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漢陽都城.
서울 4대문, 숙청문, 서대문, 북대문, 흥인지문. 4소문, 동소문(혜화문), 서소문(소의문), 남소문(광희문), 북소문(창의문).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 사적 제10호. 서울 종로구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성곽.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명칭은 '서울 성곽'이었으나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총 길이는 약 18.2㎞, 면적은 46만 7922㎡이다.
서울 한양도성은 서울의 주위를 에어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으로, 도성의 둘레는 약 18㎞이다. 이곳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일대로, 남대문과 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 수문(水門), 여장(女墻), 옹성(甕城) 등에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고 서울특별시청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는 한양 천도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1395년(태조 4)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을 비롯하여 인왕(仁旺), 목멱(木覓), 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사산(四山)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1396년(태조 5) 축성되었다. 성벽은 백악(白嶽)·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만 9500자이며, 이 길이를 천자문(千字文)의 97자(字) 구획으로 나누고 매자구간(每字區間)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되었다.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弔字) 구역으로 끝났다. 이때 쌓은 성벽은 석성(높이 15자) 1만 9200자, 평지의 토성(土城;下廣 24자, 上廣 18자, 높이 25자) 4만 30자이며,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 높이는 16자,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자였다.
성곽에는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남쪽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북쪽 숙청문(肅淸門;북대문)의 사대문(四大門)과 북동쪽 홍화문(弘化門), 남동쪽 광희문(光熙門), 북서쪽 창의문(彰義門), 남서쪽 소덕문(昭德門)의 사소문(四小門)을 냈다. 이 가운데 흥인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의 도성 수축공사 때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1451년(문종 1)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뒤 1704년(숙종 30), 1743년(영조 19) 부분적 보수를 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 해 가을 징정 8만명을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사대문(四大門)이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사소문(四小門)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태조 5)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여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일꾼이 동원된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뒤 1426년(세종 8)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세종 29)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도의 수군(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여졌고,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성은 백악 · 인왕 · 목멱(남산) ·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18,127m이다.
태조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여 한양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1396년 1월부터 시작한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원 총 118,049명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총구인구의 4%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태조 때는 성은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고,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아 석축과 토축이 뒤섞여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르러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쌓았다. 한양성곽 안에는 조선시대 궁궐, 종묘, 사직 등의 왕실건물을 비롯하여 육조 등의 관청건물, 양반과 서민들의 주거지가 정해진 위치에 세워졌다. 출입시설인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 보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총 97구간으로 나누어 2개의 구간마다 관리 12명을 배치하여 감독하게 했으며,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을 분리시키는 등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첫 구간은 천자문의 ‘천(天)’으로 시작하여 97번째인 ‘적(吊)’으로 끝나고 있다.
과학적인 축조 성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다. 세종 때에는 큰 돌로 아랫부분을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게 쌓았다. 또한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숙종 때는 정사각형의 돌로 가지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을 이루었다. 이러한 축조기술은 지방의 읍성과 산성축조의 모범이 되었다.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 이후 군사지역으로만 사용되다가 2006년 4월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의 1.1㎞ 구간이 일반에 개방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4월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의 4.3㎞ 구간이 개방되었다.
개방 시간은 하절기(4~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동절기(11~3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할 수 있고 퇴장 시간은 오후 5시이다. 매년 3~11월까지 하루 2회 창의문과 말바위에서 출발하는 문화유산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탐방 시간은 약 2시간이며, 입장료는 무료이나 군사보호지역이므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이 무려 11만 8,000명이나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구(區)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 글자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 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에도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과 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 있고, 문도 남대문·동대문·동북문·홍예문뿐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 성곽은 조선시대의 태조를 시작으로 세종, 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돈의문, 敦義門. 별칭,서대문(西大門).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1396년(태조 5년) 건립된 서울성곽 축조 당시 서쪽의 대문(西大門)의 정식 명칭이다. 1413년(태종 13년) 폐쇄되었다가 1433년(세종 15년)에 정동 길 부근으로 옮겨 세워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711년(숙종 37년)에 다시 건립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처음 세울 때 다른 문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肅靖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세종 4년(1422)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으로 부르게 되었다.
숙종 때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이 있었고 그 위에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며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다.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준공되었다. 태조 13년(1413)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장의동의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는 동시에 같은 이유로 사직동 고개에 있던 돈의문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태조 5년에 건립된 돈의문은 오늘날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종 13년에 건립되었다는 서전문(西箭門)도 그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구로(舊路)를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을 세웠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 때에 서전문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계상(計上)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의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문명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놓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현재 돈의문이 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의 위치보다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37년(1711) 9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의하여 광희문을 개건할 때 돈의문과 함께 건립하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을 보면 돈의문도 숙종 때에 재건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서쪽에 대문으로 건설되었던 돈의문은 태종 13년(1413)에 그 남쪽으로 건립하고 서전문이라고 하였으며 세종 4년(1422)에는 다시 그 남쪽으로 이건하고 본래의 명칭대로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이 돈의문은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 년 간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또 유통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 확장이라는 구실로 철거되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2010년 4월 27일 서울시는 서울 4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미복원 상태였던 돈의문을 2013년까지 최대한 원형대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4대문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사방에 세워진 성문으로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을 말한다.
