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1일 목요일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유사. 三事.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

일연(一然, 1206~1289)은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호는 목암(睦庵)인데, 후에 이름을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9살 때 광주 무량사에서 공부하다가,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출가하였고, 22세에 승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몽고의 침략이 있었던 31세 때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고, 이 해에 삼중대사를 시작으로 54세에 대선사가 되었으며, 72세에 운문사의 주지가 되었고 78세에 국존이 되었다. 

말년에는 인각사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각사의 비문에는 8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고 하지만, 현재 전하는 책은 비문에 기록되지 않은 『삼국유사』 이외에는 거의 없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각심을 심어주고 흐트러진 고려의 정신을 하나로 모아, 몽고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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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홀연 바위 하나 -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 가 나타나더니,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이것을 본 일본 사람들이,
“이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는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 <일본제기>를 살펴보면, 그 전이나 후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는 어느 변읍의 조그만 왕이요, 
진짜 왕은 아닌 것이다. -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전처럼 세오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니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이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신을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일인데, 지금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신이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이 전과 같아졌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일연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사료를 수집한 것은 청년시절부터였고, 그 원고의 집필은 대개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저자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자 무극()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 곳에 있다. ‘무극기()’라고 표한 것이 그것이다.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행하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 시기 고판본의 인본()인 석남본()과 송은본()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송은본은 현재 곽영대()가 소장하고 있다. 이 본은 3·4·5권만 있는데, 권3의 첫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잔본이다.
석남본은 1940년부터 송석하()가 소장하였던 것으로 왕력()과 제1권만 남은 잔본으로 소장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남본 및 송은본을 모사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 또는 정덕본()이라고 한다. 
이 본의 권말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이계복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 발문에 의하면,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1행 중 겨우 4, 5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다. 
이계복은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발문에는 당시에 전 책판을 개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구각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시 새겼다. 
재판에 각자()의 양식이 다른 것들이 많음은 각 고을에 나누어 새긴 탓이기도 하고, 
개각판은 복각()과 필서보각()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정을 담당하였던 최기동()·이산보()의 교정능력이 의심스럽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존되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중종임신본을 인행()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한다. 
5권이 갖추어진 완본인 순암수택본()은 이계복이 판각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된 것으로, 훗날 순암안정복()이 소장하면서 가필을 한 때문에 이와 같이 불린다. 
이 본은 이마니시[西]가 1916년부터 소장하였는데(일인들은 흔히 西이라 칭한다), 일본의 덴리대학[]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본은 완본이지만 약간의 가필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은 초기의 임신고인본으로 평가되고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이 외에도 중종임신본은 몇 가지 더 전한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西)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 이후 이 책이 두루 유포되어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책에 인용되었고 영향을 주었다. 최근 이 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간행과 유통 또한 활발해졌다.
현시대에 간행, 유포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여러 종류로 영인본·활판본·번역본 등이 있다. 1926년 순암수택본을 축소, 영인하여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총서 제6으로 간행하였고, 고전간행회에서 1932년 순암수택본을 원래의 크기로 영인, 한장본 2책으로 간행하였다. 
