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China,中國, 4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hina, PRC, 中國]
진·한(秦漢)시대
진·한시대가 되면 우리나라와 중국은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우리의 옛 땅인 만주 일대와 북부지역 일부에서는 중국측의 팽창정책에 따라 심각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특히 한나라는 무제 때부터 흉노를 정벌하여 서역까지 복속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당시 막강하게 세력을 떨치던 위만조선을 패망시켜 이 지역의 일부를 일시 점거하여 한사군(漢四郡)이라는 식민지로 삼게 된 것이다.
현재 위만조선의 분명한 유적지나 유물은 밝혀져 있지 않고, 한사군도 변천이 심해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중국 문화는 한의 동방 진출에 따라 우리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사군의 낙랑을 비롯한 식민지에는 직접적인 한문화가 남게 되었고, 우리나라 남부에까지 한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한사군을 통하여 우리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되기도 한 사실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진·남북조·수·당(魏晉南北朝·隋唐)시대와 삼국(三國)시대
이 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이에 본격적인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두 나라에 다 같이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불교문화를 통하여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부여와 삼국, 특히 고구려는 만주 일대에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강자이자 독특한 문화국을 이룩하였으므로, 전 만주 내지 북중국에 걸쳐 이들의 유적·유물이 무수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산둥반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므로, 이 일대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일대에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분명하게 남긴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 문화는 국내성이나 요동성 같은 도시적인 성곽이나 이들 성을 중심으로 한 사원지(寺院址)와 불교미술들, 그리고 무덤과 무덤벽화 등에 잘 남아 있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수많은 성(城)들이 있었다. 성은 당시의 지방 중심이자 도시였으며, 방어진지를 겸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으므로 문화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모든 문화는 이러한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수도(首都)는 나라의 중심지로 최대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첫 번째 수도는 졸본(卒本)이었으나, 제2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였다. 현재의 집안 통구지역에 해당되는 곳인데 국내성과 환도(丸都, 일명 산성자)산성 등 두 성이 있다. 이 두 성이 약간의 이동은 있었겠지만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국내성에는 역대에 걸친 고구려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으며, 이 지역 일대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고구려의 국력을 상징하던 요동성과 안시성, 백암성(白巖城)과 신성(新城), 용성(龍城: 지금의 조양)과 숙군성(宿軍城), 부여성과 남소성 등은 강대한 고구려의 국력과 광활한 국토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성곽 도시들이다. 이 가운데 요동성과 안시성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동성에는 육왕탑(育王塔)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듯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던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더러 광개토대왕이 직접 친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국방의 요충지로, 수·당의 침략 때 최선의 방어를 한 유명한 국방도시였다. 안시성 역시 당군의 침략 때 선전분투해서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도시였다.
이러한 성곽 도시들은 오늘날 대부분 폐허로 변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는 예도 많으며, 남아 있는 경우도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이러한 고구려 성곽 유적들은 치밀한 발굴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발굴은 우리나라 조사단과 합작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환도산성, 이른바 산성자산성은 현재 7㎞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성곽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광대했던 성곽 규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가지 주위에서 발굴되었는데, 거대한 석축성곽이 나타나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유물이나 기타 도시 유적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곽과 함께 고구려의 무덤(고분)과 비석도 만주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지만, 국내성 일대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국내성 부근에 있는 장군총(將軍塚)과 대왕총(大王塚)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 동북쪽에 축조된 거대한 무덤인데, 7층 5단씩 쌓은 석축무덤이다.