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6일 화요일

중국, China, 中國, 1

중국은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이 베이징[Beijing]을 수도로 중국대륙에 수립한 사회주의체제의 인민공화국.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대한민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西]·산시[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타이완 등 23개 성()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등 5개 자치구(),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등 4개 직할시(), 마카오·홍콩 등 2개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구역
주요도시


수도는 2,200만 명이 살고 있는 베이징()이다. 중국의 면적은 약 960만㎢로 한반도의 44배이며, 세계 4위에 해당한다. 중국은 남쪽 끝의 난사 군도(, 23˚N)로부터 북쪽 끝의 헤이룽 강(, 53˚32´N)까지 남북의 길이가 5,500㎞이고, 서쪽 끝의 파미르고원(73˚E)에서부터 동쪽 끝의 우쑤리 강(135˚E)까지 5,500㎞에 이른다. 
국경선의 총길이는 2만 280㎞에 이르며, 한국,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3국(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 14개 국가와 육지를 접경하고 있다. 대표적인 강으로는 길이가 6,300㎞인 양쯔 강()과 길이가 5,464㎞인 황허 강()이 있다.

중국의 인구는 2012년 말을 기준으로 약 13억 5,404만 명[타이완(), 홍콩(), 마카오() 제외]이며,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5%이다. 농촌 인구가 약 6억 7,400만 명이고, 도시 인구는 약 6억 6,500만 명이다. 중국에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소수민족은 1억 1,379만 명으로 총 인구의 8.5%을 구성하고 있다.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은 약 200만 명으로 소수민족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한어(,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데, 몇몇 방언() 및 소수민족의 언어도 쓰이고 있다.

중국은 노농()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로서 이는 1982년에 마련한 개정헌법 제1조에 규정되어 있다. 중국에는 8개 정당이 존재하지만 이는 형식상의 존재일 뿐이고 실질적인 권력 형태는 공산당 일당독재()이다. 
주요 지도자로는 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에 후진타오(胡錦濤), 당 중앙 및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에 원자바오(溫家寶), 국가 부주석에 시진핑(習近平),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에 우방궈(吳邦國),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자칭린(賈慶林), 외교부장에 양제츠(楊潔篪) 등이 있다.

중국의 건국일은 1949년 10월 1일이고,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가입일은 1971년 10월이며,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의 국방예산은 2011년 기준으로 약 915억 달러이고, 군사력(정규군)은 총 230만 명으로 육군 약 160만 명, 해군 약 26만 명, 공군 약 33만 명, 제2포병 약 10만 명이고, 이 외에 무장경찰 약 66만 명이 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은 2010년 기준으로 약 5조 8,783억 달러이고, 경제성장률은 10.3%,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이다. 대외무역액은 2조 9,727억 달러인데, 수출이 1조 5,779억 달러이고, 수입은 1조 3,948억 달러로서 1,831억 달러 흑자이다.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2조 8,473억 달러이고, 외국인 직접투자는 1,057억 달러(외국인 투자건수 2만 7,406건)이다. 중국의 재정은 재정수입이 8조 3,080억 위안, 재정지출이 8조 9,575억 위안으로 6,495억 위안 적자이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성급() 총 32개와 주급() 총 332개, 현급() 총 2,860개, 향(), 진() 총 4만 4,822개로 이루어져 있다. 성급()에는 베이징(), 텐진(), 상하이(), 충칭() 등 4개의 직할시()가 있고,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시짱(西)자치구, 광시좡족(西)자치구, 닝샤후이족()자치구 등 5개의 자치구()가 있으며, 22개의 성()이 있다.

성에는 화베이구()에 허베이성(), 산시성(西)이 있고, 시베이구(西)에 산시성(西), 간쑤성(), 칭하이성()이 있고, 둥베이구()에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이 있고, 화둥구()에는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장시성(西), 푸젠성(), 산둥성()이 있고, 중난구()에는 허난성(), 후베이성(), 후난성(), 광둥성(), 하이난성()이 있고, 시난구(西)에는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이 있다.
중국은 타이완()을 23번째 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외에 성급 행정구역으로서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마카오()가 있다.

주급()에는 22지구(), 30자치주(), 5맹(), 275시()가 있다. 이 가운데 자치주·맹·시는 독립행정구이지만, 지구()는 독립행정구가 아니며, 다만 현급() 행정구들을 관할한다.

현급()에는 830시할구(), 381시(), 1,478현(), 116자치현(), 49기(), 3자치기(), 2특구(), 1임구() 등이 있는데, 한국의 군()에 해당한다.

향(), 진()은 총 4만 4,822개인데, 향()은 한국의 면()에 해당하고, 진()은 읍() 또는 시()의 구()에 해당한다.


중국 개관

중국 개관
국명
중화인민공화국(PRC, People’s Republic of China(영어), (중국어))
위치
동경 73°~135°, 북위 23°~53°32´
면적
약 960만㎢(한반도의 44배, 세계 4위)
민족
한족()과 55개 소수민족(1억 1,379만 명, 총 인구의 8.5%)으로 구성
언어
한어(; Chinese) [*표준어: 보통화(; Mandarin)]
문자
한자()
인구
13억 5,404만 명(2012년 말 기준)[*인구수 세계 제1위]
수도
베이징()
국가형태
노농()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1982년 개정헌법 제1조 규정)
정부형태
실질적 공산당 일당독재(형식상 8개 정당 존재)
행정단위
성급() 총 32개, 주급() 총 332개, 현급() 총 2,860개, 향(), 진() 총 4만 4,822개
종교
5대 종교: 불교(B.C.2), 도교(2세기경), 천주교, 이슬람교(7세기경), 기독교(19세기경) 등
교육
초등학교, 중등학교까지 의무교육 실시
국내총생산(GDP)
약 5조 8,783억 달러(2010년 기준)
화폐단위
위안(CNY, )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이 베이징[, Beijing]을 수도로 중국대륙에 수립한 사회주의체제의 인민공화국.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약칭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중국의 국토는 러시아·캐나다·미국에 이어 세계 제4위이고, 중국의 황하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다. 2015년 현재 국민 총생산량은 11조 276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280달러이다. 2013년 이후 국가주석은 습근평(, Xi Jinping)이고, 국무원 총리는 이극강(, Li Keqiang)이다.
수도는 1949년 9월 27일 베이징[, Beijing]으로 결정되었고, 그 이전에는 북평()으로 불리었다. 북경은 경()으로 약칭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소재지로, 중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고, 중국 옛 도시 중 하나이다.
중국 인구는 대부분 한족()이고, 몽골[]·회()·장()·묘()·조선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약 7%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의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50∼60%로 대부분 변경지역이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발표에 의하면, 2008년 총인구는 13억 2802만 명으로, 작년보다 673만 명이 증가하였다. 일년 동안의 출생 인구는 1608만 명으로 출생율은 12.14%이고, 사망 인구는 935만 명으로 사망률은 7.06%이며, 자연 증가율은 5.08%이다. 출생 인구 성별 비례는 120.56%이다. 2016년 현재 중국의 총인구는 13억 7354만 1278명이다.
중국 면적은 959만 6960㎢로 세계 육지 면적의 15분의 1 및 아시아 면적의 4분의 1를 차지하고 있고, 한반도의 약 44배로 러시아, 캐나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4위이다.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부와 태평양의 서안에 위치해 있다. 영토의 북단은 흑룡강성()의 막하(, 북위 53°30′), 남단은 남사군도(, 북위 4°)로 위도 차이가 49도이고, 동단은 흑룡강과 우수리 강이 만나는 곳(동경 135°05′), 서단은 파미르 고원(동경 73°40′)으로 경도 차이가 60도이다. 남에서 북까지 그리고 동에서 서까지의 거리는 각각 약 5천 킬로미터 이상이다. 
육지 국경선의 거리는 약 2만 2,800 킬로미터로, 동쪽에는 북한, 북쪽에는 몽고, 동북쪽에는 러시아, 서북쪽에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서쪽과 서남쪽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부탄, 남쪽에는 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과 연접하고 있다. 중국 육지 주변으로는 약 5,400개의 도서가 있고, 그 중 최대 도서는 타이완()이고, 두 번째는 해남도()이다. 중국 최남단 해역에는 동사군도()·서사군도(西)·중사군도()·남사군도()가 있고, 이들로 인해 주변 국가와는 영토분쟁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의 법정 화폐는 인민폐()이다. 중국인민은행()은 인민폐를 관리하는 국가의 주관기관으로 인민폐의 설계·인쇄·발행을 책임진다. 인민폐의 단위는 위앤(, Yuan)이고, 인민폐의 보조화폐는 쟈오(, Jiao)와 펀(, Fen)이다. 1위앤은 10쟈오이고, 1쟈오는 10펀이다. 중국은 인민폐 발행 이후 50여 년 동안 5종의 인민폐를 발행하여, 지폐·금속폐·보통기념폐·귀금속기념폐 등 여러 품종의 화폐를 구성하고 있다. 2010년 유통하는 인민폐는 중국인민은행이 1987년 발행한 제4종 인민폐와 1999년 발행한 제5종 인민폐으로, 2종의 인민폐가 동시 유통되고 있다. 제4종 인민폐에는 1쟈오·2쟈오·5쟈오 그리고 1위앤·2위앤·5위앤·10위앤·50위앤·100위앤 등 9종 액면이 있고, 그 중 1쟈오·5쟈오·1위앤에는 지폐와 동전 2종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50위앤·100위앤의 대액면 인민폐를 새로이 발행하기 시작했다. 제5종 인민폐에는 1쟈오·5쟈오 그리고 1위앤·5위앤·10위앤·20위앤·50위앤·100위앤 등 8종 액면이 있고, 그 중 1쟈오·5쟈오·1위앤에는 지폐와 동전 2종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시장유통의 필요에 따라 20위앤 액면을 새로이 발행하고, 2위앤 액면을 폐기시켰다.
중국의 언어는 표준어·방언·소수민족 언어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중국의 공식 표준어는 현대 북경어()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어(, Hanyu) 혹은 보통화(, Putonghua)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부르는 ‘중국어’의 명칭은 여러 가지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93% 이상의 다수를 점하는 한족() 언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어, 이 공용어를 공식적으로 ‘한어’라고 한다. 중국의 표준어는 ‘보통화’라고 한다. 
중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보통화를 제정하기 전에는 ‘관화’()라는 명칭의 북방방언이 가장 널리 통용되었다. 북방방언을 관화라고 하는 것은 이 사투리가 명대·청대 이래로 관계()의 통용어()로 사용된 데서 연유한다. 중화민국 초기 시절 관화에 근간을 두고 있는 말을 정식 보통화로 제정하고 그 명칭을 ‘국어’()라 하였으며,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국어란 명칭은 현재 홍콩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인다. 
‘화어’()는 주로 싱가포르·말레이지아·필리핀·인도네시아 등지의 화교 사회에서 쓰는 명칭이다. 이곳의 화교들은 화인()이라 하는데, 이들의 언어라고 하여 화어라고 한다. 이들 동남아 화교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남방 지역에서 진출한 사람들로 중국의 남방 방언이 우세하나, 상호 의사 소통을 위해 중국 본토의 보통화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사용 배경이 달라서 상호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보통화·국어·화어는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들 간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중국에는 넓은 지역만큼이나 다양한 방언들이 존재한다. 방언이란 중국 인구 90% 이상이 사용하는 한족의 지방언어를 뜻한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방언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거의 모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단지 21개 민족만이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예로 회족·만주족 등 3개 민족이 한자를 사용하고, 조선족·몽고족·티벳족(Tibetian), 장족()·장족()·위구르족 등 11개 민족이 자신의 고유 문자와 통용 문자를 사용하며, 묘족()·이족() 등 7개 민족은 비록 자신의 고유 문자를 갖고 있으나 별로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 34개 민족은 자신의 문자를 갖고 있지 않다.
중국 각 민족의 언어는 서로 다른 어계에 속하는데, 중국 소수민족의 언어는 매우 복잡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장어계()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한어·장어()·묘어 등 20개 어종이고, 알타이어 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조선어·위구르어·카자흐어·우즈베크어·키르기스어·몽고어 등 17개 어종이 있다. 그 이외에 남아시아어 계에 속하는 것과 인도유럽어계가 있으며, 타이완의 고산족어는 남도어계()에 속한다.
중국 문자는 한자()로, 1956년 이후 중국에서는 일부 한자를 간소화시킨 간체자()를 정자()로 규정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2,225자의 간체자가 있다. 1958년부터는 한자의 읽는 방법으로 기존의 주음부호()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한어병음방안()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알파벳 자모를 차용하여 중국음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법정 기념일로는 신년(1월 1일, 휴가 1일), 춘절(음력 1월 1일, 음력 12월 30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휴가 3일), 청명절(음력 당일, 휴가 1일), 국제 노동 부녀의 날(3월 8일, 부녀자 반공일), 식목일(3월 12일), 국제 노동자의 날(5월 1일, 휴가 1일), 중국 청년의 날(5월 4일, 14세 이상 청년 반공일), 단오절(음력 당일, 휴가 1일), 국제 간호사의 날(5월 12일), 어린이의 날(6월 1일, 14세 미만 소년 아동 휴가 1일), 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7월 1일), 중국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8월 1일, 현역 군인 반공일), 스승의 날(9월 10일), 추석(음력 당일, 휴가 1일), 건국 기념일(10월 1일, 휴가 3일), 기자의 날(11월 8일) 등이 있다.

중국 의 자연환경

800만 년 전 청장고원()이 융기하자 거대한 지각운동으로 중국의 지형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지세는 계단처럼 생겨 서쪽에서 동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서고동저(西) 지형이다. 인도 판상표층과 유라시아 판상표층의 충돌로 융기한 청장고원은 평균 해발 4천 미터 이상으로 ‘세계의 용마루’라고 칭하며 중국 지형의 고지대를 형성한다. 고원 위의 히말라야 주봉인 주무랑마()봉은 높이가 8,848 미터로 세계 제일 고봉이다. 중지대는 내몽고고원·황토고원·운귀고원·타리무분지·준걸분지·사천분지에 의해 구성되고, 평균 해발 1천에서 2천 미터에 이른다. 중지대 동변에 자리한 대흥안령·태행산·설봉산을 지나 동쪽으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지역이 저지대이고, 평균 해발 500 미터에서 1천 미터 이하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북평원·화북평원·장강중하류평원이 분포되어 있고, 평원의 주변에는 낮은 산과 구릉을 놓여 있다.
중국에는 하류가 많아서, 하천 유역 면적이 1천 평방킬로미터 이상인 것만 해도 1,500여 개에 달한다. 주요 하류는 대부분 청장고원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수원지에서 하구에 이르는 낙차가 매우 크다. 그래서 중국의 수력 자원은 대단히 풍부하고, 매장량은 6억 8천 만 킬로와트에 도달한다. 하류는 바다로 흘러가는 하천과 내륙에서 사라지는 내륙하()로 구분한다. 해양으로 흘러가는 하천의 유역 면적은 전국 육지 총면적의 약 64%를 차지한다. 장강·황하·흑룡강·주강()·요하·해하()·회하() 등은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에 들어간다. 서장(西)의 야루장뿌쟝()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국경을 넘은 뒤 인도양으로 들어간다. 신강()의 어얼치스허()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국경을 넘은 뒤 북극해로 들어간다. 내륙호()로 유입되거나 사막 등으로 사라지는 내륙하는 유역 면적이 전국 육지 총면적의 약 36%를 점하고, 신강 남부의 타리무허는 중국에서 가장 긴 내륙하로 전체 길이는 2,179 미터이다.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북반구 온대지방에 속하여, 기온이 온화하고 사계가 분명하며 거주와 생존에 매우 적합하다. 중국 기후의 주요 특징은 대륙성 계절풍의 영향으로, 매년 9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는 건조하고 한랭한 겨울계절풍이 시베리아와 몽고고원으로부터 불어와 남북 온도차가 매우 심하다. 매년 4월부터 9월까지는 온난하고 다습한 여름계절풍이 동부와 남부의 해양으로부터 불어와 보통 후덥지근하고 비가 많으며 남북 온도차는 매우 적다. 중국은 남부로부터 북부에 이르기까지 열대·아열대·온대·한대 등 여러 온도 지역이 존재한다. 강수량은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점차 감소하며, 각 지역의 평균 강수량은 차이가 매우 커서 동남 연해안지역은 1,500 밀리 이상에 달하고 서북 내륙지역은 겨우 200 밀리 이하일 뿐이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야생동물의 종류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이고, 오로지 척추동물만도 6,266 종이 있고, 그 중에서 육서 척추동물은 2,404 종이고, 어류는 3,862 종으로, 세계 척추동물 총 종류의 약 10%를 점하고 있다. 자이언트 판다·금사후·화남호·두메꿩·두루미·따오기·양자강 악어 등 100여 종의 중국 특산 희귀 야생동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흑백 털색이 섞여 있는 포유동물 자이언트 판다는 체중이 약 135 킬로그램으로 여린 댓잎과 죽순을 먹이로 삼고 현재 약 1천 마리가 남아 있어 매우 진귀하며 세계 보호 야생동물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은 또한 세계적으로 식물자원이 매우 풍부한 국가 중 하나로, 고등식물만도 약 3만 2천 종이 있다. 북반구 한대·온대·열대 식생의 주요 식물은 중국에서 거의 모두 볼 수 있다. 목본식물에는 7천여 종이 있고, 그 중 교목은 2,800여 종이 있다. 중국 식용식물으로는 2천여 종이 있고, 약용식물에는 3천여 종이 있으며, 백두산의 인삼·서장의 잇꽃·영하()의 구기자·운남()과 귀주()의 삼칠초 등은 모두 유명하고 귀중한 약재이다. 화훼식물의 종류도 매우 많고, ‘꽃 중의 꽃’ 목단(모란)은 중국에 고유하며 꽃송이가 매우 크고 꽃잎이 많고 색채가 아름다워서 중국의 국화()로 숭배를 받는다.

역사, 고대사, 원시사회

중국은 세계 4대문명 중 하나로, 이미 3천 여 년의 문자 기록이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에 중국 운남성() 원모()에서 최초의 원시인류인 원모인()이 발견되었고, 약 50만 혹 40만 년 전에 베이징[] 주구점() 일대에서 직립 보행하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할 줄 알며 불을 사용하였던 북경인()이 나타났다. 약 7천 년에서 6천 년 이전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에서 출현한 앙소()문화는 모계 씨족사회를 구성하였고, 약 5천 년 이전 황하유역에서 출현한 용산()문화는 부계씨족사회를 구성하였으며, 이 두 역사단계에 인류는 이미 각종 석기를 마제할 수 있었고, 도기를 발명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원시사회 말기에 황하유역에는 많은 부락이 분포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삼황()·오제()의 마지막인 황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부락이 비교적 강대하고 문화도 비교적 선진적이었다. 황제는 후에 중국인에 의해 중화민족의 시조로 불리었다.

노예사회

중국은 전설시대인 삼황·오제를 거쳐, 하()·상()·주() 왕조의 3대 시기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만, 하나라는 약 기원전 21세기에 세워졌던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약 500년 후 멸망하였다고 하나, 고고학적으로는 실증되어 있지 않다.
상나라(혹은 은()나라로 칭함)는 약 기원전 16세기 하남성() 안양현()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번영하며 청동기문화와 갑골문자를 사용하였다. 기원전 11세기경 섬서성(西) 호경()에 도읍을 둔 주나라가 일어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봉건적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때가 서주(西)시기로, 주나라는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분봉제() 를 실행하였다.

봉건주의 사회

춘추전국시기
기원전 770년 주나라는 제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또 북방민족의 침입도 자주 있자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동주()시기인데, 동주는 춘추()와 전국()의 두 단계가 있어 춘추전국시기라고 하며, 이때에 중국은 봉건시대로 진입하였다. 춘추시기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이고, 전국시대는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이며, 전국시대에는 여러 제후국()이 존재하며 서로 겸병하여 사회의 변혁이 격렬하였다. 이 시대에는 도가·유가·법가·묵가 등 제자백가()가 출현하여 각 제후 밑에서 산업·문화·군사를 부흥시켰고, 이것은 그 이후 중국 문화의 원천이 되었다.
진한시기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 제후국 하나인 진(, Chin)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함양()에 도읍을 정하며,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중국을 칭하는 지나()라는 명칭의 기원은 바로 이 진나라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너무 엄격한 법률 지상주의 정책을 시행한 결과로 인해 멸망하였다.
기원전 206년 유방()에 의하여 한()왕조가 시작되어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였으며, 이 시기를 서한(西)이라고 한다. 한나라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한문화를 집대성하였다. 한무제()의 통치기간(기원전 140년∼기원전 87년)은 한나라가 가장 강성한 시기이고, 대외교류 활동이 활발하여,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비단길(Silk Road)를 개척하였다. 25년에 한나라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이 시기를 후한()이라고 한다. 1세기 경에는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하였고, 105년에는 채륜()이 민간에서 통용되던 종이 제작 방법을 집대성하여 종이 제작 기술을 발명하였다. 동한은 220년 멸망하였다.
위진남북조시기
2세기 말부터 황건()의 난과 함께 천하는 군웅할거의 상태가 되어 3국(··)시대를 거쳐, 265년 위()가 통일하여 진()나라를 세우고 그 전기를 서진(西), 그 후기를 동진()으로 칭하며, 420년 동진이 망하면서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북조()시대로 진입하였다.
수당오대시기
581년 수()나라가 건국하며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수나라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남북 교통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멸망하였다.
618년 당()나라가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여 약 300년 간 지배하였다. 이때는 중국 봉건사회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이었고, 경제가 발달하고 주변 민족관계도 원만하여 장안의 인구는 약 100만에 이르렀다. 또한 당나라의 정치제도와 문학적 성취는 주변 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당나라의 여러 제도는 이후 중국 역대 국가 통치체제의 전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일본·월남에도 도입되어 통치의 기본 조직이 되었다.
당 멸망 후 중국은 5대()10국()으로 약 60년 간 다시 분열되어 군벌들이 각지에 정권을 수립하였다.
송, 원시기
960년 송()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었다. 즉 북송()시대가 시작되었다. 송나라는 중국 봉건사회가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들어가는 전환기로, 진취적인 개척과 창조 정신이 감소하고 문화적 경향은 보수적이 되었다. 한편 송나라는 중국 도시와 시민문화가 발전한 중요 시기로 많은 중요 도시가 출현하였고, 시민문화를 배경으로 각종 통속적인 예술형식으로 희곡과 소설 등이 매우 유행하였다. 그런데 북방 소수민족의 위협으로 송나라는 1127년 장강 이남으로 천도하여 남송()시대를 열었다. 이로부터 북방의 선진적 문화와 경제의 중심은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이전되었다.
북방에서는 거란·여진·몽고족이 차례로 요()·금()·원()나라를 건국하여 그 세력이 자못 왕성하였다. 송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북방의 몽고족 세력으로, 몽고족은 1271년 원나라를 세우고, 1279년 중국을 통일하며, 대도(, 지금의 베이징)에 도읍을 정하였다. 원나라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국의 민족과 종교를 더욱 융합시켰으나, 민족과 사회의 모순이 격렬해져, 원나라의 통치기간은 100년을 채우지 못하였다.
명, 청시기
일시적 무력의 우위로 한족을 정복한 원나라는 인구와 문화 수준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중원에서 쫓겨났고, 1368년 한족 주원장()이 명()나라를 남경()에 세웠다. 1421년 명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송나라 이래 발달된 군주 독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확립하였다.
1644년 중국 동북부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북경에 들어와 명을 대신하여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청나라의 발전방향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와 유사하여, 청나라 통치자들은 명나라 후기와 일맥상통하는 쇄국정책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서양과의 통상과 교류를 거절하여, 국가와 국민의 활력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국가의 전면적인 쇠약을 자초하였다.

근대사

아편전쟁 후 주권 상실

1840년부터 1919년까지의 시기를 보통 중국 근대사로 칭하고, 1840년 발생한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사의 발단이다. 영국은 자국의 아편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으로 중국을 진공하여 아편전쟁을 야기하였으며, 이에 대해 부패하고 무능한 청 정부는 굴복하여 영국 정부와 남경조약()을 맺어 대량의 전쟁 배상을 부담하고 홍콩을 영국의 조차지()로 할양하였다. 1894년 청 정부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에게 대만(, 타이완, Taiwan)을 점령당하는 등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하였다. 1900년에는 8국 연합국(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태리)에 의해 청나라의 수도 북경이 점령당하여, 외국 군대의 북경 주둔을 허용하는 등의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자, 중국은 주권을 심각히 상실하여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하였다.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직면하여 사회 여러 계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완강히 저항하며 국가의 통일과 주권을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것으로는 태평천국운동, 변법유신운동, 의화단운동, 신해운동이다.
1851년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깃발 아래 농민을 이끌고 광서성(西)에서 기의하여 신속히 중국 남부지방을 점령하였다. 운동의 목적은 토지의 균등한 분배와 기독교사상에 근거한 남녀 평등의 주장 그리고 유가사상의 반대이었다. 운동은 청 정부와 외국 제국주의자가 결탁하여 공격함으로써 결국 실패하였다.

변법 유신운동 발기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강유위(), 담사동(), 양계초() 등의 개량파는 변법유신()운동을 발기하여, 중국 전통의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 서방의 공업과 과학기술 및 상업과 교육제도를 수용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를 주장하였다. 개량파의 운동은 황제 광서()의 지지를 얻었으나, 서태후(西) 위주의 당시 집권세력인 수구파에 의해 진압을 당하여 실패하였다. 변법유신운동은 100일 동안 유지되어 100일 유신()으로 칭한다.

의화단 

1900년 의화단()운동은 처음으로 직접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며 발생한 농민운동으로, 산동성에서 시작하여 급속으로 화북지방과 동북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이 운동은 부청멸양(: 청을 떠받치고 서양을 멸망시킨다)을 주장하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강렬한 복수심을 발현하였으나, 8국 연합군의 무장 간섭에 의해 참패하였다.

민주주의적 혁명'

1905년 손중산()은 중국 최초의 정당인 동맹회()를 조직하여 중화부흥·민국()수립·경자유기전()의 민주주의적 혁명 강령을 제시하고, 그의 강령을 민족()·민권()·민생() 즉 삼민주의()로 개괄하였다. 동맹회는 중국 각지에서 여러 차례 무장 기의를 시도하다가, 1911년 즉 음력으로 신해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기의()를 성공하여 청 왕조를 무너뜨렸다. 손중산은 동맹회를 중국국민당()으로 개명하며, 중화민국()임시정부를 남경에 세우고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여, 중국의 봉건제도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 시기를 중국에서는 구민주주의 혁명시기( )라고 칭한다.

현대사

북경대학 중심의 운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하자 일본제국주의가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Paris, 1919·1920)를 통해 패전국 독일의 조차지인 산동()반도 청도()지역을 차지하려고 기도하자, 이에 대해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 중심의 북경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에 모여, 당시 중국 통치세력인 북양군벌() 정부의 매국적 조치에 항의시위하였다. 초기에 북양군벌 정부는 가혹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나, 가혹한 진압에 대한 전국민의 분노가 격해지며 항의 시위 활동의 규모가 확대되자, 결국 체포된 학생을 석방하고 관련 외교관원을 파면하며 파리평화회의 강화조약의 서명을 거절하였다. 5·4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선진국의 문화 사조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과학과 민주를 국가 건설의 원칙으로 주장하였다.

공산당 창당

5·4운동의 직접적인 성과 중 하나는 중국 청년세대가 민족의 운명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도록 그들을 각성시키고 교육시킨 점이다. 이러한 사상운동이 정치활동으로 전향하는 과정 중에 중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적극 학습하고 전파하는 진독수()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소조()가 결성되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소조는 러시아의 1917년 10월혁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1921년 7월 전국 각지의 공산주의소조를 대표하는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상해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 대회에는 이후 중국공산당의 영도자가 되는 모택동()도 참석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성립은 중국 현대사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의 시기를 중국에서는 신민주주의 혁명시기( )라고 칭한다.

국내 혁명전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중국공산당은 손중산의 중국국민당과 제1차 국공합작()을 맺고 군벌 타도를 목표로 북벌전쟁()을 진행하였다. 1925년 손중산이 죽자 장개석() 중심의 중국국민당은 중국공산당과 분열하기 시작하고, 1927년 4월 장개석이 공산주의자 척결을 위한 상해쿠데타를 일으키자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중국공산당은 독립적인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중국국민당과 10여 년의 무장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이 시기에 모택동은 점차 중국공산당의 영도자로 부상하였다.