1964년 일본의 가쿠슈원동양문화연구소[]에서 고전간행회영인본을 축소, 재영인하기도 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3년 서울대학교 소장본을 반으로 축소, 영인하였는데, 이동환()의 교감을 두주()로 붙이고, 「균여전()」 및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를 부록으로 덧붙인 양장본이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1983년 만송문고본()을 축소, 영인하였다. 부록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소장 필사본, 즉 석남본 및 송은본의 모사본을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활자본으로는 동대본( 문학부, 1904)·속장경본(, 동대본을 정정하여 속장경 지나찬술부 사전부에 수록)·계명본( 교정,  제18호, 1927)·신증본(, 최남선, , 1943·1946)·
증보본(, 민중서관, 1954)·대정신수대장경본(, 1927)·조선사학회본(1928)·한국불교전서본(, 동국대학교 출판부, 한국불교전서 제6책에 수록, 1984) 등이 있다.
『삼국유사』의 번역본으로는 국역본·일역본·영역본 등이 있다. 국역본으로는 사서연역회번역본(고려문화사, 1946)·완역삼국유사(고전연역회 이종렬 책임번역, 학우사, 1954)·원문병역주삼국유사( , 동국문화사, 1956)·수정판역주병원문삼국유사(이병도 역주, , 1977)·
한국명저대전집본(이병도 역, , 1972)·조선과학원번역본(북한에서 1960년 번역)·세계고전전집본( , 광문출판사, 1967)·세계사상교양전집본( , 1975)·권상로역해본( 西, 1978)·
성은구역주본( , 전남대학교 출판부, 1981)·역해삼국유사(박성봉·고경식 역, 서문문화사, 1985)·삼중당문고본( 역주, 1975)·삼성문화문고본(이민수 역, 1979) 등이 있다.
일어번역본으로는, 원문화역대조삼국유사·초역삼국유사·국역일체경본·임영수() 역본·완역삼국유사( 역, , 1979) 등이 있다. 1972년 연세대학교에서 영역본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삼국유사』의 주석서로는 미지나[]의 『삼국유사고증』 상·중 2책이 있다. 색인으로는 이홍직()이 『역사학보』 5집에 발표한 것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삼국유사색인』이 있다. 
이홍직이 작성한 것은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의 부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작성한 색인은 주제별 및 가나다 색인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다를 뿐 아니라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이 책의 체재를 10과()로 분류한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경우와 비슷한 듯하지만, 왕력·기이·효선 등 중국 고승전의 선례와 다른 것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삼국의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다.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도, 불교사서, 설화집성집, 불교신앙을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 잡록적 사서, 야사 등 많은 견해들이 있다. 이 책의 내용에는 불교사적인 것이 많지만, 순수한 불교사서로 보기는 어려우며, 많은 설화를 수록하고는 있지만, 간단히 설화집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삼국유사』는 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어 표현한 것이다.
이 사서가 정사가 아니라고 해서 만록() 정도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신이()한 사화()가 많음이 흔히 지적된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기이할 것이 없다는 일연의 역사인식과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방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연의 역사인식과 서술태도는 유교적 역사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학사적인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비하여 복고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다. 
찬술동기나 서술체재가 서로 다른 두 사서의 직접적인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고, 또 『삼국유사』의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오늘날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는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사지()·비갈()·안첩() 등의 고문적()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다. 또한, 차자표기()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 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삼국유사』는 풍류도()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삼국사기』 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의 찬()이 있어 그의 시문학이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이 책의 체재, 즉 권차()·편목()·항목 등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본문 또한 오자()·탈자()·궐자()·중문()·혼효()·전도() 등으로 인한 변화도 있다. 정밀한 교감이 요구된다. 고대사료가 가진 애매성이나 신이한 설화의 문제도 있다. 역사·문학·종교 등 종합적인 연구와 자세한 주석이 필요하다.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로 표기된 《혜성가()》 등 14수의 신라 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최남선()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에 <왕력()> 제1과 <기이()> 제1을, 권2에 <기이> 제2를, 권3에 <흥법()> 제3과 <탑상()> 제4를, 권4에 <의해()> 제5를, 권5에 <신주()> 제6과 <감통()> 제7과 <피은()> 제8 및 <효선()> 제9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왕력>은 연표()로서, 난을 다섯으로 갈라 위에 중국의 연대를 표시하고, 아래로 신라·고구려·백제 및 가락()의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뒤에는 후삼국(), 즉 신라·후고구려·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 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 등에 관한 유사() 36편을 기록하였고,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다루고 있다. 
<흥법>편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전래의 유래와 고승()들에 관한 행적을 서술한 7편의 글을, 다음의 <탑상>편에는 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 및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을 30편에 나누어 각각 실었다.

