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China,中國, 2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hina, PRC, 中國]
사회주의 경제이론
마르크스(K. Marx)는 1840년대 영국의 경제·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기원과 생성 및 변천을 분석하고 자본주의의 폐단점을 강조하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로서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경제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방의 선진 공업국가에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켰던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이론적 지주로서 사회주의 소련 정권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자, 동유럽과 중국 등에서는 사회 혁명 이론으로 신봉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제기한 경제학설은 생산수단 소유제와 분배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였고, 특히 강조한 점은 자본주의 경제의 경쟁과 무정부상태를 ‘계획적이고 비례적인 발전 규율(The Law of Planned Proportional Development)’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 정권이 성립되면 계획경제를 신봉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유일한 정책 노선이 되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소련식 계획경제를 도입하였고, 1953년부터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발전에 운용하였다. 소련 볼셰비키의 혁명 이론(볼셰비즘)은 당시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레닌의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이론을 도입하고, 경제 발전의 실패와 좌절 등을 경험하면서, 당시 신중국의 상황에 적합한 경제 발전 정책을 학습해 나간다.
계획경제 정책의 실시
1979년까지의 모택동 시기에 중국에서 실행되었던 경제 발전 정책은 소련 모델(Soviet Model)를 적용한 계획경제 방식이었다. 당시 소련의 경제계획과 기업관리체제는 전반적인 국민경제를 일종의 가계경제(家計經濟)로 간주하고, 가계경제의 주요 결정자인 가장(家長)과 같은 역할을 국가가 담당하면서 수요에 근거하여 조직적인 생산을 수행하였다. 때문에 모든 기업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생산하고, 모든 생산물을 국가에 헌납하는 경제 활동을 담당하였다. 또한 모든 원자재도 국가가 제공하게 되고, 기업은 어떤 자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도의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제도는 제도적으로 공유공영·중앙계획·명령지도·고정가격제도를 실시하며, 그리고 정책적으로 고축적·고성장·저소비·저임금·중공업 우선 정책을 실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제체제는 제도와 정책적으로 소비자 주권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단지 계획 자주권만이 강조되는 형태로서, 생산력이 낙후된 국가에서의 실현에는 강제성과 방대한 행정체계의 수립을 수반해야 되는 선천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정치·외교·국방 등의 관계에서 취한 오로지 소련 일변도의 경향으로 인해, 당시 중국보다 선진적인 소련의 경제정책 모델의 채택이 경제 분야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개조 운동을 거쳐 국가 체제를 정비한 신중국은 1953년 1차 5개년 경제계획부터 소위 소련 모델을 적용하는 중공업 우선 발전의 불균형 발전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1979년까지 실시된 중국 계획경제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과도기 총노선(過渡期 總路線, 1953·1957)
중국은 사회주의 3대 개조(농업·수공업·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하고, 중공업 우선 발전을 추진하여 국가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이 농업국가인 점을 감안하여 농업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집단화 작업을 병행하였다. 초기에는 토지 개혁이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농업·공업 생산량이 1950년에 비해 약 70% 성장하는 등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중공업 정책의 무리한 추진으로 인해 경제 성장에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1960)
과도기 총노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58년 중국은 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기본 목표는 맹목적인 생산 대약진과 생산관계에 있어서의 일대이공(一大二公)을 추구하였다. 일대이공은 인민공사(人民公社) 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즉 대(大)는 인민공사의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고 토지가 많아 대규모적인 생산과 건설이 행해지는 것을 말하고, 공(公)은 사회주의화·집단 소유화를 말한다. 이들 조치로 철강 생산을 강령으로 하는 주요 전략을 택하였고, 농촌에서는 인민공사 운동이 전개되어 농촌의 집단화를 통한 정사합일(政社合一)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대약진 운동은 정책의 맹목성과 자연 재해로 인해 실패하였다. 특히 자본과 기술이 부재한 상태에서 노동력과 충성심만으로 급진적 경제 건설을 추진하려는 대약진 운동은 대내적 산업 기반의 허약함과 대외적 소련 지원의 차단 등으로 인해 더욱 좌초를 당하였다.