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하여 피라미드형이라 불리는 이 석축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야의 석축제단 등과 함께 석축문화의 장관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석축무덤은 서울 방이동 일대와 충주지방에까지 전파된 독특한 고식(古式)무덤이어서, 우리 문화의 유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 장군총과 인접한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석비는 장군총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석조문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 6m의 우람한 자연석에 새겨진 이 비석에는 1,775자 정도 되는 광개토대왕의 생애에 얽힌 갖가지 사건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는 결코 단순한 개인의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고구려의 발전사이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흥륭사여서, 이 비석은 우리나라 역사 발전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삼국간의 역사는 물론 북중국과 만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바다 건너 일본의 정세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실로 중대한 사료인 셈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여기에 적힌 글자를 변조 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일본 중심적인 이해를 하는 데 급급한 편이다. 그들은 몇 자의 단문에 집착하여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중국인들의 이해와도 어느 정도 맞아 그 기세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 학자들의 대응도 활발하지만,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손으로 바른 해석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의 벽화고분들과 기타 고분군들이 집안을 중심으로 수없이 산재해 있다. 집안에 있는 고분만 하더라도 1만 기(基) 이상이며, 전 만주 일대에 걸쳐서는 10만 기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 일대의 벽화고분만 하더라도 모두 19기가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장천(長川)1호무덤, ② 장천2호무덤, ③ 모두루무덤[牟頭婁塚], ④ 환문무덤[環文塚], ⑤ 무용무덤[舞踊塚], ⑥ 씨름무덤[角抵塚], ⑦ 산연화무덤[散蓮花塚], ⑧ 오회분(五盔墳)4호무덤, ⑨ 오회분5호무덤, ⑩ 사신무덤[四神塚], ⑪ 삼실무덤[三室塚], ⑫ 통구12호무덤, ⑬ 우산하(禹山下)41호무덤, ⑭ 산성하(山城下)332호무덤, ⑮ 산성하983호무덤, 귀갑무덤[龜甲塚], 미인무덤[美人塚], 만보정(萬寶汀)1368호무덤, 마선구(麻線溝)1호무덤 등이다.
기존의 고분벽화무덤으로는 귀갑무덤이나 씨름무덤, 무용무덤이나 사신무덤 같은 것이 유명하다. 귀갑무덤은 단실형의 무덤으로 주인공의 실내생활도가 왼쪽 벽에 그려진 일종의 인물 풍속도 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무덤은 귀갑무늬가 특징 있게 표현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산연화무덤이 있는데, 연꽃무늬가 산화(散花)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장식무늬가 그려진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무덤은 만포진 대안에 있는 환문무덤인데, 각 벽면에 20여 개의 동일한 둥근 무늬가 그려진 것이다.
씨름무덤은 우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무용무덤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현실(玄室)과 전실(前室)로 구성된 쌍실무덤인데, 현실 정벽(북쪽)에는 주인공과 2인의 부인이 있고, 주위로 시종들이 시립하고 있는 생활풍속도가 있다. 동벽에 있는 풍속도가 이 무덤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새가 앉아 있는 성스러운 나무, 왼쪽에 부엌, 오른쪽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재미있는 풍속도이다.
무용무덤은 외형은 씨름무덤과 흡사하지만, 내부는 현실·통로·전실·연도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벽화는 전실에서부터 현실까지 전면적으로 그려진 것인데, 정벽(북동쪽), 오른쪽 벽(북서쪽), 왼쪽 벽(남동쪽)에 걸쳐 연회장면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장막이 드리워진 방에 주인공과 부인이 승려에게 공양하고 있으며, 각 상마다 음식물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소달구지를 탄 2인의 승려와 사냥 장면, 왼쪽 벽에는 기마인물상과 춤추는 무희들이, 천장에는 일월성신들이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
사신무덤(통구사신총, 通溝四神塚)은 네모 부채꼴의 단실 무덤형식인데 주벽에 사신도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배경은 비운문(飛雲文)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외에 새로 발굴·조사된 벽화무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천1호무덤이다. 무덤은 집안 동북 45㎞에 위치한 분지에 있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면해 있고,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는 강가 작은 구릉 상에 120여 기의 적석무덤과 봉토무덤군이 있는데, 구릉 위의 제일 높은 곳에 가장 거대한 봉분이 바로 장천1호무덤이다. 벽화는 전실·현실의 4벽·연도·천장·석문 정면·관 위에까지 묘사되고 있어서 현란한 채색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현실 남벽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와 가무공연 장면이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앉은 불상과 부처에게 예배하는 주인공 부부, 두 권속, 그리고 비천과 연화생(蓮花生)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불교의 실상과 불상의 수용 및 특징을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확실한 예로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들은 수많은 고분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들 전체 무덤도 크게 주목되고 있으며, 이들 무덤들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 옛터로 알려진 환인(桓仁)지방에서도 현재 750여 기의 적석무덤들이 발견되었고, 고력자촌 적석대묘 등 44기 이상이 발굴되었는데, 유물은 철제품과 은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수도 국내지방에서도 1만 기 이상의 고분군이 조사되었는데,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은 우산하고분군·산성하고분군·만보정고분군·칠성산고분군·마선구고분군·하해방고분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발굴된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산하68호분에서는 향토(정, 鼎)·시루(증, 甑)·솥(부, 釜)·대야(세, 洗) 등 4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중국 서진시대의 것과 연관이 있는 세련된 작품들이다. 우산하3319호무덤에서 발견된 ‘丁巳(정사)’ 명(銘) 수막새 기와와 인물 상반신 화상석 등도 주목되며, 우산하1080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장신구들과 당시의 문화상을 연관시켜 보면 흥미를 끌게 된다.
