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백두산.白頭山. 1

백두산.山.

백두산은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화산이다. 본래 이 지역은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된 흔히 볼 수 있는 산지였으나 화산이 용암을 분출했을 때 처음에는 현무암 용암이 솟구쳐나와 수많은 골짜기들을 메우면서 넓게 퍼져서 현무암 지대를 이루어놓았다.

천지를 중심으로 병사봉(2744미터)을 비롯하여 망천후(2712미터), 백암봉(2741미터), 차일봉(2596미터), 백운봉(2691미터), 청석봉(2662미터) 등 해발 2500미터 이상의 날카로운 산봉우리들이 수없이 솟아 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중국의 오악()에 비교하여, 동악인 태산()의 웅장함도 없고, 서악인 화산()의 준험함도 없고, 남악인 형산()의 수려함도 없고, 북악인 항산()의 그윽함도 없고, 중악인 숭산()의 신기함도 없으나, 특이한 분화구를 가진 백두산의 수직적인 자연경관과 생태체계는 오악도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영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높이 2,155m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천지를 가진 산은 이 지구상에 오로지 백두산뿐이며 물이 흘러 들어오지도 않는데, 주야로 넘쳐 거대한 비룡폭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근래 미국·캐나다·일본·서독 등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천지 주변은 고산 툰드라식생대 지역이며 호수의 물은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6월 중순까지 결빙된다.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고 여름에는 비오는 날이 많다. 천지 호수 관광과 천지 12경은 천지 호반의 기암, 수면, 평지, 바위 등 12개소가 있다.
천지 주변에는 화구벽이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해발 2,500m이상의 화산봉우리가 16개 있으며, 이들 외륜산을 백두연봉이라 한다. 백두산과 천지를 등반하여 눈 아래 펼쳐진 자연경관을 바라보면 대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백두산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자연경승지이며,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숭상하는 선산이며 우리 국민들이 가고 싶어하는 관광목적지이다.
백두산 용암고원 주위에는 많은 소규모 화산지대가 있으며 소천지를 비롯하여, 원지(), 왕지()와 같은 소규모 호수가 산재한다. 이러한 호수는 철새들의 서식처이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소천지는 백두산 북부 능선 사스레나무림대에 위치한 호수로서 둘레 260m, 면적 5,300제곱미터, 평균수심 10m 이고, 호수 주위는 울창한 삼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백두산 북측사면 악화유곡 북쪽 4km 지점에 위치한 지하삼림은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계곡의 깊이는 80~90m이며, 계곡 아래에는 침엽수림이 밀집서식하고 있어 극지삼림을 형성하였다.
백두산 서측사면에 위치한 금강대협곡의 길이는 5km이며, 깊이가 100m~200m이고 폭은 200m-300m이다. 이 협곡의 양쪽에는 화산재가 흘러내려 침식에 의해 형성된 기둥 모양의 형상들이 있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협곡 양변은 모두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삼림이 울창하다.

백두산의 산마루는 급한 비탈을 이루면서 급격히 높아졌으나 그 기슭에는 넓고 평탄한 용암 지대가 펼쳐진다. 이렇게 큰 현무암 지대는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백두산 둘레에는 대연지봉, 소백산, 무두봉, 대로은산, 청봉 등 백두산의 기생화산들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 기록된 백두산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자 성산(聖山)이라 불린 백두산이 역사 속에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삼국유사』를 보면 백두산의 옛 이름은 개마산(蓋馬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마’는 천마(天馬)를 가리킨다. 『산해경』에는 백두산이 불함산(不咸山)으로 실려 있다. “넓은 평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 이름 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라고 기록된 불함을 두고 육당 최남선은 ‘붉은’의 역음(譯音)으로 천주, 즉 신명(神明)을 뜻한다고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 서문에는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이니 3층으로 된 높이가 200리요, 가로로 퍼져 1000리에 걸쳐 있고, 그 정수리에 못이 있어 달문이라 일컫는데 둘레가 800리라,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나뉜다. 그 분수령에서 구불거려서는 연지봉, 소백산, 설한등령, 철령을 일구고, 그 한 갈래가 동남으로 뻗어 도봉산, 삼각산이 되었다”라고 실려 있다.