돈의문(敦義門)은 서울 성곽의 서문으로 서대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래 사직동에서 현재의 독립문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의문, 昭義門.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고 한다. 숭례문(崇禮門)과 돈의문(敦義門) 사이, 즉 지금 서소문동 큰길에 위치하였던 서남간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1396년(태조 5)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면서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1744년(영조 20) 문루(門樓)를 세우면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1472년(성종 3) 예종(睿宗)의 비(妃) 한씨(韓氏)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하면서 이 이름을 피해 소의문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서소문동 큰길에 있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 구실을 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石築)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虹霓門) 하나를 내어 통로로 삼았으며,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한 벽돌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龍頭),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像)을 각각 장식하였다.
이 문의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경성부사 京城府史》에 1472년(성종 3)에 예종비(睿宗妃) 한씨(韓氏)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한 까닭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472년에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통설로 되다시피 되었다. 1738년(영조 14)에 문루(門樓)를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명(門名)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고, 1744년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명을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문 이름이 소의로 고쳐진 것은 1472년이 아니라 영조 때였음이 확실하다.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그 모습을 대략이나마 살펴보면, 광희문과 마찬가지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石築)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虹霓門)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하게 벽돌로 쌓은 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구조의 그 상세함은 알 수 없으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龍頭),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像)을 각각 장식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1974년에 복원된 광희문과 비슷한 형식이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그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그 형태는 사진으로 겨우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성 밖의 반석방에 있던 계로서, 한성부 4소문 중의 하나인 소의문(昭義門)을 서소문이라고 하였는데 서소문의 도성 바깥쪽에 해당된 데서 계 이름이 유래되었다. 고종 초기까지 있었으나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없어졌다. → 반석방 [조선시대 행정구역][네이버 지식백과] 서소문외계 [西小門外契]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반석방, 盤石坊.
넓고 편편한 큰 바위가 땅에 묻혀 있던 데서 유래됨.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로서, 방명은 서소문 밖 의주로2가와 합동 사이에 넓고 편편한 큰 바위가 땅에 묻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성 안에는 미전하계의 차동 · 냉동 · 개정동 · 사거리 · 합동 · 한림동 · 한동 · 대동 · 포동 · 반천동, 미전상계의 신교 · 양대동 · 서장동, 구순청계의 순동 · 자암동 · 정자동, 연지계의 굴정동 · 양동 · 소이문동 · 대이문동 · 간동 · 매동 · 연지동 · 남정동 · 분동 · 사거리, 약전계의 상동 · 중동 · 하동, 조전계의 만리현 · 동산동, 도저동계의 도동 · 우수현, 석교계의 주교 · 신촌동이 있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중림동 · 합동 · 순화동 · 의주로1 · 2가 · 충정로2가 · 교남동 · 냉천동 · 봉래동1 · 2 · 3가 · 남대문로5가 · 동자동 · 서계동 각 일원과 후암동 일부에 해당한다. → 서부 [조선시대 행정구역],구순청계 [舊巡廳契]서울지명사전
도저동계 [桃楮洞契]서울지명사전, 동자동 [東子洞]서울지명사전, 미전하계 [米廛下契]서울지명사전, 반송방 [盤松坊]서울지명사전, 서계동 [西界洞]서울지명사전, 서계동 [西界洞]서울지명사전, 서부 [西部]서울지명사전, 석교계 [石橋契]서울지명사전, 순화동 [巡和洞], 반석방 [盤石坊]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조선의 서울성곽 태조 이성계는 한양(서울)에 성곽을 쌓았는데, 17km 길이, 40척 높이의 서울성곽은 현재 일부분만 남아있다. 성곽은 4개의 대문과 소문으로 연결하여 드나들도록 하였는데, 현재 남아있는 사대문과 소문의 모습 및 역사적 의미를되새기게한다.
수도 한양, 서울 4대문ㆍ4소문, 성곽 [城郭], 돈의문 [敦義門], 사대문 [四大門], 경복궁, 흥인지문 [興仁之門], 사소문 [四小門], 숙정문 [肅靖門]
서울시 봄꽃길"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서울시가 바야흐로 봄을 맞아 가족과 봄나들이하기에 좋은 서울시내 전체 공원, 가로변, 하천 변 등을 총망라해 봄꽃길, 연인과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길, 걷기 좋은 길, 색다른 꽃을 감상할 수 있는 길 등 상춘객 발길을 잡는 총 연장 181㎞의 「서울 봄꽃길 102선」을 소개했다.