산성하159호와 152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혁대금구(金具)도 무늬와 형태에서 주목된다.
만보정1078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마구, 특히 말안장 4점은 신라나 가야 지방 말안장과 연관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칠성산1196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과 청동기들도 고구려 문화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며, 삼국과 중국의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국내성과 요동성 등지에는 많은 절터들이 남아 있겠지만, 현재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백제도 산동반도(山東半島) 일대에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백제 문화의 흔적이 중국 땅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은 앞으로 치밀한 연구와 발굴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사절과 승려를 통하여 전파된 백제 문화의 자취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가 삼국에서 제일 늦었지만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중엽부터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신라 때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절이 중국에 건너갔고, 승려들도 수없이 내왕하였다. 원광(圓光)과 자장(慈藏) 등은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이 수도했던 여러 절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중국 전역에 신라 문화의 발자취가 보다 짙어진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그들의 문화를 이역만리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천룡산 석굴(天龍山 石窟)이 크게 주목을 끈다. 이 석굴은 백제의 명장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딸 흑치씨와 고구려 유장 순(珣) 부부에 의해 조성되었던 것인데, 우리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우리나라의 조형 의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 불상들은 중국 당나라 최고의 사실조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의 유장 고선지(高仙芝)도 고구려 문화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남겼을 것이며, 고구려적인 기질을 은연중에 서역과 인도에까지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중원과 일부 중국 일대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발자취는 앞으로 좀 더 검토·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때는 신라 문화가 중국 문화에 더욱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산동 적산 일대와 장강 일대에 신라의 교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산의 신라방은 대표적인 신라 거류민들의 거류지였고, 여기에 있던 법화사(法華寺)는 신라 문화의 중국 쪽 전진기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에서 행해지던 의식과 생활습관, 즉 사찰의 의식주생활은 물론 예배대상인 불상과 불화까지도 신라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이 밝혀져 있지만, 거류지 신라방의 문화 또한 신라 문화를 그대로 이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張保皐)의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도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천룡산 석굴 조성과 비슷한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석굴사원인 용문석굴 가운데 ‘신라석굴’이라는 석굴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의 승려가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실 신라 승려들은 중국 전역에 있는 유명·무명의 각 사찰에 머물거나 사찰을 조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은 원측법사(圓測法師)가 수도 장안에 있던 서명사(西明寺)의 개창 조사가 된 이후 많은 유학승들이 신라의 문화를 중국의 사찰에 심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들의 바랑 속에는 신라의 생활용구·책·불상 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물은 신라 승려들의 정신문화까지도 중국 속에 전파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안의 흥교사에 안치된 원측법사탑도 이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9세기 중엽 회창폐불사건(會昌廢佛事件)으로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당나라 유학승들은 훨씬 축소되고 만다. 신라의 공식 사절과 그들이 가져간 예물들이 중국의 당 문화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이들 유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 그 간접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당건릉(乾陵)에 배치된 신라사절상(新羅使節像)은 당에서 만든 것이지만 신라인의 발자취이므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릉의 배총 장회태자 묘에도 신라 사절상으로 보이는 사절상이 있으므로, 신라 사절들의 대단한 활약상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1년 내지 수년 이상 중국에 체재하면서 당 조정 내외에 걸쳐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여 일종의 주중 외교사절 격이었으므로 그들이 가져간 교류문물, 가령 정교한 만불산(萬佛山), 순금불상 등의 교역에 의해 신라 문화는 어느덧 당에 상당히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만주 일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알려 주는 것은 수도이다. 발해의 수도는 네 곳이 있다.