『택리지』에 실린 백두산을 보자.
백두산은 여진(女眞)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며 온 나라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산 위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0리가 되고, 그 못에서 서쪽으로 흐른 물이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른 물이 두만강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흐른 물은 혼동강(混同江)인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곧 우리나라다.

조선 후기 조선의 국토 상황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서영보, 심상규 등이 1808년 왕명으로 지은 책)에 보면 “백두산이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황막한 들로 내려와 솟아올랐는데, 몇천만 길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꼭대기의 못은 사람의 숨구멍 같고 빛깔이 검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때는 첫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였고 바라보면 아득한 은바다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다음 알칼리조면암과 흐름무늬암 등의 용암이 흘러나왔는데 그 흐름이 약해져 멀리 흘러내리지 못하고 식어 덧쌓이면서 오늘날과 같은 백두산의 형태를 이루었다. 백두산 꼭대기 가운데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긴 자연 호수를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천지는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백두산의 기후는 찬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백두산 정상 부근에서 봄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5월 말이며, 5월 하순에야 0도가 된다. 이때부터 50일이 지난 7월 중순에야 영상 10도가 된다. 한여름에도 산정()의 기온은 영상 20도를 넘지 못한다. 하루 평균 영상 15~22도 이상 되는 날이 3~4일인데 이는 7월 하순에서 8월 상순 사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밀리미터로 우리나라에서 한 해 강수량이 제일 많은 지역에 속한다. 여름철 장마 기간에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소나기는 6월에 집중되며 우박은 6월과 9월에 내린다. 

이곳에 눈이 내리는 기간은 9월 10일에서 이듬해 6월 10일경까지인데, 눈이 쌓이는 기간이 257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천지 호반 그늘진 골짜기들에는 가장 더운 7월 하순에도 여러 해 묵은 눈이 0.5~1.5미터 두께로 쌓여 있고 그 밑으로 굳은 얼음들이 깔려 있다.

여름철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그 지속 시간이 길고 바람이 세게 부는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 마루에는 낮과 밤 할 것 없이 주로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분다. 평균 바람 속도는 초당 6.3미터, 최대 속도는 초당 59.8미터다. 

이곳의 날씨는 신기할 정도로 변화가 극심하다. 난데없이 구름이 몰려와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기도 하며 다시 순식간에 비구름에 휩싸이기도 한다. 때로는 구름이 산꼭대기까지 닿지 못하고 산중턱에서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거나, 산중턱에서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며 벼락이 내려 바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몇 년 전 백두산 천지를 방문한 필자에게 그곳 안내원이 “백두산 천지는 조선 처녀의 마음을 닮아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변덕을 부려 천지를 보기가 쉽지 않습네다. 특히 백두산 천지는 해돋이가 좋은데 심장을 달구고 손과 발을 얼구어봐야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습네다”라고 말해준 기억이 난다.

천지를 뒤덮었던 짙은 구름이 불현듯 한쪽으로 밀리면 햇빛에 반짝이는 백두산 봉우리들이 맑은 천지 물에 그대로 찬란하게 비치는데,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절경이다. 

산마루에 서린 새벽안개가 산기슭으로 내려와 어둠을 거두어가고 눈부신 햇빛이 부챗살처럼 퍼지기 시작할 때면 천지의 모든 것이 영롱하게 천만 가지 빛을 발하는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킨다.

정상의 천지는 넓이 9165제곱킬로미터, 둘레 1만 4399킬로미터, 평균 수심 213.3미터, 최대 수심 384.05미터, 물의 부피 19억 5500만 세제곱미터, 수면의 해발 높이 2190미터다. 천지의 물 온도는 7월의 경우 수면이 9.4도, 연중 물 아래쪽은 4도다. 빗물과 눈 녹은 물로 채워지는 천지의 물은 짙은 푸른색이며 대단히 맑다. 