조정정책(調整政策, 1961·1965)
대약진 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실패는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조정(調整)·공고(鞏固)·충실(充實)·제고(提高)’라는 8자(字) 방침의 개량 전략을 실시하게 하였다. 조정 시기에 국내 경제의 수습을 위해 유소기(劉少奇)·등소평이 전면에 나서 급진적 노선과 인민공사의 평균주의를 극복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당시의 주요 조치로는 농업 중시·국민생활의 향샹을 위한 각종 장려제도의 실시 등이 있었는데, 이들 조치로 인하여 중국 경제는 급속한 회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의 제2선으로 후퇴한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자)로 비판하며, 처절한 정치권력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회복되어 가던 경제 상황을 마비시킨다. 이런 정치적 국면이 바로 모택동의 급진파와 유소기의 온건파 사이에 발생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문화대혁명의 좌경 노선(左傾路線, 1966·1976)
10년 동안의 동란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전쟁불가피론(戰爭不可避論)과 3선건설(三線建設)로 대표되는 전략이 보여주듯이 경제에 관해서는 거의 정체상태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이미 실패한 대약진 시기의 각종 정책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국민경제는 더욱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인도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양 약진(洋 躍進) 시기의 정책(1977·1979)
1976년 극좌파 4인방이 몰락하고 10년 내란이 종료된 후 모택동을 승계한 화국봉(華國鋒)은 또다시 신속한 발전을 기도하는 급진정책을 입안하였다. 즉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도약하고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를 양약진이라고 한다. ‘23년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양약진 정책은 2000년에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화국봉의 권력 기반이 취약한 관계로 인하여 효과적인 정책 집행이 어려웠으며, 그 모험적인 정책은 결국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는, 문화대혁명 기간과 그 이전의 좌경적 착오를 수정하고 ‘조정(調整)·개혁(改革)·정돈(整頓)·제고(提高)’라는 신8자방침을 제기하여, 근본적인 경제이론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중국 경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경제는 계획경제 자체가 계획에 의한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원인으로 인하여, 변동하는 각종 경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방대한 행정계통이 경제를 관리할 수밖에 없는 약점 이외에도, 중국 자체의 정확한 경제정책 방침의 미흡 및 계속되는 시행착오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좌우파 투쟁 등으로 인해서, 상당히 낙후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상 중국 경제정책의 변천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과도기 총노선 시기(1953∼1957)는 불균형 발전의 소련 모델을 적용하고,
② 대약진 운동 시기(1958∼1960)는 모택동의 좌경적 모험 노선이고,
③ 1차 조정정책 시기(1961∼1965)는 후르시초프 모델의 수정주의 노선이고,
④ 문화대혁명 초기(1966∼1970)에는 모택동 노선이 부활하고,
⑤ 2차 조정정책 시기(1971∼1975)는 수정주의와 모택동 노선의 종합이고,
⑥ 문화대혁명 말기(1975∼1976)는 4인방의 극좌 노선이고,
⑦ 양약진 시기(1977∼1979)는 3차 조정정책 시기로 수정주의가 부활하였다.
등소평 경제이론
등소평 경제이론의 진수는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를 통해 신중국의 지도자로 재등장한 등소평은 10년 동란의 문화대혁명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생산력과 인민 대중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의 영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등소평은 문혁을 극복하면서 중국 국가 발전의 최대 목표인 4개 현대화(농업·공업·과학기술·국방의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과거 약 30년 동안 중국을 통제해 왔던 모택동사상의 속박을 풀기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즉 화국봉 노선의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과 논쟁을 개시하였다. 등소평은 화국봉 노선에 반해서 ‘실천시검험진리적유일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 무슨 정책이든 실천해서 성과를 거두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라는 실사구시적 실용주의 노선을 제창한다. 등소평은 모택동 말기의 개인적 착오와 모택동사상의 차이를 명백히 구별하며, 자신의 노선은 모택동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은 모택동사상을 기초로 한 중국공산주의 혁명이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듯이,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도 현재의 국가 정세에 의거해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란 어떤 고정된 모델이 아니며 각국의 실제 상황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 진리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현대 중국의 적용은 바로 ‘중국적 사회주의’이다. 중국적 사회주의는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적 실제 상황의 결합체이고, 이것이 현재 중국의 현대화 노선을 설정하는 기초를 구성하고 있으며, 중국적 사회주의현대화 건설 이론은 등소평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중국이 1980년대 이래로 추진한 중국 현대화 건설의 기조에는 등소평의 현대화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 현상은 개혁·개방의 천명·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중국공산당 14전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등 일련의 조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중국 지도층은 경제 발전의 속도와 범위의 문제에 대해 대립과 갈등 관계가 지속되었다. 종전의 정책 하에서는 행정적 명령을 통한 계획된 범위 내에서 모든 경제 활동을 고정시키고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하였다. 즉 계획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차질을 초래하여 생산품의 공급 부족 혹은 과잉상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사회주의와 상품경제를 상호 대립되고 배척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종래의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주의는 본래 공유제(公有制)를 기초한 계획적 상품경제라는 새로운 계획적 상품경제론이 제기되었다.
소위 계획적 상품경제란 생산부문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경제 주체이다. 상대적 독립이란 사회주의국가가 사회 전체의 경제 발전의 방향을 파악하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작성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사회의 생산은 계획만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 주도 하의 시장원리에 의한 조절도 충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강택민(江澤民, Jiang Zemin) 총서기는 정치공작 보고를 통해 13전대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즉 그 동안의 개혁·개방 과정 중에서 나타난 각종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제기한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중국 경제의 이론으로 정립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 형성 과정이 있었다.
주보론(主補論) 시기
1979년 2월 이선념(李先念,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하여,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경제를 보조 수단으로 하는 체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79년 3월 진운(陳雲,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계획과 시장 문제’라는 담화 중에, “전체 사회주의시기의 경제는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계획경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시장조절 부분이다. 계획경제 부분은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며, 시장조절 부분은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만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문헌 중에서는 최초로 시장조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1979년 11월 등소평은 “우리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여 시장경제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사회주의 경제이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행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의 필요성에 대해 재인식하는 의견을 전개했지만, 여전히 중국 경제체제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는 체제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의 인식 하에서 1982년 9월 12전대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충으로 하는 주보론(主補論) 체제를 공식으로 천명하였다.