첫 번째 수도는 길림성 돈화(吉林省敦化)오동성이고, 두 번째가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네 번째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이며, 세 번째·다섯 번째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이다.
이 상경은 3대 문왕(文王)이 755년에 옮긴 뒤 몇 년간 동경에 이도한 것 외에 계속 수도로 군림했기 때문에 발해 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이 도시는 중국 당의 장안성과 맞먹는 굉걸하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한다. 내성 안에는 궁성(주위 길이 2.5㎞)이 있는데, 금란전 등 5기의 궁전지가 있고 1기의 문루가 남아 있다. 내성에는 관청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담장(45㎞)과 금원(禁苑)만 남아 있다. 외성은 시민들의 거주지였으므로 주택·가로·사원들이 있었는데, 현재 성곽과 가로, 절터, 불상과 석등들이 남아 있다. 성곽은 둘레가 17㎞ 이상이며, 가로는 5줄의 대로(40m)가 바둑판처럼 나 있고, 절터도 10곳이나 남아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석불상과 석등이 융성했던 발해 불교문화의 자취를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석불상은 1.8m 높이의 좌불상으로 여러 차례 파손되었으나 현재는 보수되어 원래의 위치에 있으며, 석등은 6m 높이의 거대한 것인데 상·중·하대와 화사석까지 완전한 웅장한 석등이다. 또한 금동불·동불·철불·도자불과 소조불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4겹의 사리함도 1975년에 출토되어 발해 문화의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밖에 많은 성곽 유지들이 있는데, 돈화의 고성지(오동성·석호산성·흑성토성·마권자산성·성산자산성·남대자산성) 9곳이 조사되어 많은 유물과 건물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성곽들도 남아 있다. 발해의 고분들 또한 많은 양이 산재해 있는데, 이 중 돈화육정산(六頂山)의 100여 기 가운데 발굴된 정혜공주무덤(貞惠公主墓)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고구려 무덤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단실묘들이 많은데, 정혜공주무덤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다. 집안의 고구려 모두루무덤과 비슷한 형식이어서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묘비는 발해의 성립과 성격 등 발해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예이며, 석사자등은 발해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토기·기와·옥류 등도 초기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무덤벽화도 발해 문화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송·원(宋元)시대와 고려시대
고려와 송·원과의 교류 역시 대단히 활발하였다. 고려에서도 송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송에서도 고려의 문물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송에서 불교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해 간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원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였다. 고려의 사경승들을 대거 유입해 갔으며, 각종 문물들도 가져갔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북경에 있는 금자사경(金字寫經)이다.
