳐서 주먹만 한 크기로 둥근 모양이나 도넛 모양 메주를 만들어 서늘한 곳에서 말린다.

순창에서는 삶은 콩을 시루에 깔고 쌀가루를 그 위에 층층으로 쌓아서 쪄낸 다음 절구에 쳐서 둥글게 빚어 고추장용 메주를 만든다.
메주를 한 달 가량 띄우면 고초균과 효모가 잘 자라면서 표면이 노랗게 되고 갈라보면 속은 노르스름하거나 하얗다.

고초균은 고추장의 전분질과 단백질을 분해하여 잘 익을 수 있게 하고, 효모는 탄수화물로부터 주정(ethanol)과 함께 향기성분을 만들어 낸다.
고추장용 메주가 잘 숙성되면 다시 작게 쪼개어 3~4일 정도 햇볕에 바짝 말려 가루로 빻은 뒤, 고운 체로 쳐서 다시 3~4일간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메줏가루를 항아리에 넣고 서늘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해 봄에 고추장을 담글 때에 사용한다.

고추장용 메주는 표면에 푸른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고추장용 메주를 봄이나 가을에 만드는 것과 달리 순창에서는 여름에 만드는데, 이는 고추장의 단맛을 내는 곰팡이가 기온이 높을수록 더 많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순창고추장은 음력 7월에 메주를 띄워 음력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 사이에 고추장을 만들어 저온에서 숙성시키기 때문에 다른 고추장에 비해 당화되는 속도가 느리고 젖산균의 생성이 더뎌, 신맛이 나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 

고추장 담그기 재래식 고추장은 날이 더워지기 전인 3~4월에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담근다.

1) 찹쌀을 깨끗이 씻어 물에 담갔다가 건져 물기를 뺀 다음 가루로 빻는다.
2) 엿기름은 끓여서 식힌 물에 하룻밤 담가 불린 후에 고운 체에 걸러 웃물만 가라앉혀 사용한다.
3) 냄비에 엿기름의 웃물을 조심스럽게 따라 붓고 찹쌀가루를 곱게 풀어 약한 불에서 찹쌀 풀을 쑨 다음 불을 끄고 따뜻하게 두어 삭힌다.
찹쌀 풀 대신 찹쌀로 밥을 짓거나 익반죽한 찹쌀가루를 경단모양으로 빚어 삶은 후에 엿기름물에 잘 풀어지도록 나무주걱으로 조금씩 으깨어 만들기도 한다.
4) 넓은 그릇에 찹쌀 풀을 붓고 뜨거울 때에 메줏가루를 넣어 고루 섞은 다음, 한 김 나가면 고춧가루를 섞어준다.
고춧가루 양이 부족하면 고추장의 색이 검게 변할 수 있다.
5) 하루 정도 지난 후에 소금으로 약간 짜게 간을 맞춘다.
6) 장을 보관할 항아리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 다음 고추장을 담고 그 위에 소금을 넉넉히 얹고 망으로 덮은 후에 양지 바른 곳에 두어 숙성시킨다.
이렇게 만든 고추장은 하루에 20번 정도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삭히는데, 이런 과정을 한 달 정도 반복하면 고추장이 부풀어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간을 고루 맞출 수 있으며, 고추장이 잘 숙성된다.
고추장이 부풀어 끓어오르는 이유는 효모가 주정과 함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고추장용 항아리는 입구가 넓은 것이 햇볕을 많이 쬘 수 있어 좋다. 입구가 좁을수록 햇볕을 적게 쐬어 장의 색이 검고 맛이 나빠지며 흰색의 산막효모가 번식하여 백태가 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추장을 담은 항아리는 2~3일 간격으로 뚜껑을 열고 햇볕을 잘 쬐어주는 것이 좋다.
고추장은 해를 묵혀서 먹지 않고 매년 새로 담가 먹는데, 주로 묵은 고추장은 장아찌용으로 사용한다.

개량식 고추장 담그기 개량식 고추장은 재래식 고추장과 달리 주로 밀가루를 이용해서 만들고, 야생균으로 만든 고추장용 메주 대신에 황국균을 배양한 코지(Koji)를 사용하며, 엿기름에 의한 당화보다는 물엿을 이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개량식 고추장에 사용되는 코지는 당화력과 단백질 분해력이 강하고 숙성 조건에 따른 맛의 변화가 없어, 공장에서 만드는 고추장은 코지식 제법으로 만든 것이 많다.
코지는 쌀, 보리, 밀 등의 전분질을 가루로 만들어 증자(蒸煮, 수증기로 찌기)한 것에 황국균을 접종하여 35℃에서 48시간 이상 제국(製麴)하여 만든 것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고추장은 코지에 고춧가루, 소금, 물 등을 섞어서 상온에서 30~60일 숙성한 것에 물엿을 섞어 85℃에서 10분간 살균한 뒤 냉각하는 과정을 거쳐 만든다.

예로부터 장맛이 좋아야 집안에 불길한 일이 없다고 하여 좋은 날(吉日)을 골라 장을 담그는 풍습이 있었다.
보통 고추장용 메주는 음력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 사이에 길일을 택해 만들었고,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에서는 십이간지 중 말(馬)에 해당하는 날을 장 담그기에 좋은 날로 정했다.
장 담그기가 집안의 중요 행사인 만큼, 부정을 탈 수 있는 행동은 금하였으며 재료를 고르는 일부터 장을 담근 후에 관리하는 일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고추장을 담근 후에는 부정을 타지 않도록 금줄을 치고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는 등 액땜을 위해 신경을 썼다고 한다.
출산하거나 월경이 있는 여인이나 잡인 등은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냄새를 잘 흡수하는 메주의 특징 때문에 메주를 띄울 때에는 냄새가 나거나 더러운 것, 송장 등을 피하였다고 한다.

집 뒤꼍 외진 곳에 장독간을 만들고 목책으로 문을 잠그는 등 집안 사람 외에는 출입을 엄격히 금하였으며, 장을 담근 후 삼칠일 안에는 초상집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 집에서 고추장을 두세 가지씩 담가 두고 음식에 따라 구별하여 쓰기도 하였다. 그중 찹쌀고추장을 가장 귀하게 여겨 초고추장을 만들거나 색을 곱게 낼 때 쓰고, 밀가루로 담근 고추장은 찌개나 토장국 끓일 때 또는 채소로 고추장장아찌를 만들 때 많이 쓰고, 보리고추장은 여름철 쌈장으로 먹었다.
고추장은 쓰임새가 많다.

된장과 마찬가지로 토장국이나 고추장찌개의 맛을 내고, 생채나 숙채, 조림, 구이 등의 조미료로 쓰인다.
볶아서 찬으로 먹거나 쌈장으로도 먹으며, 회나 강회 등을 찍어 먹는 초고추장이나 비빔밥·비빔국수의 양념 고추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메줏가루를 넣지 않고 조청을 고아서 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한 엿고추장도 있다.
윤기가 나고 매끄러워 제일로 꼽는 찹쌀고추장은 찹쌀을 넣어 담근 것으로 예전에는 넉넉한 집에서만 담갔고 서민들은 보리나 밀가루로 담갔다.


메주 띄우기"
고추장은 재료나 간의 세기 그리고 보관 장소에 따라 숙성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으나 대개는 담가서 항아리에 담아 가끔 햇볕에 쪼이면서 숙성시켜 한 달쯤 지나면 먹을 수 있다.
해를 묵혀서 먹지 않으며 먹고 남은 고추장은 장아찌용으로 쓰면 좋다.

고추장에는 고춧가루, 메줏가루, 곡물의 전분질, 엿기름가루, 소금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고춧가루가 좋아야 한다.
고추장에 넣는 메주는 고추장 전용으로 주먹만한 크기의 떡 메주를 만들거나 집메주를 가루 내어 쓰기도 한다.
미리 잘 뜬 메주를 씻어 말려서 가루로 빻는다.
고추장용 메주는 콩만으로 빚은 큰 덩이의 메주로 담가서는 안 되고, 처음부터 전분질을 섞어서 작게 빚는다.
흰콩이 다섯 되이면 멥쌀은 한 되의 비율이 알맞다.
 메주를 쑬 때는 콩과 쌀가루를 따로 익혀서 절구에 찧을 때 합한다.
쌀을 불려 가루로 빻아 물을 버물버물 섞어서 흰 무리로 쪄내고, 콩은 충분히 불려서 무르게 삶거나 쪄내어 절구에 쏟아 함께 찧어서 메주를 빚는다.
불린 콩과 불린 쌀을 시루에 번갈아 가며 켜켜로 안쳐서 쪄낸 다음 절구에 찧어서 빚는 방법도 있다.
일주일 정도 지나 메주에 하얗게 곰팡이가 피면 꺼내 볕에 말렸다가 도로 상자에 넣어 더 발효시켰다가 말린다.
이같이 두세 차례 반복하여 3주 정도 지나 다 뜨면 바싹 말린다.

고추장 메주는 간장 메주보다 덜 띄우는 편이 낫다.
너무 오래 띄워 곰팡이가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면 퀴퀴한 냄새가 나서 오히려 맛이 없어진다.
메주는 솔로 먼지를 털어내고 물에 얼른 씻어 건져 잘게 쪼개서 채반에 건져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린다.
메주가 마르면 곱게 가루를 내는데, 3~4일 밤이슬을 맞히면서 말리면 메주 특유의 냄새가 없어져서 좋다고 한다. 메줏가루는 구수한 향이 나고 노란빛을 띠어야 좋은 것이다.


고추장 담그기"
고추장용 고춧가루는 가을철에 미리 색이 곱고 매운 고추로 골라서 씨를 모두 털어내고 곱게 빻아 놓는다.

엿기름은 겉보리를 씻어서 물에 하룻밤 불렸다가 건져서 시루에 시루 밑을 깔고 펴서 위를 덮어 둔다. 며칠 있다가 싹이 나오면 콩나물 기르듯이 물을 주어서 싹이 원래 보리만큼 자라면 잘 비벼서 멍석에 펴서 말린다.
마른 엿기름을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다.
요즘에는 직접 싹을 틔우지 않아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고추장 간을 맞출 때는 흰 꽃소금을 쓴다.
고추장이 되직하므로 굵은 호렴은 잘 녹지 않으며 쓴맛이 남으므로 적당하지 않고, 고운 정제염은 순도가 너무 높아서 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고추장 반죽에 들어간 소금은 잘 녹지 않으므로 고추장 버무릴 때 한꺼번에 넣지 않고 2~3일간에 걸쳐서 서너 차례로 나누어 간을 맞춘다.
고추장 반죽이 너무 되직하면 소금으로만 간을 하지 않고 간장을 섞기도 하는데 이때는 꼭 간장을 달여서 넣어야 한다. 
고추장의 재료 배합을 살펴보면 찹쌀이나 전분 곡물가루가 소두 1말이면 메줏가루는 소두 1되(5컵), 고춧가루는 2되, 엿기름은 3~4컵, 소금은 6~8컵이 기준이다.

