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6일 화요일

중국, [China, 中国].

중국, China, 中国.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대한민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西]·산시[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타이완 등 23개 성()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등 5개 자치구(),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등 4개 직할시(), 마카오·홍콩 등 2개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총 인구가 10억 명이 넘어. 세계 인구 5명 중 한 명이 중국 사람인 셈이지. 게다가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졌어. 중국 문화의 영향도 커. 한자, 유교정치 제도, 법률 등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했잖아.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는 국교를 맺지 않았지만, 1992년 수교를 맺음으로써 중국을 더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북한과 경계를 맞닿고 있는 중국으로 여행을 갈수있게 되었다.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중국 국기
위치아시아 동부
경위도동경 105° 00', 북위 35° 00'
면적(㎢)9596961
해안선(km)14500
시간대UTC+8
수도베이징
종족구성한족(91.5%) 기타(8.5%)
공용어중국어
종교도교, 불교(35%), 기독교(3.5%), 이슬람교(1.8%) (2014)
건국일1949년 10월 1일
국가원수/국무총리시진핑() (2013.3 취임)
국제전화+86
정체인민공화제
통화위안(Y)
인터넷도메인.cn
홈페이지www.china.org.cn
ISO 3166-1156
ISO 3166-1 Alpha-3CHN
인구(명)1,349,585,838(2012년)
평균수명(세)74.84(2012년)
1인당 명목 GDP($)8,400(2012년)
수출규모(억$)18,970(2012년)
수입규모(억$)16,640(2012년)
인구밀도(명/㎢)139.90(2012년)


간단 여행지"
① 만리장성 ② 자금성 ③ 톈안먼 광장 ④ 취푸 ⑤ 난징 ⑥ 룽먼 석굴 ⑦ 윈강 석굴 ⑧ 진시황릉 ⑨ 홍콩 ⑩ 마카오.

자금성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야. 세계 최대의 규모로,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은 고궁 박물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어. 9999개의 방이 있을 정도의 큰 규모이니, 크기에 놀라지 안을수가없다.

톈안먼 광장
자금성의 남문 앞 광장이야. 베이징의 중심이며 현대 중국의 상징이기도 해. 1989년 톈안먼 사태·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지금도 여러 국가 행사를 많이 한다.

만리장성
총 길이가 2,700km로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는데, 현재의 돌로 쌓은 성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성된 거야.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 10년 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취푸
공자의 고향이야.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큰 사당인 공자묘, 공자 일가 역대 자손들의 무덤인 공자림이 있고.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윈강 석굴
중국에서 가장 큰 석굴 사원이야. 위·진·남북조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어. 그리스인을 닮은 간다라 불상과 비슷하다

진시황릉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의 묘지야. 무덤과 함께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병마용갱이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지. 병마용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난징
강남의 중심지야. 명태조 주원장이 명을 세운 곳이있으며, 태평천국의 수도, 아편 전쟁 후 맺은 난징 조약, 신해혁명 후 중화 민국이 세워진 곳도 바로 이 곳이다.

룽먼 석굴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당에 걸쳐 만들어진 2300여 개의 석굴, 10만 점이 넘는 불상, 40여 개의 탑이 있어.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홍콩
마르코 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찬란한 도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 도시.

마카오
휴양지, 카지노로 유명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의 북청사변()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이 신해혁명()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는 북벌()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치체제와 국가기구
중국의 정치체제는 크게 중국공산당, 국가기관, 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세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은 1921년 상하이의 한 교외에서 창당되었다. 창당 시기 당원은 57명에 불과했지만,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국민당과 맞서는 세력으로 급성장하였고,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일당독재의 집권당이 되었다. 1977년 약 3,500만 명이었던 중국공산당 당원은 1997년에는 약 6,900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개혁개방 이래 두 배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중국공산당 당원은 8,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참고] 중국공산당 직위
국가주석 : 중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이다.
공산당 총서기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며, 중앙정치국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중앙서기처의 활동을 주재한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국무원 총리 :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이다. 국가주석의 지명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동의로 선출된다.

중국공산당 기구표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전국대표대회는 5년에 1회 개최되며 중앙위원회가 소집한다. 전국대표대회의 정책 결정은 5년간 중국을 지도하는 주요 지침이 된다. 현재 2,000여 명의 전국대표가 있으며, 2002년에 제16차, 2007년에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 오는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후진타오() 시대를 종료하고 시진핑() 체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전국대표대회 폐회 기간 전국대표대회의 결의를 집행하고 전체적인 당의 업무를 견인하며 대외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대표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결정한 회의로 잘 알려진 제11기 ‘3중전회()’는 바로 ‘제3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약칭이다. 당 중앙위원회의 장이 총서기이며, 총서기는 중앙정치국 회의와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서기처의 업무를 주재한다.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은 중앙위원회 폐회 기간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하며 전국의 모든 정치 업무를 지도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중앙조직기구와 최고 지도 기구의 중심이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 정치국과 더불어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중앙서기처
중국공산당의 일상 업무를 책임지나 정책 결정 기구는 아니며 사무기구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하에 당헌과 당내 법규를 수호하고 당풍확립, 당 노선, 방침, 정책 및 결의의 집행 상황을 검사 처리하며 당원의 해당, 반당행위 및 당기 위반 등을 조사한다.
중앙군사위원회
당이 군을 지배한다는 원칙 하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을 가지 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다.
국가기관
중국의 국가기관은 입법부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원, 사법부에 해당하는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 기구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인민해방군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 및 형사, 민사, 국가기관과 각종 기본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최고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국가주석, 부주석,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 검찰원장을 선출 또는 파면할 수 있는 직권을 가지고 있다. 5년에 1회 개최되며 1년에 한 번씩 연례회의가 열린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전인대 폐회 기간 동안 전인대를 대표하여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 법률의 해석 및 시행 감독과 법률 개정 등이 주된 업무이다. 위원장은 전인대 회의를 주재하고 상무위 회의를 소집한다.
국무원
중국의 최고 행정 기관인 중앙 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가 제정한 헌법, 법률 결의를 집행할 의무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하여 부총리와 국무위원, 각 부 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인민법원
중국의 최고 사법(재판)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법원이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최고인민검찰원
중국의 최고 사법(검찰)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검찰원이 체포의 승인, 공소제기와 유지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최고인민법원과 마찬가지로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인민정치협상회의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1949 년 9월 중국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통일전선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초기 임시 헌법에 해당하는 「정협공동강령()」을 제정하는 등 의회 역할을 대행하였다. 제1차 전인대 개최 이전까지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합법성을 상징하는 최고 권력기구였으나 전인대 출범 이후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정책 및 법령을 선전하거나 대외 업무를 협의하는 외곽 조직으로 바뀌었다. 최근 중국의 대외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정협의 대외 활동도 강화되고 있다.

정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는 공산당내에서의 노선을 통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간의 갈등의 중심적인 축을 이루어왔다. 정치갈등이나 권력갈등의 양상은 주로 주요한 국가노선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전국인민대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최고 3,500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 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성()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등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29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으며, 총리 1명, 부총리 4명, 국무위원 5명, 비서장 1명, 각처 부장 23명(중국인민은행장 포함)을 둔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2005년 현재 국가주석은 후진타오()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윈자바오()이며 이들은 개혁개방세력을 대표한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홍()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전()이라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에 의한 건국후 중국의 현대사는 전자를 중시하는 변혁기와 후자를 중시하는 공고기가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6년 다시 등장한 덩샤오핑은 개혁 및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홍과 전의 갈등은 내재되어 있었다. 즉 개혁 및 개방 정책에 의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놓고 홍과 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게 되면서 의견의 차이는 1989년 6월의 톈안먼[(천안문)]사태로 나타났으며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는 보수파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이 결합된 법륜공이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강한 탄압을 받고 있다.

정치제도

중국의 국가조직은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국가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정점으로 행정ㆍ사법ㆍ검찰기구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연계되어 중앙의 통일적 관할 아래 있다. 전인대와 병렬적 위치에 전인대 상무위원회, 국가주석, 국가중앙군사위원회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원,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이 예속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헌법상 국회 기능을 하는 전인대는 명목상으로만 최고 국가권력기관이며 정당인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공산당은 국가의 중요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기구를 장악하고 중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공산당이 내린다. 따라서 전인대와 이에 속해 있는 국무원(우리나라의 행정부)은 공산당의 결정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공산당의 하급기관에 불과하다.


공산당의 주요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총서기와 상무위원회가 정책을 제안하고 이것이 중앙위원회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비준을 받으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된다. 일단 이 과정을 거쳐 채택된 정책에 대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모든 당원은 일단 지지를 하는 것이 관례이다.

중국 정치와 권력의 구조는 당(黨)과 정(政)으로 분리돼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당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1978년 개혁ㆍ개방 이래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부터는 촌(村)ㆍ진(鎭) 등 최소 행정구역 단위의 대표자들을 당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중국에는 중국공산당 이외에 8개의 정당(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대만민주자치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구삼학사)이 있으나 8개의 당파는 독립정당으로 보기는 어렵고 중국공산당의 협조기관 형식으로 존재한다. 당 중앙에는 서기국만 두고 주석과 부주석을 폐지함으로써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다.