물속에 하등식물은 조금 있으나 물고기는 없었는데 김일성의 지시로 송어를 양식하고 있다. 북측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1미터가 넘는 송어가 잡히기도 한다. 따라서 가끔 천지 속의 괴물 출현 보도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천지의 북동쪽 호안에는 온천이 있다. 백두산의 남서쪽 비탈면에서 압록강이, 남동쪽 비탈면에서 두만강이 시작된다. 또한 북쪽으로 천지의 물이 흘러나가 송화강이 된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조종산이자 성산이라 불린다.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졌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서려 있는데, 삼지연 부근에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 즉 천평(천리천평())이 있다고 한다. ‘하늘처럼 높은 곳에 있는 광활한 땅’이라는 뜻을 지닌 천리천평이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북포태산이 오른쪽 깃이 되고 증산이 왼쪽 깃이 된다. 둘레 몇백, 몇천 리가 실상 커다란 한 벌판을 이루어, 백두산으로 하여금 높음과 한가지로 크고 넓음이 임자가 되게 하니, 이것이 예로부터 천평이라 하여 신비로운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어떤 책에 말한 대로 백두산 둘레의 기슭을 다 천평이라 한다면 시방 서간도, 북간도도 다 여기 들 것이니 그 넓이를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말처럼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잎갈나무 숲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잎갈나무 숲이 끝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생 나라 하나 만들게 생긴 땅이다”, “그 벌 하나만 해도 나라 하나를 만들기에는 너무 넓겠다”라는 말을 들었던 곳이 천리천평이다.