2012년 서울시가 선정한 「서울 봄꽃길 102선」은 공원내 꽃길, 가로변 꽃길, 하천변 꽃길 등 총 102개소다. 특히 서울시는 102개소의 봄꽃길을 장소 성격에 따라 <봄나들이하기에 좋은 봄꽃길>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봄꽃길> <색다른 꽃을 감상할 수 있는 봄꽃길> <드라이브에 좋은 봄꽃길> <산책과 운동하기에 좋은 봄꽃길> 등 5가지로 분류해 시민 이용편의를 한층 더 높였다. 기상청은 올해(2012년) 서울에 개나리는 4월 2일, 진달래는 4월 5일경 꽃이 피기 시작하고, 벚꽃은 4월 10일경 꽃이 피기 시작해 16일경 절정을 이룰 것으로 전망했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봄나들이하기 좋은 봄꽃길 1 - 대형공원.
서울시가 추천하는 봄나들이 하기 좋은 봄꽃길은 교통이 편리하고, 봄꽃길 이외에도 다양한 즐길거리, 먹거리가 함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며 첫손에 꼽는 곳은 중랑캠핑숲, 북서울꿈의숲, 뚝섬 서울숲, 상암 월드컵공원 등 대형공원들이다. 작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중랑캠핑숲은 공원으로 조성하기 전부터 배나무 과수원이 있던 지역으로 산책로를 따라 핀 하얀 배꽃이 장관을 이룬다. 또 이곳은 오토캠프장으로 유명한데 잔디밭, 야외테이블, 전원 공급시설 등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스파와 샤워장 등 편의시설이 완벽해 캠핑장 시설로는 국내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북서울꿈의숲은 큰길을 따라서 왕벚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워낼 예정이지만, 그보다는 이태리식당인 라포레스타 앞 창포원의 화려한 창포꽃과 계류와 초화원 주변으로 심겨진 수만본의 야생화가 더욱 기대되는 곳이다. 잔디광장에서 도시락도 먹고, 전망대와 문화공연도 챙겨볼 수 있다.
남산은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순차적으로 산을 물들인다. 시냇물이 새롭게 조성된 북측순환로에 핀 수선화가 화려하다. N서울타워나 케이블카,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찻집『목멱산방』도 서울의 경관을 바라보기 좋은 코스이며뚝섬 서울숲은 생태숲 구간의 왕벚나무가 화려하다. 하지만 선큰가든의 화려한 꽃과 곤충식물관의 나비군무도 꼭 찾아보아야 한다. 단, 서울숲에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은 사전 예약이 필수다.
월드컵공원은 넓은 면적만큼이나 봄꽃이 다양하다, 평화공원 잔디광장에는 유채꽃이, 평화의공원 메트로폴리스길에는 꽃양귀비와 안개꽃이, 하늘공원 하늘길에는 개나리가 대단위로 화려한 꽃을 피운다. 노을공원의 캠핑장은 5월 1일부터 운영(4.2부터 인터넷 예약시행)하지만 미리 예약을 해두는 것도 좋다.
어린이대공원은 오랜시간 자라난 거대한 왕벚나무가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어 벚꽃이 만발할 때 가장 화려한 공원으로 꼽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원과 놀이시설까지 한공간에 입지해 있어 봄나들이 장소로는 손가락에 꼽힌다. 또,과천 서울대공원에는 순환도로의 왕벚나무가 인상적이다. 평일이라면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나라 최고의 동물원과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까지 연계한 봄나들이 코스도 좋다. 인근 경마공원도 많은 가족들이 찾는다.
봄나들이하기 좋은 봄꽃길 2 - 도심의 산과 공원
도심의 작은 산과 공원들도 봄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주변에는 다양한 문화공간과 맛집들이 즐비한 동네와 연계해 산책하기 좋은 곳들로, 동작구 보라매공원과 현충원, 서대문 안산, 석촌호수(송파나루공원), 서서울호수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이번에 새롭게 선정된 보라매공원은 서문 진입로로 들어서는 300m가 진달래와 붓꽃, 야생화로 펼쳐져 장관이다. 인근 현충원도 이번에 새롭게 추가 된 곳인데 국가유공자의 충의를 상징하는 수양벚꽃이 어우러져 호국의 큰 의미를 더욱 잘 나타내는 듯하다.
서대문구청 뒤로 오르는 안산은 멋진 벚꽃순환길이다. 산자락이 온통 하얗게 피어나는 화려함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인근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이용하기 좋다. 석촌호수는 산책과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자체로 거대한 봄꽃밭이다. 붓꽃 등 야생화 30만본을 심어 화려함이 이를데 없다. 주변에 롯데월드와 함께 아이들과 나들이하기에 제격이다.