공산당을 제외한 8개 정당•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 국민당과 유관인사로 구성(1948년 1월 성립)
• 중국민주동맹 : 지식층(1941년 10월 성립)
• 대만민주자치동맹 : 대륙에 거주하는 대만호적의 인사(1947년 11월 성립)
• 중국민주건국회 : 경제계인사와 유관 전문학자(1945년 12월 성립)
• 중국민주촉진회 : 교육, 문화, 과학, 출판 업무에 종사하는 지식층(1945년 12월)
• 중국농공민주당 : 위생, 의약, 과학기술 분야의 인사(1930년 성립)
• 중국치공당 : 화교관련 인 (1925년 성립)
• 구삼학사 : 과학기술, 문화, 교육, 의약 방면의 중산층 인사(1944년 12월 성립)

이처럼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정당의 목적인 정권획득의 의미가 사라졌고 공산당에 의한 독재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보니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중국의 선거법에 의하면 국가주석과 전인대의 의원을 선출하는 데는 제도와 방식이 법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국가주석과 전인대 의원을 뽑는 데는 중국의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으로 인해 간접선거의 형태를 띤다.


중국이 우주개발, 특히 달 탐험을 강력히 추진하는 목적은 국가 위상을 높이고 국민을 단결시키며 항공 기술, 재료공학, 생명공학, 전자공학 등 최첨단 과학 기술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미래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다. 중국의 달 탐험 계획은 4단계로 나뉘어 있다.

제1단계는 지난 2004년에 시작되었는데, 1,750억 원을 투입해 금년 중에 무인 달 탐사선 창어(Chang’e) 1호를 달 궤도에 진입시켜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제2단계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이며, 로봇과 로버를 달에 착륙시켜 재료를 채취하고 분석해서 자료를 받는 것이다.

제3단계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인데, 달에 무인 우주선을 착륙시킨 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가져오는 것이다.

제4단계는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진행되며,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내는 것이다.

지리와 자연 환경.

중국은 아시아의 동부에 위치하며 태평양 서안에 접하고 있는 육지면적 약 960만 ㎢로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의 영토를 보유한 나라이다. 중국의 강역은 동서로 60여 도(), 5개 시간 구(), 약 5,200㎞, 남북으로 50여 도(), 약 5,500㎞에 이르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보하이(, 발해), 황해(), 동해()와 남해()에 접해 있고 도서(屿)는 약 5,000여 개로 절대 다수가 창강() 하구 이남의 해역()에 위치한다. 가장 큰 섬은 타이완이며 다음으로 하이난도() 및 충밍도(, 숭명도)의 순으로 이어지며 가장 큰 군도()는 주산군도()이다. 반도는 랴오둥반도()가 가장 크며 다음으로 산둥반도()로 이어지고 대륙의 해안선 총연장은 18,000여 ㎞에 달한다.

지형은 산지, 고원, 구릉, 분지, 평원 및 사막 등 각기 다른 유형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세는 서고동저(西)로 크게 3단계의 계단 형태로 이루어져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서남부에 위치한 칭장고원()은 가장 지대가 높은 제1계단에 해당하며, 쿤룬산맥(), 치롄산맥(, 기련산맥), 횡돤산맥(, 횡단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쪽과 북쪽으로 낮아지고 있는 일련의 고원과 분지가 제2계단, 다싱안령(, 대흥안령), 타이항산(, 태행산), 무산(), 우링산(, 무릉산), 쉐펑산(, 설봉산)으로 이어지는 선상의 동쪽에 있는 평원이 세 번째 계단에 해당된다.

중국의 산지는 광활하며 산지, 고원, 분지가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여 평원이 적고 고도의 차이가 심하다. 3대 평원은 동베이평원(, 동북평원), 화베이평원(, 화베이평원) 및 창강중하류평원()으로 이 중 둥베이평원()이 가장 넓은 평원이다. 사막지역은 서부지구에 분포되어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의 면적이 가장 넓으며 또한 세계 최대의 유동사막()이다. 중국의 지형에 따른 분포는 산지 33%, 고원, 26%, 분지, 19%, 평원, 12%, 구릉 10%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정부는 베이징, 톈진(), 허베이성(), 산시(西), 네이멍구자치구()를 화베이(, 화북), 헤이룽장, 지린, 랴오둥을 둥베이(, 동북), 장쑤성(), 산둥성(), 저장, 안후이, 장시, 푸젠, 상하이()를 화둥(, 화동), 허난, 후베이, 후난, 광둥, 홍콩, 광시좡족자치구(广西)를 중난(, 중남), 쓰촨성(), 충칭, 구이저우, 윈난을 시남(西, 서남), 산시(西), 산시성(西, 섬서성), 간쑤, 칭하이, 닝샤후이족자치구()및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시베이(西, 서북)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화베이( : ), 둥베이( : ), 네이몽(), 화둥( : ), 화중( : ), 화난( : ), 시난(西 : ), 칭장(), 시베이(西 : ), 신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전통적인 구분법으로 중국본부()와 만주(), 신장(), 몽고(), 청강장() 등의 구역으로 구분하기도 하는 데 이러한 구분법은 인문지리와 민족분포에 따른 분류로 최근에는 쓰이지 않고 있다. 또한 친령(, 진령)~화이하(, 회하)를 있는 선이 남방과 북방의 지리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나 사람들의 관습적으로 창강()을 남방과 북방의 분계선으로 간주해 왔다.

2. 산지 지형

중국은 산지, 고원 및 구릉이 육지면적의 약 67%를 차지하며 분지와 평원이 육지면적의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 산지와 고원은 서부지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발 500m 이하의 지역은 단지 전 국토의 16%에 불과하고 해발 1,000m 이상이 65%이며 전 세계 8,000m 이상 12개 산봉우리 중 중국 내에 7개가 위치하고 있다.

가. 산맥(山脉)

중국의 산맥은 주향()에 따라 동서주향, 남북주향, 북동주향의 산맥으로 구분되며 대체적으로 허란산맥(, 허란산맥)~류판산맥(, 육반산맥)~용문산맥~아이라오산(, 애뢰산맥)을 경계로 동쪽에는 북동주향이 많이 분포하며 서쪽에는 북서주향이 많다.

※ 강디쓰산맥카라코람산맥쿤룬산맥치롄산맥뤄샤오산맥난링산맥탕구라산맥다싱안령우이산맥우링산맥셴샤령쉐펑산맥샤오싱안령알타이산맥옌산산맥녠칭탕구라산, 류판산맥, 인산산맥친령톈산산맥타이항산맥, 허란산맥, 헝돤산맥히말라야 산맥

지역별 주요 산과 산맥

지역별 주요 산과 산맥
지역주요 산맥
서북(西)
알타이산(, 아이태산), 톈산(, 천산), 아얼진산(, 아이금산), 치롄산(, 기련산), 수러난산(, 소륵남산), 쿤룬산(, 곤륜산), 알카산(, 아이객산), 커커시리산(西, 가가서리산), 바옌카라산(, 파언객랍산), 아니마칭산(, 아니마경산), 탕구라산(, 당고랍산), 강디쓰산(, 강저사산), 녠칭탕구라산(, 염청당고랍산), 카라코람산(, 객라곤륜산), 히말라야 산(, 희마랍아산), 친령(, 진령), 류판산(, 육반산), 허란산(, 하란산)
서남(西)
헝돤산맥( : ), 공가산(, 공알산), 우량산(, 무량산), 아이라오산(, 애뢰산), 우롄봉(, 오련봉), 우멍산(, 오몽산), 먀오령(, 묘령), 다뤄산(, 대루산)
동북()
다싱안령(, 대흥안령), 샤오싱안령(, 소흥안령), 창바이산(, 장백산), 장광차이령(广, 장광재령) 완다산(, 완달산), 지린하다령(, 길림합달령), 룽강산(, 용강산), 첸산(, 천산)
화북()
옌산(, 연산), 인산(, 음산), 타이항산(, 태행산), 우타이산(, 오대산), 뤼량산(, 여량산), 왕우산(, 왕옥산), 중타오산(, 중조산), 타이산(, 태산)
화중()
다볘산(, 대별산), 푸뉴산(, 복우산), 샤오산(, 효산), 슝얼산(, 웅이산), 퉁바이산(, 동백산), 우당산(, 무당산), 무푸산(, 막부산), 징산(, 형산), 우산(, 무산), 우링산(, 무릉산), 쉐펑산(, 설봉산), 주이산(, 구이산)
화동()
윈타이산(, 운대산), 톈무산(, 천목산), 옌당산(, 안탕산), 콰이지산(, 회계산), 쿼창산(, 괄창산), 셴샤령(, 선하령), 둥관산(, 동관산), 우이산(, 무이산), 다이원산(, 대운산), 황산(), 주화산(, 구화산), 뤄샤오산(, 나소산), 화이위산(怀, 회옥산), 위산(, 우산), 위산(, 옥산)
화남()
남령남령( : ), 야오산(, 요산), 구주롄산(, 구련산), 스완다산(, 십만대산), 원카이다산(, 운개대산), 류자오산(, 육조산), 우즈산(, 오지산)

나. 주요 산

다. 고원(高原)

중국의 4대 고원은 칭장고원(), 네이멍구고원(), 황토고원() 및 윈구이고원(, 운귀고원)으로 칭장고원()이 가장 높다.