일본의 침략" 항일전쟁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군대는 1934년에서 1936년까지의 기간에 대장정()을 완료하였으며,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간의 항일전쟁()을 겪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단행하자,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은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일본에 대하여 저항하자는 민중의 강력한 요구에 응하며 중국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진행하였다. 국공 양당은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여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저항함으로써 항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정치세력의 기반과 병력을 구축하였다. 한편 항일전쟁의 승리는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중국이 제국주의국가에 대항하여 쟁취한 최초의 승리이며, 중국 근대사 이후 역사적인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인민공화국 건국과 건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공산당은 해방전쟁()를 겪었다. 1949년 4월 중국공산당 군대는 장강을 건너 단기간에 중국 본토를 제압하고, 같은 해 5월 중국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소집하여 이를 근거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를 수립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으로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에서 사회주의국가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1950년 중국 정부는 전국 농업 인구수 90% 이상을 점하는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고,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시행하였다. 1957년부터 1966년까지는 중국이 대규모의 사회주의건설을 전개한 시기이고,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는 문화대혁명()의 10년으로 국가와 국민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건국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1976년 10월 강청() 등 사인방()의 극우파가 구속되면서 문화대혁명은 종결되었고, 중국은 새로운 역사시기로 진입하였다.
원래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었던 등소평()이 복권되면서, 1979년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고 현대화건설을 국가목표로 설정하였다. 경제·정치 체제의 개혁과 대외개방을 통해 중국은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노선을 확립하면서, 경제는 성장하고 국민생활은 점차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강택민(, Jiang Zemin)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담당하고, 1993년에는 국가주석이 되어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견지하였다.
2002년 11월 호금도(, Hu Jintao)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당선되고, 2003년 3월에는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11월 습근평(, Xi Jinping)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호금도로부터 물려받았다. 2013년 3월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었다.
중국의 정치는 국가 조직과 중국공산당 조직 및 군 조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국가 조직 의 특징

중국의 국가조직 이론은 민주집중제()와 인민민주독재(, 인민민주전정)이고,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약칭 )를 정점으로 하여, 행정·사법·검찰기구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연계되어, 중앙이 통일적 관할하고 있다. 지방 조직은 성()·현()·향()의 3등급으로 조직되어 있고, 하부 구조는 중앙 조직의 기능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전통적인 중국의 통치 조직 형태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표방하면서도, 지방정부에 상당한 수준의 자주권을 허용하여 왔다. 현대 신중국 정부도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통일적 관리 하에 일정한 자율권을 지방정부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개혁개방 이후, 자원배분과 경제개발 추진 등의 방면에서, 지방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지방보호주의의 추세가 확산됨으로 인해, 지방 분권화의 정도와 성격에 관한 중앙과 지방간의 미묘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국가조직

조직의 특징

신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은 모든 정치 권력의 근원이고, 삼각형 구조의 중앙집권적 위계 질서를 통해 다른 정치조직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한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국가의 중요 정치·경제·사회적 목표와 정책을 결정하고, 이들 정책과 결정이 각 분야의 국가기관을 통해 집행되는 것을 감독·통제한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중앙 조직, 성급() 이하 행정단위를 기초로 설치된 지방 조직, 향급() 이하의 당 기층조직( )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당의중앙 조직

전국인민대표대회(, 약칭 大또는)
중국공산당의 명목상 혹은 의전상 최고기관이다. 전대의 회의는 5년마다 1회 소집하고, 전대의 회기는 1∼2주 동안이다. 대규모의 구성원 참여에 의한 집회이므로 토의기관으로서 부적합하여 전대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추인하는 형식적 회합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대 대표의 정원 숫자는 일정하지 않고, 1997년 9월 제15기에는 2,048명이었고, 2002년 11월 제16기에는 2,111명이었다. 2007년 10월 제17기에는 2,270명이다. 전대의 선거 방법은 구체적인 결정 과정이 공개되지 않고 있으나, 중앙의 권력 판도에 따라, 성 및 지급 지방 당에서의 선출로 결정된다고 추측한다.
전대의 기능은 중앙위원회()·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보고를 청취·심사하고, 당의 중대 문제에 관해 토론·결정하며, 당장(, 당의 규약)을 개정한다. 또한 중앙위·중앙기율검사위 위원을 선출한다.
전대의 제일 중요 업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통상 당 고위층에 의해 작성된 위원후보자 예비명부를 형식적으로 승인한다.
1) 역할과 구성: 입법·사법·행정권을 지닌 국가 최고 권력기관으로, 그 상설기관은 전인대상무위원회이다. 전인대의 선출 방법은 성·자치구·직할시의 인민대표대회 및 인민해방군의 선거에서 선출되고, 정원은 3,500명을 초과할 수 없고, 인민대표대회 선출 대표의 숫자는 인구비율로 배분된다. 농촌 대표 1인당 인구수는 도시 대표 1인당 인구수의 8배로 간주하고, 소수민족 대표는 인구 분포의 상황을 참조하여 최저 1인의 대표를 선출한다. 2008년 이후 제11기 전인대 대표는 2,987명이다.
임기는 5년으로, 정기소집은 매년 1회 상무위원회에 의해 소집되고, 임시소집은 상무위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와 대표자 1/5이상의 요구가 있을 경우 소집된다.
2) 직능: 헌법 수정·개정의 제헌권, 헌법 실시에 대한 감독권, 기본 법률의 제정과 개정 등 입법권, 인사권(국가주석과 부주석, 국무원 총리와 국무원 구성인원,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구성원, 최고인민법원 원장과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 등의 선출), 예산 심의 및 제반 경제 계획의 심사권, 기타 행정에 관한 통제·조사권(특별행정구 설치와 그 제도에 관한 결정권) 등을 보유한다.
중앙의 국가 권력기구로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약칭 )를 정점으로 전인대상무위원회(, 약칭 ), 국가주석(), 국가중앙군사위원회(), 국무원(),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 등이 조직되어 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의 최고 정책심의기구이다. 중앙위의 주요 기능은 전대 폐회기간 중 전대의 결의를 집행하고, 당의 모든 활동을 지도하며, 대외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대표한다. 중앙위의 임기는 매기 5년으로, 전대의 변동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다. 중앙위의 구성원은 당력 5년 이상의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으로 구성한다. 중앙위 위원 및 후보위원의 정수는 전대에서 결정되고 대략 300명이다. 1997년 제15기 중앙위원은 193명이고 후보위원은 151명이며, 2002년 제16기 중앙위원은 198명이고 후보위원은 158명이다. 2007년 제17기 중앙위원은 204명이고 후보위원은 167명이다.
중앙위는 중앙과 지방의 당과 국가의 핵심간부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 구성원은 중국 지도층의 성격을 대변한다. 중앙위 전체회의(약칭 )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의해 매년 1회 이상 소집되고, 대규모 회의로 인해 정책결정기구의 기능이 비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내정된 정책이나 중앙 기구의 인사 변동사항을 형식적으로 발의·승인·비준한다. 주요 업무에는 정치국 위원·정치국 상무위 위원·중앙위 서기의 선출 활동이 있다.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년 12기 당 대회에서 당 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가 당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당 주석은 모택동이 1937년부터 1976년까지 재임하였고, 그 뒤를 화국봉이 승계하고 1981년 사임하였다. 당시 총서기 호요방(耀, Hu Yaobang)이 공석을 겸임하였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총서기 조자양(, Zhao ziyang)이 실각하자 강택민이 승계하였고, 2007년 이후 제17기는 호금도가 담임하고 있다.
총서기의 권한은 중앙정치국 회의와 정치국 상무위 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서기처의 업무를 주재한다.
중앙정치국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국 권력의 핵심기구이다. 중앙정치국의 기능은 중앙위 폐회기간 중 중앙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국가와 당에 관계되는 모든 정책을 최종 결정하며, 국가·당·군의 고위 간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신중국의 최고 통치집단으로, 중국정치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최고위 지도층이다.
정치국의 구성원으로 제15기(1997년 10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2명(정치국 상무위원 7명 포함) 후보위원 2명 등 총 24명이고, 제16기(2002년 11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4명(정치국 상무위원 9명 포함) 후보위원은 1명 등 총 25명이다. 제17기(2007년 10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5명(정치국 상무위원 9명 포함)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준독립적인 지방 조직을 설치할 수 있다. 중앙기율검사위의 기능은 중앙위의 지도 하에 당원의 부패와 비행을 척결하는 등, 당풍()을 유지하고 당의 노선·방침·정책과 결의의 집행을 감독한다. 현재의 구성원으로는 서기 1명, 부서기 8명, 상무위원 19명이 있다.
중앙서기처
중앙서기처()의 기능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의 지도 하에 당 중앙의 일상 업무를 관장하는 일선 행정기구이고, 정책결정기구는 아니다. 구성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의 지명을 통해 중전회에서 선출된다. 제17기 중앙서기처 서기는 6명이다.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기능은 군대내 당의 활동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산하 기구인 인민해방군 총정치부()를 통해 군 내부에서의 정치공작을 책임진다.
1982년 헌법에 의해 신설되었고, 현행 규정에 의하면 전국의 군대를 지휘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당장정() 규정에 의하면, 인민해방군 총정치부()는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정치공작기관으로서, 군대 내에서 당의 활동과 정치공작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중앙군사위와 당중앙군사위가 군 통수권을 공유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3기 5중전회(1989년 11월)까지 등소평이 두 위원회의 주석직을 겸임하며, 군의 통수권을 장악하였다.
국가중앙군사위는 주석 책임제를 실시하고, 주석은 형식상 전인대 또는 전인대상무위에 책임을 진다. 임기는 전인대와 동일한 5년으로, 연임의 규정은 없다. 대체로 국가중앙군사위 주석단은 당중앙군사위 주석단과 동일하다.
모택동은 1935년부터 1976년까지 당 중앙위·중앙군사위의 주석을 겸임하였고, 그 이후 화국봉이 계승하였다.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에서 등소평이 피선되었고, 1989년 11월 13기 5중전회에서 계승하여 2002년 11월 16기까지 강택민이 연임하였다. 2004년 9월 당 16기 4중전회에서 호금도가 선출되었다. 2013년 3월부터 습근평이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앙인민공화국의 제 7대 주석을 겸임하고 있다. 현재 당 중앙군사위의 구성원은 주석 1명, 부주석 2명, 위원 8명으로 당 중앙위에서 선출한다.

전인대 상무위원회
① 구성과 선출: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비서장, 위원 약 150여 명으로 구성되고, 전인대에서 선출한다. 적정 숫자의 소수민족 대표를 반드시 포함하는 규정이 있고, 다른 국가 직위를 겸임할 수 없다. 임기는 전인대 임기 5년과 동일하고, 위원장·부위원장은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고, 상무위원장은 전인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업무를 보고한다.
② 직능: 헌법·법률의 해석과 시행의 감독, 전인대 폐회기간 중 법률에 대한 일부 보완과 개정 및 국민경제·사회개발계획·국가 예산집행 과정의 부분적 조정 방안의 심사·승인, 국무원·국가중앙군사위원회·최고인민법원·최고인민검찰원의 직무 감독, 전인대 폐회기간 중 국무원 총리의 제청에 의한 국무원의 각 부장()·각 위원회 주임() 등의 인선 결의, 전인대 폐회기간 중 중앙군사위 주석의 제청에 의한 중앙군사위 구성원의 인선 결의, 최고인민법원장의 제청에 의해 최고인민법원 부원장·재판원 등의 임면,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의 제청에 의해 최고인민검찰원의 부검찰원·검찰원 등의 임면, 외국 주재 전권대표의 임면 결의, 외국과 체결한 조약 및 중요 협정의 비준과 폐기 결의, 전인대 폐회기간 중 전쟁상태의 선포를 결의한다.
③ 현재 전인대상무위 위원장은 장덕강(, Zhang Dejiang)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제()
1954년 헌법을 제정하며 주석제()를 신설하여 당시에는 집단지도체제를 표방하며, 국가주석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당시 모택동은 당주석과 국가주석을 겸직하였다. 국가주석()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외교권 행사하고 전국의 군사력을 통솔하는 국방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며, 국무원회의를 주재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핵심이었다.
문화혁명 시기에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 Liu Shaoqi)가 주자파()로서 실각하자 국가주석제를 폐지하고, 전인대상무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였다. 1982년 헌법을 새로이 수정하며 국가주석제를 부활하였으나, 상징적 성격을 강하게 만들었다.
현행 헌법상 국가주석의 직능은 전인대와 전인대상무위의 결정에 따라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부총리·국무위원·각 부() 부장·각 위원회 주석·심계장()·국무원 비서장의 임면권을 행사하며, 계엄령·선전포고·동원령 등을 공포할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있으나, 외국사절의 접수, 전권대표의 파견과 소환 등 극히 의전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다. 실질적인 군의 통수권도 국무회의 주재권도 없는 명목상의 지위이다.
현재 국가주석은 습근평(, Xi Jinping)이다.

국무원
국가 조직을 광의의 정부라고 한다면, 국무원을 정점으로 한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은 협의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국무원은 1954년 헌법제정과 더불어 건국 당시의 정무원()을 개편한 최고의 행정기관이다.
국무원의 역할은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전인대의 집행기관으로서 국가 최고 행정기관이며, 중앙의 각 부·위원회 및 전국의 각급 지방행정기관 업무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전인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업무를 보고한다. 인적 구성은 총리, 부총리 약간 명, 국무위원 약간 명, 각 부 부장(), 각 위원회 주임, 심계장(), 비서장으로 조직되어 있다.
설치 기구는 28개 부·위원회, 심계기관, 직속기구, 사무기구, 비서기구, 지도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리는 국가주석의 제청에 의해 전인대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으로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주은래(, Zhou Enlai)는 건국 이후 사망할 때(1976년)까지 총리직 담당하였다. 부총리 이하의 구성은 총리의 제청에 의해 전인대에서 선출되고, 부총리·국무위원의 임기는 총리와 동일하다.
현재 총리는 이극강(, Li Keqiang)이다.
사법기관
중국의 사법 체계는 공안기관, 국가안전기관, 인민법원, 인민검찰원, 사법행정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기관별로 담당하는 분야를 보면, 공안기관은 형사사건에 대한 수사·구류·예심을 진행하고, 국가안전기관은 간첩사건에 대한 수사·구류·예심을 하며, 인민검찰원은 체포의 승인과 공소 제기·유지를 담당하고, 인민법원은 사건을 판결하며, 사법행정기관은 판결 후 처리를 담당한다. 중국공산당의 중앙정법위원회가 이들 기관을 총괄한다.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은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로, 전인대의 직속기관이며, 세 기관은 상호 연계 속에서 독립된 하위조직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1) 인민법원: 국가의 심판기관이다. 인민법원의 조직은 최고인민법원, 지방 각급 인민법원, 전문인민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인민법원은 최고 심판기관으로, 지방 각급 인민법원과 전문인민법원의 재판 활동을 감독하며, 상급 인민법원은 하급 인민법원의 재판 활동을 감독한다. 최고인민법원장의 임기는 전인대와 동일하고,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지방 각급 인민법원은 3개 급으로 구분하여 설치한다. 1급 행정구역()에는 고급인민법원을, 2급 행정구역()에는 중급인민법원을, 3급 행정구역()에는 기층인민법원을 둔다.
전문인민법원은 군사법원 등으로 행정구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 조직계통에 따라 설치하고, 관할 사건은 각 주관 조직계통의 활동과정에서 생긴 사건들이다.
인민법원의 기능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권을 행사하며, 행정기관·단체·개인 등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인민법원의 감독기관으로, 최고인민법원은 전인대 및 전인대상무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지방 각급 인민법원은 자신을 조직한 국가 권력기관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인민법원의 활동은 최고인민법원 활동보고의 형태로 매년 전인대에서 보고된다.
2) 인민검찰원: 국가의 법률감독기관이다. 인민검찰원의 조직은 최고인민검찰원, 지방 각급 인민감찰원, 전문인민검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인민검찰원은 최고 검찰기관으로, 지방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문인민검찰원의 업무를 지도하며, 상급 인민검찰원은 하급 인민검찰원의 업무를 지도한다.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 및 각급 인민검찰장 임기는 전인대 및 동급 인대()와 동일한 5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지방 각급 인민검찰원은 3개 급으로 구분하여 설치한다. 1급 행정구역에는 성급 인민검찰원을, 2급 행정구역에는 지급 인민검찰원을, 3급 행정구역에는 현급 인민검찰원을 설치한다.
전문인민검찰원은 군사검찰원 등으로, 관할 사건은 각 주관 조직계통의 활동과정에서 생긴 사건들이다.
인민검찰원의 기능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독립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하며, 행정기관·단체·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인민검찰원의 감독기관으로, 최고인민검찰원은 전인대 및 전인대상무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지방 각급 인민검찰원은 동급 국가권력기관 및 상급인민검찰원에 대해 책임은 진다.
인민검찰원의 활동은 최고인민검찰원 활동보고의 형태로 매년 전인대에서 보고된다.
3) 공안기관: 국가의 치안 보위 및 수사기관이다. 공안기관의 조직은 국무원에는 공안부()가, 성급 인민정부에는 공안청()이, 하부 행정기관에는 공안처(), 공안국(), 공안분국(), 공안파출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주요 기능은 반혁명 행위 및 기타 범죄 행위에 대처하고, 사회 치안 관리, 공공질서 유지 및 국가기관·기업단체 등을 보위하며, 법률 규정에 따른 형사사건의 수사·구류·체포 등 형사소송 활동을 담당한다.

지방정부 조직

조직의 특징
신중국의 행정조직은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표방하지만, 지리적·역사적 요인으로 인해, 지방정부에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허용한다. 현재 신중국의 지방 조직은 중앙정부의 통일적 관리 하에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의 각급 국가기구는 중앙 조직과 마찬가지로 동급()의 인민대표대회와 인민정부, 인민법원과 인민검찰원(현급 이상)을 설치하여, 수평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
지방의 인민대표대회(, 약칭 ) 설치는 향()·진()의 행정구역까지이고, 현급() 이상의 인대에는 상설적인 인대상무위를 설치한다. 임기와 선출은 성급() 인대 대표의 임기는 5년이고, 하급() 인대에서 간접으로 선거하여 선출하며, 성급 미만의 인대 대표의 임기는 3년이고, 선거민에 의해 직접 선거한다. 인대의 회의를 지방 각급 인대는 최소 1년 1회 개최해야 하며, 현급 이상의 인대는 동급 인대상무위가 소집하고, 현급 미만의 인대는 동급 인민정부가 소집한다.
인대의 조직으로 현급 이상의 인대상무위는 주석과 약간 명의 부주석 및 위원을 두고, 동급 인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업무를 보고하며, 상무위 구성원은 국가행정기관, 재판기관 및 검찰기관의 직무를 겸임할 수 없다.
현급 이상의 인대가 지니는 권한은 다음과 같다. 헌법상 당해 행정구역내에서 각 분야의 중요 사항을 토의·결정하고, 동급의 인민정부·인민법원 및 인민검찰원의 업무를 감독하며, 동급 인민정부의 부적절한 결의를 취소하고, 법률이 정한 권한에 따라 국가 공무원의 임면을 결정하며, 동급 인대의 폐회기간 중에는 차상급() 인대의 개별 대표를 파면·보선할 수 있다.

지방 각급의 인민정부
지방 각급의 인민정부는 동급 인대의 집행기관이며, 지방의 국가 행정기관이다. 인민정부 구성원의 임기는 동급 인대의 임기와 동일하다. 인민정부의 조직은 성장(), 현장(), 구장(), 향장(), 진장() 책임제를 실시한다.
인민정부는 동급의 인대와 차상급의 국가 행정기관에 대해 책임지고 업무를 보고한다.

중국 군 조직

중국 군사력의 조직은 인민해방군(), 인민무장경찰부대(), 민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인민해방군

기원
중국의 정규군으로, 1927년 8월 1일 강서성(西) 남창시()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 중국국민당의 군대)의 일부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 무장 폭동하여 중국공산당군()을 창건하였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공농홍군()으로 개칭하고, 당시 30만 명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휘하에 편입되어, 120만 명의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성장하였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국공내전 중 194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고, 1949년 10월 건국 직전 460만 대군으로 증강되었다.

군역할
신중국에서 정치와 군의 관계는 불가분으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모택동은 주장한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인민해방군에 의한 군사적 승리에서 비롯되었다. 문화혁명 시기에 당과 정치 기관이 마비된 공백을 군이 보충함으로써, 군의 정치적 역할은 현저히 증대되었다.
문화혁명 이후 당의 재건에 따라, 군의 정치적 역할이 다소 감소되었으나, 군대와 군 지도자는 정치·사회 각 분야의 비군사적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하였다. 특히 정치 권력이 위기에 직면할 경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례로는 1989년 6월 천안문사태의 진압이 있었다.

군사위 성격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의 당군(, 당의 군대)으로 발족되었던 특성을 계속 유지하여, 공산정권 수립 이후에도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하였다. 1982년 신헌법은 국가중앙군사위원회를 신설하여, 표면적으로는 군의 통수권이 당에서 국가로 이전하는 당군에서 국군으로의 성격 변화 과정을 거쳤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중앙군사위와 국가중앙군사위는 인적 구성이 동일하고, 오히려 당중앙군사위의 권력이 우위에 있다.

국가중앙군사위 지휘체계
헌법의 규정에 의하면 국가중앙군사위는 군의 최고 정책결정과 지휘기관으로, 국무원 산하에 국방부·국방과학기술위원회 등 군사와 관련된 국가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있다. 인민해방군 지휘체계의 중추는 국가중앙군사위으로, 4대 막료기구인 4총부() 즉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총장비부()를 통해 각 대군구()·해군·공군·제2포병 등을 지휘한다.
총참모부는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있는 전군의 최고 지휘기관이다. 전군의 작전계획, 병력배치,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 하달, 작전 운영, 교육훈련, 장비의 편성, 소집동원, 각 군구()·군종()·병종()의 조정 등 업무를 관장한다.
총정치부는 당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군내부 당의 사상·정치공작을 관장하는 최고기관이다. 휘하에 문화부와 선전부를 설치하고, 군에 대한 사상·정치적 통제 역할을 수행하고, 군 내부에서의 당의 조직·선전·교육·문화·보안 업무를 담당한다.
총후근부는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전군의 후방 병참 업무를 관리하는 최고 지도기관이다. 군수물자 보급, 시설보수, 수송, 병기생산과 관리 등의 업무 담당한다.
총장비부는 전군의 장비 업무에 대한 조직·지도를 책임지는 영도기관으로, 종합설계와 장비 과학연구 구매 등을 담당한다.

군대조직
인민해방군 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제2포병 등 4개 군종으로 편성되어 있다.
육군의 병종()은 보병·포병·장갑병·공정병·방화학병 등으로 구성되고, 편제는 군(: 군단), 사(: 사단)를 기본적 전술 단위로 하여, 단(: 연대), 영(: 대대), 연(: 중대), 배(: 소대), 반(: 분대)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군구의 수비대와 국경 및 지방부대도 육군에 속한다.
해군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독립적으로 작전임무를 수행하며, 휘하에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 장비전술부, 항공병부를 설치하고 있다. 현재 중국 해군은 북해함대(), 동해함대(), 남해함대() 등 3개 함대로 조직되어 있다.
공군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독립적 작전임무를 수행하며, 휘하에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 항공공정부를 설치하고 있다. 공군주요 부대로는 항공()부대, 방공()부대, 공강(, 공수)부대 등이 있다.
제2포병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수직적 지도를 받는 특수부대이다. 지대지()전략 핵무기 사용에 대한 조직 체계를 지휘하며, 중거리·원거리·대륙간 탄도부대 및 공공·정찰·기상·통역·수송 등 전문 기술부대로 조직되어 있다.

지방편제
인민해방군의 지역편제는 7개 대군구(), 29개 성급 군구로 구성되어 있다.
대군구는 관할 구역에서 총부 업무를 대행하고, 소재지의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며, 군구에는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를 설치한다. 7개 대군구는 심양군구, 북경군구, 제남군구, 남경군구, 광주군구, 난주군구, 성도군구이다.
성군구()와 군분구()는 군대계통에 예속되는 동시에 지방단위의 군사공작부문에 소속된다.
현()·시() 인민무장부()는 소재지 군(분)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고, 성군구의 사령부는 소속된 대군구의 지시를 받고 보고를 하며, 성군구와 대도시 경비구()의 사령원()은 치안 유지에 대한 책임을 지는 등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각 군구에 사령원과 정치위원을 두고, 당이 군을 지배하는 중국 정치 특성에 따라 정치위원이 사령원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인민무장 경찰부대(약칭 )

1983년 4월 무경총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총병력은 약 100만 명으로, 원래는 치안 담당 부대이다. 총부()는 국무원 공안부 산하 소속으로, 공안부와 중앙군사위원회의 복수 지휘 아래에 있다. 무경의 조직은 총대(), 지대(), 대대 및 중대가 있고, 유사시에는 정규군 부대로 즉시 전환될 수 있도록 무경은 훈련한다.

민병

평소에는 생산에 종사하는 군중 무장조직으로 인민해방군의 예비역 부대이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팔로군을 돕는 지방 농민의 자위조직에서 발전하였다. 1958년 8월 이후 인민공사의 무장조직으로 구성되어, 당시 병력 약 2억 5천 만 명이었다. 현재 민병대는 비직장이나 부락별로 자위대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병역 제도

건국 초기에는 혁명 시기의 지원병제도를 답습하고, 1955년 제1기 전인대 제2차회의 이후 의무병제도를 병용 실시하였다. 1984년 5월 제6기 전인대 제2차 회의에서 새로운 병역법을 통과하여, 의무병을 위주로 한 의무병·지원병 결합제도 및 민병과 예비역을 결합한 병역제를 채택하였다. 중국 국민은 병역에 복무하고, 민병조직에 참가하는 법률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의무병의 복무연한은 육군 3년, 공군·해군·육군 특종기술부대 4년, 해군 함정부대·육군 선박부대 5년이고, 지원병의 복무연한은 일반적으로 10∼25년에 40세를 초과하지 않으나, 군의 필요나 개인 희망 경우에는 연장이 가능하다.

경제정책

신중국의 경제정책은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개혁·개방정책의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개혁·개방 이전의 경제는 대체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위주로 운용되었고,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위주로 운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 경제정책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먼저 사회주의 경제이론으로서의 계획경제를 살펴보고, 등소평의 등장과 함께 제시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내용을 살펴본다.

사회주의 경제이론

마르크스(K. Marx)는 1840년대 영국의 경제·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기원과 생성 및 변천을 분석하고 자본주의의 폐단점을 강조하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로서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경제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방의 선진 공업국가에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켰던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이론적 지주로서 사회주의 소련 정권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자, 동유럽과 중국 등에서는 사회 혁명 이론으로 신봉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제기한 경제학설은 생산수단 소유제와 분배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였고, 특히 강조한 점은 자본주의 경제의 경쟁과 무정부상태를 ‘계획적이고 비례적인 발전 규율(The Law of Planned Proportional Development)’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 정권이 성립되면 계획경제를 신봉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유일한 정책 노선이 되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소련식 계획경제를 도입하였고, 1953년부터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발전에 운용하였다. 소련 볼셰비키의 혁명 이론(볼셰비즘)은 당시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레닌의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이론을 도입하고, 경제 발전의 실패와 좌절 등을 경험하면서, 당시 신중국의 상황에 적합한 경제 발전 정책을 학습해 나간다.

계획경제 정책의 실시

1979년까지의 모택동 시기에 중국에서 실행되었던 경제 발전 정책은 소련 모델(SovietModel)를 적용한 계획경제 방식이었다. 당시 소련의 경제계획과 기업관리체제는 전반적인 국민경제를 일종의 가계경제()로 간주하고, 가계경제의 주요 결정자인 가장()과 같은 역할을 국가가 담당하면서 수요에 근거하여 조직적인 생산을 수행하였다. 때문에 모든 기업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생산하고, 모든 생산물을 국가에 헌납하는 경제 활동을 담당하였다. 또한 모든 원자재도 국가가 제공하게 되고, 기업은 어떤 자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도의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제도는 제도적으로 공유공영·중앙계획·명령지도·고정가격제도를 실시하며, 그리고 정책적으로 고축적·고성장·저소비·저임금·중공업 우선 정책을 실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체제는 제도와 정책적으로 소비자 주권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단지 계획 자주권만이 강조되는 형태로서, 생산력이 낙후된 국가에서의 실현에는 강제성과 방대한 행정체계의 수립을 수반해야 되는 선천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정치·외교·국방 등의 관계에서 취한 오로지 소련 일변도의 경향으로 인해, 당시 중국보다 선진적인 소련의 경제정책 모델의 채택이 경제 분야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개조 운동을 거쳐 국가 체제를 정비한 신중국은 1953년 1차 5개년 경제계획부터 소위 소련 모델을 적용하는 중공업 우선 발전의 불균형 발전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1979년까지 실시된 중국 계획경제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과도기 총노선( , 1953·1957)

중국은 사회주의 3대 개조(농업·수공업·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하고, 중공업 우선 발전을 추진하여 국가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이 농업국가인 점을 감안하여 농업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집단화 작업을 병행하였다. 초기에는 토지 개혁이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농업·공업 생산량이 1950년에 비해 약 70% 성장하는 등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중공업 정책의 무리한 추진으로 인해 경제 성장에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 약진운동(, 1958·1960)

과도기 총노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58년 중국은 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기본 목표는 맹목적인 생산 대약진과 생산관계에 있어서의 일대이공()을 추구하였다. 일대이공은 인민공사() 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즉 대()는 인민공사의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고 토지가 많아 대규모적인 생산과 건설이 행해지는 것을 말하고, 공()은 사회주의화·집단 소유화를 말한다. 이들 조치로 철강 생산을 강령으로 하는 주요 전략을 택하였고, 농촌에서는 인민공사 운동이 전개되어 농촌의 집단화를 통한 정사합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대약진 운동은 정책의 맹목성과 자연 재해로 인해 실패하였다. 특히 자본과 기술이 부재한 상태에서 노동력과 충성심만으로 급진적 경제 건설을 추진하려는 대약진 운동은 대내적 산업 기반의 허약함과 대외적 소련 지원의 차단 등으로 인해 더욱 좌초를 당하였다.