허항령(, 함경남도 보천군과 함경북도 무산군ㆍ삼장면 경계에 있는 고개)에 올라서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천리천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하루 종일 가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그 평원도 전해내려오는 천평의 한 자락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인 1597년 8월 26일에는 “백두산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묽은 흙불이 솟아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668년과 1702년에는 정상인 천지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그 뒤에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백두산 주변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분쟁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에서 조선의 산삼을 캐는 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외교 문제가 일어났으며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중국인이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1711년에는 청나라의 오라총관()인 목극등이 압록강 대안 현지에 와서 조선의 참핵사(使, 죄인을 공동 심사하는 사절)와 함께 범법 월경 현장을 검핵()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월경 사건을 문제 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여기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그해 2월에 목극등을 장백산(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하려 하니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조선에 보냈으며,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은 접반사(使, 외국 대표를 맞는 조정의 대표) 박권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와 함께 부근에 가서 맞이하여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하여 5월 15일 백두산 천지 가에 이르게 되었으며,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지점인 해발 2200미터 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 백두산 바로 아래에 대연지봉(2360미터)과 소연지봉(2123미터)이 있고 소백산(2174미터)이 있으며 허항령 아래에 삼지연군이 있다. 필자가 2003년 가을 삼지연에 갔을 때 그곳은 가을의 향연이 펼쳐지는 별천지였다. 원시림의 마지막 숲을 이루는 사스래나무 숲을 지나 가을 단풍이 들어 노란 잎갈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그리고 자작나무가 드문드문 병풍처럼 드리워진 삼지연은 바라보기가 처연할 만큼 비장미가 있었다. 
세 개의 연못이 푸르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이 환히 보이는 정경과 어쩌다 찾는 길손의 가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잎갈나무의 노란 아우성은 한마디로 압권이었다. 그 잎갈나무에 관한 글이 조선 성종 때의 학자인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 제4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함경() 육진()에 한 종류의 나무가 있다. 그 잎이 전나무와 같은데 그 지방 사람들이 잎갈나무라고 한다. 그 기름을 취하여 종기에 붙이면 곧 낫고, 등창이 처음 시작될 때에 더욱 잘 듣는다. 
정덕() 중에 비로소 해마다 서울에 공() 바치기를 명령하고, 가정() 계사()에 그 나뭇가지를 갑 속에 넣어서 의관을 시켜 중국에 가서 질문하게 하였다. 여러 어의()에게 물어도 모두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나무가 중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본초강목()』 등 여러 방서에 빠져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인가, 혹은 방서 밖에 따로 이 나무가 있는데, 이름은 있어도 쓰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시험하지 않은 것인가, 
중국에서 이미 알고 있는데, 갑 속에 넣어 잔가지가 말라서 분변하기 어렵기 때문인가. 종기를 다스리는 데 그렇게 묘하다면, 방서에 실리고 실리지 않은 것과 중국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
중국에서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실리지 않았다고 물을 필요가 없다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중국에 대한 그러한 생각이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가 품었던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삼지연에는 15미터쯤 되는 김일성의 대형 동상이 소백산을 등지고 서 있다. 김일성이 항일 유격 활동을 할 때 잠시 쉬어간 곳이라 하여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지는 삼지연을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여기는 삼지라 하여 옛날부터 이름이 들린 곳이니 크고 작은 여러 늪이 느런히 놓인 가운데 셋이 가장 뚜렷한 고로 삼지라 일컫는 것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니 혹 칠성지라는 이름이 있음은 필시 일곱으로 보이던 시절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세 호수 중에서 크기로나 아름다움으로나 으뜸이 되는 것은 가운데 있는 것이니 둘레가 7~8리에 파란 물이 잠자는 것처럼 고요한데, 동쪽과 북쪽에는 속돌 부스러진 무게 없는 모래가 백사장을 이룬 밖으로 나직나직한 잎갈나무 숲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서쪽으로 들어가면서 얽은 구멍 숭숭한 돌들이 운치 있게 꾸민 정원처럼 물가에 깔리다가 그것이 거의 다할 만하여서 잘록한 목장이가 되고 둥글 우뚝한 조그만 섬 하나가 바로 소담스럽게 호수 가운데 솟아, 나무가 우거지고 돌 모양이 운치 있다.
삼지의 아름다움은 삼지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일면으로는 백두산 이하 간백(), 소백(), 포태(), 장군() 등 7000~8000척의 높고 험한 산들이 멀리서 둘러싸고 일면으로는 천리천(백두산 중턱의 엄청나게 넓은 들)이라고 하는 큰 들의 깊은 수풀이 끝없이 터져나가서 웅장하고 호쾌한 갖은 요소를 다 드러내 보였으니, 이러한 외곽을 얻어서 삼지의 아름다움은 다시 몇백 배의 가치를 더하여 다른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는 천하의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것은 어쩌다가 한 번 있을 일이요, 어쩌다가 한 군데 생길 것일 만큼, 그 신기하고 소중함이 여간일 수 없다.
삼지를 초점으로 하여 나타난 미의 한 서클은 백두산 아름다움의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실로 조화의 가장 자신 있는 대걸작이요, 인류의 가장 의의 있는 한 재산일 것이다. (······) 삼지는 세계적 절경이요, 또 두드러진 특색과 특별한 맛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산 가운데 가장 신령스러운 산인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유장하게 이어진 산줄기가 곧 백두대간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룬다. 이렇듯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었으며,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천지 물의 원천
백두산 천지 물의 원천은 주로 지하수이며 천지 물의 약 61%를 차지한다. 지하수는 주로 지하 온천수로 솟아 나온다. 다음으로는 자연 강수가 약 30%를 차지한다. 증발량이 적고 강수량이 많은 것이다. 세 번째는 천지 주위에서 물이 흘러드는 것으로, 수량이 많지 않아 천지 물의 9%밖에 안 된다. 지하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많은 것은 지하 심처의 마그마가 열을 방출하며 냉각 · 고결 과정에서 대량의 수증기가 생겨 지하온천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천지의 겨울 수면

백두산 천지의 겨울 수면은 11월 말부터 얼어붙어 다음 해 6월에나 녹는다. 겨울의 얼음층 두께는 1.2m이고 가장 두꺼운 얼음층은 3m이다. 다만 천문봉 아래 200m의 천지 온천 수면과 백두봉 아래 천지 가장자리의 수면은 얼지 않는다.