내재 통일론 시기
제한적이나마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중국은 기존의 계획 생산에 의한 ‘생산품’이 아닌 시장의 필요에 의한 ‘상품’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 13전대에서는 “사회주의의 계획적 상품경제 체제는 반드시 ‘계획’과 ‘시장’이 내재적으로 통일된 체제이어야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계획과 시장의 내재적인 결합이라는 내재통일론(內在統一論)의 제기는 계획과 시장을 둘러싸고 장기간 지속되었던 이원구조적 논쟁을 종식시켰다.
논쟁 시기, 성사 성자(姓社 姓資)
1989년 6·4사건으로 조자양(趙紫陽,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은 보수파에 의해 실각되고, 보수 성향의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를 ‘자산계급 자유화’·‘화평연변(和平演變, 평화적 정권전복)’과 동일시하며, 공유제 경제의 기초를 전복하는 개념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하는 중국 경제체제의 경향에 관한 논쟁(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에 관한 성사성자 논쟁)이 가열되었다.
1990년 12월 등소평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계획’이나 ‘시장’ 성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으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에 의한 통제가 있다”, “시장경제를 약간 실행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며,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시장에 어두우면 낙후를 감수해야 하며 세계 정보에도 어둡게 된다”라는 기존의 의견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등소평의 의견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 했다.
남순 강화(南巡 講話),중국 경제는 침체기,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 경제는 침체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등소평은 “제3의 혁명”을 외치며, 중국 남부지방을 시찰하여 개혁·개방을 가일층 고취하고자 시도하였다. 등소평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무한(武漢)·심천(深圳)·주해(珠海)·상해(上海) 등지를 방문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1기 3중전회 이후의 노선·방침을 관철하고, 1개 중심(一個中心: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함)·양개 기본점(兩個基本点: 개혁·개방 노선과 4개 기본노선을 견지함)을 견지한다. 성사성자의 새로운 사회주의의 기준에 관한 논쟁에 대해,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여부가 판단 기준이다”, 즉 ‘계획’이든 ‘시장’이든 간에 경제 발전에 유리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향후 현대화 과정에 있어, 일부 지역의 경제가 우선 발달하고 일부 주민의 경제가 우선 부유해지는 선부론(先富論)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평등주의를 타파하였다.
이와 같이 시장의 역할을 긍정하고 기존의 경제 발전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남순강화의 주요 정신은 14전대에서 공식적으로 이념화되었고,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장경제를 정착시켰다. 당시의 국제 환경도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지만, 이와 더불어 중국이 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한 국내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2년 초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강조한 개혁·개방정책을 지지하기 위함이다. 등소평은 남순강화에서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에도 계획적 요소가 있으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사회주의도 시장적 요소가 있다.
계획과 시장은 경제 수단일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종래 계획과 시장 관계에 대한 사상적 속박을 제거하는 작용을 하였다. 당시 10여 년에 걸친 개혁과 개방의 경험이 있었다. 개혁과 함께 진행된 연해지역의 개방으로 인하여 경제가 급성장하게 됨으로써, 시장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지역에서는 경제 활력도 비교적 강하고 발전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자본주의도 귀감이 될 만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주의의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선진국들의 발달된 경영방식과 관리방법을 받아 들여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사상을 해방하고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시켜야 비로소 사회주의제도를 공고히 하고 공산당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개혁과 개방 이래로 시장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상품의 가격이 대부분 개방되었으며, 계획이 직접 관리하는 영역이 점차 줄어들었다.
사회주의 와 시장경제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비교하면, 공급과 수요 원칙에 입각하여 경제 활동이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으나, 소유제(所有制)와 분배제(分配制) 및 거시적 조절(調節)·통제(統制) 등 3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 3가지 측면은 또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유제, (재산)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로 공유제(公有制)를 기초로 각종 비사회주의적(非社會主義的) 경제 성분, 즉 사유제(私有制)를 병행하고 있다. 소위 공유제란 전민소유제(全民所有制)와 집단소유제(集團所有制)를 말하며, 비사회주의적 경제 성분이란 개체경제(個體經濟)·사영경제(私營經濟)·외자경제(外資經濟)를 말한다. 이처럼 중국은 공유제 이외에 사유제를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중국 경제에 생기를 불러 넣고 있다.
개체경제는 개인이나 가족 또는 8명 미만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소규모의 상공업에 종사하는 기업을 말하며, 사영경제는 기업의 자산이 개인에게 속하고 8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공업에 종사하는 기업을 말한다. 개체경제와 사영경제는 중국 경제발전의 주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외자경제에는 중외합자(中外合資)·중외합작(中外合作)·외상독자(外商獨資: 외국 자본의 단독 투자)가 있다. 이는 개체경제 혹은 사영경제와 더불어 중국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분배제
공유제 이외의 각종 다양한 경제 성분을 허용한 중국은 분배의 측면에서도 노동 이외의 요소에 의한 소득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분배원칙인 노동에 의한 분배 외에, 개체기업에 의한 수입, 사영기업과 중외합자·중외합작·외상독자에 의한 수입 및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여 얻은 수입(예로, 주식 투자) 등을 허용하였다.
각종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고, 또 투자가와 노동자의 적극성을 유발시켜 경제 요소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로, 11기 3중전회 이래로 농촌과 도시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책임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바로 책임·권리·이익 등 3가지를 결합시켜, 노동에 있어서의 적극성을 발휘하게 하였다. 즉 새로운 분배제도의 시행인 것이다.