<의해>편 역시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으로 14편의 설화를 실었고, <신주>편에는 밀교()의 이적()과 이승()들의 전기 3편을, <감통>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를 각각 실었으며, <피은>편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한 일승()들의 이적을 10편에 나누어 실었다. 
마지막 <효선>편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5편의 미담(뎅그렁거리는 서양의 종소리와 달리 우리는 종의 유장한 울림을 좋아한다. 종이 한번 울리고 그 울림이 이어지다 끝나는 동안, 우리는 그 사이에 인생과 세상의 유상하고 무상한 모든 것을 헤아린다. 
그 여음이 사실은 여음이 아니며 또한 우주의 운행을 깊이 생각해 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그래서 여음이 길면 길수록 좋은 종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종이 좋아 여음만 길어서 무엇 하랴. 치는 이들이나 듣는 이들이나 그 여음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할 일이다. 
비록 그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되,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대라면, 나는 『삼국유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신라 흥덕왕(826~836) 때였다. 

손순()이라는 이는 경주의 모량리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곡식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뺏어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없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려.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불리 먹도록 해야겠소."
그러고서 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멀찌감치 올라갔다. 땅을 파다가 돌로 만든 종을 발견했는데, 매우 기이하게 생겼다. 부부가 놀라워하며 잠시 숲 속의 나무 위에 걸어두고 시험 삼아 쳐보니, 소리가 은은하기 그지없었다. 아내가 말했다.

"기이한 물건을 발견했으니, 아마도 아이의 복인가 합니다. 묻어선 안 되겠어요."
손순도 그렇다 여기고, 곧 아이와 종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엽기적이라고 할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이 대목을 읽히면, 다들 효도라는 말 앞에 기가 죽으면서도, 아무리 그렇다고 손자를 죽이기까지 해서야 나중에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면 마음이 편하겠느냐 반문한다. 딴은 합리적이지만, 사실 이 이야기가 전하자는 메시지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땅을 파다가 발견한 돌로 만든 종이다. 바로 그 종에서 나는 은은하기 그지없는 소리.
종이 없어 돌종이며, 거기서 나는 소리가 났으면 얼마나 은은했단 말인가. 자식을 묻어야할 만큼 지독한 가난의 끝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땅 파기뿐이었지만, 그러기에 거기서 무심한 한 개 돌도 유정한 물건이 되고, 턱턱거렸을 소리도 귀를 울리는 은은한 소리로 바뀌어 들려왔을 것이다.

돌 아니라 무쇠 조각이 나왔다 한들 이야기는 마찬가지다. 굳이 돌종이 된 것은 그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다. 대들보에다 종을 걸어두고 치니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를 듣고 궁금해 하자, 신하들이 그 집에 가서 살펴보고 왕에게 사정을 자세히 아뢰었다. 왕은 그 순수한 효도에 감동하여 집 한 채를 내리고, 매년 메벼 50석씩을 주었단다.

복을 받았다는 말을 하자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 가슴에 무엇을 묻을 것인가. 세상과도 견줄 수 없는 귀한 것을 묻고 돌아서야 할 더 절박한 일은 무엇인가. 그래서 과감히 가슴을 파들어 갔을 때,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우리가 읽는 『삼국유사』에는 이런 이야기로 넘쳐 난다. 첫 페이지의 단군신화에 너무 깊숙이 매료되어, 세상에서는 이 책을 민족 신화와 역사의 현장이라 서둘러 단정하지만, 사실 더 많은 부분은 이 땅에서 살아온 유명·무명의 사람들이 남긴 눈물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네들의 진솔한 생활을 수록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술은 저자가 사관()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다.

당시의 민속·고어휘()·성씨록()·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 및 고적()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한국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으로서 한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보여지는 고기()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이라 일컬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신간본()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의 사지총서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조선사학회본()과 계명구락부()의 최남선 교감본() 및 그의 증보본()이 있으며, 그 밖에 1921년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하여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총서[]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이 있다.

8·15광복 후로는 삼중당본(), 1946년 사서연역회()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에서 간행한 국역본(), 이병도()의 역주본() 등 여러 가지가 있고, 동서문화센터의 이학수() 영역본()과 1954년 《역사학보()》 제5집의 부록으로 이홍직()의 삼국유사 색인이 발간된 바 있다.