※네이멍구고원, 윈구이고원, 칭장고원, 황토고원

중국 고원() 현황

중국 고원() 현황
대고원구소속 고원
칭장고원()
장베이고원(, 장북고원),
칭남고원(, 청남고원),
촨시고원(西, 천서고원),
장둥고원(, 장동고원)
네이멍구고원()
후룬베이얼고원(, 호륜패이고원),
시린궈러고원(, 석림곽륵고원),
우란차부고원(, 오란찰포고원),
어얼둬쓰고원(, 악이다사고원),
아라산고원(, 아랍선고원),
바옌나오얼고원(, 파언뇨이고원)
황토고원()
산베이고원(, 섬북고원),
진베이고원(, 진북고원),
진난고원(, 진남고원),
닝난고원(, 영남고원),
간둥고원(, 감동고원)
윈구이고원()
뎬둥고원(, 전동고원),
뎬베이고원(, 전북고원),
뎬시고원(西, 전서고원),
뎬중고원(, 전중고원),
첸베이고원(, 검북고원),
첸중고원(, 검중고원),
첸시고원(西, 검서고원)

라. 분지

중국의 분지는 대부분 서북 내륙 건조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4대 분지 중 쓰촨분지()를 제외한 차이다무분지(, 시달목분지), 타림분지(), 준가얼분지()가 이곳에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시달목분지는 중국 최대의 분지이다.

※쓰촨분지, 차이다무분지, 준가얼분지, 타림분지, 투루판분지

3. 평원 지형

평원은 중국의 3계단 지형 중에서 세 번째 계단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하천, 호수 및 바다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낮고 평탄하며 하천망이 조밀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주요 식량생산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3대 평원으로 둥베이평원(), 화베이평원(), 창강중하류평원()이 있으며 이외에도 동남연해지구에는 삼각주평원과 연해평원이 분포한다.

※ 장한평원관중평원, 둥베이평원, 퉁팅호평원싼장평원쑹넌평원양호평원창강삼각주, 창강중하류평원, 주강삼각주허타오평원하이하평원, 화베이평원

중국 평원() 현황

중국 평원() 현황
대평원구소속 평원
둥베이평원()
싼장평원(), 쑹넌평원(, 송눈평원), 랴오허평원()
화베이평원()
하이허평원(), 황하삼각주(), 자오라이평원(), 화이하평원()
창강중하류평원()
양호평원(), 포양평원(), 완중평원(), 창강삼각주(,) , 타이호평원(), 항자호평원(), 퉁팅호평원(), 장한평원(), 간푸평원(), 리양평원()
동남연해제평원(沿)
닝샤오평원(), 원황평원(), 푸저우분지(), 싱화평원(), 취안저우평원(), 장저우평원(), 차오산평원(), 주강삼각주(), 하이장평원(), 난류장삼각주()
황하중상류평원()
황수이곡지(), 인촨평원(), 허타오평원(, 하투평원), 투모촨평원(), 펀허곡지(), 윈청분지(), 웨이허평원()
기타()
청두평원(), 한수이곡지(), 이리곡지(), 허시주랑(西)

4. 하천과 호소()

가. 주요 하천

중국은 영토가 넓고 다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하천과 호수, 거대한 빙하, 적설로 인한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관개, 수상운수, 발전, 용수공급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중 하천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외류하()와 내륙호수에 유입되는 내류하()로 구분되며 외류하()는 창강(), 황하(), 헤이룽강(), 주강(), 랴오하(, 요하), 하이하(, 해하), 화이하(, 회하) 등과 같이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에 유입하는 태평양해양수계()와 시짱자치구(西)의 야루장부강(, 아로장포강)과 같이 동쪽으로 흐르다 국경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흐르며 인도양에 유입되는 서남부 지역의 인도양수계(), 신장()의 액이제사하()와 같이 북쪽으로 흘러 국경을 지나 북빙양()으로 흘러들어가는 북빙양수계()로 나뉘어진다. 내륙독립수계()에 속하며 내륙의 호수로 흘러들어가거나 혹은 사막에서 소실되고 있는 내류하()는 주로 서북부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신장() 남부의 타리무하(, 탑리목하)는 중국 최대의 내류하()로 전장은 2,179㎞에 달한다.

중국에서 남부, 동부 및 북부의 하천은 모두 외류하()에 속하며 남방 하류의 수량은 매우 커서 수위가 계절변화에 따른 차이가 비교적 작으며 하천의 범람 기간이 비교적 길고 토사의 퇴적이 적다. 반면에 북방에는 헤이룽강() 등 몇몇의 하천을 제외하고 하수()의 유량이 적고 수위가 계절변화에 따라 크며, 범람 기간이 짧으며 토사의 함유량이 많다. 창강()은 중국의 첫 번째, 세계 제3대 하천이며 황하() 및 주강()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화이하(, 회하), 랴오하(, 요하), 하이하(, 해하) 및 쑹화강(, 송화강)을 합쳐 7대수계()라고 부르고 있다.

자링강간강진사강나취하누강넌강당곡란창강롼하미뤄강무단강민강민강푸두하푸강베이강샹강상천하쑹화강아커쑤하야루장부강야룽강리수예얼창하융딩하, 우강, 우수리강랴오하웨이하창강첸탕강주강칭이강추마얼하퉈퉈하타리무하타이쯔하퉁톈하바수하이하화톈하황포강황하화이하헤이룽강

나. 주요 호소(湖沼)

중국에는 호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데 주요 분포지역은 칭장고원() 지역과 창강중하류평원()이며 5대 담수호()인 포양호(, 파양호), 둥팅호(, 동정호), 타이호(, 태호), 훙쩌호(, 홍택호) 및 차오호(, 소호)는 모두 창강유역()에 분포한다. 칭하이호(, 청해호)는 면적이 가장 넓은 호수이며 세계 제일의 함수호()이며 나무춰(, 납목착)는 제2대 함수호()이다. 또한 호수의 형성원인이 따라 구조호, 단층호, 언색호, 하적호 해적호, 카르스트호, 빙하호, 화구호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큰 호수는 주로 지질구조의 영향으로 일반적으로 수심이 깊고 호안선이 곧은 특징을 보이며, 지역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어 시짱(西)지역에는 빙하호가 많고, 윈구이고원에는 카르스트호, 창강() 중하류 지역에는 하적호, 연해평원에는 해적호가 많이 분포한다.

중국의 호소지역은 형성원인과 수량변화 등의 특성에 의해 동부평원의 호소지역, 동북평원 산지 호소지역. 윈구이고원 호소지역, 몽신고원 호소지역, 칭장고원 호소지역의 5대 호수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쿤밍호, 쿤밍호, 주자이거우난완호단장커우수고, 둥팅호, 바이양뎬시호, 차오호, 웨야취안뎬츠, 칭하이호, 타이핑, 타이호, 포양호, 쉬안우호, 훙쩌호, 화칭츠

주향 및 지역에 따른 산맥의 분포
서쪽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리아 산맥에서 북동쪽으로 톈산〔〕 산맥, 알타이 산맥, 대싱안링〔〕 산맥을 축으로 러시아·몽골 인민 공화국과 남동쪽은 톈산 고원을 경계로 동남 아시아의 라오스·미얀마와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내부는 다시 쿤룬 산맥, 탕구라 산맥, 바옌카리 산맥, 치렌 산맥이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남북으로 타이항〔〕 산맥이 놓여 있고, 동서로 친링〔〕 산맥, 난닝〔〕 산맥, 우이〔〕 산맥이 놓여 있으며, 둥베이〔, 만주〕 평원, 화베이〔〕 평원, 창장 중·하류 평원이 있다.

이 밖에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이 있으며, 타림 분지와 웨이수이〔〕 분지가 있다. 대체로 허난〔〕성과 허베이〔〕성은 황하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고, 후난〔〕성과 후베이〔〕성은 둥팅호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며, 산둥〔〕성과 산시〔西〕성은 타이항〔〕 산맥을 기준으로 나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도 화둥〔〕·화시〔西〕·화난〔〕·화중() 지방으로도 나뉘고 있다.

화둥은 산둥·장쑤·안후이·저장·푸젠·장시성과 상하이 시를 가리키고, 화시는 창장 상류의 충칭시와 쓰촨성 일대를 가리킨다. 화난은 주강 유역으로 광둥과 광시좡족 자치구를 가리키고, 화베이는 허베이·산시·베이징시·톈진시 일대를 가리키며, 화중은 창장의 중류, 즉 후베이·후난성 일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만주라고 지칭하고 있는 랴오허 이동 지역을 둥베이 지방이라 부르고 있다.
동서주향 : 톈산산맥(, 천산산맥), 인산산맥(, 음산산맥), 쿤룬산맥(, 곤륜산맥), 친링산맥(, 진령산맥), 난링산맥(, 남령산맥) 등
▪ 북동주향 : 다싱안령(), 창바이산맥(, 장백산맥) 등
▪ 북서주향 : 알타이산(), 치롄산맥(, 기련산맥), 히말라야 산맥() 등
▪ 남북주향 : 헝돤산맥(, 황단산맥), 허란산맥(, 하란산맥), 류판산맥(, 육반산맥) 등
하천은 대부분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황해로 들어가거나 동중국해로 들어가는데, 황허〔, 5464㎞〕와 창장〔, 양쯔()강, 6300㎞〕이 대표적이며, 화이〔〕수·첸탕〔〕강이 있고, 남중국해로 들어가는 주()강 등이 있다. 그리고 동북쪽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헤이룽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또,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호수가 분포되어 있는데, 비교적 큰 것은 칭하이성의 칭하이〔〕호가 4538㎢ 장시성의 포양〔〕호가 3976㎢, 후난성의 둥팅〔〕호가 3915㎢이다.