맵게 담그려면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넣으면 되고, 묽게 하려면 엿기름이 많이 넣으면 된다. 또 전분질이 많으면 되직해지므로 기호에 따라 재료의 비율을 가감한다.

귀한 찹쌀고추장"
찹쌀고추장을 옛날 방법으로 담그려면 힘들고 번거롭기는 하나 맛이 좋고 되직하여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다.
찹쌀을 불려서 빻아 뜨거운 물로 익반죽하여 도넛 모양으로 빚는데 이를 구멍떡이라고 한다.
솥에 물을 넉넉히 부어서 펄펄 끓을 때 구멍떡을 넣어 익어서 떠오르면 건져 큰 양푼에 담고 방망이로 힘껏 저어서 고르게 푼다.
떡 삶은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멍울 없이 매끈하게 풀어서 메줏가루, 고춧가루, 소금의 순으로 넣는다.
이 방법으로 찹쌀고추장을 담글 때는 엿기름을 넣지 않는다. 
요즘에는 찹쌀을 익반죽하여 치대서 만드는 찹쌀고추장은 거의 없어지고, 찹쌀가루를 엿기름 물에 풀어서 끓여 간단히 만든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조금씩 넣고 주물러서 모아 가라앉혔다가 여기에 찹쌀가루를 풀어서 잠시 두었다가 끓이면 삭아서 말갛게 되는데 이 때 불을 줄이고 서서히 달이면 점차 검은빛이 된다.
자칫하면 끓어 넘치거나 바닥이 눌어붙기 쉬우니 나무 주걱으로 저으면서 오래 달인다.
찹쌀풀이 다 졸아들면 큰 그릇에 쏟아부어 한김 나가고 나서 메줏가루를 넣어 고루 섞고, 고춧가루를 넣어 고루 섞은 다음 끝으로 소금을 넣는다.

칼칼한 보리고추장"
보리고추장을 만들려면 예전에는 미리 보리쌀을 빻아 시루에 쪄내어 따뜻한 곳에 놓아 띄워서 다른 재료와 버무려야 했다.
푹 찐 보릿가루를 식혀서 소쿠리에 담아 따뜻한 곳에 두면 4~5일쯤 지나 노랗게 뜬다.
이것을 쏟아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싹싹 비비면서 섞어 소금 간을 하여 담근다. 
요즘에는 보릿가루를 쪄서 엿기름 물로 풀어서 삭혀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버무려서 담근다.
다른 고추장보다 단맛이 적고 칼칼하고 구수해서 쌈장으로 많이 먹는다. 

보관과 관리"
간장이나 된장은 담그고 바로 뚜껑을 덮어 두었다가 3~4일쯤 후에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볕을 쪼이기 시작하지만 고추장은 하룻밤 김이 나가게 두었다가 다음날 뚜껑을 덮는다.
익힌 재료를 바로 버무린 것이어서 담그고 바로 뚜껑을 덮으면 더운 김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서 습기가 찬다. 

고추장 항아리는 입이 좁은 것이 좋다.
고추장이 공기에 노출되면 그 면은 색이 검어지고 맛도 나빠지며, ‘곱’이라고 하는 흰색의 산막효모가 번식하므로 날씨 좋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 햇볕을 쪼여 주면 이를 방지 할 수 있다.

담근 지 얼마 안 되어 부글부글 끓어 넘치거나 흰 곰팡이가 피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엿기름에 전분을 넣고 충분히 달이지 않았거나 너무 싱거운 경우, 고추장 항아리에 빗물이나 물이 들어갔을 경우 등이다.
이럴 때는 솥에 쏟아붓고 뭉근한 불에서 달여 주고 소금을 약간 더 넣는다.
고추장을 쏟고 더운 식혜를 넣어 서서히 끓이면 맛을 되살릴 수 있다.

고추장은 단지에 담은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 저어 주어야 잘 익으며 끓어오르지 않고 간도 고루 든다.
특히 여름철에는 곰팡이가 피기 쉬우므로 망사나 거즈로 항아리를 덮어서 가끔 햇볕을 쬐어 주고 장마철에는 반드시 웃소금을 얹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주의한다.

조리법"
탄수화물의 가수분해로 생긴 단맛과 콩단백 아미노산의 감칠맛, 고추의 매운맛, 소금의 짠맛이 조화를 이룬 복합 조미료이자 기호 식품이다.


재료"
찹쌀 10컵(소두 2되), 메줏가루 3컵, 고춧가루 7∼8컵(1.5되), 엿기름가루 5컵(1되), 소금 3컵, 물 3∼4되(15~20컵)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찹쌀은 깨끗이 씻어 물에 하룻밤 불려서 가루로 빻는다.
2. 엿기름은 물에 넣고 비벼서 체에 밭아 엿기름 물을 가라앉힌다.
3. 찹쌀가루를 더운물로 익반죽하여 손바닥만한 도우넛형으로 구멍떡을 만든다.
4. 끓는 물에 구멍떡을 삶아 건져서 큰 그릇에 쏟고 ②의 엿기름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멍울이 없게 푼다.
5. 찹쌀풀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고루 섞어서 하룻밤 둔다.
6. 고추장의 색깔이 곱게 되었으면 소금을 넣고 간을 맞추어 항아리에 담고 그 위에 덧소금을 뿌리고 망사나 거즈로 덮어서 햇볕을 쬐면서 1달쯤 숙성시킨다.

찹쌀고추장 담그기"
엿기름 물 가라앉히기, 찹쌀가루로 구멍떡 만들기, 삶은 찰떡을 엿기름물로 묽게 풀기, 찹쌀풀에 고춧가루와 메줏가루 넣기, 메줏가루에 질게 지은 밥이나 떡가루 또는 되게 쑨 죽을 버무리고 고춧가루와 소금물을 섞어서 간을 맞춘 뒤 발효시킨 검붉은 페이스트 상의 향신조미식품으로 우리나라 고유 장(醬)류의 일종이다. 간장이나 된장은 상고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측되나 고추장은 고추 수입 이후에 개발된 것으로 간장이나 된장보다는 늦게 우리 식생활에 들어왔다.

이수광(李粹光)의 『지봉유설』에는 고추가 일본에서 도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6세기말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추장 제조법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1760년경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이므로 고추의 재배파급은 급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메주를 가루로 만들어 체로 친 것, 한 말에 고춧가루 서 홉, 찹쌀가루 한 되를 넣고 좋은 간장으로 개어서 담근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것이나 지금의 고추장보다 고춧가루를 훨씬 적게 쓰고 있고, 찹쌀이나 멥쌀 등 탄수화물 재료 대신 메줏가루가 주가 되어서 마치 막장과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간장으로 고추장의 간을 맞춘 점도 지금과는 다른 점이다.
고추장과 참깨를 볶아서 넣거나 다른 제조방법으로 콩 한 말로 두부를 만들어 물기를 짠 다음 고춧가루, 소금물 등을 섞어서 담그는 방법도 소개되어 있고, 또 말린 생선 조각이나 다시마, 미역을 넣어서 맛을 더욱 구수하게 하는 법, 콩 한 말을 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다시 끓여서 즙을 빼내고 더운 방에서 3일간 띄운 다음 볶은콩가루 세 말을 섞어 찧어서 고춧가루 세 홉과 소금물로 버무려 햇볕에 익혀 만드는 급조 고추장법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고추장 제조법이 다양하게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합총서』에는 “삶은 콩 한 말과 쌀 두 되로 흰 무리를 쪄 함께 찧어 메주를 만든 다음 띄워서 가루를 내고, 여기에 소금 네 되를 좋은 물에 타서 버무린 다음 고춧가루 5~7홉을 섞고 찹쌀 두 되로 밥을 지어 한데 섞어 만든다”고 되어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수록된 제조법보다 고춧가루의 비례가 많아지고 메주를 만들 때부터 쌀을 보강하고 있어 제조법이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추장용 재료로는
고춧가루, 메줏가루 혹은 고오지, 곡류로 멥쌀, 찹쌀, 보리쌀을 사용하며 곡류는 익혀서 혼합한 후 적당량의 소금물을 넣고 일정기간 발효시킨다.
고추에서 오는 매운맛, 콩 단백질의 분해산물인 아미노산의 감칠맛, 전분의 분해물인 당류의 단맛과 소금의 짠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추장은 크게 재래식 고추장과 개량식 고추장이 있으며 재래식 고추장은 대부분 가정에서 콩과 곡류를 6:4 비율로 섞어 만든 고추장 메주를 사용하고 개량식 고추장은 고추장 메주 대신에 고오지(국, 麴)를 사용하고 있다.

재래식고추장은 첨가하는 곡류에 따라 찹쌀고추장, 멥쌀고추장, 보리고추장, 밀가루고추장, 고구마고추장, 옥수수고추장이 있으며 제조방법에 따라 식혜고추장, 떡고추장이 있다. 근래 과실류(복분자, 매실 등)를 넣은 고추장도 제조되고 있다.
개량식 고추장은 전분질 원료를 가열하여 호화하고 효소로 액화한 다음 여기에 고춧가루, 고오지, 곡류 전분, 소금 등을 넣어 발효 후 각종 조미료를 넣어 살균 후 포장하고 있다.

개량식 고추장 제조 공정도:
개량식 고추장도 전분질의 원료에 따라 찹쌀고추장, 쌀고추장 등이 제조되고 있으며 규모가 큰 공장에서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인의 힘은 바로 고추장.
한국 전통 발효식품인 고추장"
기본정보"
구입요령 :
손으로 찍어 보아 흐르지 않을 정도의 점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운 붉은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유사재료 : 약고추장 (찹쌀을 원료로 하여, 보통의 고추장보다 고춧가루를 많이 넣고 담근 고추장이다.) 보관온도 : 10~15℃ 보관일 : 1일 보관법 : 밀폐용기에 담아 통풍이 잘 되고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1. 손질법 :
특별한 손질법 없이 바로 섭취 가능하다.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 순창·진주·해남 지방의 고추장이 유명하다.
2. 섭취정보"
섭취방법 :
찌개나 양념의 조미료로 이용된다.
궁합음식정보 :
제육볶음 (돼지고기의 단백질과 비타민 B1에 고추의 비타민 C, 카로틴, 칼슘이 영양적 균형을 이루어 궁합이 맞다.)
다이어트 :
고추는 비타민 C가 풍부하고 지방대사를 원활히 해주는 캡사이신을 함유하고 있어 다이어트에 좋다.