경제 의 조정정책(調, 1961·1965)

대약진 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실패는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조정(調)·공고()·충실()·제고()’라는 8자() 방침의 개량 전략을 실시하게 하였다. 조정 시기에 국내 경제의 수습을 위해 유소기()·등소평이 전면에 나서 급진적 노선과 인민공사의 평균주의를 극복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당시의 주요 조치로는 농업 중시·국민생활의 향샹을 위한 각종 장려제도의 실시 등이 있었는데, 이들 조치로 인하여 중국 경제는 급속한 회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의 제2선으로 후퇴한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자)로 비판하며, 처절한 정치권력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회복되어 가던 경제 상황을 마비시킨다. 이런 정치적 국면이 바로 모택동의 급진파와 유소기의 온건파 사이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 대혁명의 좌경 노선(, 1966·1976)

10년 동안의 동란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전쟁불가피론()과 3선건설()로 대표되는 전략이 보여주듯이 경제에 관해서는 거의 정체상태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이미 실패한 대약진 시기의 각종 정책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국민경제는 더욱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인도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내란이 종료된 후 양약진() 시기의 정책(1977·1979)

1976년 극좌파 4인방이 몰락하고 10년 내란이 종료된 후 모택동을 승계한 화국봉()은 또다시 신속한 발전을 기도하는 급진정책을 입안하였다. 즉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도약하고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를 양약진이라고 한다. ‘23년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양약진 정책은 2000년에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화국봉의 권력 기반이 취약한 관계로 인하여 효과적인 정책 집행이 어려웠으며, 그 모험적인 정책은 결국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는, 문화대혁명 기간과 그 이전의 좌경적 착오를 수정하고 ‘조정(調)·개혁()·정돈()·제고()’라는 신8자방침을 제기하여, 근본적인 경제이론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중국 경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경제는 계획경제 자체가 계획에 의한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원인으로 인하여, 변동하는 각종 경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방대한 행정계통이 경제를 관리할 수밖에 없는 약점 이외에도, 중국 자체의 정확한 경제정책 방침의 미흡 및 계속되는 시행착오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좌우파 투쟁 등으로 인해서, 상당히 낙후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상 중국 경제정책의 변천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과도기 총노선 시기(1953∼1957)는 불균형 발전의 소련 모델을 적용하고, ② 대약진 운동 시기(1958∼1960)는 모택동의 좌경적 모험 노선이고, ③ 1차 조정정책 시기(1961∼1965)는 후르시초프 모델의 수정주의 노선이고, ④ 문화대혁명 초기(1966∼1970)에는 모택동 노선이 부활하고, ⑤ 2차 조정정책 시기(1971∼1975)는 수정주의와 모택동 노선의 종합이고, ⑥ 문화대혁명 말기(1975∼1976)는 4인방의 극좌 노선이고, ⑦ 양약진 시기(1977∼1979)는 3차 조정정책 시기로 수정주의가 부활하였다.

등소평 의 경제이론

등소평 경제이론의 진수는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를 통해 신중국의 지도자로 재등장한 등소평은 10년 동란의 문화대혁명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생산력과 인민 대중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의 영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등소평은 문혁을 극복하면서 중국 국가 발전의 최대 목표인 4개 현대화(농업·공업·과학기술·국방의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과거 약 30년 동안 중국을 통제해 왔던 모택동사상의 속박을 풀기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화국봉 노선의 양개범시론()과 논쟁을 개시하였다. 등소평은 화국봉 노선에 반해서 ‘실천시검험진리적유일표준(: 무슨 정책이든 실천해서 성과를 거두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라는 실사구시적 실용주의 노선을 제창한다. 등소평은 모택동 말기의 개인적 착오와 모택동사상의 차이를 명백히 구별하며, 자신의 노선은 모택동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은 모택동사상을 기초로 한 중국공산주의 혁명이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듯이,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도 현재의 국가 정세에 의거해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란 어떤 고정된 모델이 아니며 각국의 실제 상황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 진리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현대 중국의 적용은 바로 ‘중국적 사회주의’이다. 중국적 사회주의는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적 실제 상황의 결합체이고, 이것이 현재 중국의 현대화 노선을 설정하는 기초를 구성하고 있으며, 중국적 사회주의현대화 건설 이론은 등소평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중국이 1980년대 이래로 추진한 중국 현대화 건설의 기조에는 등소평의 현대화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 현상은 개혁·개방의 천명·1992년 남순강화()·중국공산당 14전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등 일련의 조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형성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중국 지도층은 경제 발전의 속도와 범위의 문제에 대해 대립과 갈등 관계가 지속되었다. 종전의 정책 하에서는 행정적 명령을 통한 계획된 범위 내에서 모든 경제 활동을 고정시키고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하였다. 즉 계획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차질을 초래하여 생산품의 공급 부족 혹은 과잉상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사회주의와 상품경제를 상호 대립되고 배척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종래의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주의는 본래 공유제()를 기초한 계획적 상품경제라는 새로운 계획적 상품경제론이 제기되었다.
소위 계획적 상품경제란 생산부문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경제 주체이다. 상대적 독립이란 사회주의국가가 사회 전체의 경제 발전의 방향을 파악하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작성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사회의 생산은 계획만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 주도 하의 시장원리에 의한 조절도 충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강택민(, Jiang Zemin) 총서기는 정치공작 보고를 통해 13전대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즉 그 동안의 개혁·개방 과정 중에서 나타난 각종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제기한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중국 경제의 이론으로 정립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 형성 과정이 있었다.

주보론() 

1979년 2월 이선념(,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하여,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경제를 보조 수단으로 하는 체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79년 3월 진운(,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계획과 시장 문제’라는 담화 중에, “전체 사회주의시기의 경제는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계획경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시장조절 부분이다. 계획경제 부분은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며, 시장조절 부분은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만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문헌 중에서는 최초로 시장조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1979년 11월 등소평은 “우리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여 시장경제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사회주의 경제이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행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의 필요성에 대해 재인식하는 의견을 전개했지만, 여전히 중국 경제체제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는 체제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의 인식 하에서 1982년 9월 12전대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충으로 하는 주보론() 체제를 공식으로 천명하였다.

계획’과 ‘시장내재 의 통일론 

제한적이나마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중국은 기존의 계획 생산에 의한 ‘생산품’이 아닌 시장의 필요에 의한 ‘상품’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 13전대에서는 “사회주의의 계획적 상품경제 체제는 반드시 ‘계획’과 ‘시장’이 내재적으로 통일된 체제이어야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계획과 시장의 내재적인 결합이라는 내재통일론()의 제기는 계획과 시장을 둘러싸고 장기간 지속되었던 이원구조적 논쟁을 종식시켰다.

성사 성자() 논쟁 

1989년 6·4사건으로 조자양(,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은 보수파에 의해 실각되고, 보수 성향의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를 ‘자산계급 자유화’·‘화평연변(, 평화적 정권전복)’과 동일시하며, 공유제 경제의 기초를 전복하는 개념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하는 중국 경제체제의 경향에 관한 논쟁(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에 관한 성사성자 논쟁)이 가열되었다.
1990년 12월 등소평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계획’이나 ‘시장’ 성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으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에 의한 통제가 있다”, “시장경제를 약간 실행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며,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시장에 어두우면 낙후를 감수해야 하며 세계 정보에도 어둡게 된다”라는 기존의 의견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등소평의 의견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 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 경제는 침체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등소평은 “제3의 혁명”을 외치며, 중국 남부지방을 시찰하여 개혁·개방을 가일층 고취하고자 시도하였다. 등소평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무한()·심천()·주해()·상해() 등지를 방문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1기 3중전회 이후의 노선·방침을 관철하고, 1개 중심(: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함)·양개 기본점(: 개혁·개방 노선과 4개 기본노선을 견지함)을 견지한다. 성사성자의 새로운 사회주의의 기준에 관한 논쟁에 대해,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여부가 판단 기준이다”, 즉 ‘계획’이든 ‘시장’이든 간에 경제 발전에 유리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향후 현대화 과정에 있어, 일부 지역의 경제가 우선 발달하고 일부 주민의 경제가 우선 부유해지는 선부론()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평등주의를 타파하였다.
시장의 역할을 긍정하고 기존의 경제 발전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남순강화의 주요 정신은 14전대에서 공식적으로 이념화되었고,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장경제를 정착시켰다. 당시의 국제 환경도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지만, 이와 더불어 중국이 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한 국내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2년 초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강조한 개혁·개방정책을 지지하기 위함이다. 등소평은 남순강화에서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에도 계획적 요소가 있으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사회주의도 시장적 요소가 있다. 계획과 시장은 경제 수단일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종래 계획과 시장 관계에 대한 사상적 속박을 제거하는 작용을 하였다. 당시 10여 년에 걸친 개혁과 개방의 경험이 있었다. 개혁과 함께 진행된 연해지역의 개방으로 인하여 경제가 급성장하게 됨으로써, 시장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지역에서는 경제 활력도 비교적 강하고 발전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자본주의도 귀감이 될 만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주의의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선진국들의 발달된 경영방식과 관리방법을 받아 들여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사상을 해방하고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시켜야 비로소 사회주의제도를 공고히 하고 공산당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개혁과 개방 이래로 시장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상품의 가격이 대부분 개방되었으며, 계획이 직접 관리하는 영역이 점차 줄어들었다.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특징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비교하면, 공급과 수요 원칙에 입각하여 경제 활동이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으나, 소유제()와 분배제() 및 거시적 조절(調)·통제() 등 3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 3가지 측면은 또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유제, 공유제 이외에 사유제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로 공유제()를 기초로 각종 비사회주의적() 경제 성분, 즉 사유제()를 병행하고 있다. 소위 공유제란 전민소유제()와 집단소유제()를 말하며, 비사회주의적 경제 성분이란 개체경제()·사영경제()·외자경제()를 말한다. 이처럼 중국은 공유제 이외에 사유제를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중국 경제에 생기를 불러 넣고 있다.
개체경제는 개인이나 가족 또는 8명 미만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소규모의 상공업에 종사하는 기업을 말하며, 사영경제는 기업의 자산이 개인에게 속하고 8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공업에 종사하는 기업을 말한다. 개체경제와 사영경제는 중국 경제발전의 주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외자경제에는 중외합자()·중외합작()·외상독자(: 외국 자본의 단독 투자)가 있다. 이는 개체경제 혹은 사영경제와 더불어 중국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분배제, 공유제

공유제 이외의 각종 다양한 경제 성분을 허용한 중국은 분배의 측면에서도 노동 이외의 요소에 의한 소득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분배원칙인 노동에 의한 분배 외에, 개체기업에 의한 수입, 사영기업과 중외합자·중외합작·외상독자에 의한 수입 및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여 얻은 수입(예로, 주식 투자) 등을 허용하였다.
각종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고, 또 투자가와 노동자의 적극성을 유발시켜 경제 요소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로, 11기 3중전회 이래로 농촌과 도시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책임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바로 책임·권리·이익 등 3가지를 결합시켜, 노동에 있어서의 적극성을 발휘하게 하였다. 즉 새로운 분배제도의 시행인 것이다.

경제 모두 계획과 조절·통제

시장경제라고 해서 계획적 요소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등소평은 “자본주의 경제도 계획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 모두 계획과 조절이 필요하지만, 사회주의 경제가 필요로 하는 계획과 조절의 목적은 바로 인민의 단기 이익과 장기 이익 그리고 국부 이익과 전체 이익을 상호 결합하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두 제도가 지닌 장점을 최대로 발휘시켜서, 계급간의 착취 현상을 제거하고,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여 공동 부유를 달성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 국가의 계획은 중요한 거시적 통제 수단 중 하나이다. 이 점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점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와 실행 의 일정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수립과 완성은 장기적인 발전 과정이 필요로 하며, 매우 복잡하고 힘든 사회체계를 수립하는 사업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실행은 1980년대 개시 이래로 2000년까지 20년 동안 실행되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 왔고, 앞으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의 2021년에 이르면 더욱 정형화된 성숙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205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는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과도기 단계로 설정하고, 경제 건설의 목표를 3단계로 제시하였다.

국민총 생산량의 수준

제1단계 1980년부터 1990까지 1980년 국민 총생산량(7,100억 )의 2배(1조 4,000억 )로 증대시키고(1988년 이미 달성했다고 중국 정부 발표), 제2단계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980년 총생산량의 4배(2조 8,000억 )로 증대시키며, 제3단계 21세기 중엽까지 2000년 총생산량의 4배(11조 2,000억 )로 증대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민소득 수준

제1단계는 500$, 제2단계는 1,000$, 제3단계는 4,000$를 목표로 잡고 있으며, IMF의 자료에 의하면 2009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678달러이다.

국민생활 수준

‘3보주() 전략’을 택하여, 제1보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제1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온포문제(: 기본적인 거주와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2보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제2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소강수준(: 먹고 살만한 수준)’에 도달하며, 제3보는 21세기 중엽까지 제3단계의 목표를 실현하여 개인소득이 중진국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인민의 생활이 비교적 부유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현대화를 달성시키는 단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조치 확립하기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조치가 필요하였고, 이들 조치가 시장경제 체제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농촌 경제체제 개혁과 도시 경제체제 개혁을 추진하였고, 정치체제 개혁도 모색하고 있다.
1) 시장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① 자주적으로 경영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주 기업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② 대규모의 상품 교환이 가능한 대형 도매시장을 건설해야 한다.
③ 극히 일부의 품목을 제외하고는, 공평하고 경쟁적으로 가격이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가격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2) 국유 재산 제도를 개혁하여 대형국영기업의 경영 매카니즘을 전환시켜야 한다.
이것은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켜 책임과 권리 및 이익을 서로 통일시키는 경영체제로 전환시켜, 침체에 허덕이는 국영기업이 시장경제의 지배를 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3) 공유제를 기초로 하여 각종 다양한 비사회주의적 경제 성분을 발전시켜야 한다.
4) 분배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
5) 시장경제는 법률 규정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므로, 법제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립해야 한다. 이에 대해 등소평은 “국가와 기업, 기업과 기업, 기업과 개인간의 관계도 법률로써 확정해야 한다. 그들간의 문제 역시 법률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개혁과 개방의 정책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운용은 개혁과 개방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나타났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시장경제 도입의 천명과 함께 광범위하고 심도가 있게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영역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더욱 확대되었다. 개혁 정책은 대내 경제 문제에 직면하고, 개방 정책은 대외 경제 문제에 직면하여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경제개혁 정책 추진

중국의 경제 개혁 정책은 방법과 추진 과정에 있어 크게 4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제1단계(1979∼1983)
농업 개혁 시기이다. 1979년 1월 중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산 욕구를 증대시킬 방안의 하나로 농업생산대(: 인민공사의 노동력 편제의 하나로 10호 정도로 구성됨)에 자주권을 주고 ‘연합 청부 생산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반포하였다. 농가 생산 책임제의 실시는 중국의 농업 생산 증가를 가져왔으며, 농촌 경제의 번영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가 생산 책임제로 발생한 잉여노동력을 향·진() 기업으로 흡수함으로써 실업문제를 일부 해결하는 동시에 농촌 공업화의 기틀도 다졌다.
제2단계(1984∼1988)
도시 상공업 개혁 시기이다. 농촌 경제 개혁의 성과와 일부 지역의 시험적인 개혁 조치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자 중국의 개혁은 도시 상공업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1984년 10월 중국은 도시 상공업 중심의 경제 체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 개혁의 중점은 과감한 권한 이양과 기업에 대한 경영 책임제에 두어졌다. 또한 시장 구조를 제한적이나마 도입하기 시작하여, 사회주의국가의 왜곡된 가격 체제를 조정·개혁하고, 과거의 이윤 상납 방식을 세금으로 대체하는 이개세()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밖에도 개체호()의 사유 소유 성분을 허가하는 등 보다 전면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제3단계(1988∼1991)
‘치리정돈()’ 시기이다. 경제 체제 개혁이 비록 국민소득의 증가와 농촌 제의 번영 및 대외 무역의 확대 등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너무 빠른 공업 성장과 인플레이션과 소득 분배의 불균형 및 각종 권력형 부조리·비리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에 중국 정부는 경제 환경에 대한 정리, 경제 질서에 대한 정돈을 기치로 하는 긴축 정책을 도입하였다. 중국은 이를 통해 경제·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전반적인 경제 구조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건은 중국의 국제적인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려 전체적인 경기 부진 현상을 야기하였다.
제4단계(1992년 이후)
개혁 심화와 개방 확대의 시기이다. 1992년 초 중국은 ‘치리정돈’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이에 따라 계속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등소평은 남부 지역을 순시하면서 개혁·개방의 심화와 확대를 독려하는 ‘남순강화’를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오늘날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이론에 의해 중국의 경제는 보다 시장 경쟁적인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국유기업의 개혁 및 정부의 거시적 조절을 기초로 한 경제 운영 구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대외 개방 정책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 이전에 중국은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급자족의 경제를 고취하였다. 대외 개방 정책은 자력갱생 원칙의 탈피를 의미하고,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대외 개방은 크게 기술·자본의 도입 및 대외 무역의 확대라는 두 분야로 발전해 왔으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절차로 확대·발전하였다.
제1단계
경제특구()의 설치이다. 1980년부터 광동성의 심천()·주해()·산두() 및 복건성의 하문()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1984년에는 해남도()가 개방되었고, 해남도는 1988년에 성()으로 승격되어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가 되었다. 경제특구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나, 대량의 노동력을 갖고 있는 지역에서, 가공수출지역 또는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는 비교우위의 원칙에 따라 설치되었다. 경제특구는 특수한 경제 정책과 관리 체제에 따라, 다양한 경제 성분의 존재와 시장 조절·경제 자주권의 확대 등을 통한 대외 지향형 경제 형태가 가능하였다. 또한 외자 도입을 위해 세율 우대·토지 및 염가의 노동력 제공 등의 유인책을 실행하였다.
제2단계
연해개방도시(沿)의 설치이다. 1984년 중국 연해의 14개 도시 즉 천진·상해·대련·진황도·연대·청도·연운항·남통·영파·온주·복주·광주·잠강·북해 등 역사적인 통상 항구가 개방되었다. 이 도시들은 과거보다 시의 자주권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투자를 원하는 외국 기업에게도 자주적인 우대 조치를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연해도시의 개방과 더불어, 이들 지역에는 경제기술개발구가 설치되었다. 이 경제기술개발구의 설치는 가공무역에 중점을 두는 경제특구와는 달리, 신상품 개발·신기술 개발 등을 통해 산업구조 조정을 꾀하는 기초가 되었다.
제3단계
연해경제개방구(沿)의 설치이다. 1985년 중국은 장강 삼각주·주강 삼각주 및 하문·장주·천주를 잇는 삼각지대를 연해경제개방구로 선포하였다. 이들 지역은 14개 연해개방도시와 같은 정책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88년과 1989년에는 요동반도·산동반도 및 발해만 지역을 잇따라 개방하였다.
이러한 경제특구·연해개방도시·연해경제개방구의 개방 구조 수립을 통해 중국은 대외 무역형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국제 시장의 개척도 급속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제4단계
4연(沿: 즉 연해·연강·연변·연로)의 전방위개방() 조치이다. 연해 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은 1991년부터 4연 개방 전략을 신속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① 연해(沿)의 개방은 이미 개방 초기부터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② 연강(沿)에 따른 개방도 내륙으로 확대되어, 개방의 척도가 강을 따라 주요 통과 도시에도 적용되었다. ③ 연변(沿) 국경선에 따라 변경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흑룡강성·내몽고자치구·신강자치구 등을 개방하였다. ④ 주요 간선 철로·도로의 기점 도시들을 개방하는 연로(沿) 개방도 실행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연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전방위 경제 발전 전략을 완성하였다.
이상의 대외 개방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의 개방 정책은 남방에서 북방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연해에서 내륙으로, 시험적인 점진적 단계를 거쳐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경제의 현황. (2009년)

중국 국가통계국()의 『중국통계연금()』에 따르면, 2009년도 중국 경제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2009년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33조 5,353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8.7% 상승하였고, 전체 소비자물가(CPI)는 0.7% 감소하였다. 외화보유고는 2조 3,993억 달러이고, 전년 대비 4,531억 달러가 증가하였다. 재정 수입은 6조 8,477억 달러이고, 전년 대비 7,147억 달러가 증가하여 11.7% 상승하였다.
전국 총 취업인구는 7억 7,995만 명으로, 전년 대비 515만 명이 증가하였다. 그 중 도시 취업인 수는 3억 1,120만 명으로 910만 명 증가하였다. 양식 총생산량은 5조 3,082만 톤으로, 전년 대비 211만 톤이 증가하여 0.4% 증산하였다. 전체 공업 증가치(생산액)는 13조 4,625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8.3% 상승하였다. 사회 고정자산 투자총액은 22조 4,846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30.1% 상승하였다. 그 중 중서부 투자의 증가가 동부와 동북지구보다 많다. 사회 소비재 소비총액은 12조 5,343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15.5% 상승하였다.
수출입 총액은 2조 2766억 달러고 수입은 1조 6821억 달러이며 GDP성장률은 6.8%이다.
국내 여행자 수는 연인원 기준으로 19억 명으로 전년 대비 11% 상승하고, 국내 여행 수입은 1조 184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16.4% 상승하였다. 중국 입국 여행자 수는 연인원 기준으로 1억 2,648만 명으로 2.7% 하락하고, 그 중 외국인은 2,194만 명(9.8% 하락)이며, 홍콩·마카오·타이완 사람은 1억 454만 명(1.1% 하락)이다. 국제여행 외환 수입은 397억 달러로 전년 대비 2.9% 하락하였다.
광의통화(M2) 잔액은 60조 6천억 위앤으로 전년 대비 27.7% 증가하고, 협의통화(M1) 잔액은 22조 위앤으로 32.4% 증가하고, 유동현금(M0) 잔액은 3조 8천억 위앤으로 11.8%증가 하였다. 에너지 소비 총량은 31억 톤/표준석탄으로 전년 대비 6.3% 상승하였다.
2009년 중국의 총인구는 13억 3,474만 명으로 전년 대비 672만 명이 증가하였고, 자연 증가율은 5.05%이다.

사회 의 특징

중국 사회의 특징은 여러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취업, 임금, 사회보장, 생활수준, 소비 구조 등의 국민 생활 및 신앙의 자유, 종교의 현황, 중국적 종교 특색 등의 종교 생활 그리고 중국 소수민족의 상황을 개괄할 것이다.

국민 성과 와 생활

중국 개혁개방의 최대 성과 중 하나는 전국 농촌과 도시의 생활수준이 대폭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취업, 수입·소비, 사회 의료 보장 및 의료·위생 조건 등 방면에서 점차 중류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1979년 이후 취업

1979년 이후 중국 정부는 취업의 문을 크게 열고 노동 부문의 취업 소개와 스스로 직업 찾기를 서로 결합하는 방법을 실행하며, 1984년에 이르러 문화대혁명 중 강제 낙향된 1,800만 명 지식 계층의 도시 복귀 후 취업 문제를 해결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취업 규모는 계속 확대되어 노동력의 유동이 가속화되었다. 1999년 말 전국 취업인원은 7억 586만 명이며, 1949년과 1978년보다 각각 5억 2,504만 명과 3억 434만 명이 증가하였다. 도시 취업인원은 더욱 증가하여, 1949년과 1978년 전국 도시 취업인원은 각각 단지 1,533만 명과 9,514만 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2억 1,014만 명이 되고, 도시 사영 개인 상공업 취업인원은 3,940만 명이다.
동시에 경제 구조와 산업 구조의 조정에 따라, 취업인원의 취업 구조에도 상응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제3차 산업의 취업인원은 급속히 증가하여 1979년부터 1998년까지 누적하여 2.8배 증가하고, 연평균 6.9% 증가하며, 제1차 산업 1%와 제2차 산업 4.4%의 증가 속도를 초과하여, 취업 증가를 추진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사람들의 취업 관념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 1978년 중국의 주식제() 경제, 사영 경제, 외국계 기업 및 홍콩·마카오·타이완 투자 경제도 아직 출현하지 않아 개인 상공업에 종사하는 취업인원 또한 오로지 15만 명뿐이었다. 1999년 말 주식제 경제, 사영 경제, 외국계 기업 및 홍콩·마카오·타이완 투자 경제의 취업인원은 모두 2,100만 명에 달하였다.

보수 제도

중국 임금제도의 기본 원칙은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른 분배이다. 중국 현행 임금형식에는 시간급, 성과급, 상여금, 생산량 초과 급여, 수당 및 보조금 등이 있다.
임금제도 중에 남아 있는 심각한 평균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985년 중국 정부는 임금제도에 대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국가 기관과 사회단체에서는 직무 임금을 위주로 하는 임금제도를 실시하고,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등 분야에서는 각자의 등급 임금제도를 실시하며, 공장과 광산 기업 대부분에서는 등급 임금제도를 실시하고, 많은 기업에서는 임금 총액과 경제 효과를 연계한 방법을 실시하여 직원의 노동 보수는 기업 경영 상태·개인 공헌 규모 등과 연관되어 유동한다. 통계에 따르면, 국유 경제 기관의 직원 임금 총액 중에서 상여금·생산량 초과 급여·수당·보조금 등이 1978년의 8.9%에서 1995년의 39.8%로 증가하고, 시간급과 성과급은 1978년의 85.8%에서 1995년의 55.6%로 하락하였다.

사회 보장제도

중국의 사회보장 사업은 사회보험·사회복지·사회 구제·사회 서비스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 계획경제 시대에 사회보장을 받았던 사람은 비교적 적었다. 1984년 이후 중국은 점차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그 중점은 양로 보험과 실업 보험이며, 개혁의 방향은 사회화, 즉 봉사 대상의 사회화, 자금 출처의 사회화(국가·기업·개인의 공동 부담), 관리의 사회화, 봉사 시설의 사회화 및 봉사자의 사회화 등이다. 1999년 말 전국에는 9,433만 명의 노동자와 2,900만 명의 퇴직자가 기본 양로 보험에 참가하였고, 9,912만 명의 실업 보험에 참가하였다. 93%의 국유기업 퇴직자들이 재취업 센터에 들어가 그 중 90%가 기본 생활비를 수령하였다. 사회복지 사업으로 1999년 말 전국 각종 사회복지원의 침대는 108만 장에 이르고 81만 명을 수용하였다. 농촌의 사회보장 수준은 비교적 낮아서, 주로 양로보험, 이재민 구호와 빈민 구제 및 의료보험 분야에 집중한다. 전국 1/3 이상의 농촌에 농촌 사회보장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수천 만 명의 농민이 양로보험에 가입하였다.

국민생활 수준의 목표

중류 생활수준은 중국 개혁개방 성과의 종합적인 구현이고, 국민생활 수준이 가까운 장래에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소위 중류 생활수준은, 기본적 의식() 해결 정도의 생활수준의 기초 위에서 삶의 질이 진일보 제고되고, 풍족한 의식 생활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중류 생활수준은 물질생활의 개선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의 충실도 요구하고, 주민 개인의 소비 수준의 제고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와 노동환경의 개선도 요구한다. 1990년부터 중국은 중류 생활수준의 목표 실현 과정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구체적 국정에 근거하고 국제 사회의 지표를 참고하여, 중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지표 체계는 다음과 같은 3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개인 소비 수준
개인 평균 실제 수입은 전국 중류 생활의 개인 평균 수입 수준이 1,400위앤()이 되어야 하며, 그 중 도시는 2,380위앤이고 농촌은 1,100위앤이다. 개인 평균 주거 면적은 도시가 10㎡이고 농촌이 20㎡이어야 한다. 개인 평균 일일 단백질 섭취량은 75g이어야 한다. 이외에 소비 구조에서 식품 지출은 소비 지출 총액의 45%∼49%이고, 삶의 질의 제고와 정신생활의 풍요를 위한 지출은 지출 총액의 15%를 점유해야 한다.
공공 소비 수준
2000년을 예로 삼아, 중류 생활의 공공 소비 수준은 35%에 도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천명 당 2.9장의 병상() 수를 구비해야 하고, 백명 당 2.8대의 전화를 소유해야 하고, 노동자의 사회보장율은 60%에 달해야 한다.
평균 소비 수준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일부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되고, 일부 지방이 먼저 부자가 된 이후, 그 최종 목표는 전체 사회의 공동 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임금 수입 위주의 도시 근로자 사이의 수입은 비교적 균등하지만, 도시와 농촌, 연해안과 내륙, 상이한 수입원 등의 사이에는 여전히 수입 불균등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중류 생활 수준의 목표에 따라, 도시 사람들의 수입은 상대적 균등 상태에 도달해야 하고, 농촌에서는 격차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을 중국은 목표로 한다.
소비 구조의 변화 추세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소비 구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소비 구조가 기본적 의식 해결의 생활수준형에서 풍족한 의식의 생활수준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대체로 빈곤 상태, 기본적 의식의 해결 상태, 풍족한 의식의 생활 상태 등을 경험하였다. 기본적 의식 해결 정도의 생활수준에서 나타나는 소비 구조의 특징은 식품 비용이 점하는 생활비의 비중이 매우 높다. 풍족한 의식의 생활수준으로 변화함에 따라, 전체적인 추세는 식품 비용의 비중이 장차 하락하고 주거·의료·일용품·여행 등 비용의 비중이 장차 상승할 것이다.
도시 근로자의 소비 구조가 반()공급형에서 자가 부담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근로자의 소비는 대체로 절반은 자가 부담이고 절반은 평균주의에서 오는 공급제이다. 1978년 이후 양자의 비례 관계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어서, 중국 근로자의 소비 구조는 반공급형이었다. 이 소비 구조의 특징은 일부 항목의 국가 보조금이 많고 자가 부담 부분은 적었다. 경제체제의 개혁 특히 주거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에 따라, 각종 보조금은 장차 점점 감소하여 임금 혹은 다른 형식을 통해 개인 수입으로 변하고, 근로자의 생활 비용은 장차 자가 부담으로 되어 반공급형의 소비 구조가 자가 부담형 소비 구조로 변할 것이다.
농민의 소비 구조가 자급자족형에서 상품형으로 변하고 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농촌의 상품경제 발전에 따라 농민의 소비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였다. 1990년대 초 상품성 지출이 농민 생활비를 점하는 비중은 이미 60%가 초과하여, 자급자족성 지출의 비중이 약 30%까지 하락하였다. 이런 현상은 곧 수 억 중국 농민이 자급자족의 생활 방식을 떠나 상품 경제생활의 가운데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 생활소비 가운데에서 상품성 지출의 비중은 상승의 추세를 나타내고 자급자족성 지출의 비중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소비 구조는 유사()형에서 다양형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주민의 수입은 대체로 평균적이며, 소수 고소득층을 제외하고, 도시이든 농촌이든 과도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은 모두 소수이다. 수입 방면의 이러한 특징이 중국 주민의 소비 구조를 서로 비슷한 유사형으로 만들었다. 유사한 소비 구조에서는 각 계층 주민의 소비 품종이 대체로 동일하고, 각종 소비품의 품질 등급의 격차도 크지 않다. 그러나 주민 수입의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소비 수준의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격차 확대의 기초 위에서, 주민 소비 구조는 다양형으로 변화하고, 상이한 수입 계층이 상이한 소비 특징을 나타낸다.