서서울호수공원은 호수 주변 산책로를 따라 핀 왕벚나무꽃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정수장 부지를 공원으로 리모델링한 곳으로 공원 인근 김포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호수위를 지나갈때면 소리분수가 자동으로 가동돼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하며, 넓은 잔디광장에서 가족단위 피크닉을 즐기기에 알맞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드라이브에 좋은 봄꽃길
서울시는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봄꽃길론 새봄을 알리는 개나리와 진달래를 감상할 수 있는 종로구 감사원길, 북악스카이웨이, 연분홍색 벚꽃이 아름다운 은평구 증산로, 강서구 곰달래길, 금천구 벚꽃십리길 등을 꼽았다.
삼청공원과 와룡공원은 벚꽃이 멋지다. 특히 감사원에서 와룡공원으로 오르는 2차선 좁은 길의 왕벚나무 가로수는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꽃길이다. 삼청동, 가회동의 문화공간과 성북동의 맛집들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북악스카이웨이는 서울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다. 개나리, 진달래가 화려하고, 성북동, 부암동, 사직동과 연결돼 다양한 문화공간과 맛집들이 즐비하다.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을 잇는 세종로도 드라이브하면서 봄꽃을 볼 수 있다. 광화문광장에는 금잔화, 수선화, 가자니아, 데이지, 무스카라, 비올라, 튤립 등 다양한 봄꽃이 봄을 맞이한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산책과 운동에 좋은 봄꽃길"
산책과 운동에 좋은 봄꽃길은 평상시에도 산책․운동코스로 사랑 받는 한강과 하천을 따라 조성된 곳을 선정했다. 한강은 서울의 젖줄이기도 하지만 봄이 오는 통로이다. 잘 조성된 자전거길과 산책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곳곳에 피어나는 유채나 새롭게 심어진 야생화를 보는 재미도 클 것이다.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를 연결하는 중랑천은 각 자치구별로 모두 손에 꼽는 봄꽃길이다. 제방위로는 벚꽃이 만개하고 아래 산책로변으로는 유채, 장미, 창포 등 다양한 꽃이 화려하게 피어날 예정이다. 서대문구와 은평구의 불광천변,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영등포구를 잇는 안양천변, 서초구와 강남구의 양재천변, 그리고 남산공원 순환로와 서울의 중심을 흘러가는 청계천도 빼놓을 수 없는 봄꽃길이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꽃을 감상할 수 있는 봄꽃길
봄꽃으로 유명한 개나리, 벚꽃, 철쭉 이외의 색다른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색다른 꽃을 감상할 수 있는 봄꽃길도 소개했다. 2009년 개장한 서울창포원에서는 15,000㎡ 규모의 붓꽃원에서 130종의 다양한 붓꽃을 만날 수 있으며, 청계천로, 성북구 월계로, 동작구 사당로, 송파구 로데오거리 등에는 흰색의 쌀밥을 닮은 푸짐한 이팝나무꽃을 만나볼 수 있다. 양천구 신트리공원과 광진구 아차산보행녹도, 강동구 허브공원에서는 다양한 야생초화류와 허브류를 감상하며 자연학습까지 겸할 수 있어 인기가 매우 높으며, 한강, 안양천, 중랑천 둔치에는 대규모 유채밭이 조성되어 노란색 물결을 만날 수 있으며 중랑구 주말농장과 중랑캠핑숲에는 화려한 배꽃이 피어나게 된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봄꽃길
봄꽃과 함께 다양한 축제까지 즐기고 싶다면 4월 중 열리는 남산공원 100만인 걷기대회, 강동구 천호공원과 한강․여의도에서 개최하는 봄꽃축제에 참여해 보자. 2012년 남산 100만인 걷기대회는 4월 14일, 5월 12일, 6월 9일 총3회 개최되며, 가족사진․단체사진 촬영을 위한 포토존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운영된다. 4월27일부터 3일 동안 강동구 천호공원에서 처음으로 봄꽃축제가 개최돼 봄꽃과 함께 다채로운 문화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제8회 한강 여의도 봄꽃축제는 4월 13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다.(영등포구청 홈페이지 참조) 문화예술공연은 13일부터 17일에 집중된다. 국제 거리예술공연 비아페스티벌(VIAF), 구민 노래자랑, 아프리카 쇼나 조각전 등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선정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서울시 봄꽃길 - 상춘객 발길 잡는 '서울 봄꽃길 102선' (길숲섬, 서울특별시)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경성부사(京城府史)』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석조문화재보수정화지(石造文化財補修淨化誌)』
『서울의 문화재』1(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경인문화사, 2011)
『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문화재대관』-사적편 下-(문화재관리국, 1976)
『서울성곽』(서울특별시, 1976)
문화재청(www.cha.go.kr)[네이버 지식백과] 서울한양도성 [─漢陽都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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