거시적 조절·통제
시장경제라고 해서 계획적 요소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등소평은 “자본주의 경제도 계획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 모두 계획과 조절이 필요하지만, 사회주의 경제가 필요로 하는 계획과 조절의 목적은 바로 인민의 단기 이익과 장기 이익 그리고 국부 이익과 전체 이익을 상호 결합하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두 제도가 지닌 장점을 최대로 발휘시켜서, 계급간의 착취 현상을 제거하고,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여 공동 부유를 달성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 국가의 계획은 중요한 거시적 통제 수단 중 하나이다. 이 점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점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수립과 완성은 장기적인 발전 과정이 필요로 하며, 매우 복잡하고 힘든 사회체계를 수립하는 사업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실행은 1980년대 개시 이래로 2000년까지 20년 동안 실행되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 왔고, 앞으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의 2021년에 이르면 더욱 정형화된 성숙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205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는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과도기 단계로 설정하고, 경제 건설의 목표를 3단계로 제시하였다.
총생산량의 수준
제1단계 1980년부터 1990까지 1980년 국민 총생산량(7,100억 元)의 2배(1조 4,000억 元)로 증대시키고(1988년 이미 달성했다고 중국 정부 발표), 제2단계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980년 총생산량의 4배(2조 8,000억 元)로 증대시키며, 제3단계 21세기 중엽까지 2000년 총생산량의 4배(11조 2,000억 元)로 증대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민소득 수준
제1단계는 500$, 제2단계는 1,000$, 제3단계는 4,000$를 목표로 잡고 있으며, IMF의 자료에 의하면 2009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678달러이다.
국민생활 수준
‘3보주(三步走) 전략’을 택하여, 제1보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제1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온포문제(溫飽問題: 기본적인 거주와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2보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제2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소강수준(小康水準: 먹고 살만한 수준)’에 도달하며, 제3보는 21세기 중엽까지 제3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개인소득이 중진국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인민의 생활이 비교적 부유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현대화를 달성시키는 단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조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조치가 필요하였고, 이들 조치가 시장경제 체제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농촌 경제체제 개혁과 도시 경제체제 개혁을 추진하였고, 정치체제 개혁도 모색하고 있다.
1) 시장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① 자주적으로 경영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주 기업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② 대규모의 상품 교환이 가능한 대형 도매시장을 건설해야 한다.
③ 극히 일부의 품목을 제외하고는, 공평하고 경쟁적으로 가격이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가격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2) 국유 재산 제도를 개혁하여 대형국영기업의 경영 매카니즘을 전환시켜야 한다.
이것은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켜 책임과 권리 및 이익을 서로 통일시키는 경영체제로 전환시켜, 침체에 허덕이는 국영기업이 시장경제의 지배를 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3) 공유제를 기초로 하여 각종 다양한 비사회주의적 경제 성분을 발전시켜야 한다.
4) 분배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
5) 시장경제는 법률 규정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므로, 법제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립해야 한다. 이에 대해 등소평은 “국가와 기업, 기업과 기업, 기업과 개인간의 관계도 법률로써 확정해야 한다. 그들간의 문제 역시 법률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정책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정책은 개혁과 개방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나타났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시장경제 도입의 천명과 함께 광범위하고 심도가 있게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영역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더욱 확대되었다. 개혁 정책은 대내 경제 문제에 직면하고, 개방 정책은 대외 경제 문제에 직면하여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경제개혁 정책
중국의 경제 개혁 정책은 방법과 추진 과정에 있어 크게 4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제1단계(1979∼1983)
농업 개혁 시기이다. 1979년 1월 중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산 욕구를 증대시킬 방안의 하나로 농업생산대(農業生産隊: 인민공사의 노동력 편제의 하나로 10호 정도로 구성됨)에 자주권을 주고 ‘연합 청부 생산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반포하였다. 농가 생산 책임제의 실시는 중국의 농업 생산 증가를 가져왔으며, 농촌 경제의 번영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가 생산 책임제로 발생한 잉여노동력을 향·진(鄕鎭) 기업으로 흡수함으로써 실업문제를 일부 해결하는 동시에 농촌 공업화의 기틀도 다졌다.
제2단계(1984∼1988)
도시 상공업 개혁 시기이다. 농촌 경제 개혁의 성과와 일부 지역의 시험적인 개혁 조치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자 중국의 개혁은 도시 상공업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1984년 10월 중국은 도시 상공업 중심의 경제 체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 개혁의 중점은 과감한 권한 이양과 기업에 대한 경영 책임제에 두어졌다. 또한 시장 구조를 제한적이나마 도입하기 시작하여, 사회주의국가의 왜곡된 가격 체제를 조정·개혁하고, 과거의 이윤 상납 방식을 세금으로 대체하는 이개세(利改稅)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밖에도 개체호(個體戶)의 사유 소유 성분을 허가하는 등 보다 전면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제3단계(1988∼1991)
‘치리정돈(治理整頓)’ 시기이다. 경제 체제 개혁이 비록 국민소득의 증가와 농촌 제의 번영 및 대외 무역의 확대 등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너무 빠른 공업 성장과 인플레이션과 소득 분배의 불균형 및 각종 권력형 부조리·비리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에 중국 정부는 경제 환경에 대한 정리, 경제 질서에 대한 정돈을 기치로 하는 긴축 정책을 도입하였다. 중국은 이를 통해 경제·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전반적인 경제 구조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건은 중국의 국제적인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려 전체적인 경기 부진 현상을 야기하였다.