명·청(明淸)시대와 조선시대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건국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명의 문화도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조선의 문화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들은 연간 몇 차례씩 명에 파견되는데, 황엄이 가져간 사리와 법화사불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 조선의 문물이 대량으로 넘어갔다. 또 조선의 문인 사대부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긴밀하게 교류했으므로 조선의 문화유산이 중국에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청의 문화는 강희·건륭의 문화융성기 이후 북학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이후 고증학파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문화도 척화파들의 강제 체류 이후 은연중에 심어졌고, 사신외교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산둥에 있는 조선 학자의 비석의 존재 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인(한민족)의 이주와 교포사회
1999년 6월까지 중국 대륙에는 204만의 교포들이 길림·흑룡강·요령 등지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전체 교포의 60% 이상이 길림성에 모여 있었으며, 내몽고 자치구에도 소수의 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1월에는 192만6017명의 교포들이 있었으며, 수교에 따른 체류자도 늘어나 당시(1995.1.) 1만4381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교포들의 초기 이주는 대부분 식량과 인삼 채취 및 비옥한 농토를 찾기 위한 것으로,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7년 제2차 한일협약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의병, 군인들과 관리, 교육자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에 대거 투자하고, 일본 농민을 한국으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남한 각지의 소농민들이 농토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 농토를 상실한 농민들이 보다 저렴한 간도·흑룡강 지역 등으로 농토를 찾아 이주하여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한 간도 한인의 보호정책과 대륙정책의 일부로 나타난 계획적인 일본의 한인 이주정책은 한국인의 만주 이주활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한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고, 중국 지주에 예속된 소작농들이었으며 일부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의지가 절실하였고, 이에 따라 만주의 한인사회에서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컸으며, 특히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다.
중국 내의 한인들은 그 이주 배경과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에 특별한 구실을 했던 배경에서 초기 1세대의 경우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대단히 강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에 대한 이심력과 저항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중국 내 다른 토착소수민족과 다른 점이었다.
이들 초기 세대가 지나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자손들인 2·3세대의 한인들은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약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에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구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제1세대와는 달리 이 젊은 세대들은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이지만 한국을 조국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 한인들은 중국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생활도 비교적 발달되어 있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는 한국 고유의 전통·언어·관습·문화 등을 잘 유지, 발전시켜 가고 있으며, 민족적 자부심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특히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연변(延邊)은 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 교포가 80만 명이나 집단 거주하고 있다. 또 연변에는 1,900명의 학생이 있는 연변대학 등 한인사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고등교육기관들이 있으며, 특히 연변대학의 경우 재학생의 70%와 교직원의 80%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학 연구 현황
타이완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볼 때 그 대상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나, 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분야에서 성과가 있다. 한편 중국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한국학은 그 범위와 수준에서 미국·일본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중국 사회에서 혁명적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하였고, 또 문화대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좌경노선으로 객관적인 학문 연구 풍토와 기반이 취약했던 데다가, 특히 중국과 북한은 상호 혈맹적인 혁명적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한국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웠다.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나타나기 시작한 1979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한국에 대한 부분적 연구도 북한과의 혁명적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범위와 방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 특히 남한에 대한 연구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남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적 측면에 대한 연구가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이후에 나타난 중국에서의 개혁실용주의노선은 정치와 학문연구의 엄격한 분리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 방향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현대화 노선은 남한 경제발전 모델 등 한국 및 한국학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에 중국에서는 외교부 부설 국제문제연구소의 아세아태평양연구실, 국무원 산하 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동아연구실, 상해국제문제연구소의 일본연구실 및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등 정책·학술 연구기관과 북경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연구소, 길림대학의 조선연구실 등 일부 대학의 부설 연구소에서는 한국의 경제를 비롯한 정치외교·국제정세·남북한관계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북경대학에는 동방어문학과 내에 조선어문조(朝鮮語文組)가 있어 한국의 언어·문화·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연변대학 내에는 남북한의 경제·철학·역사·어학·문학·교육을 연구하는 조선연구소를 비롯하여, 민족연구소·고적연구소 등 한민족의 특수성을 연구하는 여러 학술연구소가 있다.