종교

종교 와 신앙의 자유

중국 국민의 종교 신앙의 자유 권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중국 헌법 제36조 규정에 의하면, 종교 신앙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 권리로서, 어떤 국가 기관·사회 단체·개인도 국민의 신앙 혹은 불신앙을 강제할 수 없고, 종교를 신앙하는 국민과 신앙하지 않는 국민을 차별 대우할 수 없다. 또한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 신앙을 보호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 질서의 파괴와 국민 신체·건강의 위해 및 국가 교육제도의 방해 등 활동을 행할 수 없다. 종교 단체와 종교 업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종교의 현황

2009년 중국에는 각종 종교 신도가 1억여 명이 있고, 신도 숫자는 안정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종교 활동 장소는 모두 약 13만 곳으로, 1997년 보다 약 5만 곳이 증가하였다. 종교 성직자는 약 36만으로, 1997년보다 약 6만 명이 증가하고, 종교 단체는 약 5,500여 개이고, 종교 설립 대학교는 110여 곳이다.
중국은 다종교 국가로, 주요 종교로는 불교·도교·이슬람교·천주교·개신교 등이 있다.
불교는 중국에서 이미 약 2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7년 불교 사찰은 1만 3천여 곳이고, 2009년은 2만여 곳이며, 출가 승려는 20여 만 명이다. 그 중에서 라마교의 성직자는 약 12만 명, 활불()은 1,700여 명이고, 사원은 3천여 곳이며, 소승불교의 성직자는 약 1만 명이고 사원은 1,600여 곳이다.
도교는 중국에서 기원하여 이미 약 1,700년의 역사가 있다. 도교 사원은 1997년 1,500여 곳이고, 2009년에는 3천여 곳이며, 신도수는 1997년 2만 5천여 명이고, 2009년에는 5만여 명이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이슬람교는 중국의 회족()·위구르족() 등 10개 소수민족 중 대다수가 신앙한다. 1997년 무슬림(회교도)은 약 1,800만 명이고, 2009년에는 약 2,100만 명에 달한다. 1997년 회교 사원은 3만여 곳이고, 2009년에는 3만 5천 곳이며, 이슬람교 성직자은 4만여 명이다. 그 중에서 신강위구르자치구()에는 회교도가 약 1,100만 명, 회교 사원이 2만 4천여 곳, 성직자가 2만 8천여 명이 있다.
천주교는 7세기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 1949년 건국 당시 약 300만 명의 신도가 있었고, 1997년에는 약 400만 명으로, 2009년에는 약 530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1997년 예배당은 4,600여 곳이었고, 2009년에는 예배당이 6천여 곳이고 교구는 97개이며, 주교는 60명, 신부는 2,200여 명, 수녀는 약 3천 명이다.
개신교는 19세기 초에 중국에 전래되어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로 전파되었다. 1949년 건국 당시 약 70만 명의 신도 있었고, 1997년에는 1천 만 명으로, 2009년에는 1,600여 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중국 개신교는 1980년부터 2009년까지 누적하여 성경책 약 7천 만 부(수출 포함)를 인쇄·발행하고, 모두 22종의 판본이 있다.
중국의 전국적인 종교 단체로는 중국불교협회·중국도교협회·중국이슬람교협회·중국천주교애국회·중국천주교주교단·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중국기독교협회 등이 있다.

중국 종교의 특색

중국 종교의 주요 특색으로는 대중성·민족성·국제성·복잡성·장기성이 있다.
1) 대중성: 중국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병존하고, 각 종교는 모두 상당히 많은 신도가 있다. 대다수 대중이 어떤 한 종교를 믿는 민족의 경우, 그 민족의 인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신도수도 상응하여 증가한다. 중국 총인구에서 종교 신도가 점하는 비중은 적으나, 절대적인 인구수는 적지 않아서 일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2) 민족성: 주로 불교와 이슬람교가 많은 민족 중에서 광범한 신도를 가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16개 소수민족 중의 대부분 혹은 일부분이 라마교 혹은 소승불교를 믿고, 10개 소수민족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종교는 이들 소수민족의 여러 생산활동과 사회활동에서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민족과 종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범위에 속하지만, 일부 소수민족에서 종교문제는 종종 민족문제와 서로 얽혀있다. 종교문제의 처리가 타당하지 않으면 사회문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3) 국제성: 중국의 불교·이슬람교·천주교·개신교는 모두 외국에서 전래되고, 이들 종교는 모두 세계적인 조직과 관계를 갖고 있어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또한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많은 신도를 갖고 있어 그 중 어떤 종교는 일부 국가의 국교로 신봉되고 있다. 중국은 대외 개방 이후 종교 방면에서 국제적 교류를 날로 증가시키고 있다.
4) 복잡성: 종교는 공동의 종교적 정서·도덕·의식·조직과 신앙 등 여러 요소에 의해 구성되어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복잡한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종교는 사회생활의 여러 방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의 사상·신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 문제, 대중관계, 민족관계, 국제관계 등과도 연관되어 있다.
5) 장기성: 종교는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현상이고, 그 존재에는 심오한 사회적 근원과 인식이 있다. 하나의 의식형태로서의 종교는 비교적 강한 적응성을 지지고 있다. 또한 현대 세계는 날로 개방적인 국제사회가 되고 있어, 중국 종교의 존재도 외국 종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의 종교는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사회에 대해 일정한 영향을 계속 끼치게 된다.

다 민족 국가

중국은 옛날부터 다민족 국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앙정부를 통해 확인된 민족은 모두 56개이다. 한족() 이외의 55개 민족은 상대적으로 한족보다 인구가 적어서 관습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칭한다.
중국 각 민족 분포의 특징은 잡거가 많고 집거가 적으며 상호 교차 거주하는 상태이다. 한족 지역에는 소수민족이 집거하고, 소수민족 지역에는 한족이 거주한다. 이런 분포 구조는 장기적인 역사의 발전 과정 중 각 민족 간의 상호 왕래와 이동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중국 소수민족의 인구는 비록 적으나 그 분포 지역이 넓다. 전국 각 성()·자치구·직할시에는 모두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고, 대부분의 현()급에는 모두 2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소수민족의 주요 분포 지역은 몽고·신강()·영하()·광서(西)·서장(西)·운남·귀주·청해·사천·감숙·요령·길림·호남·호북·해남·타이완 등의 성과 자치구이다. 중국 민족의 구성이 가장 많은 곳은 운남성으로 25개 민족이 있다.
민족 지역의 자치제도는 중국 정부가 중국의 현실 상황을 고려하여 채택한 기본 정책으로, 중국의 중요 정치제도이다. 1947년 5월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서 첫 번째로 성()급에 해당하는 민족자치지구 즉 내몽고자치구()를 설치하였다. 중국 건국 후 계속하여 신강위구르자치구·광서장족()자치구·영하회족자치구·서장자치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적으로 155개 민족자치지방을 설치하여, 그 중 자치구는 5곳, 자치주()는 30곳, 자치현()·기()는 120곳이다. 전국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44개 민족이 자치지방을 설치하였다. 자치를 실행하는 소수민족의 인구가 소수민족의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초과하고, 민족자치지방의 면적은 전국 국토 총면적의 약 64%이다.

문화, 문명

중국 고대 황하문명은 인류 역사에 있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며, 유일하게 연속적으로 발전하고 중간에 단절된 적이 없는 문명이다. 황하문명의 발전과 번영에 따라 중국 고대 문화가 탄생하였으며, 지금까지 번성하고 쇠퇴하지 않았다.

문학

중국 최초의 문학적 성취는 기원전 6세기에 편찬된 중국 제일의 시가() 총집 『시경()』이다. 그 후 질박한 선진() 산문, 화려한 한부() 및 한나라 말기의 악부()·민요 등은 각각 그 당시의 문학적 면모를 대표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시가()의 창작이 최고봉에 이르러, 이백()·두보()를 포함한 시인이 수천 명 탄생하였고, 현재까지 5만여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송나라는 사()가 가장 성하였고, 원나라 문학의 최고 성과는 잡극()이다. 명·청(·) 시기의 『삼국연의(』·『수호전()』·『서유기(西)』·『홍루몽()』 등 4편의 장편소설은 풍부한 문학과 역사를 혼합한 내용과 독특한 예술적 풍격으로 인해 고금에 걸쳐 명성을 얻고 있다.
20세기의 중국 문학은 20·30년대와 80·90년대에 각각 두 차례의 절정이 있었다. 전자의 절정은 ‘신문화운동’에서 발단하고, 시작과 동시에 강렬한 제국주의·봉건주의 반대의 사상을 띠었다. 노신(, Lu Xun)을 대표로 하는 진보 작가들은 중국 현대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신·심종문()·파금()·로사()·장애령() 등이 당시 중국 문단의 거장이었다.
20세기 80·90년대 일군의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신진 작가와 그 작품의 발표는 중국 당대 문학의 성과와 번영을 대표한다. 작가들은 현대 중국어로 현대 중국인의 생명과 심미에 관한 체험을 표현하여 더욱 성숙하였다. 전체 창작 수준에 있어, 당대 소설가들은 사용 언어의 사색과 표현 방면에서 높은 예술성에 도달하여 이미 그들의 선배들을 초과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문학 창작은 여성 세기로 진입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로는 1930년대 출생한 여류작가에서 아래로는 20여 세의 신여성들이 동시에 문단에서 활약하고, 그 창작의 양과 질은 모두 현저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60년대 이후 출생한 여류작가들의 작품은 고전소설이 설정한 인물 이미지 모델과 가치 취향을 비교적 많이 변화시켜서, 당대 사회의 특수한 인문적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는 수 십 개의 문학상이 있고, 그 중에서 비교적 권위 있는 것은 모순문학상()·노신문학상()과 매년 중화문학인물평선() 등이다. 2000년 북경에 건축한 중국현대문학관()은 최고로 저명한 18명의 중국 작가들이 사용한 책상·의자·필기구와 대량의 문학작품·필적·역문·편지 및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서예·회화

중국 한자()는 그림과 부호로부터 점차 변하여 형성된 것이고, 한자의 쓰기와 발전 과정으로 인해 서예가 탄생하였다. 중국에는 대대로 모두 저명한 서예가가 있었고, 그 서예와 풍격은 그 당시 서예의 전형적인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서양의 유화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 회화에는 독특한 표현 형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천 년 이전 신석기시대 도기 위에 그린 도화()가 중국 최초의 회화 작품이다. 최초의 회화와 글자쓰기는 모두 동일한 도구를 사용하고 또한 선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서화동원(: 서예와 회화는 근원이 같다)’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전통회화 작품에는 보통 모두 시쓰기와 글자쓰기가 있어, 시·서·화(··)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예술의 통일체를 이루고, 사람들에게 더욱 풍부한 미학적 내용을 부여한다. 인물화·산수화·화조화 등이 모두 전통회화의 중요 영역이다.
당대 중국 서예와 회화의 작품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여, 중국미술관() 등 예술품 전시관에서는 매년 빈번히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할 뿐만 아니라, 중국화는 또한 외국으로 나가 여러 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한편 예술품 경매 사업의 발전과 함께 최근 중국 화랑업계도 점차 국제적 관심을 받고 있으며, 매년 북경·상해·광주() 등 각지에서 예술박람회를 개최하여, 예술품 교역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중에서 상해예술박람회()가 아시아의 전람회 참가 예술품 부문에서 가장 완비된 예술박람회이다.

공예미술

중국 공예미술의 영역은 매우 다양하고 그 기예는 매우 능란하다. 공예미술은 특수전통공예와 민간공예로 대별할 수 있다.
특수전통공예는 진귀하거나 특수한 재료를 가공하여 제작한 것으로 품위가 고상하다. 옥조각은 옥석을 재료로 삼아 조각한 작품으로, 옥석의 천연 무늬·광택·색채·형상을 이용하여 가공하고, 옥석의 색깔과 작품의 형태를 기묘하게 결합시켜 자연적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경태람()은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공예품으로, 명나라 경태(, 명나라 의 연호, 1450·1456) 시기에 생산한 남색 유약이 뛰어나서 얻은 이름이고, 그 작품은 구리 바탕에 동선을 상감하고 금은으로 도금하여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주요 작품 종류로는 병·사발·상배 등이 있다.
민간공예에는 가위로 자르고, 실로 짜고, 뜨개질하고, 자수를 놓고, 돌에 새기고, 흙으로 빚고, 그림을 그리는 등 기예를 이용하여 제작한 작품들이 다양하고 천태만상이며 토속적 분위기와 민족적 풍조가 농후하다.

희곡(경극)

중국의 전통연극은 독특한 명칭으로 희곡()이라고 하며, 그리스 희비극·인도 연극과 함께 세계 3대 고대 희극문화로 불린다. 중국 희곡에는 300여 종류가 있고, 가무 형식을 운용하여 연극 줄거리를 표현하는 것은 중국 희곡의 주요 수단이다.
경극()은 가장 널리 퍼지고 영향력이 가장 큰 희곡 종류이며, 그 기원은 곤곡()에 있다. 동시에 노래 부르고 대사를 낭독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예술로 19세기 초 북경에서 시작되었고, 약 200년이 경과되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는 1천 개 이상의 연극 제목과 고유한 음악 절박 형식 및 표현 양식을 형성하였다. 매난방()·정연추()·마련량()·주신방()·두근방() 등 우수한 경극 연기자 이후, 많은 젊은 연기자들이 경극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왕용용()·우괴지() 등 젊은 연기자가 출현하였다. 2002년 중국경극원()은 서양 교향악의 요소를 전통경극에 접합시키는 시도를 대담하게 추진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영화

중국 영화의 현실적 소재는 영화 발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1980년대 중기부터 흥기하기 시작한 새로운 영화 제작의 최고조에서 『성남구사()』·『야산()』·『부용진()』·『개국대전()』·『대결전()』등은 당시의 대표작이 되었고, 이들 작품은 생활의 깊이와 넓이를 반영하고 소재·풍격·양식의 다양화를 실현하는 면에서, 그리고 영화 언어의 탐색과 창조 방면에서, 모두 높은 수준의 상태에 달해 있다. 이 기간 동안 제5세대 감독으로 불리는 장예모()·진개가()·황건신() 등의 출현은 국제 영화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후기 60·70년대 출생한 영화인들이 중국 영화계의 제6세대가 되어, 그 대표자로는 왕소수()·장원()·루엽() 등이 있다. 그들의 영화 작품은 서민화 경향이 강해 대체로 현실 기술 수법으로 표현된다. 감독 풍소강()은 중국 상업 영화에서 흥행기록이 최고인 대표자가 되었고, 그의 작품이 서술하는 것은 대부분 서민의 이야기이다.

중국은 매년 국제영화제를 거행하고, 비교적 영향력 있는 것으로는 장춘국제영화제()와 상해국제영화제()가 있다. ‘금계상()’은 중국 우수 영화의 최고상()이고, 그 외에 중국 정부에서는 주류 영화의 발전을 격려하기 위해 ‘화표상()’을 수여하며, 관중이 평가하여 수여하는 ‘백화상()’이 있다.

연극

중국 연극은 20세기 초 외국에서 유입되어, 1920년대부터 연극 무대에서 현실주의와 표현주의의 소재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30년대에 이르러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연극 대가 조우() 시기의 3부작 『뇌우(』·『일출()』·『원야()』는 심오한 내용과 원숙한 기교로 중국 연극의 고전 작품으로 간주된다. 현재까지 이 3부작은 여전히 연극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으며,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1952년 창립한 북경인민예술극원()의 작품은 중국 연극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 중 『다관()』·『융수구()』 등 연극 제목은 명성을 얻고 있다.

문화교류

중국의 대형 국제 다자문화 교류활동이 최근 매우 생동감 있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도 날로 증대되고 있다. 최근까지 중국은 이미 143개 국가와 정부 차원의 문화 협정을 체결하고, 매년 중국 문화부가 허가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는 2천여 항목에 달하여, 60에서 70개 국가를 포함하고, 연인원 3만 명에 이른다.

과학 기술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신속히 중국과학원()을 위주로 하는 과학연구 체계를 수립하고, 1978년 말 개혁개방정책 하에서는 국민경제를 새로운 기술 기초로 전이하기 위해 여러 과학연구 계획을 계속 실시하였다. 중국은 1978년 전국과학대회를 개최하여 「1978·1985년 전국 과학기술 발전기획 강령()」을 제정하였다. 이 강령은 과학기술 사업의 기본 방침을,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촉진을 주요 임무로 하고, 과학기술 중에서 생산기술의 개발을 강화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방침은 90년대까지 적용되었고, 농업·에너지·컴퓨터·레이저·우주공학기술·고에너지 물리학·유전공학 등을 우선 발전의 중점으로 삼았다.
경제체제 개혁의 필요에 따라 1985년 중국은 「과학기술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였다. 1998년 대·중형 공업기업이 설립한 기술개발 기구는 10,926개 소가 생겼고, 기구 총수의 50.5%를 점하였다. 이들 기구는 생산과 긴밀히 결합되어 생산에 직접 활용되었다. 1996년 3월 이후 중국은 ‘과교흥국(: 과학교육의 국가 흥성) 전략’을 실시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건설의 결합을 목표로 하며, 그 주요 내용은 시장 수요에 적응하여 기술 개발과 생산품 개발을 강화하고 과학기술 성과의 상품화·산업화의 추진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자연과학 방면에서 중국의 과학기술 연구기구는 주로 중국과학원(), 국무원과 지방정부 소속의 과학연구기구, 대학교의 과학연구기구, 국방과학연구기구, 광산기업의 과학연구기구 등이 있다. 최근 몇 년 간 민영 과학연구기구가 새로이 등장하여 주요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1999년 말까지 전국에 이미 현급() 이상 지방정부 소속의 연구·개발 기구로는 5,400여 개 소, 대학원의 과학연구기구는 3,400여 개 소, 대·중형 국유기업의 과학연구기구는 1만 3천 여 개소가 있다. 민영 과학연구형 기업의 규모는 보통 크지 않으나 그 수량은 상당하여, 이미 7만 9천여 개 소에 달하고, 기업 총수입은 약 1조 위앤을 초과하였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분업하고 상호 보충하며, 전국적으로 기초과학·응용과학·고급 신기술·공익성 사회 과학기술 서비스에서 엔지니어링 설계 개발까지의 학문분야가 비교적 완비한 과학기술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외에 중국과학기술협회() 소속의 160여 개 전국적 과학기술 학술단체 및 그들의 대·중 도시에 설립한 지점 기구들이 있다.
중국 과학기술의 주요한 성과를 살펴보면, 첫째로 응용과학 분야의 농업 방면에서, 중국은 밀·논벼·옥수수·면화 등 우량 품종을 배양하고 보급하여, 농작물 우량종 사용률은 80% 이상이고, 농업 생산의 안정적 발전을 촉진하였다. 중국 남부지방은 북위 18도에서 24도 사이의 지역에서 고무 시험재배가 성공하여, 중국의 고무 생산량을 세계 제5위로 끌어올렸다.
공업 방면에서, 중국 과학기술의 대부분 영역은 서양 선진국의 196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일부 항목에서는 서양 선진국의 80년대 과학기술 수준이며, 소수 항목에서 세계 선진 대열에 진입하였다. 예로 석유공업은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발전은 매우 빨라서, 50년대 후기 중국은 탐사의 이론과 기술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대경유전()을 마침내 개발하였다. 대경유전은 연속적으로 20여 년 동안 매년 원유 5천 만 톤을 생산하여, 중국을 석유 부족 국가에서 석유 자급자족의 국가로 변신시켜 주었다.
교통운수 방면에서, 중국의 대형 교량 건설 기술 특히 수심이 깊은 시공기술은 세계적이어서 무한장강대교()와 남경장강대교()를 성공적으로 건설하였다. 중국은 또한 지형·지질 조건이 복잡한 지역에서 철로와 터널의 건설기술이 뛰어나다. 이외에 중국의 조선업과 민간용 비행기 제조업도 진보되어 있다.
둘째로, 중국의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건국 당시 전무 상태이었으나, 핵기술 방면에서 1960년대 중반 중국은 이미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개발하였고, 1964년과 1967년에는 원자탄과 수소폭탄의 폭발 시험을 성공하였다. 1971년에는 중국 최초의 핵잠수함 진수 시험을 성공하여, 중국이 성공적으로 세계 5대 선진 핵기술 보유국 중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내었다.
우주공학 방면에서, 1970년 중국은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위성의 회수 및 5톤 이상 중형 위성의 발사와 통제를 실현하여, 위성 기술은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를 앞서나가고 있으며, 2008년 9월에는 신주() 7호 유인 우주선의 지구 귀항을 성공시켰다.
생물공학 방면에서, 중국은 1965년 세계 최초로 소인슐린을 인공 합성하고, 70년대 후반 유전자공학 연구를 개시하여 B형 간염 예방치료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보았다. 식물 조직 배양에서 중국은 세계적으로 효과가 가장 좋은 농작물 즉 멥쌀형 잡종강세수도를 발명하여 중국의 양식 생산량을 제고시켰다.
셋째로, 중국은 기초과학연구 분야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꾀하며, 생물학 방면에서 최초의 소인슐린 인공 합성 이후 유전공학 방법을 이용하여 세균 중에서 인슐린을 제조하고 추출 효율을 크게 높였다. 1982년 중국은 인체 인터페론을 제조하여 세계적 선진 수준에 도달하였다.
물리학 방면에서, 중국은 초전도 온도를 제고하고 초전도 부속품을 연구함으로써 국제적 수준으로 진보하였다. 티타늄과 희토의 개발·연구, 광섬유 통신 설비의 연구·제작, 지진 예보, 암 진단과 예방, 복사 육종 등 방면에서 중국은 또한 세계적 선진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넷째로, 의학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의학과 한방약의 발전이 현저하다. 중의학과 한방약은 중국 전통의 의약과학이다. 중의학의 기초이론 방면에서, 중국은 현대 과학기술 수단을 이용하여 경락()을 연구하고 이미 객관적으로 경락의 노선들을 밝혀냈다. 중국의 침구·침술 마취·침술 진통 등 연구는 침구 의학의 세계적 발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한방약의 연구 방면에서, 전국적인 한방약 자원의 일제 조사는 한방약 자원의 분포와 매장량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계수치를 제공하였다. 한방약재 품종의 정리 연구는 국가 표준의 제정을 위해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천연 약물과 전통 약물의 연구 방면에서, 1980년대 이미 현저한 성적을 이루고, 그 중 결핍 약재에 대한 연구와 배양은 장족의 진보를 가져왔다. 1996년 천진()이 생산한 ‘단삼적환()’은 미국 FDA의 허가를 받아, 한방약이 세계 시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종합적으로 볼 때, 1949년 이후 중국의 과학기술은 일정 부분에서 성과를 달성하였으나, 중국 공업기술의 총체적 수준은 여전히 서방 선진국보다 낙후되어 있고, 고급 신기술의 발전은 설비와 기술의 도입에 대부분 의지하고 있으며, 일부 영역과 항목은 외국 선진국과의 수준에서 아직도 차이가 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역사적 관계

선사시대부터 중국 대륙과의 관련이 깊었으며, 특히 위만(滿)의 침입과 한무제()의 침입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선진()의 문헌에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대의 중국인은 동이에 대하여 다른 이민족보다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여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도 『논어()』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고 하였고, 『맹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도 동이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에 이루어진 『전국책()』·『관자()』 등에서 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중국에서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말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뒤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전한()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과 『사기()』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전한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 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위만조선은 80여 년 간 계속되다가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며, 한무제는 이곳에 4군()을 설치하였다. 조선 땅에 두었던 4군은 조선의 세력에 굴복하여 설치된 지 20여 년 만에 4군 중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은 쫓겨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 안에는 겨우 낙랑군만이 그 서북쪽에 남았으나 4세기 초에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시기는 중국 대륙에서 후한 이후 삼국()·남북조()의 분열기를 거쳐 통일제국인 수·당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중국을 자주 괴롭혔다. 그러나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여는 삼국보다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에 그 이름이 보이며, 49년에는 부여 왕이 후한()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또한 111년과 167년 부여 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 122년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했을 때는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200년경 부여의 위구태()는 공손탁()과 혼인관계를 맺고, 244년과 245년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위나라 군사를 환영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에는 서쪽으로부터 선비족() 출신 모용씨()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남으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5세기에 한반도 및 요동·만주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삼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왕은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조의 북위()·동위()·북제()·북주() 등과 차례로 통교하는 한편, 바다를 통해 남조의 동진()·송·제()·양()·진() 등에도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예방하였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589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수나라와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우호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4세기 후반에 그 세력이 커져 남조의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던 백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표면상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와 연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西)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 문제()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났다.
당나라 고조() 때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태종()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16년간에 걸쳐 요동()지방에 1,000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 644년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요동에 침략군을 보낸 후 이듬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작은 산성인 안시성()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9도독부()를 두었으며, 또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 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고구려가 망한 지 8년이 지난 676년에 당나라 군사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지역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시대 한·중 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자 및 유교 문화의 보급은 삼국의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에 있어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교육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호국신앙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컸으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한 후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았다. 또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인 신라방()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진·한의 통일 이후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는 서서히 제도화되어, 처음의 삼국 대 중국 관계는 정식 조공이 아니라 입조()에 불과하던 것이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정기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되었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명·청시대에 완비되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중국은 오대()의 혼란기였다. 당나라가 망한(907년) 뒤 후량()이 섰으나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망하고(923), 이어서 후당()·후진()·후한()·후주() 등 모두 5왕조가 차례로 교체되었으며, 주변 지역에서도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혼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 여러 나라와 고려는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물의 교류와 조공을 통한 우호적 접촉을 유지해 갔다. 고려는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대 제국()과 교섭을 계속하였으며, 5대 제국은 고려로부터 전적()을 얻어 가는 등 문물 교류를 통하여 이익을 보는 면이 많았다.
이러한 관계는 후주를 이은 송나라와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는 북방의 거란족·여진족·몽고족이 차례로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그 관계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매우 어렵고도 복잡하였다. 송나라와 고려 간에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962년(광종 13)이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송에 대하여 친선외교를 폄으로써 중간에 끼어 있는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송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송나라는 개국 이래로 문치주의를 채택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동북으로부터 강대한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를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서로 처지를 달리했지만 우호적인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조공관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문물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로 고려 초부터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거란족은 3차(993년·1010년·1018년)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으나 서희()의 담판과 강감찬()의 구주대첩으로 실패하였다. 여러 차례의 침입에서 요나라는 번번이 대패했고, 고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쳤으므로 두 나라는 서로 화평을 바라게 되어 1019년(현종 10)에 두 나라 간에 화약이 성립되었으며,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순종하여 투화()하거나 조공을 바치다가 10세기 이후 그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고려의 북방을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1107년(예종 2)에는 윤관()이 17만의 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2년 뒤 여진족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청을 받아들여 9성에서 철수하였다. 1115년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한 뒤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였으며, 1125년(인종 3)요나라를 멸망시킨 뒤 금나라에 간 고려의 사신이 칭신()하지 않는다 하여 고려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자 이자겸()은 중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에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 뒤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론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 후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금나라의 국력이 쇠퇴해 가는 13세기 초 몽고족이 대륙의 북방에 흥기하여 급격하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주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후예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9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일이 있으며, 거란족의 유적(: 떠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도적)들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이에 몽고족의 칭기즈칸()은 1219년고려에 원군을 보내어 거란족의 유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 뒤 몽고족은 고려에 많은 공물을 요구했는데,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몽고족의 사신을 냉대하였다. 그러다가 1225년 몽고족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1231년에 제1차 몽고침입이 있었다. 불시에 침입을 당한 고려는 당시의 집권자 최우()의 주장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뒤 30년 간에 걸친 몽고족의 여러 차례의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1258년 고려 조정의 육지 귀환과 태자의 친조()를 조건으로 두 나라가 강화를 맺었다. 그리하여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이 끝나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원만해졌다.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과 영향력은 고려의 왕실·정치제도·습속 등에 크게 작용하였다. 두 왕실의 통혼으로 고려의 왕이 원의 공주나 종실(: 왕의 친족)의 딸과 혼인하여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고려의 관제나 칭호가 원의 제도와 상등한 것은 변경하여 원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또 호복()과 변발 등 몽고족의 생활풍습과 몽고어가 침투하였고, 경제적·인적 착취도 강화하여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하였다. 문화관계에서는 원나라의 학문과 서예가 전래되었고, 성리학이 전래되어 조선 왕조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관계는 곧 명·청의 관계인데,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에 대한 명의 소극적인 태도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가 즉위한 직후의 문제로 태조의 즉위를 명나라가 승인하는 문제, 공로()를 폐쇄한 문제, 표전문제(), 통혼문제, 명제로부터 고명()과 인장()을 받는 문제 등은 사신 내왕과 교섭 결과로 몇 년 사이에 해결되었으나, 여진문제와 세공문제, 그리고 화자()와 처녀의 진헌()문제는 오랫동안 두 나라간의 현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안들도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가 성해짐에 따라 해결되어 조·명 관계는 원만해지고,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숭명()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명의 원조를 계기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명 간의 평화적인 관계는 북방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하여 1616년(광해군 8)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태조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호전적이어서 1627년(인조 5) 봄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뒤 그 해 겨울 그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군의 급격한 진격으로 왕자 등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한강변의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어 조·명 간의 옛 관습에 따라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또 막대한 양의 세공을 바쳤다. 이러한 사행을 통하여 연경()에 가는 사신들은 중국 문물을 접하고 서적을 구입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학술과 문물에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대 학술의 전성기인 고종()의 건륭시대는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걸친 시기에 해당되며, 이 시기의 학문 발달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은 매우 컸다. 종교에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중국을 통해서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러시아가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조선에 권고하여 ‘조미수호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간섭이 심해져 흥선대원군을 납치했으며, 군대를 훈련시켜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도 큰 몫을 해냈다. 이러한 간섭은 조선의 불만을 야기시켜 친러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 뒤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의 패배 결과 청은 조선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과거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청을 대신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손문(, Sun Wen)이 초대 임시총통에 취임하자,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애국지사들은 손문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손문도 깊은 관심과 동정을 표하였다. 또한, 1918년 11월 전후문제를 설명하고자 중국에 온 미국윌슨(Wilson, T. W.)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rane, C. R.)과 만나 우리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파리강화회의 중국측 대표였던 왕정연()과 육징상()이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인들, 특히 손문 중심의 광동군 정부() 관련 인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9년상해에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5·4운동을 계기로 조중항일연석회의()를 소집하고 중국측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성명하였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1921년 9월에 의정원()의 결의로 신규식()을 전권사절로 임명하여 중국광주()의 광동호법정부()에 보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동호법정부이었지만, 이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동호법정부는 손문이 죽은 뒤 국민정부()로 개조되어 북벌을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애국지사들도 참가하였다.
중국국민당의 좌우파 분열로 국민정부도 분열되자 한국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아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1927년에는 조봉암()·여운형()·홍남표()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를 결성하여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중국공산당에 조직적으로 결부시켰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1932년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당·군·민간단체와 관련된 인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중국 의용군왕덕림()·마점산() 등이 조선독립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군()을 조직하여, 일본 관동군()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전면 항일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바로 그들의 항일전과 같은 것이어서, 어떠한 제한도 고려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김약산()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김구는 남경()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혹은 으로 약칭)를 결성하였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단체들은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세 단체를 소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약칭 )을 성립시킨 뒤 연맹의 투쟁 강령인 중국항일전쟁에의 참가에 따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필요하게 되자 국민정부는 1939년김구와 김약산에게 좌우 양파인 ‘민선’과 ‘광선’을 연합하여 항일복국()을 결성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1940년 9월한국 임시정부 안의 우익 3당(한독당·국민당·조선혁명당)의 요구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하여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그 뒤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되어 임시정부의 주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직접 미군 사령부에 요구하여 그들의 연락조를 한국광복군에 파견시켜 주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도 중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바탕으로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있던 연안파()는 별도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국공산당과 8로군()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항일전에서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확충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의 투항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고, 종전 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Hodge, J. R.)가 한국광복군은 해산하고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르도록 요구하여 한국광복군은 해산된 채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으로써 건국 이후의 국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현대적 관계