제4단계(1992년 이후)
개혁 심화와 개방 확대의 시기이다. 1992년 초 중국은 ‘치리정돈’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이에 따라 계속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등소평은 남부 지역을 순시하면서 개혁·개방의 심화와 확대를 독려하는 ‘남순강화’를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오늘날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이론에 의해 중국의 경제는 보다 시장 경쟁적인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국유기업의 개혁 및 정부의 거시적 조절을 기초로 한 경제 운영 구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대외 개방 정책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 이전에 중국은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급자족의 경제를 고취하였다. 대외 개방 정책은 자력갱생 원칙의 탈피를 의미하고,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대외 개방은 크게 기술·자본의 도입 및 대외 무역의 확대라는 두 분야로 발전해 왔으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절차로 확대·발전하였다.
제1단계
경제특구(經濟特區)의 설치이다. 1980년부터 광동성의 심천(深圳)·주해(珠海)·산두(汕頭) 및 복건성의 하문(厦門)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1984년에는 해남도(海南島)가 개방되었고, 해남도는 1988년에 성(省)으로 승격되어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가 되었다. 경제특구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나, 대량의 노동력을 갖고 있는 지역에서, 가공수출지역 또는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는 비교우위의 원칙에 따라 설치되었다. 경제특구는 특수한 경제 정책과 관리 체제에 따라, 다양한 경제 성분의 존재와 시장 조절·경제 자주권의 확대 등을 통한 대외 지향형 경제 형태가 가능하였다. 또한 외자 도입을 위해 세율 우대·토지 및 염가의 노동력 제공 등의 유인책을 실행하였다.
제2단계
연해개방도시(沿海開放都市)의 설치이다. 1984년 중국 연해의 14개 도시 즉 천진·상해·대련·진황도·연대·청도·연운항·남통·영파·온주·복주·광주·잠강·북해 등 역사적인 통상 항구가 개방되었다. 이 도시들은 과거보다 시의 자주권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투자를 원하는 외국 기업에게도 자주적인 우대 조치를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연해도시의 개방과 더불어, 이들 지역에는 경제기술개발구가 설치되었다. 이 경제기술개발구의 설치는 가공무역에 중점을 두는 경제특구와는 달리, 신상품 개발·신기술 개발 등을 통해 산업구조 조정을 꾀하는 기초가 되었다.
제3단계
연해경제개방구(沿海經濟開放區)의 설치이다. 1985년 중국은 장강 삼각주·주강 삼각주 및 하문·장주·천주를 잇는 삼각지대를 연해경제개방구로 선포하였다. 이들 지역은 14개 연해개방도시와 같은 정책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88년과 1989년에는 요동반도·산동반도 및 발해만 지역을 잇따라 개방하였다.
이러한 경제특구·연해개방도시·연해경제개방구의 개방 구조 수립을 통해 중국은 대외 무역형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국제 시장의 개척도 급속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제4단계
4연(四沿: 즉 연해·연강·연변·연로)의 전방위개방(全方位開放) 조치이다. 연해 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은 1991년부터 4연 개방 전략을 신속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① 연해(沿海)의 개방은 이미 개방 초기부터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② 연강(沿江)에 따른 개방도 내륙으로 확대되어, 개방의 척도가 강을 따라 주요 통과 도시에도 적용되었다.
③ 연변(沿邊) 국경선에 따라 변경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흑룡강성·내몽고자치구·신강자치구 등을 개방하였다. ④ 주요 간선 철로·도로의 기점 도시들을 개방하는 연로(沿路) 개방도 실행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연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전방위 경제 발전 전략을 완성하였다.
이상의 대외 개방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의 개방 정책은 남방에서 북방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연해에서 내륙으로, 시험적인 점진적 단계를 거쳐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경제의 현황
중국 국가통계국(國家統計局)의 『중국통계연금(中國統計年鑑)』에 따르면, 2009년도 중국 경제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2009년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33조 5,353억 위앤(元)으로 전년 대비 8.7% 상승하였고, 전체 소비자물가(CPI)는 0.7% 감소하였다. 외화보유고는 2조 3,993억 달러이고, 전년 대비 4,531억 달러가 증가하였다. 재정 수입은 6조 8,477억 달러이고, 전년 대비 7,147억 달러가 증가하여 11.7% 상승하였다.
전국 총 취업인구는 7억 7,995만 명으로, 전년 대비 515만 명이 증가하였다. 그 중 도시 취업인 수는 3억 1,120만 명으로 910만 명 증가하였다. 양식 총생산량은 5조 3,082만 톤으로, 전년 대비 211만 톤이 증가하여 0.4% 증산하였다. 전체 공업 증가치(생산액)는 13조 4,625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8.3% 상승하였다. 사회 고정자산 투자총액은 22조 4,846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30.1% 상승하였다. 그 중 중서부 투자의 증가가 동부와 동북지구보다 많다. 사회 소비재 소비총액은 12조 5,343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15.5% 상승하였다.
수출입 총액은 2조 2766억 달러고 수입은 1조 6821억 달러이며 GDP성장률은 6.8%이다.