효능 :
소화불량 치유(고추에 함유되어 있는 캡사이신은 위액 분비를 촉진하고 단백질의 소화를 돕는다,

Taste components of traditional kochujang from 55 households were investigated. The major free sugars in traditional kochujang (fermented hot pepper-soybean paste) were glucose $(8.21{\pm}5.62%)$ and maltose $(6.95{\pm}7.27%)$ and the minors were fructose $(1.88{\pm}1.27%)$ and sucrose $(1.05{\pm}1.21%)$. Succinic $(901.83{\pm}826.23\;mg%)$, citric $(484.16{\pm}242.89\;mg%)$ and lactic $(381.63{\pm}367.88\;mg%)$ acids in traditional kochujang were found in large amounts and acetic, oxalic, and formic acids in smaller amounts. The traditional kochujang contained large amounts of proline $(10.66{\pm}6.27\;mg%)$, glutamic acid $(9.27{\pm}10.97\;mg%)$, aspartic acid $(9.14{\pm}5.84\;mg%)$, lysine $(6.19{\pm}6.66\;mg%)$, and serine $(5.72{\pm}3.79\;mg%)$, and the total free amino acid content was 64.35mg%. Among the nucleotides and their related compounds in traditional kochujang, CMP $(42.90{\pm}28.16\;mg%)$ were the most abundant major compounds and hypoxanthine $(6.86{\pm}3.45\;mg%)$, IMP $(5.59{\pm}5.84\;mg%)$, inosine $(4.58{\pm}6.91\;mg%)$ and GMP$(3.36{\pm}3.93\;mg%)$ were found in smaller amounts, and AMP and UMP were also found in minor. This study aimed to determine the sensory acceptability of Gochujang dressing containing added Maesil (Prunus mune) concentrate. Gochujang dressing was blended with different concentrations of Maesil concentrate (0%, 1%, 2%, 3%, 4%). Moisture contents, L, a, b values, pH level, and sugar contents decreased, whereas acidity and viscosity increased with increasing Maesil contents. Salinity did not change significantly. For attribute difference test, as Maesil concentration increased, color intensity, savory flavor, sour flavor, hot taste, and mouthfeel decreased, whereas glossiness decreased. The acceptance test showed that 2% Maesil concentrate was the most preferable for appearance, taste, texture, and overall quality. In conclusion, the results indicate that addition of 2% Maesil concentrate to Gochujang dressing is optimal and provides good properties as well as reasonably high overall acceptability.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and processing of Kochujang which is rapidly fermented by commercial enzymes, three kinds of Kochujang(KP-FA, KP-FN, and KP-BN) using commercial proteases and one Kochujang(KM) using Meju were prepared and their qualities investigated. There were only small differences in pH and acidity between each Kochujang. The moisture contents were high tendency in the three kinds of Kochujangs using the commercial proteases at 20 days of fermentation. Reducing sugars had a tendency to decrease during the fermentation in the Kochujangs using the proteases. During the first half of fermentation, the Kochujangs made with proteases showed higher amino nitrogen contents than the Kochujang(KM) made using Meju. Acidic protease activity was high in KP-FA at 20 days of fermentation and neutral protease activity was high in KP-FN and KP-BN at the beginning of fermentation. The Kochujangs made using the proteases, through 20 days of fermentation, obtained high preference in the sensory evaluation for color, texture, and overall acceptability. However, the hot taste was stronger in these Kochujangs during the fermentation.

매운맛 등급화 고추장"
This study investigated the spicy hot flavor related quality characteristics of cucumber salad prepared using spicy hot flavor graded gochujang that had been stored for 60 and 120 days. The results showed that the pH of both the 60-day and 120-day fermented gochujang was significantly higher in the cap-200 sample 

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나훈아~감나무골(1973)

나훈아-꿈속의 고향

나훈아~천리길(데뷔곡)