사막

중국의 북방지역에는 사막, 고비와 여러 가지 풍식지형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는 건조 및 반 건조 기후의 산물이다. 동쪽으로는 쑹랴오평원(, 송요평원) 서부에서 서쪽의 파미르고원에까지 이르며 남북 간은 북위 35~50도 사이의 광활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사막지형은 90%가 허란산맥, 오초령 서쪽의 서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데 강수량이 적고 물리적 풍화작용이 활발하여 풍식작용이 활발하다.

주요 사막으로는 타클라마칸사막(), 고이반통고특사사막(), 파단지린사막(), 텅거리사막(, 등격리사막), 마오우쑤사막(, 모오소사막), 고모찹격사막(), 차이다무분지(, 시달목분지) 사막(), 고포기사막(), 오란포화사막() 등이 있다. 나머지 10%의 사막지형은 네이멍구자치구()와 쑹랴오평원(, 송요평원) 서부 초원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산맥, 산, 강, 분지, 고원, 족,
강디쓰산맥카라코람산맥쿤룬산맥치롄산맥뤄샤오산맥난링산맥탕구라산맥다싱안령우이산맥우링산맥셴샤령쉐펑산맥샤오싱안령알타이산맥옌산산맥녠칭탕구라산류판산맥인산산맥친령톈산산맥타이항산맥허란산맥헝돤산맥히말라야 산맥쿵퉁산주화산김교각단샤산다볘산메이리설산우당산우이산무이암차판산푸퉈산사대불교명산푸뉴산쑹산오악어메이산옌당산루산우타이산오령오지산위룽설산윈타이산류판산쯔진산징강산주무랑마봉칭청산총령타이산헝산화궈산화산훠옌산황산네이멍구고원윈구이고원칭장고원황토고원쓰촨분지차이다무분지준가얼분지타림분지투루판분지장한평원관중평원둥베이평원퉁팅호평원싼장평원쑹넌평원양호평원창강삼각주창강중하류평원주강삼각주허타오평원하이하평원화베이평원, 자링강강, 진사강나취하누강넌강당곡란창강롼하미뤄강무단강민강푸두하푸강베이강샹강상천하쑹화강아커쑤하야루장부강야룽강리수예얼창하융딩하우강우수리강랴오하웨이하창강첸탕강주강칭이강추마얼하퉈퉈하타리무하타이쯔하퉁톈하바수하이하화톈하황포강황하화이하헤이룽강징항대운하남수북조공정쿤밍호쿤밍호주자이거우난완호단장커우수고둥팅호바이양뎬시호차오호웨야취안뎬츠칭하이호타이핑타이호포양호쉬안우호훙쩌호화칭츠타클라마칸사막텅거리사막

중국()?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천하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지배자를 천자라고 칭하여 지배자는 나라의 가운데 있어야 하며, 그가 지배하는 지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중국을 차이나(China), 또는 지나()라고 부른다. 차이나나 지나는 일반적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 Chin)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진이 바로 중국을 칭하게 되었고, 여기에 a, 또는 e를 붙여 영어의 China,또는 불어의 Chine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로 표기할 때 (지나)라고 하여 일본은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즉, 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지나란 불경의 해석에서 '문물이 발달한 나라'를 가리키는 뜻으로 되어 있어 중국의 문물이 발달했기 때문에 중국을 가리킨다는 설과, 인도 산스크리트어〔〕에 '지나란 변방 지방'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즉, 인도의 변방에 있었던 중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이미 불경이나 인도의 고전에 '지나'란 말이 나와 있고, 그 '지나'란 단어가 중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China도 진(Chin)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도의 고전이란 비록 기원 후에 편집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를 가리키지만 그 내용은 기원전 5세기에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에 지나란 말이 나온다. 헤브라이 인의 『구약 성경』 「이사야의 서」에 따르면 '이들 멀리 시니(지나의 음역)에서 온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약 성서의 경우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이루어졌으므로 당연히 진시황의 통일 이전이다.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에서 China란 말이 기원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 서방 사람들은 중국을 지칭해 Seres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그리스어로 비단이라는 ser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 a를 붙여 Sera가 되었고, 이 말이 중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주장은 중국의 비단과 함께 주요 수출품이었던 도자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중국문화 의 틀' 상고시대에서 한대까지!
대부분의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그렇듯이 중국문명도 황하라는 대하천 유역의 비옥한 옥토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그대로 누런 하천, 황하는 중국의 상징이다. 황하가 황하로 불리는 까닭은 서북쪽의 황토고원에서 씻겨져온 황토 때문이다. 황하는 바닥에 퇴적된 황토로 인해 수시로 범람하는 하천이다. 황하는 실로 잔인한 강이다. 세계의 어느 하천보다 범람의 규모가 크고 파괴적이었다. 한 번 대홍수가 나면 강줄기 자체를 아예 바꾸기 때문에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였다. 황하의 종점의 위치는 몇 천 년 동안 수십 차례 바뀌었다. 산동반도 위쪽 발해만으로 흘러들어간 적도 있었고, 산동반도 아래쪽으로 흘러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그 폭이 무려 7백 킬로미터가 넘는다. 거대한 누런 용 황하는 한반도의 폭보다 더 크게 위아래로 꿈틀거렸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이라는 나라는 항상 그 방대한 규모로 우리를 압도한다. 중국이 처음부터 큰 나라는 아니었다. 처음 출발은 황하 중류 유역에 시작한 조그만 부족공동체였다. 중국인들이 고대의 성왕으로 칭송해 마지않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그저 황하 중상류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들의 공동의장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요임금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진 신하였던 순임금에게 물려주었고, 순임금 또한 아들이 그다지 똑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두뇌게임인 바둑은 순임금이 멍청한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복고적 경향을 지닌 후대의 사람들, 특히 유가의 사람들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신하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어진 왕의 대명사로 칭송했는데, 사실 이때는 부족 내의 가부장제는 확립되었는지는 몰라도 부족연합체 단위에서 왕위의 직계 계승제는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우임금 때부터 비로소 왕실의 직계 가족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조를 하()라고 부른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공통점은 치수사업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황하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는 생존에 관련된 절대 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에 결국 치수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이 세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집약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경문화, 그리고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필요로 하는 자연조건 속에서 중국문화의 원형이 서서히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은 걸()왕이다. 걸임금에게는 말희()라는 천하절색이 있었는데 그는 고급 천의 대명사인 비단을 찢는 소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걸왕은 그를 위해 궁녀에게 명하여 옆에서 항상 비단을 찢으라고 했다. 또한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안주를 나무에 걸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 망하고 만다. 다음 왕조는 탕()왕이 세운 상()나라다. 대략 기원전 17세기 무렵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수도의 지명을 따서 은()나라라고도 한다.

요순임금이나 하 왕조에 대한 기록들은 전설에 가까워 역사적 자료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은나라는 갑골문()의 발굴로 인해 그 존재가 명확히 증명된 왕조로 사실상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다. 갑골문은 거북의 껍질과 소의 견갑골이나 넓적다리뼈에 새겨진 글자인데 그 용도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복점이었다. 갑골에 글자를 새긴 다음 구멍을 뚫고 열을 가해 그것이 비틀어지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던 것이다. 갑골문은 은대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한자의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자료다. 갑골문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 특이한 모양과 신비스런 글자 때문에 용의 뼈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한약방에서 이를 갈아서 약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은나라의 왕위 계승은 부자 상속만이 아니라 형제 상속도 병행했다. 은나라 때까지는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애매했고 샤머니즘과 복점이 유행했다. 갑골문에는 전쟁과 국가의 대소사뿐만 아니라 왕실의 혼인이나 질병 등 일상적인 내용들도 있다. 이로 보아 거의 대부분의 일을 복점에 의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 대부분의 원시 부족들이 그랬듯이 하늘 신, 땅 신, 곡식 신 등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이한 것은 조상신들에 대한 제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문화의 원형이 되고 있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은 달기()라는 경국지색()에 빠져 걸왕과 마찬가지로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을 했다.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때 서쪽 변방의 주나라에는 문왕()이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문왕은 은나라의 거북점을 개선하여 음양 두 개의 코드를 여섯 번 반복해서 64괘를 만들고 이것으로 점을 치는 좀더 과학적인 점술인 주역을 개발했고 매 괘와 그 괘의 여섯 효에다 길흉을 가리는 말들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은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낚던 강태공을 등용했는데 그는 기원전 11세기 무렵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새로운 천하인 주나라를 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자기를 알아준 사람에게 보답했다.