야사().대안사서()

우리는 먼저 일연()이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된다. 
이 이름은 그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부모는 견명()이라 지어주었는데, 승려가 되어 회연()이라 불렀다. 본명의 밝음[]과 승명의 어둠[]을 대조시킨 것이다.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이름에 숨어 있다.
13세기 후반에 간행되었을 『삼국유사』 초간본은 그 전본()을 잃은 지 오래다. 실로 초간본의 간행 사실에 대한 단서조차 잡기 힘든 지금 상황에서 크게 두 종류의 원본을 상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고판본()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초기의 간본이요, 다른 하나는 중종 임신년(1512)에 간행된 이른바 정덕본()이다. 
정덕본이라면 『삼국사기』와 아울러 간행경위를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곧 경주부사 이계복()이 성주목사 권주()로부터 완본을 얻고, 경상감사 등의 도움을 받아 새 판을 짜서 보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인식은 어떨까? "13세기 승려 일연이 지어, 『삼국사기』와는 달리 고대 삼국의 야사()를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고전."이라고하는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한두 가지 지적해야 할 대목이 있다. 먼저 '야사'라는 말이다.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다. 그러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조동일 교수에게서 나왔다.

역사서·고승전·설화집이 각기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정착된 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이다. 『삼국유사』는 그 셋을 합쳐 그 셋이 각기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어 새로운 인식과 사고를 열었다. 융합에 의한 창조의 본보기가 오늘날 학문을 위해 소중한 의의를 가져, 통합학문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지침이 된다. 그 작업을 외래문화와 고유문화의 융합과 함께 이룩했다. 
보편적인 의의를 가진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고유문화와 합쳐, 민족문화를 수준 높게 재창조해 세계문화가 될 수 있게 하는 소망을 실현했다.
오늘날 정규학교가 못하는 더 긍정적인 역할을 대안학교가 하듯이,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제는 야사라는 말 대신 대안사서라 쓰자는 것이다. 오류를 고치는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는. 실은 그다지 오랫동안 사랑을 받지 못한 책이 『삼국유사』다. 거의 잊힐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난 책이다.
2006년은 일연의 탄생 800주년이다. 
1206년생인 그가 80세 전후에 『삼국유사』를 편찬하였으니, 『삼국유사』의 탄생은 700여 년 전쯤 된다. 그 사이 이 책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멸망의 역사와 같이했다.  
『삼국유사』는 어떤 대우를 받는 책이었던가?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잊힌 책이었고 그나마 매우 제한적으로 읽힌 책이었다. 20세기 들어서서야 주목을 받았으며, 연구자들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극적인 재발견의 책이다.

『삼국유사』는 재발견의 책이다. 처음에 『삼국유사』가 발간되고 200여 년 만인 조선의 중종 때 경주에서 한 차례 더 나왔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내내 널리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서서야 주목을 받았고, 학자들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중앙승가대학의 불교학연구소가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 현재 2,186편의 논문과 저서가 『삼국유사』를 연구하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물로서 학계에 제출되었다. 
1904년 『삼국유사』를 출간한 이래 2,186편의 논저는 1년 평균 20여 편으로 나뉘고, 결국 100여 년 동안 한 달에 두 편 꼴로 쉼 없이 연구 성과를 냈다는 계산이 된다.

책으로 간행되고 600여 년을 침잠했던 이 책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제 역할을 할 어떤 기회를 잡았다. 
민족이 각성하고 민족의 문제를 가장 내세워야 할 20세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20세기의 민족주의를 삼국유사는 이미 13세기에 소박하게나마 말하고 있다. 
놀라움은 이러한 산술적 계산에만 있지 않다. 앞서 보고서의 목차를 살펴보건대, 자료로서 출간된 각종 판본, 번역본, 비첩, 색인 등을 제외하고서라도 해제, 역사, 사상·종교, 사회·민속, 고고·미술·음악, 신화·설화, 문학일반, 이두·향가, 어학의 9개 분야로 크게 분류된, 인문학의 거의 전 영역에서 『삼국유사』 또는 『삼국유사』를 자료로 한 연구는 빠짐없이 고루 분포한다.