국내 여행자 수는 연인원 기준으로 19억 명으로 전년 대비 11% 상승하고, 국내 여행 수입은 1조 184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16.4% 상승하였다. 중국 입국 여행자 수는 연인원 기준으로 1억 2,648만 명으로 2.7% 하락하고, 그 중 외국인은 2,194만 명(9.8% 하락)이며, 홍콩·마카오·타이완 사람은 1억 454만 명(1.1% 하락)이다. 국제여행 외환 수입은 397억 달러로 전년 대비 2.9% 하락하였다.
광의통화(M2) 잔액은 60조 6천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27.7% 증가하고, 협의통화(M1) 잔액은 22조 위앤으로 32.4% 증가하고, 유동현금(M0) 잔액은 3조 8천억 위앤으로 11.8%증가 하였다. 에너지 소비 총량은 31억 톤/표준석탄으로 전년 대비 6.3% 상승하였다.
2009년 중국의 총인구는 13억 3,474만 명으로 전년 대비 672만 명이 증가하였고, 자연 증가율은 5.05%이다.
사회
중국 사회의 특징은 여러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취업, 임금, 사회보장, 생활수준, 소비 구조 등의 국민 생활 및 신앙의 자유, 종교의 현황, 중국적 종교 특색 등의 종교 생활 그리고 중국 소수민족의 상황을 개괄할 것이다.
국민 생활
중국 개혁개방의 최대 성과 중 하나는 전국 농촌과 도시의 생활수준이 대폭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취업, 수입·소비, 사회 의료 보장 및 의료·위생 조건 등 방면에서 점차 중류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취업
1979년 이후 중국 정부는 취업의 문을 크게 열고 노동 부문의 취업 소개와 스스로 직업 찾기를 서로 결합하는 방법을 실행하며, 1984년에 이르러 문화대혁명 중 강제 낙향된 1,800만 명 지식 계층의 도시 복귀 후 취업 문제를 해결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취업 규모는 계속 확대되어 노동력의 유동이 가속화되었다. 1999년 말 전국 취업인원은 7억 586만 명이며, 1949년과 1978년보다 각각 5억 2,504만 명과 3억 434만 명이 증가하였다. 도시 취업인원은 더욱 증가하여, 1949년과 1978년 전국 도시 취업인원은 각각 단지 1,533만 명과 9,514만 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2억 1,014만 명이 되고, 도시 사영 개인 상공업 취업인원은 3,940만 명이다.
동시에 경제 구조와 산업 구조의 조정에 따라, 취업인원의 취업 구조에도 상응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제3차 산업의 취업인원은 급속히 증가하여 1979년부터 1998년까지 누적하여 2.8배 증가하고, 연평균 6.9% 증가하며, 제1차 산업 1%와 제2차 산업 4.4%의 증가 속도를 초과하여, 취업 증가를 추진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사람들의 취업 관념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 1978년 중국의 주식제(株式制) 경제, 사영 경제, 외국계 기업 및 홍콩·마카오·타이완 투자 경제도 아직 출현하지 않아 개인 상공업에 종사하는 취업인원 또한 오로지 15만 명뿐이었다. 1999년 말 주식제 경제, 사영 경제, 외국계 기업 및 홍콩·마카오·타이완 투자 경제의 취업인원은 모두 2,100만 명에 달하였다.
임금
중국 임금제도의 기본 원칙은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른 분배이다. 중국 현행 임금형식에는 시간급, 성과급, 상여금, 생산량 초과 급여, 수당 및 보조금 등이 있다.
임금제도 중에 남아 있는 심각한 평균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985년 중국 정부는 임금제도에 대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국가 기관과 사회단체에서는 직무 임금을 위주로 하는 임금제도를 실시하고,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등 분야에서는 각자의 등급 임금제도를 실시하며, 공장과 광산 기업 대부분에서는 등급 임금제도를 실시하고, 많은 기업에서는 임금 총액과 경제 효과를 연계한 방법을 실시하여 직원의 노동 보수는 기업 경영 상태·개인 공헌 규모 등과 연관되어 유동한다. 통계에 따르면, 국유 경제 기관의 직원 임금 총액 중에서 상여금·생산량 초과 급여·수당·보조금 등이 1978년의 8.9%에서 1995년의 39.8%로 증가하고, 시간급과 성과급은 1978년의 85.8%에서 1995년의 55.6%로 하락하였다.
사회보장
중국의 사회보장 사업은 사회보험·사회복지·사회 구제·사회 서비스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 계획경제 시대에 사회보장을 받았던 사람은 비교적 적었다. 1984년 이후 중국은 점차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그 중점은 양로 보험과 실업 보험이며, 개혁의 방향은 사회화, 즉 봉사 대상의 사회화, 자금 출처의 사회화(국가·기업·개인의 공동 부담), 관리의 사회화, 봉사 시설의 사회화 및 봉사자의 사회화 등이다. 1999년 말 전국에는 9,433만 명의 노동자와 2,900만 명의 퇴직자가 기본 양로 보험에 참가하였고, 9,912만 명의 실업 보험에 참가하였다. 93%의 국유기업 퇴직자들이 재취업 센터에 들어가 그 중 90%가 기본 생활비를 수령하였다. 사회복지 사업으로 1999년 말 전국 각종 사회복지원의 침대는 108만 장에 이르고 81만 명을 수용하였다. 농촌의 사회보장 수준은 비교적 낮아서, 주로 양로보험, 이재민 구호와 빈민 구제 및 의료보험 분야에 집중한다. 전국 1/3 이상의 농촌에 농촌 사회보장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수천 만 명의 농민이 양로보험에 가입하였다.