나훈아~가고싶은 내고향

노래 잘하는 뽕짝아줌마 트로트 메들리

정전의 신위"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신위" 현재 종묘에 모셔진 신위는 19실에 19대의 왕들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에 봉안된 신주들은 문조(文祖)를 제외하면 전부 실제로 국왕으로 즉위하여 활동하였던 인물들이다. 다만 문조의 경우 헌종의 아버지로 추존되어 종묘에 봉안되었는데, 친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종묘에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예제의 원칙상 5묘제, 즉 5대의 신주[태조와 현왕의 4대 조상]만이 종묘에 봉안해야만 했다. 그런데 위 표에서 보듯이 현재의 종묘에는 19대의 신주가 모셔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다고 판단되는 대상은 ‘세실(世室)’로 정해 영원히 종묘에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삼는다는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고종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으로 개편되었고, 이후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7묘제, 즉 창업의 군주인 태조와 순종-고종-철종-헌종-문조-순조까지의 7대가 원래대로의 종묘제사의 대상이고, 나머지 태종 이하 정조까지의 신주는 모두 불천위인 ‘세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15실에 봉안되어 있는 문조(익종)의 존재이다. 문조는 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이자 23대 왕인 순조의 큰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이다. 순조 30년(1830)에 그는 사망하였고, 이후 순조의 왕위는 손자인 헌종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헌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증하고, 동왕 3년(1837) 정월 춘향대제를 지내면서 종묘의 17실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추존된 왕들이 종묘에 일단 봉안되면 그가 친진(親盡)이 될 때까지 종묘에 그대로 두다가 친진이 이루어지면 예외없이 불천위로 지정하지 않고 영녕전으로 그 신주를 옮겼다. 그런데 정조의 아버지, 흔히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莊祖)의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것은 장조가 이미 친진으로 영녕전으로 옮겨졌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시기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인 고종 2년으로 판단된다. 만약에 이것이 대한제국 설립 이후라면 고종과 순종의 시대에는 장조가 친진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묘에 봉안된 역대 국왕 및 왕비의 신주> 왕호 생몰연대 재위기간 선왕 생부 생모 관계 왕비 부묘시기 태조 1335∼1408 1392~1398 이자춘 최씨 차남 신의왕후한씨 신덕왕후강씨 태종 10년 (1410) 태종 1367~1422 1400~1418 정종 태조 신의왕후한씨 오남 원경왕후민씨 세종 6년 (1424) 세종 1397~1450 1418~1450 태종 태종 원경왕후민씨 삼남 소헌왕후심씨 문종 2년 (1452) 세조 1417~1468 1455~1468 단종 세종 소헌왕후심씨 차남 정희왕후윤씨 성종 원년 (1470) 성종 1457~1494 1469~1494 예종 의경세자 소혜왕후한씨 차남 공혜왕후한씨 정현왕후윤씨 연산군 3년 (1497) 중종 1488~1544 1506~1544 연산군 성종 정현왕후윤씨 차남 단경왕후신씨 장경왕후윤싸 문정왕후윤씨 명종 2년 (1547) 선조 1552~1608 1567~1608 명종 덕흥대원군 하동부 대부인정씨 삼남 자인왕후박씨 인목왕후김씨 광해군 2년 (1610) 인조 1595~1649 1623~1649 광해군 정원군 인헌왕후구씨 장남 인열왕후한씨 장열왕후조씨 효종 2년 (1651) 효종 1619~1659 1649~1659 인조 인조 인열왕후한씨 차남 인선왕후장씨 현종 2년 (1661) 현종 1641~1674 1659~1674 효종 효종 인선왕후장씨 장남 명성왕후김씨 숙종 2년 (1676) 숙종 1661~1720 1674~1720 현종 현종 명성왕후김씨 장남 인경왕후김씨 인현왕후민씨 인원왕후김씨 경종 2년 (1722) 영조 1694~1776 1724~1776 경종 숙종 화경숙빈최씨 차남 정성왕후서씨 정순왕후김씨 정조 2년 (1778) 정조 1752~1800 1776~1800 영조 장헌세자 혜빈홍씨 장남 효의왕후김씨 순조 2년 (1802) 순조 1790~1834 1800~1834 정조 정조 수빈박씨 차남 순원왕후김씨 헌종 3년 (1837) 문조 1809∼1830 ~ - 순조 순원왕후김씨 신정왕후조씨 헌종 3년 (1837) 헌종 1827∼1849 1834~1849 순조 효명세자 신정왕후조씨 장남 효현왕후김씨 효정왕후홍씨 철종 2년 (1851) 철종 1831∼1863 1849~1863 헌종 전계대원군 용성부 대부인염씨 삼남 철인왕후김씨 고종 2년 (1865) 고종 1852∼1919 1863~1907 철종 흥선대원군 여흥부 대부인민씨 차남 명성왕후민씨 순종 14년 (1920) 순종 1874∼1926 1907~1910 고종 고종 명성왕후민씨 차남 순명왕후민씨 순정왕후윤씨 제1실 왕호 태조(太祖) 생몰연대 1335~1408 재위기간 1392~1398 선왕 생부 이자춘(李子春) 생모 최씨(崔氏) 관계 次男 왕비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 康氏) 부묘시기 태종 10년(1410) 7월 26일 제2실 왕호 태종(太宗) 생몰연대 1367~1422 재위기간 1400~1418 선왕 정종(定宗) 생부 태조(太祖) 생모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관계 五男 왕비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 부묘시기 세종 6년(1424) 7월 12일 제3실 왕호 세종(世宗) 생몰연대 1397~1450 재위기간 1418~1450 선왕 태종(太宗) 생부 태종(太宗) 생모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 관계 三男 왕비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부묘시기 문종 2년(1452) 4월 10일 제4실 왕호 세조(世祖) 생몰연대 1417~1468 재위기간 1455~1468 선왕 단종(端宗) 생부 세종(世宗) 생모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관계 次男 왕비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부묘시기 성종 원년(1470) 12월 16일 제5실 왕호 성종(成宗) 생몰연대 1457~1494 재위기간 1469~1494 선왕 예종(睿宗) 생부 의경세자(懿敬世子) 생모 소혜왕후한씨(昭惠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공혜왕후한씨(恭惠王后 韓氏) 정현왕후윤씨(貞顯王后尹氏) 부묘시기 연산군 3년(1497) 2월 11일 제6실 왕호 중종(中宗) 생몰연대 1488~1544 재위기간 1506~1544 선왕 연산군(燕山君) 생부 성종(成宗) 생모 정현왕후윤씨(貞顯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단경왕후신씨(端敬王后愼氏) 장경왕후윤싸(章敬王后尹氏) 문정왕후윤씨(文定王后尹氏) 부묘시기 명종 2년(1547) 정월 12일 제7실 왕호 선조(宣祖) 생몰연대 1552~1608 재위기간 1567~1608 선왕 명종(明宗)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생모 하동부대부인정씨(河東府大夫人鄭氏) 관계 三男 왕비 자인왕후박씨(懿仁王后朴氏) 인목왕후김씨(仁穆王后金氏) 부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1일 제8실 왕호 인조(仁祖) 생몰연대 1595~1649 재위기간 1623~1649 선왕 광해군(光海君) 생부 정원군(定遠君:원종) 생모 인헌왕후구씨(仁獻王后具氏) 관계 長男 왕비 인열왕후한씨(仁烈王后韓氏) 장열왕후조씨(莊烈王后趙氏) 부묘시기 효종 2년(1651) 7월 7일 제9실 왕호 효종(孝宗) 생몰연대 1619~1659 재위기간 1649~1659 선왕 인조(仁祖) 생부 인조(仁祖) 생모 인열왕후한씨(仁烈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인선왕후장씨(仁宣王后張氏) 부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7일 제10실 왕호 현종(顯宗) 생몰연대 1641~1674 재위기간 1659~1674 선왕 효종(孝宗) 생부 효종(孝宗) 생모 인선왕후장씨(仁宣王后張氏) 관계 長男 왕비 명성왕후김씨(明聖王后金氏) 부묘시기 숙종 2년(1676) 10월 15일 제11실 왕호 숙종(肅宗) 생몰연대 1661~1720 재위기간 1674~1720 선왕 현종(顯宗) 생부 현종(顯宗) 생모 명성왕후김씨(明聖王后金氏) 관계 長男 왕비 인경왕후김씨(仁敬王后金氏) 인현왕후민씨(仁顯王后閔氏) 인원왕후김씨(仁元王后金氏) 부묘시기 경종 2년(1722) 8월 10일 제12실 왕호 영조(英祖) 생몰연대 1694~1776 재위기간 1724~1776 선왕 경종(景宗) 생부 숙종(肅宗) 생모 화경숙빈최씨(和敬淑嬪崔氏) 관계 次男 왕비 정성왕후서씨(貞聖王后徐氏) 정순왕후김씨(貞純王后金氏) 부묘시기 정조 2년(1778) 5월 2일 제13실 왕호 정조(正祖) 생몰연대 1752~1800 재위기간 1776~1800 선왕 영조(英祖) 생부 장헌세자(莊獻世子:장조) 생모 혜빈홍씨(惠嬪洪氏) 관계 長男 왕비 효의왕후김씨(孝懿王后金氏) 부묘시기 순조 2년(1802) 8월 9일 제14실 왕호 순조(純祖) 생몰연대 1790~1834 재위기간 1800~1834 선왕 정조(正祖) 생부 정조(正祖)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 관계 次男 왕비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 부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5실 왕호 문조(文祖) 생몰연대 1809∼183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순조(純祖) 생모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 관계 왕비 신정왕후조씨(神貞王后趙氏) 부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6실 왕호 헌종(憲宗) 생몰연대 1827∼1849 재위기간 1834~1849 선왕 순조(純祖) 생부 효명세자(孝明世子:문조) 생모 신정왕후조씨(神貞王后趙氏) 관계 長男 왕비 효현왕후김씨(孝顯王后金氏) 효정왕후홍씨(孝定王后洪氏) 부묘시기 철종 2년(1851) 8월 6일 제17실 왕호 철종(哲宗) 생몰연대 1831∼1863 재위기간 1849~1863 선왕 헌종(憲宗) 생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생모 용성부대부인염씨(龍城府大夫人廉氏) 관계 三男 왕비 철인왕후김씨(哲仁王后金氏) 부묘시기 고종 2년(1865) 6월 6일 제18실 왕호 고종(高宗) 생몰연대 1852∼1919 재위기간 1863~1907 선왕 철종(哲宗)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생모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관계 次男 왕비 명성왕후민씨(明成王后閔氏) 부묘시기 순종 14년(1920) 3월 31일 제19실 왕호 순종(純宗) 생몰연대 1874∼1926 재위기간 1907~1910 선왕 고종(高宗) 생부 고종(高宗) 생모 명성왕후민씨(明成王后閔氏) 관계 次男 왕비 순명왕후민씨(純明王后閔氏) 순정왕후윤씨(純貞王后尹氏) 부묘시기 종묘 봉안 신주 종묘에는 정전 19실에 49명의 왕과 왕비, 영녕전에는 16실에 34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종묘 봉안 신주 종묘에는 정전(正殿)에 태조 및 태조비를 비롯해 총 19실에 49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는 총 16실에 34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 정전 및 영녕전에 모셔진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配享功臣)이 정전에 83명 영녕전에 11명 등 총 94명이 있다. 결국 종묘에 봉안된 신주는 총 합계가 177명에 이르고 있다. 선왕의 신주는 기본적으로 다음대의 왕위에 오른 사왕의 3년 상이 끝난 후에 엄속하게 시행한다. 신주의 종묘 부묘 선왕의 종묘 부묘는 기본적으로 다음대의 왕위에 오른 사왕(嗣王)의 3년상(실제로는 27개월)이 끝난 후에 엄숙하게 시행된다. 그런데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일은 왕실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대사이고, 또 왕위를 계승하는 현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할 수 없다. 사시대향(四時大享)이나 납일대향(臘日大享)과 같이 종묘에서 시행되는 가장 큰제사의 시기에 선왕의 부묘(祔廟 :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것)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선왕의 3년상의 상기가 2월에 끝날 경우 그 달에 바로 선왕을 종묘에 봉안한 것이 아니라 다음 종묘대제의 시기인 4월에 이르러 하향대제(夏享大祭)를 시행하면서 그 신주를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지켜졌다. 세종의 부묘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세종은 재위 32년만인 1450년 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이에 다음날 바로 빈전도감(殯殿都監)이 설치되어 상례의 제반 절차를 시행하게 되었다. 3일 후인 20일에 소렴(小殮)을 시행하고, 다시 이틀 후인 22일에 대렴(大殮)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 6일 후인 23일에 이르러 왕세자인 문종이 정식으로 국왕으로 즉위하고, 다음날 종묘.사직에 왕의 즉위를 고하였다. 26일에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왕의 부고(訃告)를 전하고, 아울러 선왕의 행장(行狀)을 보내며, 시호(諡號)를 하사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러한 상례절차는 다음해 6월 24일 졸곡제(卒哭祭)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되고 이때부터 곡(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3개월째인 다음해 2월 17일에 연제(練祭)를 시행하고, 27개월째인 문종 2년 4월 3일에 담제(禫祭)를 시행하면서 국상이 완전히 끝났다. 이러한 국상이 끝난 후에 세종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려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당시에는 종묘의 신주가 익조[1묘], 도조[2묘], 환조[3묘], 태조[4묘], 정종.태종[5묘]의 5묘 6실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세종의 부묘로 5대가 넘어서, 익조의 신주가 이 달 9일에 영녕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0일에 국왕의 주도하에 종묘에서 하향대제를 시행하며 세종의 신주를 종묘의 7실에 봉안하였다. 불천위 선정" 공(功)과 덕(德)이 있었던 국왕의 신위는 불천위로 지정하여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았다. 조선시대 종묘제는 ‘제후는 5묘’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현 국왕의 5대가 넘는 신주들은 모두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야 했다. 이같이 종묘의 신주가 세대상으로 제사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친진(親盡)’이라고 한다. 원칙상 건국자로서 영원히 종묘에 봉안되어야 할 ‘태조’를 제외한 모든 신주들은 친진이 되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공(功)과 덕(德)이 있었던 국왕의 신위는 세실(世室)로 정해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불천위(不遷位) 즉 세실의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처음 발생한 것은 연산군 2년(1496)이었다. 이때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신주는 태조[1대], 정종.태종[2대], 세종[3대], 문종.세조[4대], 덕종.예종[5대]으로, 전체 5묘 8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성종의 신주를 부묘할 경우 6묘가 되기 때문에 1대의 신주를 옮겨야 했다. 당연히 그 대상은 불천위인 태조를 제외하면, 2대인 정종과 태종의 신위였다. 그런데 이 때의 결정은 정종은 친진(親盡)이 되었음으로 당연히 영녕전으로 옮겨야 하지만 태종은 공덕(功德)이 있기 때문에 종묘에서 그 신주를 옮길 수 없다며, 세실로 지정해 그대로 종묘에 봉안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불천위의 선정은 원칙적으로 대상이 되는 신주가 친진으로 나갈 시기에 이르러서 정해져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진의 시기가 되기 훨씬 전에 미리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종 6년(1424) 태종을 종묘에 봉안한 직후에 태종을 불천위로 지정했고, 문종 2년(1452)에는 태종.세종을, 성종 원년(1470)에는 태종.세종.세조를 불천위로 각각 지정하는 등 친진이 되기 이전에 불천위는 정해졌다. 이같이 불천위가 미리 정해지는 것은 옛 왕의 은택(恩澤)을 생각하고 현왕이 그 효도(孝道)를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천위의 선정은 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의문점을 품을 소지가 적지 않다. 현재의 종묘는 대한제국 건립 이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종묘의 묘실은 ‘천자의 7묘(대)’를 기준으로 한다. 이를 적용해 보면.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와 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일곱 신주는 친진(親盡)의 대상이 아닌 인물들이고, 2실의 태종이하부터 정조까지는 불천위로 종묘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천위 중에서 선조와 인조, 현종 등은 과연 불천위의 기본 논리인 ‘공덕(功德)’이 있는 대상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반면에 반정의 과정에서 폐위되었던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불천위의 지정은 물론 복위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결국 종묘나 영녕전에 그 신주가 봉안되지 못하였다. 이중 광해군은 현재 학계에서의 재평가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그의 업적은 불천위로 지정된 평범한 군주들보다 적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불천위를 지정하는 명분으로 ‘공덕(功德)’을 내세웠지만, ‘공덕(功德)’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현재 종묘와 영녕전에 모셔진 신주 중에 국왕으로 활동한 적이 없는 존재들이 있고, 또 실제로 왕 노릇을 했음에도 영녕전으로 옮겨진 신주들이 있다. 전자는 대다수가 선왕과 부자(父子) 관계가 아니었던 현왕이 자기 아버지를 추증했던 경우이고, 후자는 그(죽은 왕)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이다. 결국 불천위는 ‘공덕’이라는 명분하에 현왕이 그의 직계선왕들을 전부 포괄하는 방식으로 지정하였고, 그 나머지 신주는 친진(親盡)이라는 원칙에 따라 영녕전으로 옮긴 것이다. 종묘제 원리" 종묘의 묘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대 국왕 중 특별한 공덕이 있는 경우 '불천위'로 지정한 것이다. 종묘의 제도는 원래 고대 중국인들의 원시신앙과 조상숭배의 관념이 유교적인 보편적 제사의 형태로 나타난 것을 국가에서 왕실의 제사로 전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은(殷)나라에서 처음 정리되기 시작했고, 주(周)나라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주대(周代)의 종묘제는 '의례(儀禮)' '예기(禮記)' 등 고대의 예서에 그 형태가 나오고 있다. 주나라의 제례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제사는 대상이 되는 조상의 직계(直系)의 후손이 주관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큰아들〔長子〕만이 시행할 수 있었다. 직계(直系)의 장자 즉 종자손(宗子孫)이 종가(宗家)를 계승하고 그 의례적 상징으로 제사를 주관한다는 종법사상(宗法思想)은 주나라 이후 중국 사회 조직의 원리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를 시행할 때 그 대상을 어디까지로 한정할 것인가는 상당기간을 거치면서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는데, 그 기준은 자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세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유교제사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설정되었다. '예기' 를 비롯한 고대의 예서에서는 제사의 범위를 ‘천자(天子)는 7묘, 제후(諸侯)는 5묘 경대부(卿大夫)는 3묘, 사서인(士庶人)은 1묘’로 각각 규정하였다. 이것은 제례가 갖고 있는 기본 속성인 차별성을 드러낸 것으로, 종자(宗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제사의 대상 및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의 범위는 경대부 이하의 사가(私家)에서는 그 적용에 큰 문제가 없지만 천자.제후의 경우 실제의 적용에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주나라에서는 천자의 7묘를 7대로, 제후의 5묘를 5대로 각각 해석하였다. 예컨대 천자의 경우 건국자와 6대의 조상을 태조묘[1대]와 소묘[昭廟 : 6대조.고조.조].목묘[穆廟 : 5대조.증조.부]로 구분하여 종묘에 봉안하였다. 만약에 현재의 천자가 죽으면 태조위는 영원히 모시는 불천위(不遷位)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6대조의 신주를 옮기고 그 자리에 죽은 천자의 신위를 모시는 것으로 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경대부 이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경대부 이하에서 혈통을 기준으로 종자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반하여, 천자.제후의 지위는 종자에게로만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천자.제후의 지위가 경대부 이하의 종자와 같이 제사권과 재산권의 상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은 종자가 일찍 죽거나 종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등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찬탈(簒奪)이나 가계(家系)의 이동 등 다양한 현상이 나타났다. 더욱이 만약에 어느 국가가 건국된 이후 몇 대에 걸쳐 형제로 왕위가 계승될 경우 종묘에서 그 신주는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이는 중국 역대의 왕조에서 계속 고민했던 문제였다. 