중국과 북한

중국과 북한의 외교 수립은 1949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10월중국은 19개 군 57개 사단의 약 85만 명을 6·25전쟁에 참전시켰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 명분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 자기 안전 확보에 두었으나, 당시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성과 중국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6·25전쟁 참전을 자신의 정치권력 통합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목적 및 참전을 통한 스탈린(Stalin, I. V.)의 신임 획득 등 복합 원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7월의 비밀군사협정 체결을 통하여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혈맹관계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중소()분쟁의 표면화, 중국의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의 사건으로 인하여 상호 밀착과 소원관계가 반복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양대진영론()과 중간지대론() 같은 진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혁명과 이념적 일치성을 기반으로 했던 북방 삼각 협력체제가 중소분쟁으로 붕괴되자, 북방 삼각관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이변적 관계( )로 발전하였다. 중·소 관계의 개선은 북방 삼각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1950년대와 같은 삼각 협력체제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대남전략에 대한 적극 지원 확약과 1971년 8월의 무상군사원조협약 체결 등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1970년대 모택동(, Mao Zedong)과 화국봉(, Hua Guofeng)에 의해 추구되었던 적극적인 반소노선이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지위를 크게 제고시켰기 때문이다.
1975년 4월김일성()의 중국 방문 및 1978년 5월화국봉과 9월등소평(, DengXiaoping)의 북한 방문 등 최고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 되었고, 특히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함과 동시에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두 개의 한국정책을 반대하였다.
1978년 말 중국공산당의 11기 3중전회 이후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중국 외교정책의 신축성을 크게 제한했던 양대진영론과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다원화를 추구하는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점진적인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한 대화 및 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처지가 북한의 처지와 일치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반도정책이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과는 달리 점차 이원화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교차 승인이나 유엔 동시가입 문제는 한반도의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중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했던 ‘1국가 2체제()’방식에 의한 남북한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 중·소 대립의 악화는 중·소의 북한에 대한 경쟁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북한에 대한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동시에 중·소에 대한 북한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로 중·소 관계는 중·러 관계로 변화되어 한반도에 대한 중·러의 행동반경을 제고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한국 과 중국

중국은 1949년 10월 대륙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양대진영론에 입각한 대소() 일변도정책을 선포하고 반미()를 외교의 기본 척도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친미() 국가는 곧 적대 국가로 여겨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중국의 북한정책에 의해 결정되었고, 한국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단절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중소분쟁의 표면화,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으로 밀착과 소원의 관계가 반복되면서도 중국의 한국 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1972년 12월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기본 정책노선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어, 1973년한국은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위해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한국도 중국 접근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 체결을 비롯하여 한·중 간 어로분쟁 등과 관련한 비난을 전개하는 등 한국의 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두 나라 최고 지도자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로, 남북한에 대한 기본 정책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1978년 말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과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호요방(耀, Hu Yaobang)의 정치 보고에서 중국이 우호국이 될 수 없는 국가군()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국관에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관 및 인식의 변화는 과거 금기시해 왔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신축성과 현실주의적인 정책 추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1983년 5월 중국인에 의한 중국민항기 납치로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은 국제민항기구나 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중국 당국의 관계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관계자와 직접 사태 수습을 위한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교섭 결과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중국 정권 성립 후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중국 당국자에 의해 처음으로 호칭되고 문서화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기존 한국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함과 동시에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중국은 간접 교역과 직접적인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부터 홍콩·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 교역이 시작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크게 확대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간접 교역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직접 교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물질 유인·경쟁 개념과 시장경제이론 같은 자본주의 경제방식의 적극 도입, 지방과 기업의 자주권 확대, 민법통칙과 기타 경제법규 등을 비롯한 경제체제에 대한 적극적 개혁·개방정책은 중국 경제체제와 다른 이질적 체제의 서방이 중국 진출에 유리한 환경요인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가 없던 1991년까지 한국의 중국 경제 진출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나가고 있었다.
중국측은 한국 기업과의 접촉을 통하여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문제를 거론하고, 중국 내 자원개발과 건설사업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발전함과 동시에, 1992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일련의 중국 경제 진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인적 교류면에서 1983년 7월 친인척 간의 상호 방문이 허용된 이래, 한국과 중국 간에는 이산가족들의 초청 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중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한국 관리의 입국이 허용됨으로써 한국인의 중국 방문이 확대되어 갔으며,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도 점차 증대되었다.
어느 영역보다도 체육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1979년 6월항주(, Hangzhou)에서 개최된 세계배드민턴대회의 초청장을 보내는 등, 197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접근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84년에 곤명(, Kunming)에서 있었던 데이비스동부예선 테니스대회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후, 1984년 4월 광주(, Guangzhou)의 제11회 아시아축구연맹총회, 10월 상해의 제10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및 1985년 4월 항주 제17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등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하였으며, 중국측은 1984년 4월 제8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와 제2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각종 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중국은 1984년 9월 제3차 아시아올림픽위원회 총회에 공식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특히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그 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도 중국은 750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되는 제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결국 1992년 8월 정식 국교가 수립됨에 따라 체육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구기종목이 교차로 두 나라를 오가며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두 나라 인적 교류도 1987년에는 1,8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88년에는 1만 명에 이르고, 1989년에는 약 2만 3천 명이 상호 방문함으로써 2년 만에 10배 이상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고, 중국에 대한 투자도 꾸준한 급신장세를 보여 2015년에는 수출 1,371억 4000만 달러와 수입 902억 4000만 달러에 이르는 급성장을 보였다.
1990년 10월 20일 두 나라 간에 일부 영사 기능을 포함하는 무역대표부 설치를 합의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 교역과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관계 발전에는 1991년까지 엄격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북한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고 있는 이익을 상쇄할 만한 중요한 이익이 한·중 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정치적 역학관계는 두 나라 우호관계 증진 발전에 어려움을 가져왔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계속 두 나라 관계 발전의 주요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78년 말 등소평의 등장에 따른 개방개혁정책을 선언한 중국의 새로운 대외정책과 1980년대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소련에서 러시아로의 변혁은 중·소 관계의 냉전체제 해소로 중국의 외교정책에 폭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된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이 소련 관계에서 중국 관계로 중심축을 옮기게 되자 중국의 미국정책도 차츰 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국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 택한 중국식의 개방과 중국의 독자노선을 미국이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국은 한반도정책에서도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을 탈피하여 점차 다원화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경제적 실용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중국은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드디어 1992년 8월 24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로 나타났고, 중국의 대외개방과 현대화정책 추진으로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경제교류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중 양국은 1992년 8월 수교 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특히 양국은 함께 경제·통상 등 실질 협력관계를 증진시킴으로써, 각 방면에서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그간의 한·중 관계 발전에 따라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긴요한 만큼 4자회담을 거쳐 6자회담 참여 등을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로서도 중국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한·중 양국 관계는 수교이후 경제분야 위주의 실질 우호 협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으나, 1998년도에는 정무분야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의 확대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해였다. 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및 역내 경제·안보 분야 협력을 위해 4자회담은 물론 UN과 APEC 및 ASEM 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왔으며, 특히 1998년 11월김대중() 대통령의 국빈 방중 때에는 ‘21세기의 한·중 협력동반자관계’ 구축을 규정한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형사사법공조조약, 복수사증협정, 청소년 교류 양해각서, 철도분야 교류협력약정 등에 서명함으로써,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포괄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였다.
1998년에는 양국간 정부 고위인사 교류도 활성화되어, 11월김대중 대통령과 강택민(, Jiang Zemin)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및 4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ASEM 정상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주용기(, Zhu Rongji) 중국 국무원 총리의 회담 등 정상급 교류는 물론, 7월 외교통상부장관 공식 방중 등 4차례의 한·중 외무장관회담(4월 ASEM 외무장관회의, 9월 UN 총회, 11월 대통령 국빈 방중)이 개최되었다. 양국 정부 간 관련부처에서도 상호 고위인사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감사원장과 정보통신부장관과 문화관광부장관 등의 방중 및 중국 대외무역합작부 부부장 등의 방한이 있었다. 양국 의회 및 정당 간 교류도 활성화되어, 2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5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대표단, 11월 김용환() 의원 등 자민련 대표단, 12월 양성철 의원 등 새정치국민회의 대표단 등이 방중하였고, 3월 이성인(, Li Chengren)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호금도(, Hu Jintao) 국가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이 방한하였다. 한·중 간의 정책협의회도 빈번히 개최되어, 양국 간의 주요 현안들에 있어서 상호 입장 차이를 좁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해에서의 어업 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한 양국 간 어업회담이 타결되어 한·중 어업협정이 11월 가서명되었고,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 경계획정회담도 열렸다. 그 외에 한·중 외교부 정책기획협의회와 영사국장회의, 문화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특히 중국이 해외여행 자유화 대상지역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조치가 있었다.
1998년도 대중국 교역액은 184억 달러(수출 119억 달러, 수입 65억 달러)로 양국은 상호 각각 3번째(미국, 일본 다음) 교역 대상국이 되었다. 대중국 투자 역시 활발히 진행되어서 실제 투자 기준으로 40억 달러에 달해 중국은 우리의 제2의(미국 다음) 투자대상국이 되었으며, 특히 건설부문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였다.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지역인 홍콩과의 실질관계도 주권반환 전과 다름없이 계속 증진되어, 한국·홍콩 간 1998년도 교역이 98억 달러(우리 무역 흑자 87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인적 교류도 급증하여, 1998년에 35만명(홍콩 방문 12만 7천 명, 한국 방문 22만 4천 명)에 달했다. 이로써 홍콩을 포함한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국가로 급부상하였다.
한·중 간에 자동차, 고화질 텔레비젼, 전자교환기 분야 등 산업분야 협력의 진일보 발전을 위한 일련의 교섭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94년 6월 한·중 환경협력공동위가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황해 오염 방지 및 산성비에 대처하기 위한 환경분야 협력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 체제는 한·중 무역실무회의, 경제공동위원회·환경공동위원회 등 경제협력을 위한 각종 협의체제들이 정기화되면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양국 간의 각종 학술·예술 교류 등 문화 협력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양국 국민 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99년 9월 양국의 저명한 학자가 참가하는 제5차 한·중 미래포럼이 상해에서 개최되어 21세기에 한·중 관계의 바람직한 발전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으며, 11월에는 상해 사회과학원과 우리 외교안보연구원 간 세미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한·중 간 급속한 관계 발전에 힘입어 양국간 인적 교류도 급증하고 있다. 2015년도 한·중 인적 교류는 우리측 기준으로 1,042만 8000명(한국인 방중 444만 4천 명, 중국인 방한 598만 4천 명)이다다.
중국에는 1998년 말 1,500여 개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3만 5천 명 이상의 교민이 장기체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교민 보호 및 중국 진출 기업의 원활한 지원을 위한 총영사관 추가 개설 등 효율적인 공관 지원 체제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신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 양국 지도자의 평상적 상호 방문 혹은 국제 활동에서의 회견 등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켰고 양국 관계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경제적으로 양국의 호혜 협력은 계속 심화되고 서로가 중요한 무역 동반자가 되었다. 문화·교육·과학기술 등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도 날로 활발해지고 있다.
정치관계와 고위층 상호 방문에서 있어, 2000년 10월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중국주용기 총리가 방한하여 회담을 진행하고, 양국은 한·중 관계를 전면적 협력의 새 단계로 높이기로 동의하였다. 2003년 7월 7일부터 10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호금도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은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2008년 2월 25일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국무원 위원 당가선(, Tang Jiaxuan)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당가선은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호금도 국가주석의 전언을 전달하고, 중국 정부가 한국 관계를 중시하며 한·중 관계 발전의 전면적 추진을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8년 5월 12일중국사천성()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한국 정부는 중국에게 5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 구조대를 파견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방중 기간 사천성 재난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위문하였다.
2008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호금도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국무원 총리 온가보(, Wen Jiabao), 전국정협주석 가경림(, Jia Qinglin)과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중 우호협력관계의 진일보 발전 및 공동 관심의 지역과 국제문제에 대해 깊은 의견을 교환하고,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제고시키는 데 의견을 일치하였다.
2008년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회담하고, 김형오 국회의장, 한승수 국무총리와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중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여, 한·중 관계는 양국에게 중요한 관계라고 인식을 같이 하고, 5월 양국이 발표한 「한·중 공동성명」의 기초 위에서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전면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국은 장기적인 공동 발전을 기본 목표로 삼아 상호 협력을 전방위적으로 확대 심화하고, 지역과 국제의 중요문제에서의 협조를 강화하며, 장기적 평화와 공동 번영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 역량을 공헌하기로 선언하였다.
2008년 9월 6일부터 7일까지 한승수 국무총리는 중국을 방문하여 온가보 국무원 총리와 회견하였다. 중국은 한국과 환경보호·통신·금융·물류·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중 자유무역지구 수립 절차를 추진하며, 산업 구조조정의 경험을 공유하여, 양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 중 호혜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9년 4월 3일이명박 대통령은 런던G20 제2차 금융 정상회의 기간에 호금도 국가주석과 회견하였다. 2009년 5월 25일유명환 외무부 장관은 하노이 제9차 아시아·유럽 외무장관 회의 기간에 중국 외교부 장관 양길지(, Yang Jichi)와 회견하였다. 
양국은 한·중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양호한 교류 협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공동으로 노력하여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추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양국은 최근의 정세 하에서 한반도 비핵화 절차를 지속적으로 견고히 추진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하였다.
둘째로, 경제 협력과 무역 관계에 있어,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과학·기술 협력 협정(1992년 10월), 무역 협정(1992년 10월), 경제·무역 및 기술 협력공동위 설립 협정(1992년 10월), 투자 보장 협정(1992년 12월), 해상 운송 협정(1993년 6월), 우편·전기통신 분야 협정(1993년 8월), 환경 협력 협정(1993년 11월), 문화 협정(1994년 4월), 산업협력위 설치 협정(1994년 6월), 한국기상청·중국기상국간 서울·북경간 기상통신회선 설치 협정(1994년 7월), 이중과세 방지 협정(1994년 9월), 항공 협정(1994년 10월), 원자력 협정(1995년 2월), 세관 협력 협정(1995년 4월) 등 양국 간 주요 협정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양국의 경제·무역 협력은 안정적이며 신속히 발전하였다.
중국 해관총서(, General Administration of Customs of the PR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한·중 무역액은 900억 7천 만 달러이고, 42.5%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278억 2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622억 5천 만 달러로, 각각 성장은 38.4%와 44.3%이다. 2005년 양국 무역액은 1,119억 3천 만 달러에 달하고, 동기 대비 성장은 24.3%이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351억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6.2%이며, 수입은 768억 2천 만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3.4%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5년 9월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는 모두 37,532건이고, 실제 사용액은 295억 5천 만 달러이다. 그 중 2004년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62억 5천 만 달러로 39.2% 성장하고 한국 대외 투자 총액의 45.8%를 차지하며, 2005년 1월부터 9월까지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36억 1천 5백 만 달러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이다.
2008년 한·중 무역액은 1,861억 1천 만 달러로 16.2%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739억 5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1,121억 6천 만 달러로, 각각 31%와 8% 성정하였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 겸 수입 공급자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8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 누계는 419억 달러로,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가이고, 한국은 중국의 제4대 외상 직접투자 공급국가이다.
끝으로, 한·중 양국은 과학기술·문화·교육·사법 분야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모두 우호적인 교류와 협력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중국상해·청도()·광주()·심양()·성도()·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부산에 각각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양국은 주요 도시 사이에 65개의 정기 여객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375회 운행하고, 5개의 정기 화물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13회 운행하고 있다. 
한국 인천·부산은 중국천진()·청도·대련()·연대()·위해() 등지와 정기 여객선·화물선 항로를 개설하고 있다. 2015년 한·중 사이 인적 왕래는 연인원 1,042만 8천 명에 달하고, 그 중 한국인의 방중 연인원은 444만 4천 명이고, 중국 국민의 방한 연인원은 598만 4천 명이다. 2015년 말까지 한국의 재중 유학생은 약 80만 명으로 재중 외국 유학생 총수의 40%를 초과하며, 중국의 재한 유학생은 95만 명이다.
한·중 군사 교류는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국은 상대국 주재 대사관에 모두 무관을 파견하고 있다. 1998년 8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웅광해(, Xiong Guangjie)가 한국을 방문하였고, 1999년 8월 한국 국방부 장관 조성태가 중국을 방문하였다. 2000년 1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 장관 지호전(, Chi Haotian)이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2001년 10월 한국 원양순항훈련편대가 중국을 방문하고, 12월 한국 국방부 장관 김동신이 방중하였다. 2002년 1월 한국 공군 참모총장 이억수가 방중하고, 2004년 10월 한국 해군 총참모장 문정일이 방중하였다. 양국은 문학·예술·체육·교육·위생·방송·영화·텔레비젼·신문·출판 등 분야에서도 신속한 교류를 발전시키고 있다. 양국 주요 도시 사이에는 47개 정기 여객기 항로가 있어 매주 830여 회가 운행되고, 10개 정기 화물기 항로가 있어 매주 47회가 운행되고 있다. 
한국 인천·부산·평택은 중국천진·청도·대련·연대·위해·연운항() 등지와 정기 여객선·화물선 항로가 있다. 양국은 모두 104 쌍의 우호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양국의 우호 단체로는 한중우호협회·한중문화협회·21세기한중교류협회·한중경영인협회·한중친선협회와 중한우호협회 등이 있다. 양국 수도의 대사관 설치 이외에 한국은 중국상해·청도·광주·심양·성도·서안(西)·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한국 부산·광주에 각각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한·중 양국은 역사적 연관성, 지정학적 근접성, 정치적 상관성, 문화적 유사성, 경제구조의 보완성 등 요인을 고려할 때, 21세기에도 양국 사이 우호와 협력 그리고 경쟁의 관계는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특히 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도 긴요하다는 공통 인식을 견지하고 있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상이한 사회 체제에 따른 법과 제도 및 국민 간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이 양국 관계의 진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중 양국은 이들 문제를 원만히 극복해 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상호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 안의 우리 문화

우리나라와 중국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특수하고 복잡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시대마다 국경선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가 형성기에서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는 얼마간의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이었으며, 가장 많이 확장될 때는 중국 화북지방까지 넓혀진 적도 있다. 남북국시대인 발해 때도 다소 축소는 되었지만 역시 중국 동북지방은 우리의 영토가 분명한 우리의 옛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우리 민족과 친연관계가 있는 요·금 등 동북방 민족이 우리의 옛 영토를 점령하였고, 명·청이 번갈아 지배하게 되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이 지역에서 사실상 주권이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 왔고 다시 근세의 이민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우리 민족이 차지하고 있으며, 옛 민족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현재 중국 동북부 일대는 한국 민족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므로 가장 밀접하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역대에 걸쳐 공식 사절의 내왕은 물론, 승려·상인의 교류와 함께 수시로 대규모의 이민도 있어서 중국 본토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이나 유물도 상당수에 이르며, 간접적인 자료도 흔한 편이라고 하겠다. 또한, 중국 정사인 『이십오사()』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은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선사()시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어 왔겠지만 민족 교류의 실상은 거의 알 수 없다. 기원전 6000년 경 전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는 직접적인 교류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 쪽에서는 전 극동지역이 비슷한 신석기문화라고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만주 일대나 현재의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지의 신석기문화는 중국황하 유역인 이른바 중원()과는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상호간에 유사점이 많아 어느 정도의 교류관계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신석기문화는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가령 심양()의 신락문화()나 요령성()의 우하량유지, 객좌현 동산취문화() 등의 만주 일대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등과 관련하여 고조선() 문화와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2000년 경에서부터 1000년 경 사이에 시베리아 내지 만주 일대에서부터 우리나라에 걸쳐 동일한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가 아닌 무문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구릉지대에서 농기구와 함께 나오고 있어 농경사회로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묘제는 지석묘와 석관묘인데, 무문토기와 함께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무덤형식이다. 여기에서는 마제석검과 더불어 세형동검()이 반출되고 있는데, 세형동검은 이보다 선행하는 비파형동검(만주식 동검)에서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청동단추·세문경()·동모() 등 특징적인 청동기들이 대량으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어서 바로 한국적인 청동기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단군조선은 만주에서 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우리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선국가() 형태이었다고 생각되므로,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원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 등도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와 어느 정도 교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흑도의 유사성 등에서 이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유적은 몽고·만주·한국·시베리아 그리고 멀리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우리 청동기문화와 가장 깊이 관련되고 있는 지역은 북으로 내몽고의 적봉() 하가점, 동으로 만주의 길림과 송화강 일대, 서로는 요서(西)에 이르고 있다. 특히 길림의 소달구, 내몽고의 하가점, 요령의 조양 12대영자 등 수많은 문화층은 그 좋은 예이며, 요령 객좌현 북동의 청동기문화층도 이 같은 예에 속할 가능성이 짙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북부지역과 함께 기자조선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자조선의 실체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만주와 우리나라 북부지역에 세력을 떨친 지배적인 국가형태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므로, 이 지역의 당시 국가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지역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민족은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예맥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예맥족만 거주했다고는 보지 않으며, 선주민을 비롯해서 여러 민족이 혼재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동기문화의 담당 계층인 지배 민족은 예맥족으로 보는 견해에 일단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예맥족은 농경문화인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자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를 건설하여 고대 문명을 꽃피웠을 것이다. 우리는 만주 일대에 분포해 있는 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이런 사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이 지역의 철기문화도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는데, 그것은 위만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진·한()시대

진·한시대가 되면 우리나라와 중국은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우리의 옛 땅인 만주 일대와 북부지역 일부에서는 중국측의 팽창정책에 따라 심각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한나라는 무제 때부터 흉노를 정벌하여 서역까지 복속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당시 막강하게 세력을 떨치던 위만조선을 패망시켜 이 지역의 일부를 일시 점거하여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로 삼게 된 것이다.
현재 위만조선의 분명한 유적지나 유물은 밝혀져 있지 않고, 한사군도 변천이 심해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중국 문화는 한의 동방 진출에 따라 우리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사군의 낙랑을 비롯한 식민지에는 직접적인 한문화가 남게 되었고, 우리나라 남부에까지 한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한사군을 통하여 우리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되기도 한 사실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삼국()시대 와 위·진·남북조·수·당(·)