무엇이 『삼국유사』를 재발견하게 하고 이렇듯 폭넓은 관심을 받게 하였을까? 그 까닭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13세기는 역사적으로 20세기 한국의 선험적인 시대였던 것처럼 보인다. 
무인정권의 혼란,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몽고를 대리해서 치러야했던 일본 정벌.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이때만큼 절절이 느낀 적이 있었을까. 
이 시기의 지식인이요 국사였던 일연은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는 요체가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것을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남겼다. 바로 『삼국유사』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의 시기가 없었던 바 아니나, 콧대 센 조선의 유학자들은 승려가 남긴 이 책을 애써 외면했는데, 조금 시야를 넓힌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여기서 어떤 답을 얻고자 했다.

『삼국유사』는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역사서로서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해 볼 수 있다.

'왕력' 편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 편은 양적으로도 역사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현저히 다른 질적인 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기이' 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 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이' 편에서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한 조를 한 왕과 그 왕대의 특징적인 사건 하나를 묶어서 기술해 나간 점이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흥법' 편 이하의 편들을 나는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하였다. 일연은 승려로서 분명한 불교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불교문화사란 그런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흥법' 편 이하가 중국의 승전()을 많이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일찍이 일연과 『삼국유사』를 학문 연구의 테마로 정한 다음, 나는 그 이야기의 현장을 다녀 보기로 했다. 
『삼국유사』는 서안()에서 이루어진 책이 아닌 까닭이다. 일연이 수고로운 땀을 길 위에 뿌렸을진대, 참으로 그 뜻을 캐고자한다면 같은 애를 쓰는 데서 일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일찍이 민영규 선생이 쓴 해제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가능한 한의 필요한 전고()가 과부족() 없이 일연으로 해서 정복되었을 것은 『유사()』의 내용을 아는 이로서 상상키 어려운 일이 아니려니와 또한 우리 후학으로 하여금 놀라 마지않는 점은 그 철저한 실증벽()이다. 
신라에 관한 한의 기사()에 한해서 어느 것 하나 일연 손수 발로 찾아 걸어가서 몸으로 실험해 본 나머지의 것 아님이 없다. 
'탑상' 편의 천룡사() 조에서 저자는 최제안()의 사서()를 동사()에서 목도()해 있고, 의해 편 보양이목() 조에서는 진양부오도관찰사(使), 각도선교사원시창연월형지안() 그 밖의 당사자들의 수고(稿)를 낱낱이 점검하고 있다. 
원용한 자료가 상반된 내용의 것일 때 양자를 원인()함으로써 저자 자신의 경솔한 판단을 경계한다.
일연이 인용한 전고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 최남선()이 편찬해 낸 『삼국유사』의 자상한 해제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방대함에 빠져 언저리를 헤매었지만, 더러는 구체적 물증을 대기 어려운 것이 있고, 어떤 경우 저자가 깔아놓은 선의()의 속임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허점을 채울 충분한 까닭을 대지 못한다면 인용한 글에서 지적한 바, 일연의 실증벽과 그에 따른 실험정신을 놓쳐서는 『삼국유사』 이해의 중요한 열쇠를 잃어버리게 된다. 
민영규 선생은 "『유사』의 행문()이 일견() 단장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대개 이러한 실증주의에서 오는 것이 많을 것이다"는 데까지 논의를 끌고 나간다.

'신라에 관한 한'이라는 단서가 있다. 심지어 『삼국유사』를 신라중심의 불교문화사라고 자리 매김한 주장도 있거니와, 그가 태어나고 주요한 활동무대가 되었던 옛 신라의 강역()만큼 더 이상 세밀한 답사기를 얻지 못해 다른 곳이 상대적으로 초라해져버린 혐의를 굳이 꼬집지 않는다면, 우리의 『삼국유사』 이해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의 발걸음을 뒤쫓는 일로 출발해야 마땅하다. 일연과 실증주의, 이것은 『삼국유사』 연구의 화두가 되어야 마땅하다.