이 문제는 한(漢)나라를 지나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치면서 고대 주나라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즉 진(晉)나라에서는 '예기(禮記)' 와 '춘추(春秋)' 에서 언급한 ‘형제간에는 소목(昭穆)을 같이한다’ 라는 대목에 근거하여 혈연상 같은 세대는 종묘의 묘(廟)를 같이 하여 1대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동세이실(同世異室)’ 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진(晉)나라의 종묘는 6대 11실, 당(唐)나라의 종묘는 9대 11실, 송(宋)나라의 종묘는 9대 12실이 될 수 있었고, 고려시대의 경우 5대 9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세이실’ 제도는 사실상의 왕위를 기준으로 7대를 파악했던 주나라의 제도를 변통(變通)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 보이는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경우 7대가 아닌 9대가 종묘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불천위(不遷位)의 관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불천위의 설명은 '세조실록' 에 "예조가 아뢰기를, 묘제를 상세히 살펴보니,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로 줄어들기를 둘씩 하는데, 제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功)이 있으면, 조(祖)라 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라 하여 7묘.5묘 이외에 또 백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신위[百世不遷之位]가 있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세실(世室)과 노(魯)나라의 세실옥(世室屋)이 이것입니다." 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 '世祖實錄' 卷 7 世祖 3年 3月 甲申 '禮曹啓  詳廟制 天子七 諸侯五 大夫三 降殺以兩 不可踰制 然祖功宗德 七廟五廟之外 又有百歲不遷之位 周之文世室 魯之世室屋 是已') '세조실록' 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종묘의 제도는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로 이를 변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역대의 제왕(帝王)중에 특별히 공(功)과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세실(世室)로 정해 영원히 종묘에 봉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보았던 당나라와 송나라의 종묘신주가 9대에 이른 것은 그 중 2대가 불천위인 ‘세실’로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라는 기본 원칙과 이를 왕위가 아닌 혈통으로 이해한 ‘동세이실’제, 그리고 역대 국왕 중 특별한 공덕(功德)이 있는 경우 ‘세실’이라는 ‘불천위’로 지정한 것 등이 종묘의 묘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조선시대에는 앞의 두 가지 사항을 기본 전제로 하여 종묘가 세워졌고 운영되었는데, 세 번째의 경우 이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보다도 적극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종묘제례 뿐 아니라 종묘의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함께 총 34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신위 영녕전은 총 16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중앙에는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신위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왼쪽의 협실에는 정종(定宗), 문조(文祖), 단종(端宗), 덕종(德宗), 예종(睿宗), 인종(仁宗)이, 오른쪽의 협실에는 명종(明宗), 원종(元宗), 경종(景宗), 진종(眞宗), 장조(莊祖),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영녕전에 봉안된 신주들을 보면 다양한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같이 이성계의 4대조로 추증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바로 왕으로 추증되었고, 종묘가 태조 4년(1395)에 건설되자 바로 종묘에 봉안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생존해 있지도 않았고, 더욱이 왕으로 활약한 적도 없지만 이성계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종묘에 봉안된 인물들이다. 원래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면 종묘와 사직이 건설되고, 종묘에 봉안되는 첫 신주는 개창자인 태조가 된다. 그리고 세대가 흘러 묘제(廟制)를 넘어 친진(親盡)된 대상이 나오면 별묘를 세워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건국자의 선조는 따로 별전(別殿)을 세워 신주를 봉안할 뿐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역대 왕조나 고려시대의 경우 일부의 가감(加減)이 있었지만 대체로 준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와 달리 건국 시조의 4대 조상을 종묘에 안치하였고, 태조는 죽은 뒤 5번째의 신주로 종묘에 봉안되었다. 이후 정종이 죽자 5대를 넘는 목조를 영녕전으로 옮겼고, 세종의 사후 익조를, 문종의 사후 도조를, 예종의 사후 환조를 영녕전에 각각 옮겼던 것이다. 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명종, 경종 등은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활약하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23년간 왕위에 있었던 명종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재위기간이 1∼2년에 불과하였고, 더욱이 이들이 죽은 후에 다음대의 왕위는 자식이 아닌 동생들에게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후대에 그들은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지 못하고, 친진(親盡)이 되자 바로 영녕전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단종의 경우에는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그 후의 왕들 역시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다. 그러다가 200여년이 지난 숙종때에 이르러서야 복위되고 단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아 영녕전에 그 신주가 봉안되었다. 덕종, 원종, 진종, 장조 등은 조선왕조 기간동안에 추증되어 종묘에 부묘 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겨진 경우이다. 이들은 현 국왕이 바로 앞의 선왕과 혈연적으로 부자(父子) 관계를 갖지 않았을 경우 친아버지 혹은 의제적(擬制的)인 아버지의 자격으로 추증되어 종묘에 모셔졌던 인물들이다. 이중 덕종은 성종의 친부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세조의 장자)이고, 원종은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定遠君: 선조의 3자], 장조는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영조의 2자]이다. 다만 진종의 경우 조금 다른데, 그는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로, 영조가 다음대의 왕위가 세손(世孫)인 정조에게 옮겨졌을 때의 정치적 불안을 막고자 유언으로 효장세자와 정조를 부자지간으로 만든 것에 기인해 그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겨진 것이다. 의민황태자의 경우 조선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종의 아들이었던 그를 순종의 다음대로 인정해 영녕전에 봉안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을 것 같다. 의민황태자의 경우 정식으로 황제(혹은 왕)로 즉위한 적이 없고, 현재 영녕전의 신위들은 추증된 왕의 경우에도 종묘를 거쳐 영녕전으로 옮겨졌으며, 그리고 종묘의 친진(親盡)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 점들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사항들은 조선왕조 500년간 지속되어온 일관된 원칙인데, 후손들이 임의적으로 이를 수정한다는 것은 종묘의 올바른 정신을 계승하는 데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녕전에 봉안된 역대 왕과 왕비들> 왕호 생몰연대 재위기간 선왕 생부 생모 관계 왕비 부묘시기 천묘시기 목조 ?~1274 x x 이자춘 이씨 공효왕후이씨 태조4년 (1395) 세종3년 (1421) 익조 ?~? x x 목조 공효왕후이씨 정숙왕후최씨 태조4년 (1395) 문종2년 (1452) 도조 ?~1342 x x 익조 정숙왕후최씨 사남 경순왕후박씨 태조4년 (1395) 단종2년 (1454) 환조 1315~ 1360 x x 도조 경순왕후박씨 의혜왕후최씨 태조4년 (1395) 성종3년 (1472) 정종 1357~ 1419 1398~ 1400 태조 태조 신의왕후한씨 차남 정안왕후김씨 세종3년 (1421) 연산군2년 (1496) 문종 1414~ 1452 1450~ 1452 세종 세종 소헌왕후심씨 장남 현덕왕후권씨 단종2년 (1454) 연산군2년 (1496) 단종 1441~ 1457 1452~ 1455 문종 문종 현덕왕후권씨 장남 정순왕후송씨 x 숙종24년 (1698) 덕종 1438~ 1457 - - 세조 정희왕후윤씨 장남 소혜왕후한씨 성종7년 (1476) 광해군2년 (1610) 예종 1450~ 1469 1468~ 1469 세조 세조 정희왕후윤씨 차남 장순왕후한씨 안순왕후한씨 성종3년 (1472) 광해군2년 (1610) 인종 1515~ 1545 1544~ 1545 중종 중종 장경왕후윤씨 장남 인성왕후박씨 명종2년 (1547) 현종2년 (1661) 명종 1534~ 1567 1545~ 1567 인종 중종 문정왕후윤씨 차남 인순왕후심씨 선조2년 (1569) 현종2년 (1661) 원종 1580~ 1619 x x 선종 인빈김씨 장남? 인헌왕후구씨 인조13년 (1635) 경종2년 (1722) 경종 1688~ 1724 1720~ 1724 숙종 숙종 희빈장씨 장남 단의왕후심씨 선의왕후어씨 영조2년 (1726) 헌종 3년 (1837) 진종 1719~ 1728 x x 영조 정빈이씨 장남 효순왕후조씨 정조2년 (1778) 철종 2년 (1851) 장조 1735~ 1762 x x 영조 영빈이씨 장남 헌경왕후홍씨 순조14년 (1814) 영왕 1897~ 1970 x x 고종 귀비엄씨 칠남 의민황태자비이씨 x 1973년 5월6일 제1실 왕호 목조(穆祖) 생몰연대 ?~1274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이양무(李陽茂) 생모 이씨(李氏) 관계 ? 왕비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6일 제2실 왕호 익조(翼祖) 생몰연대 ?~?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목조(穆祖) 생모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관계 ? 왕비 정숙왕후최씨(貞淑王后崔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문종 2년(1452) 4월 9일 생몰연대 ?~1274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이양무(李陽茂) 생모 이씨(李氏) 관계 ? 왕비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6일 제3실 왕호 도조(度祖) 생몰연대 ?~1342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익조(翼祖) 생모 정숙왕후최씨(貞淑王后崔氏) 관계 四男 왕비 경순왕후박씨(敬順王后朴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단종 2년(1454) 7월 15일 제4실 왕호 환조(桓祖) 생몰연대 1315~136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度祖(도조) 생모 경순왕후박씨(敬順王后朴氏) 관계 ? 왕비 의혜왕후최씨(懿惠王后崔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성종 3년(1472) 정월 12일 제5실 왕호 정종(定宗) 생몰연대 1357~1419 재위기간 1398~1400 선왕 태조(太祖) 생부 태조(太祖) 생모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정안왕후김씨(定安王后金氏) 부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8일 천묘시기 연산군 2년(1496) 정월 20일 제6실 왕호 문종(文宗) 생몰연대 1414~1452 재위기간 1450~1452 선왕 세종(世宗) 생부 세종(世宗) 생모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관계 長男 왕비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부묘시기 단종 2년(1454) 7월 16일 천묘시기 선조 2년(1569) 8월 16일 제7실 왕호 단종(端宗) 생몰연대 1441~1457 재위기간 1452~1455 선왕 문종(文宗) 생부 문종(文宗) 생모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관계 長男 왕비 정순왕후송씨(定順王后宋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숙종 24년(1698) 12월 24일 제8실 왕호 덕종(德宗) 생몰연대 1438~1457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세조(世祖) 생모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관계 長男 왕비 소혜왕후한씨(昭惠王后韓氏) 부묘시기 성종 7년(1476) 정월9일 천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0일 제9실 왕호 예종(睿宗) 생몰연대 1450~1469 재위기간 1468~1469 선왕 세조(世祖) 생부 세조(世祖) 생모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장순왕후한씨(章順王后韓氏) 안순왕후한씨(安順王后韓氏) 부묘시기 성종 3년(1472) 정월 12일 천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0일 제10실 왕호 인종(仁宗) 생몰연대 1515~1545 재위기간 1544~1545 선왕 중종(中宗) 생부 중종(中宗) 생모 장경왕후윤씨(章敬王后尹氏) 관계 長男 왕비 인성왕후박씨(仁聖王后朴氏) 부묘시기 명종 2년(1547) 9월 17일 천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3일 제11실 왕호 명종(明宗) 생몰연대 1534~1567 재위기간 1545~1567 선왕 인종(仁宗) 생부 중종(中宗) 생모 문정왕후윤씨(文定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 부묘시기 선조 2년(1569) 8월 16일 천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5일 제12실 왕호 원종(元宗) 생몰연대 1580~1619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선종(宣祖) 생모 인빈김씨(仁嬪金氏) 관계 長男? 왕비 인헌왕후구씨(仁獻王后具氏) 부묘시기 인조 13년(1635) 3월 19일 천묘시기 경종 2년(1722) 8월 8일 제13실 왕호 경종(景宗) 생몰연대 1688~1724 재위기간 1720~1724 선왕 숙종(肅宗) 생부 숙종(肅宗) 생모 희빈장씨(禧嬪張氏) 관계 長男 왕비 단의왕후심씨(端懿王后沈氏) 선의왕후어씨(宣懿王后魚氏) 부묘시기 영조 2년(1726) 10월 13일 천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4실 왕호 진종(眞宗) 생몰연대 1719~1728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영조(英祖)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 관계 長男 왕비 효순왕후조씨(孝純王后趙氏) 부묘시기 정조 2년(1778) 5월 2일 천묘시기 철종 2년(1851) 6월 9일 제15실 왕호 장조(莊祖) 생몰연대 1735~1762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영조(英祖) 생모 영빈이씨(映嬪李氏) 관계 長男 왕비 헌경왕후홍씨(獻敬王后洪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순조 14년(1814) 3월 1일 제16실 왕호 영왕(英王) 생몰연대 1897~197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고종(高宗) 생모 귀비엄씨(貴妃嚴氏) 관계 七男 왕비 의민황태자비이씨(懿愍皇太子妃李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1973년 5월 6일 현대적 의의" 제례의 내면에 깔려있는 의식세계의 올바른 계승은 바람직한 한국문화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매년 5월이 되면 종묘에서는 대규모의 제례의식이 거행된다. 종묘의 뜰 앞에서 펼쳐지는 엄숙한 제례의식은 장엄한 종묘의 건물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한다. 찰칵거리는 카메라의 소음과 유치원생 꼬마들의 반짝이는 눈망울, 노란 머리털의 이방인들의 진지함 등이 함께 묻어져 나온다. 한쪽에서는 교수들이 내준 과제 때문에 마지못해 왔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재잘거리는 여대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중 과연 얼마나 종묘제례를 이해하고 혹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고 있을까. 종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신전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신전이나 기독교의 교회들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그리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들을 모셔놓고 추앙하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추모의 장소이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식들은 오랜 기간 동안 부모의 뜻을 잊지 않고 추모하는데, 그 추모를 시행하는 장소가 사당이며, 이 사당이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곳이 종묘인 것이다. 제사는 자식이 부모를 추모하는 ‘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몰려든 일가 친척들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전통적인 방식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들은 종묘제례를 시행하며,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왕실의 안녕은 국가가 평안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양자는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왕조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종묘제례를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제사로 한정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후자의 입장에서 종묘제례를 바라보며,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문화재들을 보면서 감탄한다. 그러나 그 웅장하고 화려한 이면에는 그것들의 제작을 위해 쏟아 부어야 했던 당대인들의 엄청난 땀과 고통이 있었음을 잊고 있다. 당시의 피지배층들은 그러한 문화재들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거나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후손들은 그러한 문화재를 통해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실제로 외국 관광객의 유치를 통하여 이익을 챙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예(禮)를 통한 합리적 통치, 즉 예치(禮治)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의 과도한 동원을 통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제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제작된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이 종묘이다. 그러나 종묘는 국왕을 비롯한 일부 지배층의 유희를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목적 아래 통치권자 및 지배층의 자기 성찰을 추구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종묘와 동격인 사직을 건립하여 여기서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제사하였던 것이다. 현재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 건축의 웅장함과 제례악의 엄숙성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종묘라는 현존하는 탁월한 건축물위에다 시간적으로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실제적인 제례의식이 그대로 재현되어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후자의 제례의식이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종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여타의 문화재와는 달리 상당한 문헌 자료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고증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요사이 기성세대는 세대가 내려갈수록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접근할 경우 금방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엄격한 고증을 통한 올바른 문화의 상(像)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전통적인 것이라 알고 있는 상당수의 문화현상이 일제시대에 천박하게 왜곡.변형되었음에도 이를 전통이라 우기는 모습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된다. 한 사회의 문화는 과거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를 반성한 바탕 위에 합리적으로 현재의 사실을 결합시켜야만 수준 높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묘제례는 엄격한 문헌고증을 통해 조선시대 문화의 가장 큰 줄거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제례의 내면에 깔려있는 의식세계의 올바른 계승은 향후 바람직한 한국문화의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원.