이 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이에 본격적인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두 나라에 다 같이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불교문화를 통하여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부여와 삼국, 특히 고구려는 만주 일대에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강자이자 독특한 문화국을 이룩하였으므로, 전 만주 내지 북중국에 걸쳐 이들의 유적·유물이 무수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산둥반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므로, 이 일대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일대에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분명하게 남긴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 문화는 국내성이나 요동성 같은 도시적인 성곽이나 이들 성을 중심으로 한 사원지()와 불교미술들, 그리고 무덤과 무덤벽화 등에 잘 남아 있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수많은 성()들이 있었다. 성은 당시의 지방 중심이자 도시였으며, 방어진지를 겸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으므로 문화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모든 문화는 이러한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수도()는 나라의 중심지로 최대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첫 번째 수도는 졸본()이었으나, 제2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 현재의 집안 통구지역에 해당되는 곳인데 국내성과 환도(, 일명 산성자)산성 등 두 성이 있다. 이 두 성이 약간의 이동은 있었겠지만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국내성에는 역대에 걸친 고구려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으며, 이 지역 일대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고구려의 국력을 상징하던 요동성과 안시성, 백암성()과 신성(), 용성(: 지금의 조양)과 숙군성(宿), 부여성과 남소성 등은 강대한 고구려의 국력과 광활한 국토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성곽 도시들이다. 이 가운데 요동성과 안시성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동성에는 육왕탑()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듯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던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더러 광개토대왕이 직접 친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국방의 요충지로, 수·당의 침략 때 최선의 방어를 한 유명한 국방도시였다. 안시성 역시 당군의 침략 때 선전분투해서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도시였다.
이러한 성곽 도시들은 오늘날 대부분 폐허로 변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는 예도 많으며, 남아 있는 경우도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이러한 고구려 성곽 유적들은 치밀한 발굴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발굴은 우리나라 조사단과 합작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환도산성, 이른바 산성자산성은 현재 7㎞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성곽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광대했던 성곽 규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가지 주위에서 발굴되었는데, 거대한 석축성곽이 나타나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유물이나 기타 도시 유적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곽과 함께 고구려의 무덤(고분)과 비석도 만주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지만, 국내성 일대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국내성 부근에 있는 장군총()과 대왕총()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 동북쪽에 축조된 거대한 무덤인데, 7층 5단씩 쌓은 석축무덤이다.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하여 피라미드형이라 불리는 이 석축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야의 석축제단 등과 함께 석축문화의 장관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석축무덤은 서울 방이동 일대와 충주지방에까지 전파된 독특한 고식()무덤이어서, 우리 문화의 유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 장군총과 인접한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석비는 장군총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석조문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 6m의 우람한 자연석에 새겨진 이 비석에는 1,775자 정도 되는 광개토대왕의 생애에 얽힌 갖가지 사건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는 결코 단순한 개인의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고구려의 발전사이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흥륭사여서, 이 비석은 우리나라 역사 발전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삼국간의 역사는 물론 북중국과 만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바다 건너 일본의 정세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실로 중대한 사료인 셈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여기에 적힌 글자를 변조 또는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일본 중심적인 이해를 하는 데 급급한 편이다. 그들은 몇 자의 단문에 집착하여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중국인들의 이해와도 어느 정도 맞아 그 기세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 학자들의 대응도 활발하지만,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손으로 바른 해석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의 벽화고분들과 기타 고분군들이 집안을 중심으로 수없이 산재해 있다. 집안에 있는 고분만 하더라도 1만 기() 이상이며, 전 만주 일대에 걸쳐서는 10만 기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 일대의 벽화고분만 하더라도 모두 19기가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장천()1호무덤, ② 장천2호무덤, ③ 모두루무덤[], ④ 환문무덤[], ⑤ 무용무덤[], ⑥ 씨름무덤[], ⑦ 산연화무덤[], ⑧ 오회분()4호무덤, ⑨ 오회분5호무덤, ⑩ 사신무덤[], ⑪ 삼실무덤[], ⑫ 통구12호무덤, ⑬ 우산하()41호무덤, ⑭ 산성하()332호무덤, ⑮ 산성하983호무덤, 귀갑무덤[], 미인무덤[], 만보정()1368호무덤, 마선구()1호무덤 등이다.
기존의 고분벽화무덤으로는 귀갑무덤이나 씨름무덤, 무용무덤이나 사신무덤 같은 것이 유명하다. 귀갑무덤은 단실형의 무덤으로 주인공의 실내생활도가 왼쪽 벽에 그려진 일종의 인물 풍속도 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무덤은 귀갑무늬가 특징 있게 표현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산연화무덤이 있는데, 연꽃무늬가 산화()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장식무늬가 그려진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무덤은 만포진 대안에 있는 환문무덤인데, 각 벽면에 20여 개의 동일한 둥근 무늬가 그려진 것이다.
씨름무덤은 우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무용무덤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현실()과 전실()로 구성된 쌍실무덤인데, 현실 정벽(북쪽)에는 주인공과 2인의 부인이 있고, 주위로 시종들이 시립하고 있는 생활풍속도가 있다. 동벽에 있는 풍속도가 이 무덤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새가 앉아 있는 성스러운 나무, 왼쪽에 부엌, 오른쪽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재미있는 풍속도이다.
무용무덤은 외형은 씨름무덤과 흡사하지만, 내부는 현실·통로·전실·연도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벽화는 전실에서부터 현실까지 전면적으로 그려진 것인데, 정벽(북동쪽), 오른쪽 벽(북서쪽), 왼쪽 벽(남동쪽)에 걸쳐 연회장면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장막이 드리워진 방에 주인공과 부인이 승려에게 공양하고 있으며, 각 상마다 음식물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소달구지를 탄 2인의 승려와 사냥 장면, 왼쪽 벽에는 기마인물상과 춤추는 무희들이, 천장에는 일월성신들이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
사신무덤(통구사신총, )은 네모 부채꼴의 단실 무덤형식인데 주벽에 사신도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배경은 비운문()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외에 새로 발굴·조사된 벽화무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천1호무덤이다. 무덤은 집안 동북 45㎞에 위치한 분지에 있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면해 있고,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는 강가 작은 구릉 상에 120여 기의 적석무덤과 봉토무덤군이 있는데, 구릉 위의 제일 높은 곳에 가장 거대한 봉분이 바로 장천1호무덤이다. 벽화는 전실·현실의 4벽·연도·천장·석문 정면·관 위에까지 묘사되고 있어서 현란한 채색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현실 남벽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와 가무공연 장면이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앉은 불상과 부처에게 예배하는 주인공 부부, 두 권속, 그리고 비천과 연화생()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불교의 실상과 불상의 수용 및 특징을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확실한 예로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들은 수많은 고분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들 전체 무덤도 크게 주목되고 있으며, 이들 무덤들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 옛터로 알려진 환인()지방에서도 현재 750여 기의 적석무덤들이 발견되었고, 고력자촌 적석대묘 등 44기 이상이 발굴되었는데, 유물은 철제품과 은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수도 국내지방에서도 1만 기 이상의 고분군이 조사되었는데,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은 우산하고분군·산성하고분군·만보정고분군·칠성산고분군·마선구고분군·하해방고분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발굴된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산하68호분에서는 향토(정, )·시루(증, )·솥(부, )·대야(세, ) 등 4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중국 서진시대의 것과 연관이 있는 세련된 작품들이다. 우산하3319호무덤에서 발견된 ‘(정사)’ 명() 수막새 기와와 인물 상반신 화상석 등도 주목되며, 우산하1080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장신구들과 당시의 문화상을 연관시켜 보면 흥미를 끌게 된다. 산성하159호와 152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혁대금구()도 무늬와 형태에서 주목된다.
만보정1078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마구, 특히 말안장 4점은 신라나 가야 지방 말안장과 연관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칠성산1196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과 청동기들도 고구려 문화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며, 삼국과 중국의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국내성과 요동성 등지에는 많은 절터들이 남아 있겠지만, 현재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백제도 산동반도() 일대에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백제 문화의 흔적이 중국 땅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은 앞으로 치밀한 연구와 발굴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사절과 승려를 통하여 전파된 백제 문화의 자취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가 삼국에서 제일 늦었지만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중엽부터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신라 때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절이 중국에 건너갔고, 승려들도 수없이 내왕하였다. 원광()과 자장() 등은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이 수도했던 여러 절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중국 전역에 신라 문화의 발자취가 보다 짙어진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그들의 문화를 이역만리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천룡산 석굴( )이 크게 주목을 끈다. 이 석굴은 백제의 명장이었던 흑치상지()의 딸 흑치씨와 고구려 유장 순() 부부에 의해 조성되었던 것인데, 우리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우리나라의 조형 의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 불상들은 중국 당나라 최고의 사실조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의 유장 고선지()도 고구려 문화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남겼을 것이며, 고구려적인 기질을 은연중에 서역과 인도에까지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중원과 일부 중국 일대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발자취는 앞으로 좀 더 검토·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때는 신라 문화가 중국 문화에 더욱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산동 적산 일대와 장강 일대에 신라의 교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산의 신라방은 대표적인 신라 거류민들의 거류지였고, 여기에 있던 법화사()는 신라 문화의 중국 쪽 전진기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에서 행해지던 의식과 생활습관, 즉 사찰의 의식주생활은 물론 예배대상인 불상과 불화까지도 신라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이 밝혀져 있지만, 거류지 신라방의 문화 또한 신라 문화를 그대로 이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도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룡산 석굴 조성과 비슷한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석굴사원인 용문석굴 가운데 ‘신라석굴’이라는 석굴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의 승려가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실 신라 승려들은 중국 전역에 있는 유명·무명의 각 사찰에 머물거나 사찰을 조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은 원측법사()가 수도 장안에 있던 서명사(西)의 개창 조사가 된 이후 많은 유학승들이 신라의 문화를 중국의 사찰에 심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들의 바랑 속에는 신라의 생활용구·책·불상 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물은 신라 승려들의 정신문화까지도 중국 속에 전파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안의 흥교사에 안치된 원측법사탑도 이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9세기 중엽 회창폐불사건()으로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당나라 유학승들은 훨씬 축소되고 만다. 신라의 공식 사절과 그들이 가져간 예물들이 중국의 당 문화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이들 유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 그 간접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당건릉()에 배치된 신라사절상(使)은 당에서 만든 것이지만 신라인의 발자취이므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릉의 배총 장회태자 묘에도 신라 사절상으로 보이는 사절상이 있으므로, 신라 사절들의 대단한 활약상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1년 내지 수년 이상 중국에 체재하면서 당 조정 내외에 걸쳐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여 일종의 주중 외교사절 격이었으므로 그들이 가져간 교류문물, 가령 정교한 만불산(), 순금불상 등의 교역에 의해 신라 문화는 어느덧 당에 상당히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만주 일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알려 주는 것은 수도이다. 발해의 수도는 네 곳이 있다. 첫 번째 수도는 길림성 돈화()오동성이고, 두 번째가 중경 현덕부(), 네 번째가 동경 용원부()이며, 세 번째·다섯 번째가 상경 용천부()이다.
이 상경은 3대 문왕()이 755년에 옮긴 뒤 몇 년간 동경에 이도한 것 외에 계속 수도로 군림했기 때문에 발해 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이 도시는 중국 당의 장안성과 맞먹는 굉걸하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한다. 내성 안에는 궁성(주위 길이 2.5㎞)이 있는데, 금란전 등 5기의 궁전지가 있고 1기의 문루가 남아 있다. 
내성에는 관청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담장(45㎞)과 금원()만 남아 있다. 외성은 시민들의 거주지였으므로 주택·가로·사원들이 있었는데, 현재 성곽과 가로, 절터, 불상과 석등들이 남아 있다. 성곽은 둘레가 17㎞ 이상이며, 가로는 5줄의 대로(40m)가 바둑판처럼 나 있고, 절터도 10곳이나 남아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석불상과 석등이 융성했던 발해 불교문화의 자취를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석불상은 1.8m 높이의 좌불상으로 여러 차례 파손되었으나 현재는 보수되어 원래의 위치에 있으며, 석등은 6m 높이의 거대한 것인데 상·중·하대와 화사석까지 완전한 웅장한 석등이다. 또한 금동불·동불·철불·도자불과 소조불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4겹의 사리함도 1975년에 출토되어 발해 문화의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밖에 많은 성곽 유지들이 있는데, 돈화의 고성지(오동성·석호산성·흑성토성·마권자산성·성산자산성·남대자산성) 9곳이 조사되어 많은 유물과 건물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성곽들도 남아 있다. 발해의 고분들 또한 많은 양이 산재해 있는데, 이 중 돈화육정산()의 100여 기 가운데 발굴된 정혜공주무덤()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 무덤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단실묘들이 많은데, 정혜공주무덤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다. 집안의 고구려 모두루무덤과 비슷한 형식이어서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출토된 묘비는 발해의 성립과 성격 등 발해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예이며, 석사자등은 발해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토기·기와·옥류 등도 초기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무덤벽화도 발해 문화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송·원()시대와 고려시대

고려와 송·원과의 교류 역시 대단히 활발하였다. 고려에서도 송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송에서도 고려의 문물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송에서 불교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해 간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원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였다. 고려의 사경승들을 대거 유입해 갔으며, 각종 문물들도 가져갔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북경에 있는 금자사경()이다.

명·청()시대와 조선시대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건국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명의 문화도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조선의 문화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들은 연간 몇 차례씩 명에 파견되는데, 황엄이 가져간 사리와 법화사불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 조선의 문물이 대량으로 넘어갔다. 또 조선의 문인 사대부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긴밀하게 교류했으므로 조선의 문화유산이 중국에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청의 문화는 강희·건륭의 문화융성기 이후 북학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이후 고증학파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문화도 척화파들의 강제 체류 이후 은연중에 심어졌고, 사신외교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산둥에 있는 조선 학자의 비석의 존재 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인(한민족) 이주와 교포사회

1999년 6월까지 중국 대륙에는 204만의 교포들이 길림·흑룡강·요령 등지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전체 교포의 60% 이상이 길림성에 모여 있었으며, 내몽고 자치구에도 소수의 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1월에는 192만6017명의 교포들이 있었으며, 수교에 따른 체류자도 늘어나 당시(1995.1.) 1만4381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교포들의 초기 이주는 대부분 식량과 인삼 채취 및 비옥한 농토를 찾기 위한 것으로,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7년 제2차 한일협약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의병, 군인들과 관리, 교육자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에 대거 투자하고, 일본 농민을 한국으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남한 각지의 소농민들이 농토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 농토를 상실한 농민들이 보다 저렴한 간도·흑룡강 지역 등으로 농토를 찾아 이주하여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한 간도 한인의 보호정책과 대륙정책의 일부로 나타난 계획적인 일본의 한인 이주정책은 한국인의 만주 이주활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한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고, 중국 지주에 예속된 소작농들이었으며 일부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의지가 절실하였고, 이에 따라 만주의 한인사회에서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컸으며, 특히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다.
중국 내의 한인들은 그 이주 배경과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에 특별한 구실을 했던 배경에서 초기 1세대의 경우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대단히 강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에 대한 이심력과 저항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중국 내 다른 토착소수민족과 다른 점이었다. 이들 초기 세대가 지나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자손들인 2·3세대의 한인들은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약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에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구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제1세대와는 달리 이 젊은 세대들은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이지만 한국을 조국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 한인들은 중국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생활도 비교적 발달되어 있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는 한국 고유의 전통·언어·관습·문화 등을 잘 유지, 발전시켜 가고 있으며, 민족적 자부심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특히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 교포가 80만 명이나 집단 거주하고 있다. 또 연변에는 1,900명의 학생이 있는 연변대학 등 한인사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고등교육기관들이 있으며, 특히 연변대학의 경우 재학생의 70%와 교직원의 80%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학 연구 현황

타이완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볼 때 그 대상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나, 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분야에서 성과가 있다. 한편 중국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한국학은 그 범위와 수준에서 미국·일본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중국 사회에서 혁명적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하였고, 또 문화대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좌경노선으로 객관적인 학문 연구 풍토와 기반이 취약했던 데다가, 특히 중국과 북한은 상호 혈맹적인 혁명적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한국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웠다.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나타나기 시작한 1979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한국에 대한 부분적 연구도 북한과의 혁명적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범위와 방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 특히 남한에 대한 연구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남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적 측면에 대한 연구가 초점이 되었다.
1979년 이후에 나타난 중국에서의 개혁실용주의노선은 정치와 학문연구의 엄격한 분리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 방향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현대화 노선은 남한 경제발전 모델 등 한국 및 한국학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에 중국에서는 외교부 부설 국제문제연구소의 아세아태평양연구실, 국무원 산하 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동아연구실, 상해국제문제연구소의 일본연구실 및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등 정책·학술 연구기관과 북경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연구소, 길림대학의 조선연구실 등 일부 대학의 부설 연구소에서는 한국의 경제를 비롯한 정치외교·국제정세·남북한관계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북경대학에는 동방어문학과 내에 조선어문조()가 있어 한국의 언어·문화·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연변대학 내에는 남북한의 경제·철학·역사·어학·문학·교육을 연구하는 조선연구소를 비롯하여, 민족연구소·고적연구소 등 한민족의 특수성을 연구하는 여러 학술연구소가 있다. 1992년부터 1999년 말 상해 복단대학에 한국학강좌 운영지원사업을 우리나라에서 계속 벌여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대학, 북경어언문화대학, 산동대학, 연변대학, 요녕대학 등에 한국학 관력 객원교수제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학 관련 자료들이 일정량 소장되어 있는 복단대, 북경대, 북경어언문화대 등에 관련 자료를 체계화 하는 데 드는 제반 경비를 일정 부분 지원하고 있다. 이어 요녕대·북경대·북경어언문화대·복단대·인민대·중앙민족대·연변대·항주대·산동대·길림성사회과학원·상해사회과학원·타이완한국연구회 등에서 수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을 우리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편 한글로 된 『연변일보』를 비롯하여 『천지』·『아리랑』·『문학예술연구』·『은하수』·『장춘문예』·『노다지』·『진달래』 등 한글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다.
1980년대 중국 내에서 중국조선사연구회·중국조선언어연구회·중국조선문학연구회·중국남조선경제연구회·중국조선정치경제연구회 등 다방면의 한국학 관계 학술단체들이 설치된 바 있는데,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1990년대 국교 이후 양국이 우호증진에 따라 1999년 이래 북경대·북경어언문화대 등에 한국국제교류재단 주관 하에 한국학 연구와 관련된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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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China, 中国]. 1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대한민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西]·산시[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타이완 등 23개 성()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등 5개 자치구(),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등 4개 직할시(), 마카오·홍콩 등 2개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총 인구가 10억 명이 넘어. 세계 인구 5명 중 한 명이 중국 사람인 셈이지. 게다가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졌어. 중국 문화의 영향도 커. 한자, 유교정치 제도, 법률 등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했잖아.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는 국교를 맺지 않았지만, 1992년 수교를 맺음으로써 중국을 더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북한과 경계를 맞닿고 있는 중국으로 여행을 갈수있게 되었다.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중국 국기
중국 국기
위치아시아 동부
경위도동경 105° 00', 북위 35° 00'
면적(㎢)9596961
해안선(km)14500
시간대UTC+8
수도베이징
종족구성한족(91.5%) 기타(8.5%)
공용어중국어
종교도교, 불교(35%), 기독교(3.5%), 이슬람교(1.8%) (2014)
건국일1949년 10월 1일
국가원수/국무총리시진핑() (2013.3 취임)
국제전화+86
정체인민공화제
통화위안(Y)
인터넷도메인.cn
홈페이지www.china.org.cn
ISO 3166-1156
ISO 3166-1 Alpha-3CHN
인구(명)1,349,585,838(2012년)
평균수명(세)74.84(2012년)
1인당 명목 GDP($)8,400(2012년)
수출규모(억$)18,970(2012년)
수입규모(억$)16,640(2012년)
인구밀도(명/㎢)139.90(2012년)


간단 여행지"
① 만리장성 ② 자금성 ③ 톈안먼 광장 ④ 취푸 ⑤ 난징 ⑥ 룽먼 석굴 ⑦ 윈강 석굴 ⑧ 진시황릉 ⑨ 홍콩 ⑩ 마카오.

자금성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야. 세계 최대의 규모로,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은 고궁 박물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어. 9999개의 방이 있을 정도의 큰 규모이니, 크기에 놀라지 안을수가없다.

톈안먼 광장
자금성의 남문 앞 광장이야. 베이징의 중심이며 현대 중국의 상징이기도 해. 1989년 톈안먼 사태·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지금도 여러 국가 행사를 많이 한다.

만리장성
총 길이가 2,700km로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는데, 현재의 돌로 쌓은 성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성된 거야.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 10년 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취푸
공자의 고향이야.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큰 사당인 공자묘, 공자 일가 역대 자손들의 무덤인 공자림이 있고.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윈강 석굴
중국에서 가장 큰 석굴 사원이야. 위·진·남북조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어. 그리스인을 닮은 간다라 불상과 비슷하다

진시황릉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의 묘지야. 무덤과 함께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병마용갱이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지. 병마용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난징
강남의 중심지야. 명태조 주원장이 명을 세운 곳이있으며, 태평천국의 수도, 아편 전쟁 후 맺은 난징 조약, 신해혁명 후 중화 민국이 세워진 곳도 바로 이 곳이다.

룽먼 석굴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당에 걸쳐 만들어진 2300여 개의 석굴, 10만 점이 넘는 불상, 40여 개의 탑이 있어.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홍콩
마르코 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찬란한 도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 도시.

마카오
휴양지, 카지노로 유명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의 북청사변()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이 신해혁명()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는 북벌()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치체제와 국가기구
중국의 정치체제는 크게 중국공산당, 국가기관, 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세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은 1921년 상하이의 한 교외에서 창당되었다. 창당 시기 당원은 57명에 불과했지만,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국민당과 맞서는 세력으로 급성장하였고,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일당독재의 집권당이 되었다. 1977년 약 3,500만 명이었던 중국공산당 당원은 1997년에는 약 6,900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개혁개방 이래 두 배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중국공산당 당원은 8,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참고] 중국공산당 직위
국가주석 : 중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이다.
공산당 총서기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며, 중앙정치국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중앙서기처의 활동을 주재한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국무원 총리 :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이다. 국가주석의 지명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동의로 선출된다.
중국공산당 기구표
중국공산당 기구표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전국대표대회는 5년에 1회 개최되며 중앙위원회가 소집한다. 전국대표대회의 정책 결정은 5년간 중국을 지도하는 주요 지침이 된다. 현재 2,000여 명의 전국대표가 있으며, 2002년에 제16차, 2007년에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 오는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후진타오() 시대를 종료하고 시진핑() 체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전국대표대회 폐회 기간 전국대표대회의 결의를 집행하고 전체적인 당의 업무를 견인하며 대외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대표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결정한 회의로 잘 알려진 제11기 ‘3중전회()’는 바로 ‘제3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약칭이다. 당 중앙위원회의 장이 총서기이며, 총서기는 중앙정치국 회의와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서기처의 업무를 주재한다.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은 중앙위원회 폐회 기간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하며 전국의 모든 정치 업무를 지도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중앙조직기구와 최고 지도 기구의 중심이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 정치국과 더불어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중앙서기처
중국공산당의 일상 업무를 책임지나 정책 결정 기구는 아니며 사무기구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하에 당헌과 당내 법규를 수호하고 당풍확립, 당 노선, 방침, 정책 및 결의의 집행 상황을 검사 처리하며 당원의 해당, 반당행위 및 당기 위반 등을 조사한다.
중앙군사위원회
당이 군을 지배한다는 원칙 하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을 가지 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다.
국가기관
중국의 국가기관은 입법부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원, 사법부에 해당하는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 기구표
국가 기구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인민해방군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 및 형사, 민사, 국가기관과 각종 기본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최고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국가주석, 부주석,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 검찰원장을 선출 또는 파면할 수 있는 직권을 가지고 있다. 5년에 1회 개최되며 1년에 한 번씩 연례회의가 열린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전인대 폐회 기간 동안 전인대를 대표하여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 법률의 해석 및 시행 감독과 법률 개정 등이 주된 업무이다. 위원장은 전인대 회의를 주재하고 상무위 회의를 소집한다.
국무원
중국의 최고 행정 기관인 중앙 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가 제정한 헌법, 법률 결의를 집행할 의무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하여 부총리와 국무위원, 각 부 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인민법원
중국의 최고 사법(재판)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법원이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최고인민검찰원
중국의 최고 사법(검찰)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검찰원이 체포의 승인, 공소제기와 유지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최고인민법원과 마찬가지로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인민정치협상회의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1949 년 9월 중국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통일전선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초기 임시 헌법에 해당하는 「정협공동강령()」을 제정하는 등 의회 역할을 대행하였다. 제1차 전인대 개최 이전까지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합법성을 상징하는 최고 권력기구였으나 전인대 출범 이후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정책 및 법령을 선전하거나 대외 업무를 협의하는 외곽 조직으로 바뀌었다. 최근 중국의 대외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정협의 대외 활동도 강화되고 있다.

정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는 공산당내에서의 노선을 통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간의 갈등의 중심적인 축을 이루어왔다. 정치갈등이나 권력갈등의 양상은 주로 주요한 국가노선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전국인민대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최고 3,500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 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성()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등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29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으며, 총리 1명, 부총리 4명, 국무위원 5명, 비서장 1명, 각처 부장 23명(중국인민은행장 포함)을 둔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2005년 현재 국가주석은 후진타오()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윈자바오()이며 이들은 개혁개방세력을 대표한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홍()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전()이라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에 의한 건국후 중국의 현대사는 전자를 중시하는 변혁기와 후자를 중시하는 공고기가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6년 다시 등장한 덩샤오핑은 개혁 및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홍과 전의 갈등은 내재되어 있었다. 즉 개혁 및 개방 정책에 의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놓고 홍과 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게 되면서 의견의 차이는 1989년 6월의 톈안먼[(천안문)]사태로 나타났으며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는 보수파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이 결합된 법륜공이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강한 탄압을 받고 있다.

정치제도

중국의 국가조직은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국가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정점으로 행정ㆍ사법ㆍ검찰기구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연계되어 중앙의 통일적 관할 아래 있다. 전인대와 병렬적 위치에 전인대 상무위원회, 국가주석, 국가중앙군사위원회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원,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이 예속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헌법상 국회 기능을 하는 전인대는 명목상으로만 최고 국가권력기관이며 정당인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공산당은 국가의 중요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기구를 장악하고 중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공산당이 내린다. 따라서 전인대와 이에 속해 있는 국무원(우리나라의 행정부)은 공산당의 결정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공산당의 하급기관에 불과하다.


공산당의 주요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총서기와 상무위원회가 정책을 제안하고 이것이 중앙위원회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비준을 받으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된다. 일단 이 과정을 거쳐 채택된 정책에 대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모든 당원은 일단 지지를 하는 것이 관례이다.

중국 정치와 권력의 구조는 당(黨)과 정(政)으로 분리돼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당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1978년 개혁ㆍ개방 이래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부터는 촌(村)ㆍ진(鎭) 등 최소 행정구역 단위의 대표자들을 당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중국에는 중국공산당 이외에 8개의 정당(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대만민주자치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구삼학사)이 있으나 8개의 당파는 독립정당으로 보기는 어렵고 중국공산당의 협조기관 형식으로 존재한다. 당 중앙에는 서기국만 두고 주석과 부주석을 폐지함으로써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다.

공산당을 제외한 8개 정당•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 국민당과 유관인사로 구성(1948년 1월 성립)
• 중국민주동맹 : 지식층(1941년 10월 성립)
• 대만민주자치동맹 : 대륙에 거주하는 대만호적의 인사(1947년 11월 성립)
• 중국민주건국회 : 경제계인사와 유관 전문학자(1945년 12월 성립)
• 중국민주촉진회 : 교육, 문화, 과학, 출판 업무에 종사하는 지식층(1945년 12월)
• 중국농공민주당 : 위생, 의약, 과학기술 분야의 인사(1930년 성립)
• 중국치공당 : 화교관련 인 (1925년 성립)
• 구삼학사 : 과학기술, 문화, 교육, 의약 방면의 중산층 인사(1944년 12월 성립)

이처럼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정당의 목적인 정권획득의 의미가 사라졌고 공산당에 의한 독재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보니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중국의 선거법에 의하면 국가주석과 전인대의 의원을 선출하는 데는 제도와 방식이 법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국가주석과 전인대 의원을 뽑는 데는 중국의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으로 인해 간접선거의 형태를 띤다.


중국이 우주개발, 특히 달 탐험을 강력히 추진하는 목적은 국가 위상을 높이고 국민을 단결시키며 항공 기술, 재료공학, 생명공학, 전자공학 등 최첨단 과학 기술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미래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다. 중국의 달 탐험 계획은 4단계로 나뉘어 있다.

제1단계는 지난 2004년에 시작되었는데, 1,750억 원을 투입해 금년 중에 무인 달 탐사선 창어(Chang’e) 1호를 달 궤도에 진입시켜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제2단계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이며, 로봇과 로버를 달에 착륙시켜 재료를 채취하고 분석해서 자료를 받는 것이다.

제3단계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인데, 달에 무인 우주선을 착륙시킨 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가져오는 것이다.

제4단계는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진행되며,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내는 것이다.

지리와 자연 환경.

중국은 아시아의 동부에 위치하며 태평양 서안에 접하고 있는 육지면적 약 960만 ㎢로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의 영토를 보유한 나라이다. 중국의 강역은 동서로 60여 도(), 5개 시간 구(), 약 5,200㎞, 남북으로 50여 도(), 약 5,500㎞에 이르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보하이(, 발해), 황해(), 동해()와 남해()에 접해 있고 도서(屿)는 약 5,000여 개로 절대 다수가 창강() 하구 이남의 해역()에 위치한다. 가장 큰 섬은 타이완이며 다음으로 하이난도() 및 충밍도(, 숭명도)의 순으로 이어지며 가장 큰 군도()는 주산군도()이다. 반도는 랴오둥반도()가 가장 크며 다음으로 산둥반도()로 이어지고 대륙의 해안선 총연장은 18,000여 ㎞에 달한다.

지형은 산지, 고원, 구릉, 분지, 평원 및 사막 등 각기 다른 유형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세는 서고동저(西)로 크게 3단계의 계단 형태로 이루어져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서남부에 위치한 칭장고원()은 가장 지대가 높은 제1계단에 해당하며, 쿤룬산맥(), 치롄산맥(, 기련산맥), 횡돤산맥(, 횡단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쪽과 북쪽으로 낮아지고 있는 일련의 고원과 분지가 제2계단, 다싱안령(, 대흥안령), 타이항산(, 태행산), 무산(), 우링산(, 무릉산), 쉐펑산(, 설봉산)으로 이어지는 선상의 동쪽에 있는 평원이 세 번째 계단에 해당된다.

중국의 산지는 광활하며 산지, 고원, 분지가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여 평원이 적고 고도의 차이가 심하다. 3대 평원은 동베이평원(, 동북평원), 화베이평원(, 화베이평원) 및 창강중하류평원()으로 이 중 둥베이평원()이 가장 넓은 평원이다. 사막지역은 서부지구에 분포되어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의 면적이 가장 넓으며 또한 세계 최대의 유동사막()이다. 중국의 지형에 따른 분포는 산지 33%, 고원, 26%, 분지, 19%, 평원, 12%, 구릉 10%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정부는 베이징, 톈진(), 허베이성(), 산시(西), 네이멍구자치구()를 화베이(, 화북), 헤이룽장, 지린, 랴오둥을 둥베이(, 동북), 장쑤성(), 산둥성(), 저장, 안후이, 장시, 푸젠, 상하이()를 화둥(, 화동), 허난, 후베이, 후난, 광둥, 홍콩, 광시좡족자치구(广西)를 중난(, 중남), 쓰촨성(), 충칭, 구이저우, 윈난을 시남(西, 서남), 산시(西), 산시성(西, 섬서성), 간쑤, 칭하이, 닝샤후이족자치구()및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시베이(西, 서북)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화베이( : ), 둥베이( : ), 네이몽(), 화둥( : ), 화중( : ), 화난( : ), 시난(西 : ), 칭장(), 시베이(西 : ), 신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전통적인 구분법으로 중국본부()와 만주(), 신장(), 몽고(), 청강장() 등의 구역으로 구분하기도 하는 데 이러한 구분법은 인문지리와 민족분포에 따른 분류로 최근에는 쓰이지 않고 있다. 또한 친령(, 진령)~화이하(, 회하)를 있는 선이 남방과 북방의 지리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나 사람들의 관습적으로 창강()을 남방과 북방의 분계선으로 간주해 왔다.

2. 산지 지형

중국은 산지, 고원 및 구릉이 육지면적의 약 67%를 차지하며 분지와 평원이 육지면적의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 산지와 고원은 서부지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발 500m 이하의 지역은 단지 전 국토의 16%에 불과하고 해발 1,000m 이상이 65%이며 전 세계 8,000m 이상 12개 산봉우리 중 중국 내에 7개가 위치하고 있다.

가. 산맥(山脉)

중국의 산맥은 주향()에 따라 동서주향, 남북주향, 북동주향의 산맥으로 구분되며 대체적으로 허란산맥(, 허란산맥)~류판산맥(, 육반산맥)~용문산맥~아이라오산(, 애뢰산맥)을 경계로 동쪽에는 북동주향이 많이 분포하며 서쪽에는 북서주향이 많다.

