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0일 수요일

왕희지 . 집자 성교서.

집자 성교서는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 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 끝에 집대성한 것이다.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 비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獎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唐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워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이라 구분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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