왕위 계승에서 부자와 형제 계승이 뒤섞여 있던 은나라와는 달리 주나라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아울러 방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왕도와 그 주변만 직속으로 다스리고 나머지 영토는 왕실의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어 지배를 맡기는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각 지방의 제후()들은 자기의 영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되 중앙의 천자를 대종자()로 모셨다. 그리고 제후들은 다시 자기의 도읍을 직속으로 다스리고 나머지 영역을 경대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경대부들은 제후를 종자()로 모셨다. 경대부들은 자신들의 땅을 일반 백성들에게 분배하고 일반 백성은 경대부를 종자로 모셨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종법제도()인데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국가 단위로 확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종법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시스템 전체를 총괄하는 말이 예()다. ''라는 글자의 왼쪽 부수 ''는 원래 땅 귀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오른쪽 ''은 제기에 옥을 담아놓은 것이다. 그것은 땅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예는 원래 고대의 제례의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대에 와서 예의 의미는 크게 확장된다. 주대의 예는 단순히 제례의식이나 그것을 행하는 공경스러우면서도 정성스러운 마음가짐뿐만이 아니라 신분질서와 사회규범, 나아가 여러 가지 문물제도까지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이다.

중국이 제정일치의 종교적인 사회시스템에서 인문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더 합리적인 사회시스템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의 지배 아래 있었던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고 인문주의적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중국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 예 문화의 기초를 잡은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으로, 공자는 그를 지극히 앙망하여 꿈속에서도 만나기를 바랐다.

주나라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유왕()이라는 못난 임금에 이르러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유왕에게도 걸주와 마찬가지로 천하절색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사()였다. 포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포사의 웃음을 보고 싶어 묘책을 강구하던 유왕은 어떤 신하의 제의로 아무런 이유 없이 왕궁의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피웠다. 봉화를 보고 부랴부랴 군장을 챙겨 왕도로 달려온 각 지역의 군대들은 왕도에 아무런 일이 없자 우왕좌왕했고 나중에 그냥 심심풀이로 봉화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으로 군대를 돌려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 이를 보고 포사가 소리 내어 웃었고 유왕은 크게 만족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을 사기 위해 어리석은 장난을 했던 유왕은 나중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포사에게 밀려난 왕후의 아버지가 북방의 유목민족과 결탁하여 왕도를 공격했을 때 긴급히 봉화를 올렸지만 『이솝우화』의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의 경우처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수도는 불타고 왕은 죽게 된다. 이에 주 왕실은 지금의 서안 근처에 있는 수도를 동쪽으로 약 3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인 낙양으로 옮기고 유왕의 아들을 옹립하여 새롭게 왕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동주시대라 하고 그 이전을 서주시대라고 부른다.

망국의 군주에게는 항상 경국지색이 있다. 물론 군주가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는 것은 망국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하, 은, 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은 다소 과장된 바가 있다. 승자를 미화하기 위해 패자를 용렬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만만한 것이 포악하거나 우매한 성격에다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국지색을 치명적 요부로 묘사함으로써 후대의 군주에게 훈계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여자의 특이한 취미나 개성을 망국의 원인으로 부각시켰다. 주지육림을 좋아한다든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한다든지, 봉화를 보고 달려온 군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좋아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다.

동주시대는 주나라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어 각 지역의 제후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패권을 다투던 시기다. 동주시대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를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춘추시대(BC 770~403)는 공자가 정리했다고 하는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고 전쟁도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종주국인 주나라를 존중했고 전쟁의 규모와 양상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전국시대(BC 403~221)는 『전국책』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춘추시대 강국의 하나였던 진()나라가 내부의 신하들의 반란으로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로 분열된 것을 기점으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주 왕조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각 제후국들은 노골적으로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면서 치열하게 전쟁을 했는데, 전쟁의 규모도 엄청났고 그 피해 또한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춘추전국시대를 대혼란기로 규정한다.

춘추전국시대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라 중국이 새로운 단계로 비약하는 데 필요했던 위대한 창조적 혼란기였다. 우선 지리적으로 보아 중국문명의 영역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서주시대만 해도 중국의 영역이란 황하 중류에서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북중국 평원 일대에 그쳤지만 동주시대에는 중국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바다가 있는 동쪽과 강력한 유목민족들이 있는 북쪽으로의 확장은 별로 없었지만 서쪽과 남쪽으로는 크게 확장되었다.

서쪽에는 뒤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나라가 편입되었고 사천성도 진나라에 편입되면서 중국문화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남쪽으로의 확장이 돋보인다. 춘추 후기에 이르러 양자강 중류 유역의 초()나라가 중국문명권에 흡수되었고, 전국 초기에 이르러서는 양자강 남쪽에 자리 잡은 오()나라와 지금의 절강성 일대에 자리 잡은 월()나라가 중국문명권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서주시대에는 모두 남쪽 오랑캐인 남만족에 속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문명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말기에는 후대 한족 세력권의 경계선이 대략 형성되었다. 이들 광대한 지역을 중국문명으로 흡수시켜 통합시킨 원동력은 바로 한자와 예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가 위대한 시대로 불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사상의 기틀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춘추 말기에서부터 제후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사회의 변동과 혼란도 극심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흔히 제자백가라고 한다. 백가는 중국 사람들의 상투적인 과장법이고 실제로는 십가 정도에 그치는데, 유가(), 도가(), 법가(), 묵가(), 음양가(), 명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제대로 사상체계를 갖춘 학파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유가, 도가, 법가, 묵가를 들 수 있다. 묵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와 반전사상을 주장하는 일종의 종교집단으로, 한때는 그 세력이 대단했지만 한대 이후에는 금지사상으로 지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고, 법가는 진시황에게 채택되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형법과 술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쇠퇴하여 결국 유가와 도가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들 제자백가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사상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영겁의 윤회 속에서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우주의 창조자인 신의 뜻을 따라 내세의 영생복락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종교적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현세를 중시하고 현실적인 인간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철학처럼 만물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변화하는가 불변하는가 등의 우주자연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및 사회통합에 대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예 문화라고 하는 중국적 토양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았을 때 예 문화를 가장 충실하게 수호하려고 했던 것은 유가사상이지만 예 문화에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도가에서조차도 정치에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 문화의 영향력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사상으로 볼 때 노자사상은 백성들에 대한 작위적인 간섭을 최소화한 무위의 정치를 강조했고, 법가는 가혹하리만큼 철저한 법의 집행을 통한 법치주의를 강조했으며, 유가는 인의와 예악제도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공자사상의 한 맥을 이어받은 순자의 문하에서 법가사상의 최대의 이론가인 한비자()와 최대의 실천가인 이사()가 나온 사실이나 한비자가 노자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노자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했던 일들을 볼 때 유가, 도가, 법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법가사상의 힘을 빌려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했다. 진나라의 왕 영정()은 삼황오제()를 줄여 처음으로 황제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즉, 시황제()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실제적인 의미의 강력한 제국인 중국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나라는 유럽에 중국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왕조다. 오늘날의 차이나(China)는 바로 진에서 나온 이름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로 당시까지 서로 약간씩 차이를 보이던 문자와 도량형, 수레바퀴의 크기를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도 통제했다. 그리고 주나라와 같은 봉건제도가 아니라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 현을 두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군현제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다. 다소 가혹한 면도 있었지만 진시황의 통합정책은 단일문명권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은 또한 북쪽의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장성을 축조하고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아방궁을 지었다.

진시황의 가혹한 통치행위는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몰락하고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항우와 유방의 치열한 싸움 끝에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웠다. 비록 짧은 기간의 대치였지만 이 두 영웅의 싸움은 깊은 인상을 남겨 후대 『초한지()』와 같은 소설과 『패왕별희()』와 같은 희곡으로 남아 있고, 장기라는 놀이로 전해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기원전 206년에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진시황의 정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제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일단 진시황이 추구했던 군현제가 현실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봉건제와 군현제를 절충한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사상에서도 한대 초기에는 법가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하기 위해 노자가 주장한 무위의 정치를 펼치다가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 때 이르러 중도적인 유가를 관학으로 삼게 된다. 한나라는 중간에 왕망()이라는 외척이 황당한 도참사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나라를 잠시 빼앗은 15년을 빼고 무려 4백 년이 넘게 존속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최장수 통일 왕조다. 이 기간 동안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국문화의 토대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한족, 한문화, 한자, 한어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상고시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는 중국문화의 기본 틀이 잡힌 시기다. 이 시기까지는 중국문화사에서 고대에 해당한다. 중국인들은 상고에서 한대까지를 흔히 삼대양한()이라고 일컫는다. 삼대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를 가리키고, 양한이란 서한(西)과 동한()을 말한다. 처음 유방이 나라를 세워 외척인 왕망에게 망하기 전까지가 서한이고, 이후 광무제가 다시 일으킨 나라가 동한이다. 흔히 전한(), 후한()이라고도 한다. 주나라가 망하고 동쪽 낙양으로 천도한 뒤로 중국에서는 앞의 왕조에다 서를 붙이고, 뒤의 왕조에다 동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한대에만 이르러도 중국문화의 수준은 당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인 부() 작품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수사기교를 뽐내고 있으며 심지어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한자가 주는 멋을 추구하고 있다. 한대 왕족의 분묘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옷과 장식품들은 실로 화려한 기교를 뽐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분에서 출토된 회화작품들도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구체적 근거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한대의 음악이나 건축도 꽤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문화사의 긴 흐름으로 보았을 때 한대의 문화와 예술은 아직 소박한 수준, 즉 졸의 단계이고 사상에서도 범속함을 추구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이 세상보다는 저세상을 더 중시한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또한 마찬가지다. 노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우주의 근원인 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도에 대한 체험과 자신이 체득한 도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자의 이야기를 흔히 현묘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도저히 체험하기 어려운 깊고도 오묘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해했고 그것을 자신의 깨달음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화광동진의 기본 얼개는 범속함에서 성스러움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의 범속함은 물론 단순한 범속함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속으로 감추고 있는 범속함이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의 의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크게 두 개의 차원이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한다는 의미다. 전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후자의 의미를 터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자 당시 수많은 은자들은 주로 감추기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노자는 통합도 실천했다. 노자의 글 속에는 초월적인 도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고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등장하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구절들도 많이 나온다. 이는 노자가 초월의 세계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 문명과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노자의 계승자인 장자는 초월의 세계에 치우쳐 있다.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붕()의 이야기는 장자의 이런 성향을 잘 대변한다. 그는 구만 리 상공을 날아가는 대붕과 같이 자질구레한 일상의 현실을 뛰어넘어 절대 자유에서 소요하며 노니는 것을 추구했지 일상과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은 주로 자신의 지혜의 빛이나 재주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쪽으로만 이해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다가 벌목당하는 미목보다는 쓸모없는 잡목으로 구석에 틀어박혀 하늘이 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기를 원했다.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의 선사들 또한 불교 안에서는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있다.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들인데, 이런 것들은 분명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일상성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 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산중의 화광동진으로서 미완의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화광동진 또한 미진함이 있다. 그는 분명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삶은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머릿속으로는 분명 자신이 체험한 깊은 도의 관점에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상이나 꿈은 너무나 고원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탁하고 혼란스러워 그 속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고고하게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감추고 그저 초야에 조용히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모호한 생애가 후대에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전설과 뒤섞여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미완의 화광동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을 창출하여 그것을 개념화하고 언어화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 사상을 자신의 삶 속에 체화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상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배워 창시자보다 더 훌륭하게 체득하고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 사상을 제창하는 사람과 그것을 구현하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공자는 노자에게서 화광동진을 배웠지만 노자보다 더 깊게 그것을 이해했다.