이방원"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즉위 후, 의정부(議政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도 설치하였다.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방간·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대신들 가운데 일부가 동모제(同母弟)를 세자로 삼은 전례가 없다며 왕태제(王太弟)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며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종에게서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0년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취약점은 정통성이었습니다.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비정한 형. 민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인정을 받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죠. 아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함흥으로 떠납니다. 태종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여러 번 관리인 차사를 보냈어요. 그러나 태종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성계는 차사들이 올 때마다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죽여버리죠. 이렇게 해서 함흥차사1)란 말이 생겨난 겁니다. 때마침 이성계가 나고 자란 동북 지방에서 태종에게 반대하는 난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성계가 가담한 거죠.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이 벌어진 겁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인 늙은 아버지, 이성계는 허무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태종은 직접 아버지가 있는 함흥으로 찾아가 돌아가자고 해요. 한 마디로 봐주겠으니 돌아가자는 거죠. 이렇게 이성계의 한 달 만의 외출은 끝나게 됩니다. 떨떠름하긴 해도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이제 태종은 거리낄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있었어요. 바로 아내 원경왕후 민 씨입니다. 민 씨는 정말 당찬 여자입니다. 일단 남편이 왕이 되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자신의 두 남동생도 남편의 심복으로 삼는 등 왕자의 난 때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이 큰 만큼 입김이 셋던 것도 당연하겠죠?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부인 민 씨의 행복도 태종이 왕이 되면서 깨져버리게 돼요.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젊은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거든요. 남편의 배신을 참지 못한 그녀는 태종이 가까이 한 궁녀를 직접 벌하기까지 하죠. 그러자 태종은 중전을 모시는 시녀와 내시들을 모두 내칩니다. 처가에 대한 숙청, 강력한 왕권강화로 이어지다 벌은 부인의 아랫사람들이 받았지만 사실상 부인에게 내린 법이었죠. 한술 더 떠서 태종은 후궁제도를 아예 법으로 만들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새엄마, 태조의 경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반역 혐의로 처남 2명을 처벌하면서 민 씨 일가는 몰락하게 됩니다. 이걸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왕은 자신의 친척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죽일 수 있다!’였죠. 처가에 대한 숙청은 강력한 왕권강화로 이어지게 됩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태종은 사병을 없앱니다. 자신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사병이었잖아요. 그러니 민간에서 사사로이 소유하는 병사들과 무기를 금지해서 미연의 불상사를 방지하려고함. 개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여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인 양전사업2)을 벌이고 주민등록제도인 호패법3)을 실시합니다. 또 신권의 상징이었던 의정부서사제에서 6조직계제로 시스템을 바꿉니다. 의정부를 빼고 왕과 정책실행기구인 6조가 직접 일을 처리하면서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힘을 약화시킨다. 왕권이 강했던 태종도 신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냥이었죠. 태종은 사냥을 정말 좋아해서 가능하면 자주 나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왕의 사냥 행차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일이라 신하들이 반대했던 거죠. 웬 돈이 들어가느냐고요? 일단 해당 지역 백성들은 곡식이 여물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추수를 끝내야 했어요. 짐승들이 여기저기 못 숨게 하기 위해 수풀도 다 깎아놔야 했죠. 호송하는 신하들까지 합치면 사냥 지역으로 행차하는 인원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들을 대접하는 것도 모두 마을 사람들의 부담이었어요. 심지어 사냥에 필요한 몰이꾼은 5천 명 정도나 필요했습니다. 이래저래 민폐죠! 대간의 언관들은 태종이 사냥의 ‘사’ 자만 꺼내도 목에 핏대를 올리고 반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태종은 군사 훈련이라며 궁색한 변명을 하기 바빴고 하지만 대간이라도 없앨 수는 없었다. 태종은 그들이 좀 더 바른말을 할 수 있도록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줬고 만약 그들이 없다면 신하들의 비리를 감시할 사람도, 바른말을 할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귀찮지만 꼭 필요한 존재. 그들이 바로 대간이었다. 태종에게도 너무나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자 양녕대군. 태종은 자신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이은 만큼 아들만큼은 정통성이 있길 바랐어요. 마치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독재자가 자기 아들만큼은 투표를 통해 다음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요? 그래서 조강지처의 장남 양녕대군에게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양녕은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였습니다. 항상 공부를 빼먹고 기생과 어울리고 심지어 민가의 개를 훔치기도 하고. 실록의 기록을 보면 카리스마 초절정의 태종이 양녕대군으로 인해 목이 다 쉬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가를 깡그리 제거한 냉혈한인 것 같으면서도 아들 앞에선 한없이 약한 아들 바보였던 거죠. 계속해서 양녕의 잘못을 넘어가주던 태종도 등을 돌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조선을 뒤흔든 ‘어리 스캔들’이었고. 양녕대군이 양반의 첩인 어리를 보고 한눈에 반해 연애를한다. 유교적 질서를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태종은 양녕이 어리와 헤어지겠다며 용서를 빌자 처음엔 넘어가줍니다. 실은 헤어지지 않았던 거예요. 어리를 스님으로 위장해서 몰래 궁으로 데려오면서 관계를 이어나갔던 거죠. 이 일이 발각되자 결국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하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가 바로 대왕 세종입니다. 태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 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모역(謀逆)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천하의 모든 오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너는 어진 임금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도록 하라.” 태종 이방원이 임종할 때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오늘날 세종은 어질고 현명한 임금으로,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권쟁탈전을 거쳐 권좌에 오른 피의 임금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낸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아버지 태종의 집념이 빚어낸 피와 땀의 결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왕권을 획득해 후대에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위대한 임금의 아들로서 그리고 어진 임금의 아버지로서 소설보다 더욱 흥미로운 삶을 살다간 태종은 퍽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현실이 그때와 유사함을 볼 때 자못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세 권 분량의 소설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변방 신흥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 권문세가의 후예들로부터 신분적 좌절을 맛본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헌한다. 그 후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비롯한 친인척, 조정 공신들을 살해하거나 귀양 보내는 등 차례로 정적들을 없애고 마침내 조선 3대 왕위에 오른다. 태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왕세자 방석을 죽이고 태조가 믿고 의지하던 정도전마저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미움을 사 끝까지 화해하지 못한 채 왕권 확립에만 몰두하다 의리를 지키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단하는 결단력 이면에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던 걸까? 태종의 여성편력은 열두 명의 부인을 거스리고 슬하에 12남 17녀를 둔 데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끝내 버림 받은 뒤 아들에게 어진 임금을 당부하며 죽어간 고독한 임금 태종 이방원! 1405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도전.鄭道傳