그리고 1992년부터 1999년 말 상해 복단대학에 한국학강좌 운영지원사업을 우리나라에서 계속 벌여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대학, 북경어언문화대학, 산동대학, 연변대학, 요녕대학 등에 한국학 관력 객원교수제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학 관련 자료들이 일정량 소장되어 있는 복단대, 북경대, 북경어언문화대 등에 관련 자료를 체계화 하는 데 드는 제반 경비를 일정 부분 지원하고 있다. 이어 요녕대·북경대·북경어언문화대·복단대·인민대·중앙민족대·연변대·항주대·산동대·길림성사회과학원·상해사회과학원·타이완한국연구회 등에서 수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을 우리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편 한글로 된 『연변일보』를 비롯하여 『천지』·『아리랑』·『문학예술연구』·『은하수』·『장춘문예』·『노다지』·『진달래』 등 한글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다.
1980년대 중국 내에서 중국조선사연구회·중국조선언어연구회·중국조선문학연구회·중국남조선경제연구회·중국조선정치경제연구회 등 다방면의 한국학 관계 학술단체들이 설치된 바 있는데,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1990년대 국교 이후 양국이 우호증진에 따라 1999년 이래 북경대·북경어언문화대 등에 한국국제교류재단 주관 하에 한국학 연구와 관련된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중국 위치도
중국
30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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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사(法華寺) #신라 문화의 중국 쪽 전진기지 #절에서 행해지던 의식과 생활습관 #사찰의 의식주생활 #예배대상인 불상과 불화까지도 신라식 #일본 승려 엔닌[圓仁] #기행문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 #거류지 신라방의 문화 또한 신라 문화를 그대로 이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張保皐)의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도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룡산 석굴 조성과 비슷한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석굴사# 용문석굴 #신라석굴’이라는 석굴이 있는 것이다 #신라의 승려가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실 신라 승려들은 중국 전역에 있는 유명·무명의 각 사찰에 머물거나 사찰을 조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은 원측법사(圓測法師) #수도 장안 #서명사(西明寺) #개창 조사 #유학승 #신라의 문화를 중국의 사찰에 심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들의 바랑 속에는 신라의 생활용구 책 불상 #이러한 문물은 신라 승려들의 정신문화까지도 중국 속에 전파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안의 흥교사에 안치된 원측법사탑도 이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9세기 중엽 회창폐불사건(會昌廢佛事件)으로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당나라 유학승들은 훨씬 축소되고 만다 #신라의 공식 사절과 그들이 가져간 예물들이 중국의 당 문화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이들 유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 #간접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당건릉(乾陵)에 배치된 신라사절상(新羅使節像)은 당에서 만든 것이지만 신라인의 발자취이므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릉의 배총 장회태자 묘에도 신라 사절상으로 보이는 사절상 #신라 사절들의 대단한 활약상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1년 내지 수년 이상 중국에 체재하면서 당 조정 내외에 걸쳐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여 일종의 주중 외교사절 격이었으므로 그들이 가져간 교류문물 #정교한 만불산(萬佛山) #순금불상 등의 교역에 의해 신라 문화는 어느덧 당에 상당히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유적과 유물이 만주 일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알려 주는 것은 수도이다 #발해의 수도는 네 곳이 있다 #9세기 중엽 #회창폐불사건(會昌廢佛事件)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당나라 유학승들은 훨씬 축소되고 만다 #신라의 공식 사절 #그들이 가져간 예물들이 중국의 당 문화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유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 #그 간접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당건릉(乾陵)에 배치된 신라사절상(新羅使節像)은 당에서 만든 것 #신라인의 발자취이므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릉의 배총 #장회태자 묘 #신라 사절상 #신라 사절들의 대단한 활약상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1년 내지 수년 이상 중국에 체재하면서 당 조정 내외에 걸쳐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 #일종의 주중 외교사절 격 #교류문물 #정교한 만불산(萬佛山) #순금불상 #교역에 의해 신라 문화는 어느덧 당에 상당히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유적과 유물이 만주 일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알려 주는 것은 수도이다 #발해의 수도는 네 곳이 있다 #첫 번째 수도는 길림성 돈화(吉林省敦化)오동성이고 #두 번째가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네 번째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세 