생활수준의 목표
중류 생활수준은 중국 개혁개방 성과의 종합적인 구현이고, 국민생활 수준이 가까운 장래에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소위 중류 생활수준은, 기본적 의식(衣食) 해결 정도의 생활수준의 기초 위에서 삶의 질이 진일보 제고되고, 풍족한 의식 생활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중류 생활수준은 물질생활의 개선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의 충실도 요구하고, 주민 개인의 소비 수준의 제고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와 노동환경의 개선도 요구한다. 1990년부터 중국은 중류 생활수준의 목표 실현 과정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구체적 국정에 근거하고 국제 사회의 지표를 참고하여, 중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지표 체계는 다음과 같은 3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개인 소비 수준
개인 평균 실제 수입은 전국 중류 생활의 개인 평균 수입 수준이 1,400위앤(元)이 되어야 하며, 그 중 도시는 2,380위앤이고 농촌은 1,100위앤이다. 개인 평균 주거 면적은 도시가 10㎡이고 농촌이 20㎡이어야 한다. 개인 평균 일일 단백질 섭취량은 75g이어야 한다. 이외에 소비 구조에서 식품 지출은 소비 지출 총액의 45%∼49%이고, 삶의 질의 제고와 정신생활의 풍요를 위한 지출은 지출 총액의 15%를 점유해야 한다.
공공 소비 수준
2000년을 예로 삼아, 중류 생활의 공공 소비 수준은 35%에 도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천명 당 2.9장의 병상(病床) 수를 구비해야 하고, 백명 당 2.8대의 전화를 소유해야 하고, 노동자의 사회보장율은 60%에 달해야 한다.
평균 소비 수준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일부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되고, 일부 지방이 먼저 부자가 된 이후, 그 최종 목표는 전체 사회의 공동 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임금 수입 위주의 도시 근로자 사이의 수입은 비교적 균등하지만, 도시와 농촌, 연해안과 내륙, 상이한 수입원 등의 사이에는 여전히 수입 불균등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중류 생활 수준의 목표에 따라, 도시 사람들의 수입은 상대적 균등 상태에 도달해야 하고, 농촌에서는 격차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을 중국은 목표로 한다.
소비 구조의 변화 추세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소비 구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소비 구조가 기본적 의식 해결의 생활수준형에서 풍족한 의식의 생활수준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대체로 빈곤 상태, 기본적 의식의 해결 상태, 풍족한 의식의 생활 상태 등을 경험하였다. 기본적 의식 해결 정도의 생활수준에서 나타나는 소비 구조의 특징은 식품 비용이 점하는 생활비의 비중이 매우 높다. 풍족한 의식의 생활수준으로 변화함에 따라, 전체적인 추세는 식품 비용의 비중이 장차 하락하고 주거·의료·일용품·여행 등 비용의 비중이 장차 상승할 것이다.
도시 근로자의 소비 구조가 반(半)공급형에서 자가 부담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근로자의 소비는 대체로 절반은 자가 부담이고 절반은 평균주의에서 오는 공급제이다. 1978년 이후 양자의 비례 관계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어서, 중국 근로자의 소비 구조는 반공급형이었다. 이 소비 구조의 특징은 일부 항목의 국가 보조금이 많고 자가 부담 부분은 적었다. 경제체제의 개혁 특히 주거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에 따라, 각종 보조금은 장차 점점 감소하여 임금 혹은 다른 형식을 통해 개인 수입으로 변하고, 근로자의 생활 비용은 장차 자가 부담으로 되어 반공급형의 소비 구조가 자가 부담형 소비 구조로 변할 것이다.
농민의 소비 구조가 자급자족형에서 상품형으로 변하고 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농촌의 상품경제 발전에 따라 농민의 소비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였다. 1990년대 초 상품성 지출이 농민 생활비를 점하는 비중은 이미 60%가 초과하여, 자급자족성 지출의 비중이 약 30%까지 하락하였다. 이런 현상은 곧 수 억 중국 농민이 자급자족의 생활 방식을 떠나 상품 경제생활의 가운데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 생활소비 가운데에서 상품성 지출의 비중은 상승의 추세를 나타내고 자급자족성 지출의 비중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소비 구조는 유사(類似)형에서 다양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주민의 수입은 대체로 평균적이며, 소수 고소득층을 제외하고, 도시이든 농촌이든 과도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은 모두 소수이다. 수입 방면의 이러한 특징이 중국 주민의 소비 구조를 서로 비슷한 유사형으로 만들었다. 유사한 소비 구조에서는 각 계층 주민의 소비 품종이 대체로 동일하고, 각종 소비품의 품질 등급의 격차도 크지 않다. 그러나 주민 수입의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소비 수준의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격차 확대의 기초 위에서, 주민 소비 구조는 다양형으로 변화하고, 상이한 수입 계층이 상이한 소비 특징을 나타낸다.