정도전 鄭道傳"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민본사상"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장자방 이 되다."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요동 정벌, 표전문 사건"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정도전은 화의 근원” -명태조 주원장. “헤어진 지 오래되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최긍이 와서 안부를 듣게 되니 적잖이 위로가 되었소.” -태조 이성계. “잘 되어간다. 만일 잘 안 풀리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해주지”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다. 나는 조선의 장자방이다.” -정도전."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행정 : 경복궁(景福宮)의 위치 및 이름 제정 / 판삼사사_국가 재정 총괄 군사 : 판의흥삼군부자_국가 병권 담당 / 병서 <사시수수도>, <진도>를 지어 병사훈련에 활용 - 강력한 조선군을 만들어 요동정벌을 계획 교육 : 세자 교육 역사 : 역사서 <고려국사>저술 음악 : 악사 <문덕곡>, <몽금척> 등을 지어 조선 궁중음악의 기틀을 마련 법 : <경국대전>의 모태인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저술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한 정도전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했다. (요동정벌을 반대하던) 조준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8월 9일. 세계를 제패한 몽골에 맞서 40년을 버텨낸 나라, 고려 수비에 유리한 산악지형 / 활의 명수들이 포진 흩어진 사병들을 통합해 단일 지휘체계를 확보한다면 요동 정벌은 가능하다! 명태조 주원장이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여겨 제거하려고 했으나 태조 이성계가 보호 시대를 앞서간 정도전" 태종은 정도전이 구상, 추진한 정책의 대부분을 그대로 실행 요동 정벌, 재상총재제1)는 따르지 않음 정도전은 전문 정치인인 재상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 · 안정적이라 생각 "왕에게는 재상 임명권을 부여 “똑똑한 명군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도 있지만 멍청한 암군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만약 정도전이 더 오래 살았다면... 재상 중심의 입헌군주제 / 단일 지휘체계 확보, 요동정벌 재상이 국정을 총괄하는 제도 (=입헌군주제) “개국 초기에 시행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써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신숙주 "정의"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생애"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 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이방석(李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사항"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 1.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2. 병법에 관한 것"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이름 높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머리가 좋았고 열심히 공부를 해 벼슬자리에 올랐지요. 나랏일을 하는 관리로서의 삶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백성들에게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을 비판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귀양 생활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백성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정도전은 백성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이성계 장군의 도움을 얻기. 이성계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었어요.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을 설득 둘은 나라의 개혁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토지 제도를 바로 잡고자 ‘과전법’을 실시. 귀족들이 불합리하게 가지고 있던 땅을 다시 빼앗아 토지 대장(토지에 관한 것들을 기록해 놓은 장부)을 새로 만든 것.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는 넓은 토지를 정리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바꾸어주고 싶어서 실시한 개혁적인 정책.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통치 제도를 만들었어요. 또한 새 도읍 한양의 건설에 총책임을 맡았음. 경복궁이나 다른 도성, 거리, 사직단 등 도시의 기본적인 모습은 정도전의 손으로 탄생한 것. 정도전은 각 건물마다 조선이 유교적 국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름까지도 직접 붙임. 정도전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일어난 왕자들 사이의 싸움인 ‘왕자의 난’으로 그만 죽임을 당함.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위를 차지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정도전을 죽임을당함.

전자올겐 영시에 이별 korg Microarranger

2017년 12월 1일 금요일

유성룡柳成龍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42년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학자가 될 꿈을 갖고 성장하던 중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을 때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유성룡은 스승인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스승인 이황 선생을 통해 유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 [근사록(近思錄)]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근사록]은 향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출세"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유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인종(仁宗, 조선 12대왕. 중종의 장남)을 문소전(왕의 신주가 모셔진 곳)에 배향하는데 있어 공론을 형성했던 공로도 작용했다. 30세 때는 병조좌랑에,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는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마친 1576년 유성룡은 사간원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유성룡은 타고난 경세가(經世家)로 알려져 있는데, 1607년(선조 40)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귀국한 뒤에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류성룡은 정치가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생애 대부분을 활약했지만,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게 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류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 등과 함께 통신사로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뒤로 거의 말년까지 정란에 휩싸인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 전심전력하였다. 말년에는 북인으로부터 주화론자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정치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직된 뒤에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영모록』·『지행설』 등을 지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러한 정국에서 유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유성룡은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했지만, 이는 뒷날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유성룡이 벼슬살이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논란이 생기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47세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이때를 전후로 고위관료가 되는데, 이 무렵 동인계의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반란)가 일어났다. 정여립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정은 서인 천하가 되었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하는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서인의 좌장격인 정철이 귀양을 가면서 동인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과 낙향" 유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 고향인 하회에서 은거하는 동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아 7년간 왕의 부름에도 거절하며 고향을 지켰다. 그러는 가운데 160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 벼슬을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되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의 저술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가 모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시 하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유성룡은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라며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 유성룡은 선견지명적인 인재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출사(出仕)하여 최고 관직까지 오른 탓에 비교적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업적 또한 평가절하 당한 면이 많다. 그러한 배경에는 붕당싸움(黨爭)과 임진왜란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에게 더욱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훈련도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5군영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영으로 성장했으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그의 선구적인 정책 또한 훗날 대동법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왜란을 통해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사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경세가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그가 가진 경험과 식견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 등 전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1712년 조정에서 이 책의 일본 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유성룡이 국가 개혁을 위해 생각했던 것은 실로 방대하였다.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시책을 추진했고, 염업, 수산물 유통 등 물자의 수급조절과 품질향상에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보낸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하회마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병산리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 등의 지방 유림들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 기관이었는데, 선조 5년(1572)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 성과가 크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은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안동포가 생산되는 마을이다. 삼베길쌈이 워낙 성했던 곳이라 다른 마을 처녀가 시집오기를 꺼려했을 정도라는데, 이제는 이곳마저도 안동포를 짜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서민들이 즐겨 입었던 안동포는 구경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옆에 위치한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이천동 석불, 일명 제비원 석불이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미터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그대로 깎아 몸통을 만들고 2미터 높이의 바위를 부처의 머리로 만들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주의 근본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라고 노래한 무가(巫歌) 「성주풀이」의 기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석불이 있는 이천동 영남산에 연미사가 있다. 안동부 관아는 화산(花山) 남쪽에 있다. 황강 물은 동북방에서 흘러오고 청송읍(靑松邑) 냇물은 임하(臨河)를 지나온다. 이 두 물이 동남방에서 합쳐서 고을 성을 돌며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에 영호루(映湖樓)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 누각 위에서 잔치하며 놀았다. 누각에 걸린 현판은 바로 공민왕이 쓴 것이다. 영호루 북쪽에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 있다. 지금은 절이 망해 스님은 없어도 그 정전은 들 복판에 따로 서 있는데 조금도 기울지 않아 사람들이 노나라의 영광전(靈光殿)에 견준다. 『택리지』에 실린 안동에 관한 기록이다. 안동의 영호루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일컬어졌다. 김종직은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서 “영호루는 안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그 강산의 뛰어난 장관은 비록 촉석루나 영남루에 비해서는 더러 손색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똑같이 낙동강 언덕에 자리한 상주의 관수루(觀水樓), 선산의 월파정(月波亭)은 자못 영호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영호루의 현판은 고려 말(1380년) 공민왕의 필적으로 전해진다. 영호루가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 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하기도 했고, 호숫가에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환도한 뒤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영호루’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내려 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호루는 여러 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다섯 차례 유실되었고, 일곱 차례 중수되었다. 1934년 7월 23일에는 낙동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현재의 영호루를 지었다. 옛 영호루는 지금 자리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이곳을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태백산 꼭대기에 응축한 맑은 기운 이 누대 앞에까지 달려와서 펼쳐졌네 바닷물과 산맥이 삼천리를 에워싼 곳 흥성한 예악 문물 사백 년을 이어왔네 푸른 물 맑은 모래 아름답게 빛나고 드높은 성 거대한 집 빽빽하게 연이었네 하회마을 고택은 알괘라 어드메냐 딴 시대라 쓸쓸히 한번 슬퍼하노라. 안동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안동도호부」편 「형승」조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1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이 가장 뛰어나게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인 『영가지(永嘉志)』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을 일컬어 “산은 태백에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에서부터 흘러온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출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안동 상전(床廛) 흥정이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는 옛날 안동 상전에서 여자들이 조용히 상을 사가듯 말없이 행동할 때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동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를 유교 문화권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지방의 열악했던 자연 환경과 독특한 역사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안동 지방은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중기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남인 세력이 3백여 년 동안 묻혀 지낸 ‘야당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 한 알 먹고 요기한다’는 선비 기질의 권위를 가졌고, ‘열 끼를 굶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체모가 이해관계에 앞섰던 가치관도 대물림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안동문화원장을 지냈던 유한상 씨는 이런 기질을 가진 안동 사람을 ‘안동 숙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607년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향년 66세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현재 병산서원ㆍ남계서원ㆍ도남서원ㆍ삼강서원ㆍ빙계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Sahara Des., ─沙漠