※ 강디쓰산맥카라코람산맥쿤룬산맥치롄산맥뤄샤오산맥난링산맥탕구라산맥다싱안령우이산맥우링산맥셴샤령쉐펑산맥샤오싱안령알타이산맥옌산산맥녠칭탕구라산, 류판산맥, 인산산맥친령톈산산맥타이항산맥, 허란산맥, 헝돤산맥히말라야 산맥

지역별 주요 산과 산맥

지역별 주요 산과 산맥
지역주요 산맥
서북(西)
알타이산(, 아이태산), 톈산(, 천산), 아얼진산(, 아이금산), 치롄산(, 기련산), 수러난산(, 소륵남산), 쿤룬산(, 곤륜산), 알카산(, 아이객산), 커커시리산(西, 가가서리산), 바옌카라산(, 파언객랍산), 아니마칭산(, 아니마경산), 탕구라산(, 당고랍산), 강디쓰산(, 강저사산), 녠칭탕구라산(, 염청당고랍산), 카라코람산(, 객라곤륜산), 히말라야 산(, 희마랍아산), 친령(, 진령), 류판산(, 육반산), 허란산(, 하란산)
서남(西)
헝돤산맥( : ), 공가산(, 공알산), 우량산(, 무량산), 아이라오산(, 애뢰산), 우롄봉(, 오련봉), 우멍산(, 오몽산), 먀오령(, 묘령), 다뤄산(, 대루산)
동북()
다싱안령(, 대흥안령), 샤오싱안령(, 소흥안령), 창바이산(, 장백산), 장광차이령(广, 장광재령) 완다산(, 완달산), 지린하다령(, 길림합달령), 룽강산(, 용강산), 첸산(, 천산)
화북()
옌산(, 연산), 인산(, 음산), 타이항산(, 태행산), 우타이산(, 오대산), 뤼량산(, 여량산), 왕우산(, 왕옥산), 중타오산(, 중조산), 타이산(, 태산)
화중()
다볘산(, 대별산), 푸뉴산(, 복우산), 샤오산(, 효산), 슝얼산(, 웅이산), 퉁바이산(, 동백산), 우당산(, 무당산), 무푸산(, 막부산), 징산(, 형산), 우산(, 무산), 우링산(, 무릉산), 쉐펑산(, 설봉산), 주이산(, 구이산)
화동()
윈타이산(, 운대산), 톈무산(, 천목산), 옌당산(, 안탕산), 콰이지산(, 회계산), 쿼창산(, 괄창산), 셴샤령(, 선하령), 둥관산(, 동관산), 우이산(, 무이산), 다이원산(, 대운산), 황산(), 주화산(, 구화산), 뤄샤오산(, 나소산), 화이위산(怀, 회옥산), 위산(, 우산), 위산(, 옥산)
화남()
남령남령( : ), 야오산(, 요산), 구주롄산(, 구련산), 스완다산(, 십만대산), 원카이다산(, 운개대산), 류자오산(, 육조산), 우즈산(, 오지산)

나. 주요 산

다. 고원(高原)

중국의 4대 고원은 칭장고원(), 네이멍구고원(), 황토고원() 및 윈구이고원(, 운귀고원)으로 칭장고원()이 가장 높다.

※네이멍구고원, 윈구이고원, 칭장고원, 황토고원

중국 고원() 현황

중국 고원() 현황
대고원구소속 고원
칭장고원()
장베이고원(, 장북고원),
칭남고원(, 청남고원),
촨시고원(西, 천서고원),
장둥고원(, 장동고원)
네이멍구고원()
후룬베이얼고원(, 호륜패이고원),
시린궈러고원(, 석림곽륵고원),
우란차부고원(, 오란찰포고원),
어얼둬쓰고원(, 악이다사고원),
아라산고원(, 아랍선고원),
바옌나오얼고원(, 파언뇨이고원)
황토고원()
산베이고원(, 섬북고원),
진베이고원(, 진북고원),
진난고원(, 진남고원),
닝난고원(, 영남고원),
간둥고원(, 감동고원)
윈구이고원()
뎬둥고원(, 전동고원),
뎬베이고원(, 전북고원),
뎬시고원(西, 전서고원),
뎬중고원(, 전중고원),
첸베이고원(, 검북고원),
첸중고원(, 검중고원),
첸시고원(西, 검서고원)

라. 분지

중국의 분지는 대부분 서북 내륙 건조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4대 분지 중 쓰촨분지()를 제외한 차이다무분지(, 시달목분지), 타림분지(), 준가얼분지()가 이곳에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시달목분지는 중국 최대의 분지이다.

※쓰촨분지, 차이다무분지, 준가얼분지, 타림분지, 투루판분지

3. 평원 지형

평원은 중국의 3계단 지형 중에서 세 번째 계단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하천, 호수 및 바다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낮고 평탄하며 하천망이 조밀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주요 식량생산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3대 평원으로 둥베이평원(), 화베이평원(), 창강중하류평원()이 있으며 이외에도 동남연해지구에는 삼각주평원과 연해평원이 분포한다.

※ 장한평원관중평원, 둥베이평원, 퉁팅호평원싼장평원쑹넌평원양호평원창강삼각주, 창강중하류평원, 주강삼각주허타오평원하이하평원, 화베이평원

중국 평원() 현황

중국 평원() 현황
대평원구소속 평원
둥베이평원()
싼장평원(), 쑹넌평원(, 송눈평원), 랴오허평원()
화베이평원()
하이허평원(), 황하삼각주(), 자오라이평원(), 화이하평원()
창강중하류평원()
양호평원(), 포양평원(), 완중평원(), 창강삼각주(,) , 타이호평원(), 항자호평원(), 퉁팅호평원(), 장한평원(), 간푸평원(), 리양평원()
동남연해제평원(沿)
닝샤오평원(), 원황평원(), 푸저우분지(), 싱화평원(), 취안저우평원(), 장저우평원(), 차오산평원(), 주강삼각주(), 하이장평원(), 난류장삼각주()
황하중상류평원()
황수이곡지(), 인촨평원(), 허타오평원(, 하투평원), 투모촨평원(), 펀허곡지(), 윈청분지(), 웨이허평원()
기타()
청두평원(), 한수이곡지(), 이리곡지(), 허시주랑(西)

4. 하천과 호소()

가. 주요 하천

중국은 영토가 넓고 다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하천과 호수, 거대한 빙하, 적설로 인한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관개, 수상운수, 발전, 용수공급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중 하천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외류하()와 내륙호수에 유입되는 내류하()로 구분되며 외류하()는 창강(), 황하(), 헤이룽강(), 주강(), 랴오하(, 요하), 하이하(, 해하), 화이하(, 회하) 등과 같이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에 유입하는 태평양해양수계()와 시짱자치구(西)의 야루장부강(, 아로장포강)과 같이 동쪽으로 흐르다 국경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흐르며 인도양에 유입되는 서남부 지역의 인도양수계(), 신장()의 액이제사하()와 같이 북쪽으로 흘러 국경을 지나 북빙양()으로 흘러들어가는 북빙양수계()로 나뉘어진다. 내륙독립수계()에 속하며 내륙의 호수로 흘러들어가거나 혹은 사막에서 소실되고 있는 내류하()는 주로 서북부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신장() 남부의 타리무하(, 탑리목하)는 중국 최대의 내류하()로 전장은 2,179㎞에 달한다.

중국에서 남부, 동부 및 북부의 하천은 모두 외류하()에 속하며 남방 하류의 수량은 매우 커서 수위가 계절변화에 따른 차이가 비교적 작으며 하천의 범람 기간이 비교적 길고 토사의 퇴적이 적다. 반면에 북방에는 헤이룽강() 등 몇몇의 하천을 제외하고 하수()의 유량이 적고 수위가 계절변화에 따라 크며, 범람 기간이 짧으며 토사의 함유량이 많다. 창강()은 중국의 첫 번째, 세계 제3대 하천이며 황하() 및 주강()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화이하(, 회하), 랴오하(, 요하), 하이하(, 해하) 및 쑹화강(, 송화강)을 합쳐 7대수계()라고 부르고 있다.

자링강간강진사강나취하누강넌강당곡란창강롼하미뤄강무단강민강민강푸두하푸강베이강샹강상천하쑹화강아커쑤하야루장부강야룽강리수예얼창하융딩하, 우강, 우수리강랴오하웨이하창강첸탕강주강칭이강추마얼하퉈퉈하타리무하타이쯔하퉁톈하바수하이하화톈하황포강황하화이하헤이룽강

나. 주요 호소(湖沼)

중국에는 호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데 주요 분포지역은 칭장고원() 지역과 창강중하류평원()이며 5대 담수호()인 포양호(, 파양호), 둥팅호(, 동정호), 타이호(, 태호), 훙쩌호(, 홍택호) 및 차오호(, 소호)는 모두 창강유역()에 분포한다. 칭하이호(, 청해호)는 면적이 가장 넓은 호수이며 세계 제일의 함수호()이며 나무춰(, 납목착)는 제2대 함수호()이다. 또한 호수의 형성원인이 따라 구조호, 단층호, 언색호, 하적호 해적호, 카르스트호, 빙하호, 화구호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큰 호수는 주로 지질구조의 영향으로 일반적으로 수심이 깊고 호안선이 곧은 특징을 보이며, 지역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어 시짱(西)지역에는 빙하호가 많고, 윈구이고원에는 카르스트호, 창강() 중하류 지역에는 하적호, 연해평원에는 해적호가 많이 분포한다.

중국의 호소지역은 형성원인과 수량변화 등의 특성에 의해 동부평원의 호소지역, 동북평원 산지 호소지역. 윈구이고원 호소지역, 몽신고원 호소지역, 칭장고원 호소지역의 5대 호수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쿤밍호, 쿤밍호, 주자이거우난완호단장커우수고, 둥팅호, 바이양뎬시호, 차오호, 웨야취안뎬츠, 칭하이호, 타이핑, 타이호, 포양호, 쉬안우호, 훙쩌호, 화칭츠

주향 및 지역에 따른 산맥의 분포
서쪽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리아 산맥에서 북동쪽으로 톈산〔〕 산맥, 알타이 산맥, 대싱안링〔〕 산맥을 축으로 러시아·몽골 인민 공화국과 남동쪽은 톈산 고원을 경계로 동남 아시아의 라오스·미얀마와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내부는 다시 쿤룬 산맥, 탕구라 산맥, 바옌카리 산맥, 치렌 산맥이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남북으로 타이항〔〕 산맥이 놓여 있고, 동서로 친링〔〕 산맥, 난닝〔〕 산맥, 우이〔〕 산맥이 놓여 있으며, 둥베이〔, 만주〕 평원, 화베이〔〕 평원, 창장 중·하류 평원이 있다.

이 밖에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이 있으며, 타림 분지와 웨이수이〔〕 분지가 있다. 대체로 허난〔〕성과 허베이〔〕성은 황하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고, 후난〔〕성과 후베이〔〕성은 둥팅호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며, 산둥〔〕성과 산시〔西〕성은 타이항〔〕 산맥을 기준으로 나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도 화둥〔〕·화시〔西〕·화난〔〕·화중() 지방으로도 나뉘고 있다.

화둥은 산둥·장쑤·안후이·저장·푸젠·장시성과 상하이 시를 가리키고, 화시는 창장 상류의 충칭시와 쓰촨성 일대를 가리킨다. 화난은 주강 유역으로 광둥과 광시좡족 자치구를 가리키고, 화베이는 허베이·산시·베이징시·톈진시 일대를 가리키며, 화중은 창장의 중류, 즉 후베이·후난성 일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만주라고 지칭하고 있는 랴오허 이동 지역을 둥베이 지방이라 부르고 있다.
동서주향 : 톈산산맥(, 천산산맥), 인산산맥(, 음산산맥), 쿤룬산맥(, 곤륜산맥), 친링산맥(, 진령산맥), 난링산맥(, 남령산맥) 등
▪ 북동주향 : 다싱안령(), 창바이산맥(, 장백산맥) 등
▪ 북서주향 : 알타이산(), 치롄산맥(, 기련산맥), 히말라야 산맥() 등
▪ 남북주향 : 헝돤산맥(, 황단산맥), 허란산맥(, 하란산맥), 류판산맥(, 육반산맥) 등
하천은 대부분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황해로 들어가거나 동중국해로 들어가는데, 황허〔, 5464㎞〕와 창장〔, 양쯔()강, 6300㎞〕이 대표적이며, 화이〔〕수·첸탕〔〕강이 있고, 남중국해로 들어가는 주()강 등이 있다. 그리고 동북쪽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헤이룽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또,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호수가 분포되어 있는데, 비교적 큰 것은 칭하이성의 칭하이〔〕호가 4538㎢ 장시성의 포양〔〕호가 3976㎢, 후난성의 둥팅〔〕호가 3915㎢이다.

사막

중국의 북방지역에는 사막, 고비와 여러 가지 풍식지형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는 건조 및 반 건조 기후의 산물이다. 동쪽으로는 쑹랴오평원(, 송요평원) 서부에서 서쪽의 파미르고원에까지 이르며 남북 간은 북위 35~50도 사이의 광활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사막지형은 90%가 허란산맥, 오초령 서쪽의 서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데 강수량이 적고 물리적 풍화작용이 활발하여 풍식작용이 활발하다.

주요 사막으로는 타클라마칸사막(), 고이반통고특사사막(), 파단지린사막(), 텅거리사막(, 등격리사막), 마오우쑤사막(, 모오소사막), 고모찹격사막(), 차이다무분지(, 시달목분지) 사막(), 고포기사막(), 오란포화사막() 등이 있다. 나머지 10%의 사막지형은 네이멍구자치구()와 쑹랴오평원(, 송요평원) 서부 초원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산맥, 산, 강, 분지, 고원, 족,
강디쓰산맥카라코람산맥쿤룬산맥치롄산맥뤄샤오산맥난링산맥탕구라산맥다싱안령우이산맥우링산맥셴샤령쉐펑산맥샤오싱안령알타이산맥옌산산맥녠칭탕구라산류판산맥인산산맥친령톈산산맥타이항산맥허란산맥헝돤산맥히말라야 산맥쿵퉁산주화산김교각단샤산다볘산메이리설산우당산우이산무이암차판산푸퉈산사대불교명산푸뉴산쑹산오악어메이산옌당산루산우타이산오령오지산위룽설산윈타이산류판산쯔진산징강산주무랑마봉칭청산총령타이산헝산화궈산화산훠옌산황산네이멍구고원윈구이고원칭장고원황토고원쓰촨분지차이다무분지준가얼분지타림분지투루판분지장한평원관중평원둥베이평원퉁팅호평원싼장평원쑹넌평원양호평원창강삼각주창강중하류평원주강삼각주허타오평원하이하평원화베이평원, 자링강강, 진사강나취하누강넌강당곡란창강롼하미뤄강무단강민강푸두하푸강베이강샹강상천하쑹화강아커쑤하야루장부강야룽강리수예얼창하융딩하우강우수리강랴오하웨이하창강첸탕강주강칭이강추마얼하퉈퉈하타리무하타이쯔하퉁톈하바수하이하화톈하황포강황하화이하헤이룽강징항대운하남수북조공정쿤밍호쿤밍호주자이거우난완호단장커우수고둥팅호바이양뎬시호차오호웨야취안뎬츠칭하이호타이핑타이호포양호쉬안우호훙쩌호화칭츠타클라마칸사막텅거리사막

중국()?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천하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지배자를 천자라고 칭하여 지배자는 나라의 가운데 있어야 하며, 그가 지배하는 지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중국을 차이나(China), 또는 지나()라고 부른다. 차이나나 지나는 일반적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Chin)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진이 바로 중국을 칭하게 되었고, 여기에 a, 또는 e를 붙여 영어의 China,또는 불어의 Chine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로 표기할 때 (지나)라고 하여 일본은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즉, 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지나란 불경의 해석에서 '문물이 발달한 나라'를 가리키는 뜻으로 되어 있어 중국의 문물이 발달했기 때문에 중국을 가리킨다는 설과, 인도 산스크리트어〔〕에 '지나란 변방 지방'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즉, 인도의 변방에 있었던 중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이미 불경이나 인도의 고전에 '지나'란 말이 나와 있고, 그 '지나'란 단어가 중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China도 진(Chin)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도의 고전이란 비록 기원 후에 편집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를 가리키지만 그 내용은 기원전 5세기에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에 지나란 말이 나온다. 헤브라이 인의 『구약 성경』 「이사야의 서」에 따르면 '이들 멀리 시니(지나의 음역)에서 온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약 성서의 경우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이루어졌으므로 당연히 진시황의 통일 이전이다.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에서 China란 말이 기원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 서방 사람들은 중국을 지칭해 Seres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그리스어로 비단이라는 ser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 a를 붙여 Sera가 되었고, 이 말이 중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주장은 중국의 비단과 함께 주요 수출품이었던 도자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중국문화 의 틀' 상고시대에서 한대까지!
대부분의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그렇듯이 중국문명도 황하라는 대하천 유역의 비옥한 옥토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그대로 누런 하천, 황하는 중국의 상징이다. 황하가 황하로 불리는 까닭은 서북쪽의 황토고원에서 씻겨져온 황토 때문이다. 황하는 바닥에 퇴적된 황토로 인해 수시로 범람하는 하천이다. 황하는 실로 잔인한 강이다. 세계의 어느 하천보다 범람의 규모가 크고 파괴적이었다. 한 번 대홍수가 나면 강줄기 자체를 아예 바꾸기 때문에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였다. 황하의 종점의 위치는 몇 천 년 동안 수십 차례 바뀌었다. 산동반도 위쪽 발해만으로 흘러들어간 적도 있었고, 산동반도 아래쪽으로 흘러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그 폭이 무려 7백 킬로미터가 넘는다. 거대한 누런 용 황하는 한반도의 폭보다 더 크게 위아래로 꿈틀거렸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이라는 나라는 항상 그 방대한 규모로 우리를 압도한다. 중국이 처음부터 큰 나라는 아니었다. 처음 출발은 황하 중류 유역에 시작한 조그만 부족공동체였다. 중국인들이 고대의 성왕으로 칭송해 마지않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그저 황하 중상류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들의 공동의장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요임금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진 신하였던 순임금에게 물려주었고, 순임금 또한 아들이 그다지 똑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두뇌게임인 바둑은 순임금이 멍청한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복고적 경향을 지닌 후대의 사람들, 특히 유가의 사람들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신하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어진 왕의 대명사로 칭송했는데, 사실 이때는 부족 내의 가부장제는 확립되었는지는 몰라도 부족연합체 단위에서 왕위의 직계 계승제는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우임금 때부터 비로소 왕실의 직계 가족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조를 하()라고 부른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공통점은 치수사업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황하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는 생존에 관련된 절대 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에 결국 치수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이 세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집약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경문화, 그리고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필요로 하는 자연조건 속에서 중국문화의 원형이 서서히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은 걸()왕이다. 걸임금에게는 말희()라는 천하절색이 있었는데 그는 고급 천의 대명사인 비단을 찢는 소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걸왕은 그를 위해 궁녀에게 명하여 옆에서 항상 비단을 찢으라고 했다. 또한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안주를 나무에 걸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 망하고 만다. 다음 왕조는 탕()왕이 세운 상()나라다. 대략 기원전 17세기 무렵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수도의 지명을 따서 은()나라라고도 한다.

요순임금이나 하 왕조에 대한 기록들은 전설에 가까워 역사적 자료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은나라는 갑골문()의 발굴로 인해 그 존재가 명확히 증명된 왕조로 사실상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다. 갑골문은 거북의 껍질과 소의 견갑골이나 넓적다리뼈에 새겨진 글자인데 그 용도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복점이었다. 갑골에 글자를 새긴 다음 구멍을 뚫고 열을 가해 그것이 비틀어지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던 것이다. 갑골문은 은대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한자의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자료다. 갑골문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 특이한 모양과 신비스런 글자 때문에 용의 뼈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한약방에서 이를 갈아서 약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은나라의 왕위 계승은 부자 상속만이 아니라 형제 상속도 병행했다. 은나라 때까지는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애매했고 샤머니즘과 복점이 유행했다. 갑골문에는 전쟁과 국가의 대소사뿐만 아니라 왕실의 혼인이나 질병 등 일상적인 내용들도 있다. 이로 보아 거의 대부분의 일을 복점에 의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 대부분의 원시 부족들이 그랬듯이 하늘 신, 땅 신, 곡식 신 등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이한 것은 조상신들에 대한 제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문화의 원형이 되고 있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은 달기()라는 경국지색()에 빠져 걸왕과 마찬가지로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을 했다.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때 서쪽 변방의 주나라에는 문왕()이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문왕은 은나라의 거북점을 개선하여 음양 두 개의 코드를 여섯 번 반복해서 64괘를 만들고 이것으로 점을 치는 좀더 과학적인 점술인 주역을 개발했고 매 괘와 그 괘의 여섯 효에다 길흉을 가리는 말들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은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낚던 강태공을 등용했는데 그는 기원전 11세기 무렵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새로운 천하인 주나라를 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자기를 알아준 사람에게 보답했다.

왕위 계승에서 부자와 형제 계승이 뒤섞여 있던 은나라와는 달리 주나라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아울러 방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왕도와 그 주변만 직속으로 다스리고 나머지 영토는 왕실의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어 지배를 맡기는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각 지방의 제후()들은 자기의 영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되 중앙의 천자를 대종자()로 모셨다. 그리고 제후들은 다시 자기의 도읍을 직속으로 다스리고 나머지 영역을 경대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경대부들은 제후를 종자()로 모셨다. 경대부들은 자신들의 땅을 일반 백성들에게 분배하고 일반 백성은 경대부를 종자로 모셨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종법제도()인데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국가 단위로 확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종법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시스템 전체를 총괄하는 말이 예()다. ''라는 글자의 왼쪽 부수 ''는 원래 땅 귀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오른쪽 ''은 제기에 옥을 담아놓은 것이다. 그것은 땅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예는 원래 고대의 제례의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대에 와서 예의 의미는 크게 확장된다. 주대의 예는 단순히 제례의식이나 그것을 행하는 공경스러우면서도 정성스러운 마음가짐뿐만이 아니라 신분질서와 사회규범, 나아가 여러 가지 문물제도까지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이다.

중국이 제정일치의 종교적인 사회시스템에서 인문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더 합리적인 사회시스템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의 지배 아래 있었던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고 인문주의적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중국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 예 문화의 기초를 잡은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으로, 공자는 그를 지극히 앙망하여 꿈속에서도 만나기를 바랐다.

주나라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유왕()이라는 못난 임금에 이르러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유왕에게도 걸주와 마찬가지로 천하절색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사()였다. 포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포사의 웃음을 보고 싶어 묘책을 강구하던 유왕은 어떤 신하의 제의로 아무런 이유 없이 왕궁의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피웠다. 봉화를 보고 부랴부랴 군장을 챙겨 왕도로 달려온 각 지역의 군대들은 왕도에 아무런 일이 없자 우왕좌왕했고 나중에 그냥 심심풀이로 봉화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으로 군대를 돌려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 이를 보고 포사가 소리 내어 웃었고 유왕은 크게 만족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을 사기 위해 어리석은 장난을 했던 유왕은 나중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포사에게 밀려난 왕후의 아버지가 북방의 유목민족과 결탁하여 왕도를 공격했을 때 긴급히 봉화를 올렸지만 『이솝우화』의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의 경우처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수도는 불타고 왕은 죽게 된다. 이에 주 왕실은 지금의 서안 근처에 있는 수도를 동쪽으로 약 3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인 낙양으로 옮기고 유왕의 아들을 옹립하여 새롭게 왕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동주시대라 하고 그 이전을 서주시대라고 부른다.

망국의 군주에게는 항상 경국지색이 있다. 물론 군주가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는 것은 망국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하, 은, 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은 다소 과장된 바가 있다. 승자를 미화하기 위해 패자를 용렬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만만한 것이 포악하거나 우매한 성격에다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국지색을 치명적 요부로 묘사함으로써 후대의 군주에게 훈계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여자의 특이한 취미나 개성을 망국의 원인으로 부각시켰다. 주지육림을 좋아한다든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한다든지, 봉화를 보고 달려온 군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좋아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다.

동주시대는 주나라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어 각 지역의 제후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패권을 다투던 시기다. 동주시대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를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춘추시대(BC 770~403)는 공자가 정리했다고 하는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고 전쟁도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종주국인 주나라를 존중했고 전쟁의 규모와 양상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전국시대(BC 403~221)는 『전국책』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춘추시대 강국의 하나였던 진()나라가 내부의 신하들의 반란으로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로 분열된 것을 기점으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주 왕조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각 제후국들은 노골적으로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면서 치열하게 전쟁을 했는데, 전쟁의 규모도 엄청났고 그 피해 또한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춘추전국시대를 대혼란기로 규정한다.

춘추전국시대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라 중국이 새로운 단계로 비약하는 데 필요했던 위대한 창조적 혼란기였다. 우선 지리적으로 보아 중국문명의 영역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서주시대만 해도 중국의 영역이란 황하 중류에서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북중국 평원 일대에 그쳤지만 동주시대에는 중국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바다가 있는 동쪽과 강력한 유목민족들이 있는 북쪽으로의 확장은 별로 없었지만 서쪽과 남쪽으로는 크게 확장되었다.

서쪽에는 뒤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나라가 편입되었고 사천성도 진나라에 편입되면서 중국문화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남쪽으로의 확장이 돋보인다. 춘추 후기에 이르러 양자강 중류 유역의 초()나라가 중국문명권에 흡수되었고, 전국 초기에 이르러서는 양자강 남쪽에 자리 잡은 오()나라와 지금의 절강성 일대에 자리 잡은 월()나라가 중국문명권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서주시대에는 모두 남쪽 오랑캐인 남만족에 속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문명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말기에는 후대 한족 세력권의 경계선이 대략 형성되었다. 이들 광대한 지역을 중국문명으로 흡수시켜 통합시킨 원동력은 바로 한자와 예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가 위대한 시대로 불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사상의 기틀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춘추 말기에서부터 제후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사회의 변동과 혼란도 극심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흔히 제자백가라고 한다. 백가는 중국 사람들의 상투적인 과장법이고 실제로는 십가 정도에 그치는데, 유가(), 도가(), 법가(), 묵가(), 음양가(), 명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제대로 사상체계를 갖춘 학파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유가, 도가, 법가, 묵가를 들 수 있다. 묵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와 반전사상을 주장하는 일종의 종교집단으로, 한때는 그 세력이 대단했지만 한대 이후에는 금지사상으로 지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고, 법가는 진시황에게 채택되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형법과 술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쇠퇴하여 결국 유가와 도가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들 제자백가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사상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영겁의 윤회 속에서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우주의 창조자인 신의 뜻을 따라 내세의 영생복락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종교적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현세를 중시하고 현실적인 인간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철학처럼 만물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변화하는가 불변하는가 등의 우주자연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및 사회통합에 대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예 문화라고 하는 중국적 토양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았을 때 예 문화를 가장 충실하게 수호하려고 했던 것은 유가사상이지만 예 문화에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도가에서조차도 정치에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 문화의 영향력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사상으로 볼 때 노자사상은 백성들에 대한 작위적인 간섭을 최소화한 무위의 정치를 강조했고, 법가는 가혹하리만큼 철저한 법의 집행을 통한 법치주의를 강조했으며, 유가는 인의와 예악제도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공자사상의 한 맥을 이어받은 순자의 문하에서 법가사상의 최대의 이론가인 한비자()와 최대의 실천가인 이사()가 나온 사실이나 한비자가 노자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노자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했던 일들을 볼 때 유가, 도가, 법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법가사상의 힘을 빌려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했다. 진나라의 왕 영정()은 삼황오제()를 줄여 처음으로 황제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즉, 시황제()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실제적인 의미의 강력한 제국인 중국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나라는 유럽에 중국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왕조다. 오늘날의 차이나(China)는 바로 진에서 나온 이름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로 당시까지 서로 약간씩 차이를 보이던 문자와 도량형, 수레바퀴의 크기를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도 통제했다. 그리고 주나라와 같은 봉건제도가 아니라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 현을 두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군현제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다. 다소 가혹한 면도 있었지만 진시황의 통합정책은 단일문명권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은 또한 북쪽의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장성을 축조하고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아방궁을 지었다.