『사기』의 「노장신한열전」 가운데서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은 비중이 매우 크다. 노자 자체에 대한 기록만으로 볼 때 절반이 훨씬 넘고 여러 가지 이설을 포함한 전체 문장 가운데서도 3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이다. 제1장에서 간략히 말했지만 여기서는 좀더 상세히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했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해야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했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역대 이래로 설이 분분하고 지금도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적 진실성 여부를 떠나 사상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이 많다.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예'였다. 이때의 '예'는 물론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어지러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사회·문화시스템으로서의 예다. 공자는 그것을 주공을 비롯한 옛 현인들의 기록에서 찾으려고 했다. 노자는 공자가 추구하는 그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항상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말이란 우리 마음의 그림자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그 윤곽만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은 말의 그림자다. 말 속에는 현장감과 생동감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전할 수 있다. 똑같은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말의 톤과 색깔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글로 표현할 때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거친 윤곽만 남을 뿐이다. 물론 상상의 힘으로 그 윤곽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만약 그 글이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 시대 사람의 글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옛 사람의 글이라면 어떨까?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아마도 노자는 공자에게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는 당시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공자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항상의 도이냐, 아니냐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실용성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주공의 예 문화야말로 중국인의 문화와 심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설령 껍질만 남아 있다고 해도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평생을 예를 탐구하면서 창조적 계승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처신해야 함을 말하고는 이어서 본격적으로 화광동진을 말하고 있다.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물론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화광동진이다. 마지막으로 감추기의 관점에서 볼 때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했다.

노자와 공자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했다. 노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그 시대를 물러나야 할 때라고 여겨 결국 은둔했지만 공자는 그 시대야말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보고 평생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발분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남의 도 자체에 대해서는 공자도 공감했다고 본다. 맹자의 글에는 "군자는 영달할 때는 온 천하를 두로 구제해야 하고 궁할 때는 자신의 몸이라도 잘 닦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삶의 유형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퇴계(退) 이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말 자체가 은둔적이다.

공자는 노자가 충고한 화광동진의 감추기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한 듯하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세부터 51세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30대 정도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이후 공자는 노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덕성과 자질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려고 했던 것 같다. 『논어』에는 공자의 감추기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공()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인품과 능력을 고루 갖추었고 인물도 출중했다. 그래서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자공이 공자보다 뛰어나다고 찬미했다. 그러자 자공은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의 담에 비유하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로 보아 공자는 속으로 깊은 도와 덕을 지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새 뒤에 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했던 것이다. 자공 또한 사람이 생긴 이래로 공자만큼 훌륭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공자의 제자들이 했던 말이므로 공자의 도의 깊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자의 화광동진의 경지를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화광동진을 감추기로만 파악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에는 그런 인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충고를 들었을 때 공자는 "내가 이 백성들을 버리고 날짐승과 들짐승과 더불어 살란 말인가?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는 말을 했다.

노자로부터 이미 화광동진의 충고를 받은 적이 있는 공자는 그들 은자들의 충고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산속에서 날짐승과 들짐승과 어울려서 홀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이 아니었다.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노자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로 화광동진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화광동진은 찬란한 깨달음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안으로 감추고 다시 먼지 펄펄 나는 속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속세와 하나되는 동진은 더욱 어렵다. 나는 동진의 단계를 성숙도에 따라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 싶다.

첫 번째 단계는 화광에 급급하여 그저 표피적인 동진에 머무르고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겉으로 볼 때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실제 속으로는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는 데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심리적인 거리를 둔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에 큰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이 경우 육신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홀로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는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생활을 이야기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초월의 세계,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다. 역대의 수많은 은둔자들이나 산중의 선승들은 이 단계에서 머물렀다.

동진이 깊어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표피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게 되며,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물론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우월한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 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다.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을 성취하고도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다.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사회와 문명을 깊이 이해하고 사회변혁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세 번째 단계다. 현실 세계의 일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우리의 일상성을 제대로 바로 보려면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사회와 문명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묵묵한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지극한 경지라고 본다.

나의 관점으로는 노자는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마지막 단계까지 나아갔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피상적인 동진의 단계에 머물렀다.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인데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문제다. 만약 깨달음이 없다면 아무리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역사와 문명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해도 화광동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공자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이며 교육자인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정치 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는 공자를 폄하한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느 선사는 공자 같은 속인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가 수도를 게을리 해서 되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자의 경지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것으로 본 것이다.

나는 공자를 위대한 대각자로 본다. 공자가 왜 위대한 대각자이고 그는 과연 무엇을 깨쳤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생이지지()가 아니라 학이지지()라고 했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또는 성인을 말한다. 예수나 석가가 그 대표적인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이지지란 꾸준히 노력해서 안다는 뜻으로 공자같은 사람이 바로 그 대표적인 성인이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했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호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호학'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한 순간에 천지가 뒤바뀌는 극적인 장면은 없다. 실로 점진적인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는 아마도 오십 정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천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인격도야만으로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에서도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인생과 우주의 주재자가 거하는 곳으로 여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중국문명의 특징상 하늘은 창조주나 절대자가 거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우주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모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의 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깊은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뒤 육십에 이순()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 경지는 많은 주석가들이 귀가 순통하게 되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아마도 지천명()의 다음 단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순통()이라는 말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부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다른 사람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순의 경지가 바로 화광동진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고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놓는 경지인 것이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안과 밖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도를 깨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성스럽다. 내면의 본성을 완전히 자각하고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법도와 부딪힐 때는 아무래도 충돌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도를 깨친 사람의 행동은 때로는 파격적이어서 세상 사람들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 있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은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진정으로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공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의 법도에 별로 어긋남이 없다. 이것은 개아()의 행위가 사회 전체의 행위규범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이것은 사실 부분과 전체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자의 깨달음은 노자의 깨달음보다 훨씬 아름답다. 노자의 깨달음은 설령 그것이 깊다고 해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세상과의 소통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은둔의 삶으로 끝났다. 이에 비해 공자는 처음의 자질은 노자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끝없는 배움으로 평생을 일관했으며 만년에는 안과 밖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다.

사실 근대 이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교였고, 동아시아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은 성인은 바로 공자였다. 그러나 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의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따라 공자의 성스러움이나 권위 또한 형편없이 추락하여 위대한 성인에서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상가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공자가 절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봉건 지배계층이 자기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자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고 공자를 신격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창했던 예 문화가 대성약범을 추구하는 중국문명의 원형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고, 그의 삶이 대성약범의 미학을 지향하는 중국인의 미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며, 그의 깨달음이 중국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대성약범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깊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수백 년을 보냈지만 인도 내의 기독교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리랑카나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근대 이후 유럽의 세력이 한창 팽창할 때 기독교는 전통의 고등 종교가 없는 남미 지역 등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지만 고유의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예외인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사상들은 모두 현실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사상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고 그래서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 중국인들은 새선생()과 덕선생()을 받아들여 중국을 탈바꿈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는 'Science'의 음역어인 '새은사()'의 첫 글자고 ''는 'Democracy'의 음역어인 '덕모극납서(西)'의 첫 글자다. 새선생과 덕선생은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의인화해 만든 단어다. 유교의 상대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의 민주주의와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훨씬 불리한 싸움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결국 서구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산업구조와 정치구조를 좇아갈 수밖에 없었고, 전통적인 산업구조나 정치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유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아우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도로 몰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 때문에 유교는 새롭게 각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 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봉건시대의 유교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시대의 사회와 종교 상황에 맞는 새로운 유교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교의 역사 속에는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송명대의 신유학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