번째 다섯 번째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이다 #이 상경은 3대 문왕(文王)이 755년에 옮긴 뒤 몇 년간 동경에 이도한 것 외에 계속 수도로 군림 #발해 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이 도시는 중국 당의 장안성과 맞먹는 굉걸하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한다 #내성 안에는 궁성(주위 길이 2.5㎞)이 있는데 금란전 등 5기의 궁전지가 있고 1기의 문루가 남아 있다 #내성에는 관청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담장(45㎞)과 금원(禁苑)만 남아 있다 #외성은 시민들의 거주지 #주택 가로 사원들이 있었는데 #성곽과 가로 절터 불상과 석등들이 남아 있다 #성곽은 둘레가 17㎞ 이상 #가로는 5줄의 대로(40m)가 바둑판처럼 나 있고 #절터도 10곳이나 남아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석불상과 석등이 융성 #발해 불교문화의 자취를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석불상은 1800cm 높이의 좌불상으로 여러 차례 파손되었으나 #현재는 보수되어 원래의 위치 #석등은 6m 높이의 거대한 것 #상 중 하대와 화사석까지 완전한 웅장한 석등이다 #금동불 #동불 #철불 #도자불 #소조불이 대량으로 출토 #4겹의 사리함도 1975년에 출토되어 발해 문화의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성곽 유지 #돈화의 고성지(오동성 석호산성 흑성토성 마권자산성 성산자산성 남대자산성) 9곳이 조사되어 많은 유물과 건물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성곽들도 남아 있다 #발해의 고분들 또한 많은 양이 산재해 있는데 #돈화육정산(六頂山)의 100여 기 가운데 발굴된 정혜공주무덤(貞惠公主墓)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 무덤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단실묘들이 많은데, 정혜공주무덤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다 #집안의 고구려 모두루무덤과 비슷한 형식이어서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출토된 묘비는 발해의 성립과 성격 등 #발해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예 #석사자등은 발해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토기 기와 옥류 #초기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새로이 발견된 무덤벽화도 발해 문화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고려에서도 송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송에서도 고려의 문물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에서 불교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해 간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원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였다 #고려의 사경승들을 대거 유입해 갔으며 #각종 문물들도 가져갔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북경에 있는 금자사경(金字寫經)이다 #명 청(明淸)시대 #조선시대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건국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의 문화도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조선의 문화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들은 연간 몇 차례씩 명에 파견 #황엄이 가져간 사리와 법화사불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 조선의 문물이 대량으로 넘어갔다 #조선의 문인 사대부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긴밀하게 교류했으므로 조선의 문화유산이 중국에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청의 문화는 강희 건륭의 문화융성기 이후 #북학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 #이후 고증학파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조선의 문화도 척화파들의 강제 체류 이후 은연중에 심어졌고, 사신외교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산둥에 있는 조선 학자의 비석의 존재 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인(한민족)의 이주와 교포사회 #1999년 6월까지 중국 대륙에는 204만의 교포들이 길림·흑룡강·요령 등지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전체 교포의 60% 이상이 길림성에 모여 있었으며 #내몽고 자치구에도 소수의 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95년 1월에는 192만6017명의 교포들이 있었으며, 수교에 따른 체류자도 늘어나 당시(1995.1.) 1만4381명에 이르고 있다 #교포들의 초기 이주는 대부분 식량과 인삼 채취 및 비옥한 농토를 찾기 위한 것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1907년 제2차 한일협약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의병 군인들과 관리 #교육자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에 대거 투자하고 #일본 농민을 한국으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남한 각지의 소농민들이 농토 #이들 농토를 상실한 농민들이 보다 저렴한 간도 흑룡강 지역 등으로 농토를 찾아 이주하여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한 간도 한인의 보호정책과 대륙정책의 일부로 나타난 계획적인 일본의 한인 이주정책은 한국인의 만주 이주활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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