Sahara Des., ─沙漠 면적은 약 860만㎢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아틀라스산맥에서 나이저강(江)·차드호(湖)에 이르는 남북길이 약 1,700km이다.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사바나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막 지역은 열풍으로 기온이 올라간다. 게다가 사막에는 강우가 적기 때문에 잡초를 제외하고는 수목이 자랄 수 없어 일반적인 땅보다 더 더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없다. 사막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막은 아프리카 대륙 북부에 있는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 사막의 ‘사하라’라는 말은 아랍어 ‘사흐라(Sahra: 불모지)’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식생이 없는 적색 평원을 뜻하는 ‘아샤르’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한 이곳은 나일 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 강 서쪽의 아하가르 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사하라와 아하가르 산맥 서쪽의 서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른다. 또 동서 사하라는 다시 여러 개의 사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기다 사막, 세시 사막, 엘주프 사막, 테네레 사막, 리비아 사막, 누비아 사막, 동부 대사구, 서부 대사구 등으로 구분된다. 사하라 사막도 한때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던 곳이었다. 이는 사하라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 그려져 있는 코끼리와 기린 같은 동물의 모습과 사람들이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는 모습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들 지역 대부분이 사구나 암석으로 변해 있다. 보통 사막이라고 하면 모래로 이루어진 평지이거나 얕은 모래 언덕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하라에는 타하트 산, 티베스티 산과 같이 해발 3,000m에 이르는 산도 있다. 또 북회귀선1) 북쪽에 있는 1,000m 이상의 산에서는 겨울철에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막이라고 해서 다 평평하고 날씨가 더운 것만은 아니다. 사하라의 연평균 기온은 27℃이지만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막이 워낙 넓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의 온도 분포로 설명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알아지지야 지역에서 기온이 최고 58℃까지 올라간 기록이 있으며 낮에는 보통 40~50℃까지 올라가고, 야간에는 10~20℃ 이하로 내려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기온이 급변하는 기후의 특징 때문에 암석이 빠르게 붕괴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고 사막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사하라 사막을 국가별로 나누면 서사하라,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의 북부 사하라와 모리타니, 니제르, 차드, 수단 등의 남부 사하라로 나뉜다. 역내의 국가 중 건조 지역이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할 때 리비아 (99%)와 이집트(98%)가 사하라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사하라 전역에 걸친 주민의 총수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약 200만 명은 사하라 북단의 아틀라스 산맥, 지중해 인접 지역, 나일 강 유역 등에 거주한다. 내륙 지대에는 티베스티ㆍ아하가르 산의 기슭과 페잔, 그 밖의 큰 오아시스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사하라 내의 도시 중 리비아의 사바(Sabhah)는 11세기부터 오아시스에 발달한 도시인데, 1943~1963년에는 페잔(Fezzan) 주의 주도로 성장하였다. 순백색 빌딩과 넓은 거리로 정돈된 지금의 시가지와 토담집과 비좁은 골목길이 들어찬 구시가지로 나뉘는데, 한때 이탈리아의 기지였던 엘레나 요새는 현재 사무실ㆍ상점ㆍ병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이 도시는 사하라 사막에서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튀니지와 차드로부터 자동차 편으로 오는 무역상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중해 연안 지방과는 도로나 항공 편으로 연결되는데 리비아 정부에서는 농업 진흥 계획에 따라 이 도시 인근에 관개 시설을 조성 중이다. 아프리카 전 대륙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제국주의의 경쟁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사하라 사막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사하라의 서반부를, 영국은 동반부를, 이탈리아는 리비아 지역을 각각 식민지화하였다. 이는 주로 지하자원을 캐내 가기 위함인데 사막이라는 지형상의 특수성(수송 문제) 때문에 대부분의 강국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전 사하라를 통째로 삼키려던 프랑스의 야심 찬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이집트의 혁명(1952)과 리비아의 독립(1951)을 계기로 잠시 주춤 하였지만 알제리의 석유, 모리타니의 철광석, 리비아의 유전, 니제르의 우라늄 광산이 개발되자 프랑스는 영유권을 강화하고 식민지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사하라 사막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사하라 지역의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이며, 1964년까지 사하라 지역의 모든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덥고 건조한 곳으로 메마른 고원과 자갈로 뒤덮인 평원, 그리고 광활한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땅, 바로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는 ‘황야’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사흐라Sah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하라 사막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이하로 매우 건조하다. 연평균 기온이 27℃ 이상인 곳이 대부분이고, 낮과 밤의 기온차는 30℃를 넘는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암석의 기계적 풍화 작용을 촉진시켜 사막에 모래를 공급하는 주요인이 된다.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사막은 약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된 대지이다. 사막의 기반암은 약 6억 년 이전의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것이며 이 기반암 위를 사암과 석회암이 덮고 있었다. 이 사암과 석회암은 약 1억 년 전 사하라 사막 대부분이 바다에 잠겼을 때 퇴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사막의 모래는 이 암석들이 풍화된 알갱이들이다. 사막의 모래는 바다에서 생성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 7,000만 년 전 이후 신생대로 접어들면서 사하라 사막 일대가 육지화되고 표토층인 사암과 석회암이 풍화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생대 제4기 약 200만 년 전 이후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며 암석의 풍화에 의한 모래들이 쌓여 지금의 사막이 형성되었다. 풍요의 땅이 불모의 땅으로 변한 이유는? 지금은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강이 흐르고 나무와 풀로 덮인 비옥한 땅이었다. 주민들은 사냥과 낚시를 하며 살았다. 알제리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에 그려진 기린, 코뿔소, 영양, 사자 등의 동물과 이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보여 준다. 이런 풍요의 땅에서 불모의 땅으로 변한 것은 기온의 변화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7,000년 전에는 지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약 1~2℃가량 높았다. 따라서 적도 부근의 기단이 세력을 확장하여 적도 수렴대가 북상했고 이 적도 수렴대에 사하라 사막 일대가 있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 울창한 초원과 삼림을 이루었다. 반면 지중해 부근은 고압대에 위치하여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같은 매우 건조한 기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이 점차 내려가면서 적도 수렴대가 남하하자 사하라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점차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 4,300년 전부터 사하라의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또한 점차 비와 풀을 찾아 남하했다. 지금의 보츠와나와 나미비아 일대에 사는 부시먼이 바로 그들이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홍해 연안에서 대서양 해안까지 이르는 세계 최대의 사막이에요.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니제르, 차드, 수단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어요. 사하라 사막의 크기는 860만 제곱킬로미터로, 남한의 86배가 넘는 크기예요. 지구가 점점 더워지면서 사하라 사막은 매년 남쪽으로 약 15km씩 더 커지고 있다고 해요. 사하라 사막은 밤낮의 기온 차가 매우 커요. 사하라 사막의 북쪽은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남쪽에는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답니다. 면적은 약 860만㎢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아틀라스산맥에서 나이저강(江)·차드호(湖)에 이르는 남북길이 약 1,700km이다.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사바나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덥고 건조한 곳으로 메마른 고원과 자갈로 뒤덮인 평원, 그리고 광활한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땅, 바로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는 ‘황야’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사흐라Sah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하라 사막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이하로 매우 건조하다. 연평균 기온이 27℃ 이상인 곳이 대부분이고, 낮과 밤의 기온차는 30℃를 넘는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암석의 기계적 풍화 작용을 촉진시켜 사막에 모래를 공급하는 주요인이 된다.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사막은 약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된 대지이다. 사막의 기반암은 약 6억 년 이전의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것이며 이 기반암 위를 사암과 석회암이 덮고 있었다. 이 사암과 석회암은 약 1억 년 전 사하라 사막 대부분이 바다에 잠겼을 때 퇴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사막의 모래는 이 암석들이 풍화된 알갱이들이다. 사막의 모래는 바다에서 생성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 7,000만 년 전 이후 신생대로 접어들면서 사하라 사막 일대가 육지화되고 표토층인 사암과 석회암이 풍화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생대 제4기 약 200만 년 전 이후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며 암석의 풍화에 의한 모래들이 쌓여 지금의 사막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강이 흐르고 나무와 풀로 덮인 비옥한 땅이었다. 주민들은 사냥과 낚시를 하며 살았다. 알제리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에 그려진 기린, 코뿔소, 영양, 사자 등의 동물과 이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보여 준다. 이런 풍요의 땅에서 불모의 땅으로 변한 것은 기온의 변화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7,000년 전에는 지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약 1~2℃가량 높았다. 따라서 적도 부근의 기단이 세력을 확장하여 적도 수렴대가 북상했고 이 적도 수렴대에 사하라 사막 일대가 있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 울창한 초원과 삼림을 이루었다. 반면 지중해 부근은 고압대에 위치하여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같은 매우 건조한 기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이 점차 내려가면서 적도 수렴대가 남하하자 사하라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점차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 4,300년 전부터 사하라의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또한 점차 비와 풀을 찾아 남하했다. 지금의 보츠와나와 나미비아 일대에 사는 부시먼이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