『삼국유사』 현장의 답사가 만 3년을 넘겼을 때, 매우 분명하게도 일연의 필력()이 힘을 얻은 곳은 그 자신의 발길이 주어진 곳과 맞아 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결절점이다. 
승려들의 삶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도 많은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다만 그가 가보고 머물렀던 곳의 이야기와 기록들을 소중히 건사하고, 끝내 하나의 통일된 서사물로 만들어 냈다는 데 일연과 『삼국유사』의 특별한 점이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고대 가요 가운데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한 것이면서 지극히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한 향가라는 이 시가 장르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전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삼대목()』이라는 책에다 그 노래를 수집하여 놓았다는 안타까운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향가란 어떤 노래? 신라는 고대 삼국 가운데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낸 나라다. 불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들어 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문화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고급한 문화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신라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다른 증거다.
한자를 들여다가 사용했던 신라 사람들이 왜 굳이 향찰을 만들어냈을까. 물론 한자의 문자체계가 복잡다단하여 쉽게 익혀 쓰기가 곤란했다는 점으로 설명하고 말 수도 있다. 
논리적인 사실만 기록해도 되는 산문에서보다 정서적이며 주관적인 개성을 표현하는 시에서 더욱 그렇고, 일반 평민들까지 두루 즐겼을 노래에 가면 사정은 더욱 절박해진다. 이 같은 표기수단의 어려움이 우리말로 된 우리의 시가를 갖게 하는 데 동기를 부여했으리라 보는 것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표기수단이 외연적 현상이라면 문제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다.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 하였는가? 한문이라는 고급 언어수단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란 무엇? 
한문이 어렵다지만 배우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만들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처럼 소중한 자료를 비록 편린이나마 볼 수 있게 해준 것이 『삼국유사』다. 일연은 
이 시기의 모든 문화적 현상에 대해 두루 관심을 가졌으므로, 여기에 열 몇 수 남짓한 향가가 실렸다는 점은 달리 이상스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그 노래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를 동반하고 있다. 
이야기 전개의 보조수단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처용랑 망해사」조에서 「처용가」가 빠지면 처용의 심리상태나 역신()이 처용에게 굴복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무왕'조에서 「서동가」가 빠지면 어떻게 하여 선화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되는지를 알 수 없다.

거기까지라면 향가의 존재이유가 무척 좁아진다. 산문 기록과 향가 가운데 어느 한쪽을 무시해도 전체적인 연결에 무리가 없는데도 모두 실어놓은 경우를 보게 된다. 
우리는 향가와 문학에 관한 일연의 내면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가지고 설명해보자. 노래의 작자는 월명사, 그의 사적과 두 편의 향가가 소개된 『삼국유사』의 기록은 '월명사 도솔가' 조다. 두 해가 나타나 이를 물리칠 연승()으로 월명이 선정되고, 그가 「도솔가」라는 노래를 지어 해결하는 과정이 이 조의 본문이다. 
월명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가 덧붙여 나오는데, 「제망매가」는 여기에 와서야 소개된다.

실로 「제망매가」는 누구나 공감하는 향가의 최고 작품이다. 본문 기사가 끝난 다음, "월명이 또 일찍이 죽은 누이의 영재()를 지내려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다"는 말을 붙이고 이 노래를 실었다. 일찍이'라는 말은 일단 본문 기사와 별개의 이야기임을 암시해준다. 
향가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자꾸 말하면서 이 노래를 실은 것은, 기실 서사 전개상의 필요성보다, 노래 자체를 전하려는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연의 개인적인 성향, 곧 시취미()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 이것이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삼국유사』 속에 굳이 실은 저변이다. 
이 점에서는 『삼국유사』에 산재된 민요와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연의 개인적 취미가 오늘날 우리에게 고대 시가의 모습을 전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앞서 고마움을 표시하였지만, 고마움을 넘어 이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 시가의 한 시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논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니 아찔하기까지 하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일본의 도쿄에서 『삼국유사』가 간행된 것이 1904년이었다. 도쿄대학 사지총서()로 들어간 이 책은 『삼국유사』의 재발견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임진왜란 때 들고 간 원본을 근대식 활자로 인쇄한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내기도 했다. 한일합방이 이뤄진 뒤인 1915년의 일이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식민지 경영의 기초 사업이라는 목적의식이 들어 있었으리라 본다. 한국인의 뿌리와 심성을 알아야 했을 것이고, 일정 부분 저들의 역사와 겹치는 고대사를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가자면, 학자들의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로 인해 도쿄에 유학중이던 우리 젊은이들은 자극을 받았다. 새삼 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민족주의의 논리를 개발하는 자료로 공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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