진시황의 가혹한 통치행위는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몰락하고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항우와 유방의 치열한 싸움 끝에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웠다. 비록 짧은 기간의 대치였지만 이 두 영웅의 싸움은 깊은 인상을 남겨 후대 『초한지()』와 같은 소설과 『패왕별희()』와 같은 희곡으로 남아 있고, 장기라는 놀이로 전해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기원전 206년에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진시황의 정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제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일단 진시황이 추구했던 군현제가 현실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봉건제와 군현제를 절충한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사상에서도 한대 초기에는 법가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하기 위해 노자가 주장한 무위의 정치를 펼치다가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 때 이르러 중도적인 유가를 관학으로 삼게 된다. 한나라는 중간에 왕망()이라는 외척이 황당한 도참사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나라를 잠시 빼앗은 15년을 빼고 무려 4백 년이 넘게 존속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최장수 통일 왕조다. 이 기간 동안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국문화의 토대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한족, 한문화, 한자, 한어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상고시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는 중국문화의 기본 틀이 잡힌 시기다. 이 시기까지는 중국문화사에서 고대에 해당한다. 중국인들은 상고에서 한대까지를 흔히 삼대양한()이라고 일컫는다. 삼대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를 가리키고, 양한이란 서한(西)과 동한()을 말한다. 처음 유방이 나라를 세워 외척인 왕망에게 망하기 전까지가 서한이고, 이후 광무제가 다시 일으킨 나라가 동한이다. 흔히 전한(), 후한()이라고도 한다. 주나라가 망하고 동쪽 낙양으로 천도한 뒤로 중국에서는 앞의 왕조에다 서를 붙이고, 뒤의 왕조에다 동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한대에만 이르러도 중국문화의 수준은 당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인 부() 작품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수사기교를 뽐내고 있으며 심지어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한자가 주는 멋을 추구하고 있다. 한대 왕족의 분묘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옷과 장식품들은 실로 화려한 기교를 뽐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분에서 출토된 회화작품들도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구체적 근거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한대의 음악이나 건축도 꽤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문화사의 긴 흐름으로 보았을 때 한대의 문화와 예술은 아직 소박한 수준, 즉 졸의 단계이고 사상에서도 범속함을 추구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이 세상보다는 저세상을 더 중시한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또한 마찬가지다. 노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우주의 근원인 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도에 대한 체험과 자신이 체득한 도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자의 이야기를 흔히 현묘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도저히 체험하기 어려운 깊고도 오묘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해했고 그것을 자신의 깨달음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화광동진의 기본 얼개는 범속함에서 성스러움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의 범속함은 물론 단순한 범속함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속으로 감추고 있는 범속함이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의 의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크게 두 개의 차원이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한다는 의미다. 전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후자의 의미를 터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자 당시 수많은 은자들은 주로 감추기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노자는 통합도 실천했다. 노자의 글 속에는 초월적인 도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고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등장하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구절들도 많이 나온다. 이는 노자가 초월의 세계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 문명과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노자의 계승자인 장자는 초월의 세계에 치우쳐 있다.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붕()의 이야기는 장자의 이런 성향을 잘 대변한다. 그는 구만 리 상공을 날아가는 대붕과 같이 자질구레한 일상의 현실을 뛰어넘어 절대 자유에서 소요하며 노니는 것을 추구했지 일상과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은 주로 자신의 지혜의 빛이나 재주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쪽으로만 이해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다가 벌목당하는 미목보다는 쓸모없는 잡목으로 구석에 틀어박혀 하늘이 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기를 원했다.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의 선사들 또한 불교 안에서는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있다.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들인데, 이런 것들은 분명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일상성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 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산중의 화광동진으로서 미완의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화광동진 또한 미진함이 있다. 그는 분명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삶은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머릿속으로는 분명 자신이 체험한 깊은 도의 관점에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상이나 꿈은 너무나 고원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탁하고 혼란스러워 그 속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고고하게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감추고 그저 초야에 조용히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모호한 생애가 후대에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전설과 뒤섞여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미완의 화광동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을 창출하여 그것을 개념화하고 언어화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 사상을 자신의 삶 속에 체화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상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배워 창시자보다 더 훌륭하게 체득하고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 사상을 제창하는 사람과 그것을 구현하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공자는 노자에게서 화광동진을 배웠지만 노자보다 더 깊게 그것을 이해했다.

『사기』의 「노장신한열전」 가운데서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은 비중이 매우 크다. 노자 자체에 대한 기록만으로 볼 때 절반이 훨씬 넘고 여러 가지 이설을 포함한 전체 문장 가운데서도 3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이다. 제1장에서 간략히 말했지만 여기서는 좀더 상세히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했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해야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했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역대 이래로 설이 분분하고 지금도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적 진실성 여부를 떠나 사상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이 많다.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예'였다. 이때의 '예'는 물론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어지러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사회·문화시스템으로서의 예다. 공자는 그것을 주공을 비롯한 옛 현인들의 기록에서 찾으려고 했다. 노자는 공자가 추구하는 그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항상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말이란 우리 마음의 그림자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그 윤곽만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은 말의 그림자다. 말 속에는 현장감과 생동감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전할 수 있다. 똑같은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말의 톤과 색깔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글로 표현할 때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거친 윤곽만 남을 뿐이다. 물론 상상의 힘으로 그 윤곽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만약 그 글이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 시대 사람의 글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옛 사람의 글이라면 어떨까?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아마도 노자는 공자에게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는 당시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공자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항상의 도이냐, 아니냐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실용성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주공의 예 문화야말로 중국인의 문화와 심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설령 껍질만 남아 있다고 해도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평생을 예를 탐구하면서 창조적 계승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처신해야 함을 말하고는 이어서 본격적으로 화광동진을 말하고 있다.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물론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화광동진이다. 마지막으로 감추기의 관점에서 볼 때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했다.

노자와 공자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했다. 노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그 시대를 물러나야 할 때라고 여겨 결국 은둔했지만 공자는 그 시대야말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보고 평생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발분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남의 도 자체에 대해서는 공자도 공감했다고 본다. 맹자의 글에는 "군자는 영달할 때는 온 천하를 두로 구제해야 하고 궁할 때는 자신의 몸이라도 잘 닦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삶의 유형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퇴계(退) 이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말 자체가 은둔적이다.

공자는 노자가 충고한 화광동진의 감추기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한 듯하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세부터 51세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30대 정도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이후 공자는 노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덕성과 자질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려고 했던 것 같다. 『논어』에는 공자의 감추기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공()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인품과 능력을 고루 갖추었고 인물도 출중했다. 그래서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자공이 공자보다 뛰어나다고 찬미했다. 그러자 자공은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의 담에 비유하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로 보아 공자는 속으로 깊은 도와 덕을 지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새 뒤에 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했던 것이다. 자공 또한 사람이 생긴 이래로 공자만큼 훌륭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공자의 제자들이 했던 말이므로 공자의 도의 깊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자의 화광동진의 경지를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화광동진을 감추기로만 파악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에는 그런 인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충고를 들었을 때 공자는 "내가 이 백성들을 버리고 날짐승과 들짐승과 더불어 살란 말인가?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는 말을 했다.

노자로부터 이미 화광동진의 충고를 받은 적이 있는 공자는 그들 은자들의 충고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산속에서 날짐승과 들짐승과 어울려서 홀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이 아니었다.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노자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로 화광동진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화광동진은 찬란한 깨달음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안으로 감추고 다시 먼지 펄펄 나는 속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속세와 하나되는 동진은 더욱 어렵다. 나는 동진의 단계를 성숙도에 따라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 싶다.

첫 번째 단계는 화광에 급급하여 그저 표피적인 동진에 머무르고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겉으로 볼 때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실제 속으로는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는 데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심리적인 거리를 둔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에 큰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이 경우 육신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홀로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는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생활을 이야기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초월의 세계,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다. 역대의 수많은 은둔자들이나 산중의 선승들은 이 단계에서 머물렀다.

동진이 깊어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표피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게 되며,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물론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우월한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 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다.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을 성취하고도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다.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사회와 문명을 깊이 이해하고 사회변혁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세 번째 단계다. 현실 세계의 일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우리의 일상성을 제대로 바로 보려면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사회와 문명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묵묵한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지극한 경지라고 본다.

나의 관점으로는 노자는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마지막 단계까지 나아갔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피상적인 동진의 단계에 머물렀다.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인데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문제다. 만약 깨달음이 없다면 아무리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역사와 문명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해도 화광동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공자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이며 교육자인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정치 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는 공자를 폄하한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느 선사는 공자 같은 속인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가 수도를 게을리 해서 되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자의 경지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자를 위대한 대각자로 본다. 공자가 왜 위대한 대각자이고 그는 과연 무엇을 깨쳤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생이지지()가 아니라 학이지지()라고 했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또는 성인을 말한다. 예수나 석가가 그 대표적인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이지지란 꾸준히 노력해서 안다는 뜻으로 공자같은 사람이 바로 그 대표적인 성인이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했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호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호학'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한 순간에 천지가 뒤바뀌는 극적인 장면은 없다. 실로 점진적인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는 아마도 오십 정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천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인격도야만으로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에서도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인생과 우주의 주재자가 거하는 곳으로 여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중국문명의 특징상 하늘은 창조주나 절대자가 거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우주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모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의 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깊은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뒤 육십에 이순()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 경지는 많은 주석가들이 귀가 순통하게 되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아마도 지천명()의 다음 단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순통()이라는 말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부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다른 사람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순의 경지가 바로 화광동진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고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놓는 경지인 것이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안과 밖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도를 깨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성스럽다. 내면의 본성을 완전히 자각하고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법도와 부딪힐 때는 아무래도 충돌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도를 깨친 사람의 행동은 때로는 파격적이어서 세상 사람들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 있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은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진정으로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공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의 법도에 별로 어긋남이 없다. 이것은 개아()의 행위가 사회 전체의 행위규범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이것은 사실 부분과 전체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자의 깨달음은 노자의 깨달음보다 훨씬 아름답다. 노자의 깨달음은 설령 그것이 깊다고 해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세상과의 소통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은둔의 삶으로 끝났다. 이에 비해 공자는 처음의 자질은 노자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끝없는 배움으로 평생을 일관했으며 만년에는 안과 밖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다.

사실 근대 이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교였고, 동아시아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은 성인은 바로 공자였다. 그러나 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의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따라 공자의 성스러움이나 권위 또한 형편없이 추락하여 위대한 성인에서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상가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공자가 절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봉건 지배계층이 자기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자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고 공자를 신격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창했던 예 문화가 대성약범을 추구하는 중국문명의 원형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고, 그의 삶이 대성약범의 미학을 지향하는 중국인의 미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며, 그의 깨달음이 중국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대성약범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깊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수백 년을 보냈지만 인도 내의 기독교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리랑카나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근대 이후 유럽의 세력이 한창 팽창할 때 기독교는 전통의 고등 종교가 없는 남미 지역 등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지만 고유의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예외인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사상들은 모두 현실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사상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고 그래서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 중국인들은 새선생()과 덕선생()을 받아들여 중국을 탈바꿈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는 'Science'의 음역어인 '새은사()'의 첫 글자고 ''는 'Democracy'의 음역어인 '덕모극납서(西)'의 첫 글자다. 새선생과 덕선생은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의인화해 만든 단어다. 유교의 상대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의 민주주의와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훨씬 불리한 싸움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결국 서구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산업구조와 정치구조를 좇아갈 수밖에 없었고, 전통적인 산업구조나 정치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유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아우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도로 몰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 때문에 유교는 새롭게 각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 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봉건시대의 유교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시대의 사회와 종교 상황에 맞는 새로운 유교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교의 역사 속에는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송명대의 신유학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

문화에는 학술, 사상, 종교, 문물제도, 예술 등과 같이 그 지역 문화의 외양적인 특징을 규정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실제 생활에 매우 중요하고 그 문화의 실질적인 특징을 규정짓지만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간과되는 부분이 있다. 음식, 의복, 주거양식 등이 간과되는 바로 그것이다. 문화라고 하면 옛날에는 무조건 전자만을 일컫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후자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증가하고 있다. 사실 그 지역 문화의 고유한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후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전자가 전파력이 매우 강한 반면 후자는 그리 강하지가 않다. 물론 요즈음은 매스컴의 발달로 부분적으로는 후자의 전파속도도 무척 빨라졌지만 근대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근대 이전에는 중국의 사상, 종교, 학술, 예술 등이 동아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음식, 의복, 주거양식 등에서는 중국의 문화가 한국, 일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는 했지만 전자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후자가 전자에 비해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 및 거기에서 파생되는 생활양식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음식은 그 나라의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 또는 전반적인 생활양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로는 종교적 금기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불교나 힌두교 성직자나 독실하게 믿는 신도들은 육류를 금하고 채식을 위주로 하고, 이슬람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Marvin Haris)는 종교적으로 어떤 특정한 음식을 금하는 것이 단순한 종교적 세계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나 생태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로 보아 음식문화는 그 사회의 상층문화와 하부구조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지역의 음식문화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전반적인 사유체계나 행동양식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육식을 즐겨 먹는 사람들과 채식을 즐겨 먹는 사람들의 사유체계나 행동양식은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활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다소 소극적인 사고방식과 정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비교해볼 때, 서양 사람들은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곡류를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훨씬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다.

같은 동아시아권 안에서도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유목민족들이 곡류를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에 비해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다.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대결과 융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경민족인 한족은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은 몇 차례나 점령당했다.

음식은 특히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전쟁의 기술이나 무기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먹을거리다. 제대로 잘 먹지 못한 군인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 특히 원거리 전투나 장기간 전쟁에서 보급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곡류를 주식으로 하는 농경민족은 전쟁에서 먹는 문제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취사도구와 식량을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유목민족의 음식은 휴대하고 조리하기가 간편하기 때문에 전쟁에 매우 유리하다. 그리고 음식의 내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유목민족들은 육류와 유제품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곡류와 채식을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의 군인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공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13세기 무렵에 몽고 초원에서 흥기한 몽골족이 빠른 시간 안에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제국을 세웠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훌륭한 말의 확보, 강력한 무기인 신종 활의 개발, 광대한 지역에 걸친 훌륭한 정보망의 구축뿐 아니라 뛰어난 전략과 전술의 구사, 정복지역에 대한 관용과 반항하는 지역에 대한 철저한 응징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음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몽골인들은 평소에 이동의 편리성을 위해 보르츠(borcha)를 애용했다. 보르츠는 고기를 얇게 찢어서 건조한 육포를 말한다. 이것을 다시 빻으면 매우 가는 실처럼 되는데 작은 용기에도 엄청난 양을 저장할 수 있다.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에도 한두 달치 분의 식량을 담을 수 있다. 먹는 방식도 간단하다. 급할 때는 날 것으로 먹을 수 있고, 주둔하고 있을 때는 그릇에 물을 부어 조금씩만 풀어 넣고 끓여도 엄청난 양의 고깃국으로 바뀐다. 거기에 야채나 면류를 넣으면 전골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야채도 건조시켜 빻아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휴대가 간편하고 영양가도 높은 전투식량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군의 전투력 향상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음식 속에는 많은 문화적인 의미들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음식문화를 잘 살펴보면 그 나라 문화의 특징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음식이란 물론 소수민족을 포함한 전체 중국의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줄곧 이야기했듯이 한족의 음식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곡류가 주식이다. 쌀이 많이 나는 남방에서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밀이 많이 나는 북부에서는 면을 주식으로 한다. 하지만 드넓은 영토에 일찍부터 상업과 유통이 발달하여 여러 종류의 육류와 해산물을 이용한 다양하고 풍성한 요리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은 실로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서 각 지방마다 요리의 차이도 심하다. 북경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 산동요리 등은 제각기 지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렁 음식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일단 음식의 재료가 풍성하고 조리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농담 삼아 하늘에 나는 것 가운데서는 비행기, 땅에 다니는 것 가운데서는 탱크, 바다에 헤엄치는 것 가운데서는 잠수함만 빼고 모두 요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재료의 풍성함과 요리방식의 다양함에서는 전 세계에서 으뜸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발달했다. 높은 화력과 식용유를 이용하여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재료를 볶아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삶아 국물을 우려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전 세계에서 중국요리에 견줄 수 있는 요리로는 프랑스요리를 드는데, 재료의 풍성함과 조리방법의 다양함에서 프랑스요리는 중국요리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국요리는 재료나 조리방법 면에서 워낙 다채롭고 풍성하기 때문에 자세히 찾아보면 한국요리와 비슷한 것들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요리와 한국요리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과 맛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차이는 중국요리는 다채롭고 풍성한 데 비해 한국요리는 단조롭고 조촐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넓은 영토에 다양한 지형, 그리고 여러 종류의 이질적인 문화가 융합되면서 음식문화도 다양함과 풍성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한국은 땅도 좁고 지형도 전반적으로 단조로우며 이질적 문화와의 충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음식문화 또한 아무래도 단조롭고 조촐할 수밖에 없다.

일단 요리의 가짓수만 가지고 볼 때, 중국요리는 한국요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다. 요리방식이나 맛으로 보았을 때도 중국음식은 온갖 종류의 조리방식과 다채로운 맛을 다 지니고 있지만, 한국음식은 중국음식만큼 그렇게 다채롭지가 않다. 물론 한국음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찬의 가짓수가 적지 않고 각각의 반찬들이 다양한 맛을 자랑한다. 그러나 중국음식에 비해서 소박하고도 조촐한 편이다. 이는 식당의 식단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아주 자그마한 식당에서도 최소한 수십 가지 이상의 요리 이름을 볼 수 있지만, 한국의 식당에서는 웬만큼 큰 식당에서도 그렇게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았을 때 중국음식이 가짓수나 맛의 다양함에서 한국요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에는 맛으로 둘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사실 음식의 맛이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대상이다. 종류 또한 워낙 많기 때문에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지도 어렵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비교를 해본다면 중국음식의 전반적인 특징이 농염한 맛을 위주로 한다면, 한국음식은 전반적으로 담백한 맛을 위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음식의 조리방법이 다양하다고 하지만 가장 주된 것은 갖은 양념을 기름에 볶아서 주 재료 위에 덮는 것이다. 갖는 양념을 기름과 고열을 이용해 볶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맛이 조합되어 진한 맛을 낸다. 물론 기름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은 느끼하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비교적 담백한 맛의 요리가 주종을 이룬다. 물론 한국요리도 고추가 수입된 이래로 맵고 자극적인 맛을 많이 내기 때문에 담백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이런저런 양념을 동시에 사용하여 농염한 맛을 내기보다는 한두 가지의 양념이 위주가 되는 맛을 추구하고, 특히 기름을 많이 써서 볶기보다는 삶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담백이라는 말에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이런저런 사항을 조합해볼 때 아무래도 중국요리가 교에 해당한다면 한국요리는 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요리의 테크닉이나 재료가 다채롭고 풍성하다는 것은 그만큼 요리의 기교가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그만큼 소박하고 덜 발달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의 맛 차이를 보아도 농염한 맛을 추구하는 것이 교에 가깝고 담백한 맛이 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뿐인가? 맛과 색과 향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요리가 주는 이미지는 매우 화려하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가 주는 이미지는 소박한 편이다. 이 때문에 중국요리를 교에, 한국요리를 졸에 비교하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요리는 그냥 소박하고 덜 발달된 것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기교와 안목이 숨어 있다. 즉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이라는 뜻이다. 한국요리가 대교약졸의 졸이라고 하는 데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한국요리는 담백한 맛을 추구하지만 그냥 담백한 맛이 아니라 숙성된 뒤에 우러나오는 담백한 맛을 추구한다. 중국음식에 대한 한국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발효음식이 많다는 것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발효음식을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민족이 고래로부터 발효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장과 메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효음식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발효음식들이 있었다. 『주례』에 보면 이미 장()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장에는 해()와 혜() 두 종류가 있는다. 해는 새고기, 짐승고기, 물고기 할 것 없이 어떤 고기든 햇볕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넣어 잘 섞은 다음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백여 일 동안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다.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실 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오늘날 육장에 가까운 것으로 우리가 먹는 간장이나 된장과는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중국에서 된장과 비슷한 것은 동한 이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콩을 소금에 절여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 것을 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된장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하고, 시의 냄새를 '고려취()', 즉 고구려 냄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장을 만드는 발효기술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콩을 발효시켜 된장을 만드는 기술은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역사는 떠나 오늘날의 요리로 보자. 오늘날의 중국요리에서도 발효 양념을 쓰고 발효를 주된 조리법으로 만드는 요리도 있다. 그러나 한국요리에 비해 가짓수도 적고 그다지 중시되지도 않는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기본 양념이 대부분 발효음식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반찬들도 대부분 발효식품들이다.

한국은 발효음식의 천국이다. 일단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기본 양념인 간장이 발효음식이다. 요리에는 양념이 필요한데 양념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양념은 짠맛을 내는 소금이다. 우리 몸의 기본 체액에 염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소금을 바로 그대로 섭취하면 여러 가지 불순물이 많아 몸에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염분을 정제시키고 건강에 좋은 형태로 섭취하기 위해 간장을 개발했던 것이다.

간장을 만드는 데는 실로 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가을철에 대두를 삶아서 절구에 빻아 메주를 만든 다음 겨우내 방 안에서 발효시킨 뒤, 봄이 되면 먼지를 털어내고 씻어 다시 햇빛에 말려서 장독에 넣는다. 그리고 소금물을 붓는데 이 소금물도 하루 전에 미리 천일염을 물에 풀어서 불순물을 바닥에 가라앉힌 뒤 윗물만 걸러낸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숯을 넣고 맛을 내기 위해 고추와 대추, 때로는 깻잎도 넣는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달 반에서 두 달 가까이 숙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즙액과 메주를 분리하면 메주는 된장이 되고 즙액은 간장이 된다. 이렇게 분리시킨 즙액을 다시 약 80도 정도에서 10분 내지는 20분 정도 달이고, 이것을 식힌 뒤 독에 넣고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망사나 한지로 막고, 다시 숙성시켜야 비로소 음식에 쓸 수 있는 간장이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집의 음식 맛은 장맛이 결정한다고 하여 장을 담그는 데 실로 많은 정성을 들였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양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간장은 국이나 찌개는 물론, 나물 무침이나 조림 등 거의 대부분의 음식에 기본 양념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음식은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정성으로 발효된 간장과 된장을 기본 양념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소박하고 담백해보여도 그 속에는 실로 깊게 숙성된 은은한 맛이 있고 우리의 건강에도 참으로 도움이 된다.

우리의 반찬 가운데는 많은 발효음식들이 있다. 한국 사람들의 가장 주된 반찬인 김치와 된장찌개가 발효음식이고 대부분의 밑반찬들 또한 그렇다. 다양한 종류의 젓갈류에서부터 마늘장아찌, 고추장아찌, 깻잎장아찌 등 실로 얼마나 많은 종류의 발효음식들이 있는가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콩잎도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옛날 어른들은 잘 익은 장아찌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맛있게 먹곤 했다. 그밖에 밥에다가 생선을 넣고 고추양념을 하여 아랫목에서 잘 삭혀서 만든 생선식혜, 밥에다가 엿기름 물을 넣어서 삭혀 만든 명절의 시원한 음료수인 식혜도 바로 발효음식이다. 발효음식의 종류와 가짓수가 풍성한 것으로는 아마도 한국음식을 따라올 음식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발효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숙성을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깊은 맛을 내려면 그만큼 느긋함을 필요로 한다. 발효음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독특한 맛과 냄새 때문에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에는 상당한 거부감을 주지만, 일단 한 번 맛을 들여놓으면 실로 오랜 친구와 같아서 헤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발효음식의 독특한 맛과 냄새는 바로 유산균 때문인데 그것들은 건강에 매우 좋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류가 만든 음식 가운데 최고의 음식은 바로 발효음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깊은 맛을 추구하는 한국요리의 특징은 탕 요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탕이나 찌개 요리가 발달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곰탕, 설렁탕에서부터 해물탕, 꽃게탕, 각종 전골 요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의 탕과 찌개가 있다. 서양에서 탕은 음식을 먹기 전에 수프로 간단하게 먹는 것이고, 중국에서도 탕이란 주 요리를 다 먹고 난 뒤에 후식용으로 먹는 것이며, 일본 또한 탕에 대한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한국음식에는 탕이나 찌개가 주된 요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탕은 서양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오랫동안 끓이는 편이다. 중국의 탕 가운데서도 한국의 탕처럼 매우 오랫동안 끓이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의 탕은 재료를 식용유에 볶은 다음에 물을 붓고 그 물을 데우는 것이고, 일본요리에도 나베요리라고 하여 냄비에 음식을 끓여 먹는 것이 있지만, 한국의 찌개나 탕처럼 푹 끓이지 않고 가볍게 데쳐서 먹는다. 그리고 우리의 된장찌개에 해당하는 미소시루도 우리나라처럼 푹 끓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끓인 것이다.

탕이나 찌개는 모든 재료를 푹 삶기 때문에 재료 고유의 신선한 맛이 사라지고 비타민 등 일부 영양소가 파괴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재료의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뼈를 고아 먹는 곰탕이나 설렁탕 등은 뼈 속의 골수를 우려내는 맛이 있다. 여기에는 튀기거나 볶거나 삶는 것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의 요리는 겉으로는 분명히 중국요리에 비해 조촐하고 소박하며 맛에서도 여러 가지 다채롭고 농염함보다는 담백함을 추구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소박한 가운데 실로 정련된 맛이 있고 담백한 가운데 실로 깊고 은은한 맛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음식을 만들 때 음식 자체의 맛을 얼마나 맛있게 낼 것인가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에 얼마나 보탬이 될 것인가에 대해 깊이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배경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교약졸의 미학에 부합하는 것이다.


요리
중국은 국토가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가 형성되었는데 황허강 유역 및 기타 북방은 베이징 요리를 대표로 하고, 양쯔강의 하류는 상하이 요리를, 양쯔강의 중상류는 쓰촨 요리를, 쭈강 유역은 광둥 요리를 대표로 하고 있다.


상하이() 요리
양쯔강 하류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난징이지만, 상하이가 항구로서 발달하여 국제적인 풍미를 갖추었기 때문에 상하이 요리로 부르고 있다. 상하이 요리는 비교적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
음식의 색이 화려하고 선명하도록 만들며, 그 지방의 특산품인 간장과 설탕을 써서 진하고 달콤하며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9월 말부터 1월 중순에 맛볼 수 있는 상하이의 게 요리는 전 세계 식도락가들이 최고로 뽑는 진미이다.

베이징() 요리

베이징이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한 것은 청나라 때로, 이때부터 궁중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서 명물 진상품과 우수한 요리사들이 모여 각 지역의 장점만을 받아들인 음식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요리의 별칭인 '청 요리'도 이때 유래된 것이다.
밀의 생산이 많아 면류·만두·전병의 종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은 베이징 오리 요리이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은 대부분 이 베이징 요리법을 따르고 있다.

쓰촨() 요리
중국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쓰촨 분지는 해산물을 제외한 사계절 산물이 모두 풍성해 야생 동식물이나 채소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더위와 추위가 심해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가 발달한 것이 특징으로, 그에 따라 매운 요리와 마늘·파·고추를 사용하는 요리가 많다.
깨끗함, 신선함, 순수함과 진함이 함께 느껴지는 저리고 매운 맛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룽지탕, 마파두부 등이 대표적이다.

광둥() 요리

광둥 지역은 동남 연해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재료가 풍부한 곳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광둥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둥 지역은 예부터 요리가 발달한 곳이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전통 요리와 국제적인 요리의 특성이 조화를 이뤄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서유럽 요리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등 서양 요리 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인 요리도 있다. 간을 싱겁게 하고 기름도 적게 써 가장 대중적인 요리로 꼽힌다. 탕수육과 팔보채, 중국 요리의 보석으로 꼽히는 딤섬도 광둥 요리이다.

딤섬()2백여 가지의 맛과 모양을 가진 딤섬은 모양에 따라 교, 파오, 마이, 쇼마이, 편 등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무술

태극권

태극권은 중국 무술 중의 하나로, 최근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유연하고 완만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를 단전에 모아 온몸에 원활하게 유통시켜 오장육부를 강화하는 것이 특징으로, 수련 과정 중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고 한다.
태극권은 24개의 기본 동작과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자세로 구성되어 있다. 일명 '건강 체조'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른 아침에 공원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선(), 기공권, 감각권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소림 무술

1천 5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소림 무술은 중악 숭산의 소림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인도 승려 보리달마 대사가 좌선에 지친 승려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창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육체와 정신을 두루 갖추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자세 하나하나의 동작이 잘 어우러지고 빈틈이 없어야 하고 신체 각 부분의 균형이 잡혀 일치되어야 한다.
소림 무술은 독특한 기교가 대단히 많은데,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하는 것,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것, 방어하면서 여러 가지 공격을 하는 것 등이 있다. 종류도 아주 많아서 성질에 따라 내공·외공·경공·기공 등으로 나뉘며, 기법에 따라 권술·창술·도술·검술·곤술 등 1백여 종으로 나뉘고, 소홍권·소림연환권·소림장권·통배권·나한권 등 97개의 권법이 있다.

쿵푸·우슈
보통 중국 무술은 쿵푸로 대표된다고 알고 있지만 원래 쿵푸와 우슈는 같은 말이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쿵푸로, 중국 본토에서는 우슈라 부른다. 또한 우슈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불려 오던 각종 용어들을 통합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제정한 용어로, 우리나라의 태권도나 일본의 유도처럼 중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를 뜻하기도 한다.
우슈의 색다른 점은 두 선수가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닌 혼자 하는 '표현 무술'이라는 점이다. 크게 태극권·남권·장권으로 나뉘며 이것을 '3권'이라 하고, 직립 자세를 비롯하여 개구리·용·뱀·기마 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쿵푸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감정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술 경기뿐만 아니라 건강법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중국의 지리 [-地理]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중국 (처음 읽는 미래과학 교과서 - 우주공학, 2007..,)
주향 및 지역에 따른 산맥의 분포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자연 지리 (중국사, 2008.., , 위키미디어 커먼즈)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본 노자와 공자 (중국문화 대교약졸, 2007...)
중국의 4대 요리 (중국에서 보물찾기, 2004., 곰돌이 co.,)

유튜브 동영사" 보러가기"
https://youtu.be/i8irA05_krs
https://youtu.be/fnLPeGrmhbA
https://youtu.be/NHjc6etIQUM?
https://youtu.be/-XGRmDQI7FE
https://youtu.be/xpqCHcEUvaU
https://youtu.be/0ezy25PUkTU
https://youtu.be/6Y5mcLxlSgU?t=36
https://youtu.be/xpqCHcEUvaU
https://youtu.be/xDFjE2WJmws
https://youtu.be/Ctk33ldX2Ws
https://youtu.be/sizGebSGywE?t=16
https://youtu.be/oDIFw-x5R-4
https://youtu.be/x2UlMAOmT4s
https://youtu.be/jcZOCDkJ-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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