문화에는 학술, 사상, 종교, 문물제도, 예술 등과 같이 그 지역 문화의 외양적인 특징을 규정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실제 생활에 매우 중요하고 그 문화의 실질적인 특징을 규정짓지만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간과되는 부분이 있다. 음식, 의복, 주거양식 등이 간과되는 바로 그것이다. 문화라고 하면 옛날에는 무조건 전자만을 일컫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후자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증가하고 있다. 사실 그 지역 문화의 고유한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후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전자가 전파력이 매우 강한 반면 후자는 그리 강하지가 않다. 물론 요즈음은 매스컴의 발달로 부분적으로는 후자의 전파속도도 무척 빨라졌지만 근대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근대 이전에는 중국의 사상, 종교, 학술, 예술 등이 동아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음식, 의복, 주거양식 등에서는 중국의 문화가 한국, 일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는 했지만 전자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후자가 전자에 비해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 및 거기에서 파생되는 생활양식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음식은 그 나라의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 또는 전반적인 생활양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로는 종교적 금기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불교나 힌두교 성직자나 독실하게 믿는 신도들은 육류를 금하고 채식을 위주로 하고, 이슬람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Marvin Haris)는 종교적으로 어떤 특정한 음식을 금하는 것이 단순한 종교적 세계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나 생태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로 보아 음식문화는 그 사회의 상층문화와 하부구조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지역의 음식문화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전반적인 사유체계나 행동양식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육식을 즐겨 먹는 사람들과 채식을 즐겨 먹는 사람들의 사유체계나 행동양식은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활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다소 소극적인 사고방식과 정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비교해볼 때, 서양 사람들은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곡류를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훨씬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다.

같은 동아시아권 안에서도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유목민족들이 곡류를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에 비해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다.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대결과 융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경민족인 한족은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은 몇 차례나 점령당했다.

음식은 특히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전쟁의 기술이나 무기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먹을거리다. 제대로 잘 먹지 못한 군인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 특히 원거리 전투나 장기간 전쟁에서 보급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곡류를 주식으로 하는 농경민족은 전쟁에서 먹는 문제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취사도구와 식량을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유목민족의 음식은 휴대하고 조리하기가 간편하기 때문에 전쟁에 매우 유리하다. 그리고 음식의 내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유목민족들은 육류와 유제품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곡류와 채식을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의 군인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공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13세기 무렵에 몽고 초원에서 흥기한 몽골족이 빠른 시간 안에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제국을 세웠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훌륭한 말의 확보, 강력한 무기인 신종 활의 개발, 광대한 지역에 걸친 훌륭한 정보망의 구축뿐 아니라 뛰어난 전략과 전술의 구사, 정복지역에 대한 관용과 반항하는 지역에 대한 철저한 응징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음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몽골인들은 평소에 이동의 편리성을 위해 보르츠(borcha)를 애용했다. 보르츠는 고기를 얇게 찢어서 건조한 육포를 말한다. 이것을 다시 빻으면 매우 가는 실처럼 되는데 작은 용기에도 엄청난 양을 저장할 수 있다.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에도 한두 달치 분의 식량을 담을 수 있다. 먹는 방식도 간단하다. 급할 때는 날 것으로 먹을 수 있고, 주둔하고 있을 때는 그릇에 물을 부어 조금씩만 풀어 넣고 끓여도 엄청난 양의 고깃국으로 바뀐다. 거기에 야채나 면류를 넣으면 전골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야채도 건조시켜 빻아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휴대가 간편하고 영양가도 높은 전투식량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군의 전투력 향상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음식 속에는 많은 문화적인 의미들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음식문화를 잘 살펴보면 그 나라 문화의 특징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음식이란 물론 소수민족을 포함한 전체 중국의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줄곧 이야기했듯이 한족의 음식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곡류가 주식이다. 쌀이 많이 나는 남방에서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밀이 많이 나는 북부에서는 면을 주식으로 한다. 하지만 드넓은 영토에 일찍부터 상업과 유통이 발달하여 여러 종류의 육류와 해산물을 이용한 다양하고 풍성한 요리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은 실로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서 각 지방마다 요리의 차이도 심하다. 북경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 산동요리 등은 제각기 지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렁 음식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일단 음식의 재료가 풍성하고 조리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농담 삼아 하늘에 나는 것 가운데서는 비행기, 땅에 다니는 것 가운데서는 탱크, 바다에 헤엄치는 것 가운데서는 잠수함만 빼고 모두 요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재료의 풍성함과 요리방식의 다양함에서는 전 세계에서 으뜸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발달했다. 높은 화력과 식용유를 이용하여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재료를 볶아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삶아 국물을 우려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전 세계에서 중국요리에 견줄 수 있는 요리로는 프랑스요리를 드는데, 재료의 풍성함과 조리방법의 다양함에서 프랑스요리는 중국요리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국요리는 재료나 조리방법 면에서 워낙 다채롭고 풍성하기 때문에 자세히 찾아보면 한국요리와 비슷한 것들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요리와 한국요리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과 맛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차이는 중국요리는 다채롭고 풍성한 데 비해 한국요리는 단조롭고 조촐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넓은 영토에 다양한 지형, 그리고 여러 종류의 이질적인 문화가 융합되면서 음식문화도 다양함과 풍성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한국은 땅도 좁고 지형도 전반적으로 단조로우며 이질적 문화와의 충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음식문화 또한 아무래도 단조롭고 조촐할 수밖에 없다.

일단 요리의 가짓수만 가지고 볼 때, 중국요리는 한국요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다. 요리방식이나 맛으로 보았을 때도 중국음식은 온갖 종류의 조리방식과 다채로운 맛을 다 지니고 있지만, 한국음식은 중국음식만큼 그렇게 다채롭지가 않다. 물론 한국음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찬의 가짓수가 적지 않고 각각의 반찬들이 다양한 맛을 자랑한다. 그러나 중국음식에 비해서 소박하고도 조촐한 편이다. 이는 식당의 식단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아주 자그마한 식당에서도 최소한 수십 가지 이상의 요리 이름을 볼 수 있지만, 한국의 식당에서는 웬만큼 큰 식당에서도 그렇게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았을 때 중국음식이 가짓수나 맛의 다양함에서 한국요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에는 맛으로 둘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사실 음식의 맛이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대상이다. 종류 또한 워낙 많기 때문에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지도 어렵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비교를 해본다면 중국음식의 전반적인 특징이 농염한 맛을 위주로 한다면, 한국음식은 전반적으로 담백한 맛을 위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음식의 조리방법이 다양하다고 하지만 가장 주된 것은 갖은 양념을 기름에 볶아서 주 재료 위에 덮는 것이다. 갖는 양념을 기름과 고열을 이용해 볶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맛이 조합되어 진한 맛을 낸다. 물론 기름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은 느끼하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비교적 담백한 맛의 요리가 주종을 이룬다. 물론 한국요리도 고추가 수입된 이래로 맵고 자극적인 맛을 많이 내기 때문에 담백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이런저런 양념을 동시에 사용하여 농염한 맛을 내기보다는 한두 가지의 양념이 위주가 되는 맛을 추구하고, 특히 기름을 많이 써서 볶기보다는 삶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담백이라는 말에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이런저런 사항을 조합해볼 때 아무래도 중국요리가 교에 해당한다면 한국요리는 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요리의 테크닉이나 재료가 다채롭고 풍성하다는 것은 그만큼 요리의 기교가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그만큼 소박하고 덜 발달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의 맛 차이를 보아도 농염한 맛을 추구하는 것이 교에 가깝고 담백한 맛이 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뿐인가? 맛과 색과 향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요리가 주는 이미지는 매우 화려하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가 주는 이미지는 소박한 편이다. 이 때문에 중국요리를 교에, 한국요리를 졸에 비교하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요리는 그냥 소박하고 덜 발달된 것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기교와 안목이 숨어 있다. 즉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이라는 뜻이다. 한국요리가 대교약졸의 졸이라고 하는 데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한국요리는 담백한 맛을 추구하지만 그냥 담백한 맛이 아니라 숙성된 뒤에 우러나오는 담백한 맛을 추구한다. 중국음식에 대한 한국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발효음식이 많다는 것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발효음식을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민족이 고래로부터 발효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장과 메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효음식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발효음식들이 있었다. 『주례』에 보면 이미 장()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장에는 해()와 혜() 두 종류가 있는다. 해는 새고기, 짐승고기, 물고기 할 것 없이 어떤 고기든 햇볕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넣어 잘 섞은 다음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백여 일 동안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다.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실 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오늘날 육장에 가까운 것으로 우리가 먹는 간장이나 된장과는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중국에서 된장과 비슷한 것은 동한 이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콩을 소금에 절여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 것을 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된장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하고, 시의 냄새를 '고려취()', 즉 고구려 냄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장을 만드는 발효기술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콩을 발효시켜 된장을 만드는 기술은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역사는 떠나 오늘날의 요리로 보자. 오늘날의 중국요리에서도 발효 양념을 쓰고 발효를 주된 조리법으로 만드는 요리도 있다. 그러나 한국요리에 비해 가짓수도 적고 그다지 중시되지도 않는다. 이에 비해 한국요리는 기본 양념이 대부분 발효음식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반찬들도 대부분 발효식품들이다.