종교
종교 신앙의 자유
중국 국민의 종교 신앙의 자유 권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중국 헌법 제36조 규정에 의하면, 종교 신앙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 권리로서, 어떤 국가 기관·사회 단체·개인도 국민의 신앙 혹은 불신앙을 강제할 수 없고, 종교를 신앙하는 국민과 신앙하지 않는 국민을 차별 대우할 수 없다. 또한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 신앙을 보호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 질서의 파괴와 국민 신체·건강의 위해 및 국가 교육제도의 방해 등 활동을 행할 수 없다. 종교 단체와 종교 업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종교의 현황
2009년 중국에는 각종 종교 신도가 1억여 명이 있고, 신도 숫자는 안정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종교 활동 장소는 모두 약 13만 곳으로, 1997년 보다 약 5만 곳이 증가하였다. 종교 성직자는 약 36만으로, 1997년보다 약 6만 명이 증가하고, 종교 단체는 약 5,500여 개이고, 종교 설립 대학교는 110여 곳이다.
중국은 다종교 국가로, 주요 종교로는 불교·도교·이슬람교·천주교·개신교 등이 있다.
불교는 중국에서 이미 약 2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7년 불교 사찰은 1만 3천여 곳이고, 2009년은 2만여 곳이며, 출가 승려는 20여 만 명이다. 그 중에서 라마교의 성직자는 약 12만 명, 활불(活佛)은 1,700여 명이고, 사원은 3천여 곳이며, 소승불교의 성직자는 약 1만 명이고 사원은 1,600여 곳이다.
도교는 중국에서 기원하여 이미 약 1,700년의 역사가 있다. 도교 사원은 1997년 1,500여 곳이고, 2009년에는 3천여 곳이며, 신도수는 1997년 2만 5천여 명이고, 2009년에는 5만여 명이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이슬람교는 중국의 회족(回族)·위구르족(維吾爾族) 등 10개 소수민족 중 대다수가 신앙한다. 1997년 무슬림(회교도)은 약 1,800만 명이고, 2009년에는 약 2,100만 명에 달한다. 1997년 회교 사원은 3만여 곳이고, 2009년에는 3만 5천 곳이며, 이슬람교 성직자은 4만여 명이다. 그 중에서 신강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는 회교도가 약 1,100만 명, 회교 사원이 2만 4천여 곳, 성직자가 2만 8천여 명이 있다.
천주교는 7세기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 1949년 건국 당시 약 300만 명의 신도가 있었고, 1997년에는 약 400만 명으로, 2009년에는 약 530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1997년 예배당은 4,600여 곳이었고, 2009년에는 예배당이 6천여 곳이고 교구는 97개이며, 주교는 60명, 신부는 2,200여 명, 수녀는 약 3천 명이다.
개신교는 19세기 초에 중국에 전래되어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로 전파되었다. 1949년 건국 당시 약 70만 명의 신도 있었고, 1997년에는 1천 만 명으로, 2009년에는 1,600여 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중국 개신교는 1980년부터 2009년까지 누적하여 성경책 약 7천 만 부(수출 포함)를 인쇄·발행하고, 모두 22종의 판본이 있다.
중국의 전국적인 종교 단체로는 중국불교협회·중국도교협회·중국이슬람교협회·중국천주교애국회·중국천주교주교단·중국기독교삼자(三自)애국운동위원회·중국기독교협회 등이 있다.
종교의 특징과 특색
중국 종교의 주요 특색으로는 대중성·민족성·국제성·복잡성·장기성이 있다.
1) 대중성: 중국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병존하고, 각 종교는 모두 상당히 많은 신도가 있다. 대다수 대중이 어떤 한 종교를 믿는 민족의 경우, 그 민족의 인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신도수도 상응하여 증가한다. 중국 총인구에서 종교 신도가 점하는 비중은 적으나, 절대적인 인구수는 적지 않아서 일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2) 민족성: 주로 불교와 이슬람교가 많은 민족 중에서 광범한 신도를 가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16개 소수민족 중의 대부분 혹은 일부분이 라마교 혹은 소승불교를 믿고, 10개 소수민족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종교는 이들 소수민족의 여러 생산활동과 사회활동에서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민족과 종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범위에 속하지만, 일부 소수민족에서 종교문제는 종종 민족문제와 서로 얽혀있다. 종교문제의 처리가 타당하지 않으면 사회문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3) 국제성: 중국의 불교·이슬람교·천주교·개신교는 모두 외국에서 전래되고, 이들 종교는 모두 세계적인 조직과 관계를 갖고 있어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또한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많은 신도를 갖고 있어 그 중 어떤 종교는 일부 국가의 국교로 신봉되고 있다. 중국은 대외 개방 이후 종교 방면에서 국제적 교류를 날로 증가시키고 있다.
4) 복잡성: 종교는 공동의 종교적 정서·도덕·의식·조직과 신앙 등 여러 요소에 의해 구성되어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복잡한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종교는 사회생활의 여러 방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의 사상·신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 문제, 대중관계, 민족관계, 국제관계 등과도 연관되어 있다.
5) 장기성: 종교는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현상이고, 그 존재에는 심오한 사회적 근원과 인식이 있다. 하나의 의식형태로서의 종교는 비교적 강한 적응성을 지지고 있다. 또한 현대 세계는 날로 개방적인 국제사회가 되고 있어, 중국 종교의 존재도 외국 종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의 종교는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사회에 대해 일정한 영향을 계속 끼치게 된다.
출처 ^ 참고문헌,
[중국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hina, PRC, 中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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