한국은 발효음식의 천국이다. 일단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기본 양념인 간장이 발효음식이다. 요리에는 양념이 필요한데 양념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양념은 짠맛을 내는 소금이다. 우리 몸의 기본 체액에 염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소금을 바로 그대로 섭취하면 여러 가지 불순물이 많아 몸에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염분을 정제시키고 건강에 좋은 형태로 섭취하기 위해 간장을 개발했던 것이다.

간장을 만드는 데는 실로 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가을철에 대두를 삶아서 절구에 빻아 메주를 만든 다음 겨우내 방 안에서 발효시킨 뒤, 봄이 되면 먼지를 털어내고 씻어 다시 햇빛에 말려서 장독에 넣는다. 그리고 소금물을 붓는데 이 소금물도 하루 전에 미리 천일염을 물에 풀어서 불순물을 바닥에 가라앉힌 뒤 윗물만 걸러낸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숯을 넣고 맛을 내기 위해 고추와 대추, 때로는 깻잎도 넣는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달 반에서 두 달 가까이 숙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즙액과 메주를 분리하면 메주는 된장이 되고 즙액은 간장이 된다. 이렇게 분리시킨 즙액을 다시 약 80도 정도에서 10분 내지는 20분 정도 달이고, 이것을 식힌 뒤 독에 넣고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망사나 한지로 막고, 다시 숙성시켜야 비로소 음식에 쓸 수 있는 간장이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집의 음식 맛은 장맛이 결정한다고 하여 장을 담그는 데 실로 많은 정성을 들였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양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간장은 국이나 찌개는 물론, 나물 무침이나 조림 등 거의 대부분의 음식에 기본 양념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음식은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정성으로 발효된 간장과 된장을 기본 양념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소박하고 담백해보여도 그 속에는 실로 깊게 숙성된 은은한 맛이 있고 우리의 건강에도 참으로 도움이 된다.

우리의 반찬 가운데는 많은 발효음식들이 있다. 한국 사람들의 가장 주된 반찬인 김치와 된장찌개가 발효음식이고 대부분의 밑반찬들 또한 그렇다. 다양한 종류의 젓갈류에서부터 마늘장아찌, 고추장아찌, 깻잎장아찌 등 실로 얼마나 많은 종류의 발효음식들이 있는가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콩잎도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옛날 어른들은 잘 익은 장아찌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맛있게 먹곤 했다. 그밖에 밥에다가 생선을 넣고 고추양념을 하여 아랫목에서 잘 삭혀서 만든 생선식혜, 밥에다가 엿기름 물을 넣어서 삭혀 만든 명절의 시원한 음료수인 식혜도 바로 발효음식이다. 발효음식의 종류와 가짓수가 풍성한 것으로는 아마도 한국음식을 따라올 음식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발효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숙성을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깊은 맛을 내려면 그만큼 느긋함을 필요로 한다. 발효음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독특한 맛과 냄새 때문에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에는 상당한 거부감을 주지만, 일단 한 번 맛을 들여놓으면 실로 오랜 친구와 같아서 헤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발효음식의 독특한 맛과 냄새는 바로 유산균 때문인데 그것들은 건강에 매우 좋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류가 만든 음식 가운데 최고의 음식은 바로 발효음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깊은 맛을 추구하는 한국요리의 특징은 탕 요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탕이나 찌개 요리가 발달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곰탕, 설렁탕에서부터 해물탕, 꽃게탕, 각종 전골 요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의 탕과 찌개가 있다. 서양에서 탕은 음식을 먹기 전에 수프로 간단하게 먹는 것이고, 중국에서도 탕이란 주 요리를 다 먹고 난 뒤에 후식용으로 먹는 것이며, 일본 또한 탕에 대한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한국음식에는 탕이나 찌개가 주된 요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탕은 서양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오랫동안 끓이는 편이다. 중국의 탕 가운데서도 한국의 탕처럼 매우 오랫동안 끓이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의 탕은 재료를 식용유에 볶은 다음에 물을 붓고 그 물을 데우는 것이고, 일본요리에도 나베요리라고 하여 냄비에 음식을 끓여 먹는 것이 있지만, 한국의 찌개나 탕처럼 푹 끓이지 않고 가볍게 데쳐서 먹는다. 그리고 우리의 된장찌개에 해당하는 미소시루도 우리나라처럼 푹 끓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끓인 것이다.

탕이나 찌개는 모든 재료를 푹 삶기 때문에 재료 고유의 신선한 맛이 사라지고 비타민 등 일부 영양소가 파괴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재료의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뼈를 고아 먹는 곰탕이나 설렁탕 등은 뼈 속의 골수를 우려내는 맛이 있다. 여기에는 튀기거나 볶거나 삶는 것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의 요리는 겉으로는 분명히 중국요리에 비해 조촐하고 소박하며 맛에서도 여러 가지 다채롭고 농염함보다는 담백함을 추구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소박한 가운데 실로 정련된 맛이 있고 담백한 가운데 실로 깊고 은은한 맛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음식을 만들 때 음식 자체의 맛을 얼마나 맛있게 낼 것인가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에 얼마나 보탬이 될 것인가에 대해 깊이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배경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교약졸의 미학에 부합하는 것이다.


요리
중국은 국토가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가 형성되었는데 황허강 유역 및 기타 북방은 베이징 요리를 대표로 하고, 양쯔강의 하류는 상하이 요리를, 양쯔강의 중상류는 쓰촨 요리를, 쭈강 유역은 광둥 요리를 대표로 하고 있다.


상하이() 요리
양쯔강 하류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난징이지만, 상하이가 항구로서 발달하여 국제적인 풍미를 갖추었기 때문에 상하이 요리로 부르고 있다. 상하이 요리는 비교적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
음식의 색이 화려하고 선명하도록 만들며, 그 지방의 특산품인 간장과 설탕을 써서 진하고 달콤하며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9월 말부터 1월 중순에 맛볼 수 있는 상하이의 게 요리는 전 세계 식도락가들이 최고로 뽑는 진미이다.

베이징() 요리

베이징이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한 것은 청나라 때로, 이때부터 궁중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서 명물 진상품과 우수한 요리사들이 모여 각 지역의 장점만을 받아들인 음식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요리의 별칭인 '청 요리'도 이때 유래된 것이다.
밀의 생산이 많아 면류·만두·전병의 종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은 베이징 오리 요리이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은 대부분 이 베이징 요리법을 따르고 있다.

쓰촨() 요리
중국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쓰촨 분지는 해산물을 제외한 사계절 산물이 모두 풍성해 야생 동식물이나 채소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더위와 추위가 심해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가 발달한 것이 특징으로, 그에 따라 매운 요리와 마늘·파·고추를 사용하는 요리가 많다.
깨끗함, 신선함, 순수함과 진함이 함께 느껴지는 저리고 매운 맛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룽지탕, 마파두부 등이 대표적이다.

광둥() 요리

광둥 지역은 동남 연해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재료가 풍부한 곳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광둥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둥 지역은 예부터 요리가 발달한 곳이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전통 요리와 국제적인 요리의 특성이 조화를 이뤄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서유럽 요리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등 서양 요리 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인 요리도 있다. 간을 싱겁게 하고 기름도 적게 써 가장 대중적인 요리로 꼽힌다. 탕수육과 팔보채, 중국 요리의 보석으로 꼽히는 딤섬도 광둥 요리이다.

딤섬()2백여 가지의 맛과 모양을 가진 딤섬은 모양에 따라 교, 파오, 마이, 쇼마이, 편 등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무술

태극권

태극권은 중국 무술 중의 하나로, 최근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유연하고 완만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를 단전에 모아 온몸에 원활하게 유통시켜 오장육부를 강화하는 것이 특징으로, 수련 과정 중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고 한다.
태극권은 24개의 기본 동작과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자세로 구성되어 있다. 일명 '건강 체조'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른 아침에 공원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선(), 기공권, 감각권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소림 무술

1천 5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소림 무술은 중악 숭산의 소림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인도 승려 보리달마 대사가 좌선에 지친 승려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창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육체와 정신을 두루 갖추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자세 하나하나의 동작이 잘 어우러지고 빈틈이 없어야 하고 신체 각 부분의 균형이 잡혀 일치되어야 한다.
소림 무술은 독특한 기교가 대단히 많은데,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하는 것,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것, 방어하면서 여러 가지 공격을 하는 것 등이 있다. 종류도 아주 많아서 성질에 따라 내공·외공·경공·기공 등으로 나뉘며, 기법에 따라 권술·창술·도술·검술·곤술 등 1백여 종으로 나뉘고, 소홍권·소림연환권·소림장권·통배권·나한권 등 97개의 권법이 있다.

쿵푸·우슈
보통 중국 무술은 쿵푸로 대표된다고 알고 있지만 원래 쿵푸와 우슈는 같은 말이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쿵푸로, 중국 본토에서는 우슈라 부른다. 또한 우슈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불려 오던 각종 용어들을 통합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제정한 용어로, 우리나라의 태권도나 일본의 유도처럼 중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를 뜻하기도 한다.
우슈의 색다른 점은 두 선수가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닌 혼자 하는 '표현 무술'이라는 점이다. 크게 태극권·남권·장권으로 나뉘며 이것을 '3권'이라 하고, 직립 자세를 비롯하여 개구리·용·뱀·기마 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쿵푸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감정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술 경기뿐만 아니라 건강법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중국의 지리 [-地理]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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