천지의 형성과 연대

백두산 천지의 형성과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백두산 천지가 최근(1702년)의 백두산 분출 후 화구에 지하수와 눈, 비 등의 강수가 고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백두산 천지가 후기 홀로세(1,400~1,200년 전)에 백두산이 조면암질 부석을 분출한 후 형성되었다고도 하고, 후기 플라이스토세와 1만 2,000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백두산 천지는 백두산 분출 후 화구가 형성되고 그곳에 물이 고여 화구호로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 천지가 형성된 근거"

1,000년 전에 7개의 화구에서 화산이 분출한 후 함몰작용에 의해 오늘의 화구호가 형성되었다.
천문봉기에 백두산이 강렬히 분출하여 화구가 형성되고, 그 후에 물이 고여 최초의 화구호가 형성되었다.
빙하기에 백두산 화구에 얼음이 차고 이후에 얼음이 녹아 화구호가 형성되었다.
빙하기 이후 백두산이 수차례 분출한 후 화구에 온천수가 솟아 나와 화구호가 형성되었다.

주위의 화구호



소천지

소천지는 백두산 북쪽 비탈 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 화구호이다. 백두산 천지로부터 4km거리에 있는 원형 화구로 둘레는 260m, 면적은 500m2, 깊이는 20m이다. 원래 이름은 은하호()였고, 이 외에 대환호(), 동호()라고도 한다. 호수에는 과두어, 규규어가 서식하고 있다. 호숫물은 남쪽 지하수로 흘러들어 오고 지하수로 유출되고 있다. 주위에는 악화림이 무성하게 자라 호수면에 비쳐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적지
적지()는 소천지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고도는 1,800m이다. 적지는 소천지 면적의 3분의 1 정도이며 동쪽에만 물이 있고 서쪽은 습지로 되어 있다. 적지 남쪽의 단열대 틈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가 적지로 흘러들고 다시 지하수로 흘러 나간다. 아직 호수에 어류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주위에는 악화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고요한 수면에 푸른 악화림이 비쳐 경치가 아름답다.
원지
원지()는 백두산 동쪽 30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백두산 현무용암대지 동쪽 현무암 화산 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 화구호이다. 화구호가 원형으로 되었다고 하여 원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원지의 지름은 180m, 면적은 0.41km2이며 깊이는 10여m이다.

원지는 호수 중심에서 샘이 솟고 겨울에 얼지 않는다. 원지의 옛이름은 만주어로 부리후리(), 20세기 초에는 천녀욕궁지(), 그리고 그 외에도 옥녀지, 선지(), 원앙지() 등 이름이 많다. 아름다운 원앙새가 짝을 지어 호수에 내려와 놀아 원앙늪이 라고도 한다. 원지는 백두산 화산이 분출한 부석이 원래의 화구를 덮어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

호수의 물은 대부분은 지하수이며, 호수 동쪽 20~30m 지점에서 지표로 흘러나와 작은 물줄기(약류수)를 이루어 흐른다. 홍토산 남쪽에서 약류수와 홍토수가 합쳐 흐르는데, 이 합수목이 두만강의 시작이다. 원지 주위에는 주과 월귤, 부수하엽 등이 무성하고 낙엽송, 홍송산림이 울창하다. 거울같이 맑은 수면에 푸른 산림이 비쳐 경치가 아름답다. 호수 서쪽에는 천녀욕궁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원래 비석이 분실되어 후세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원지는 만주족의 발생지라고 한다.
왕지
왕지()는 백두산 서남쪽 13km 거리의 비탈에 있다. 왕지 화구호의 남북 길이는 40m, 동서 너비는 30m이고, 둘레는 110m이다. 왕지 화구는 원형이며 고요한 물에 푸른 산림이 비쳐 절경을 이루고 있다. 호수 동쪽은 고산 악화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초지가 형성되어 있다. 왕지는 소왕지 또는 악화못이라고도 한다.



화산 화구호
화산 화구호는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9km 떨어져 있다. 군함산 현무암 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되었으며 이를 그대로 화산 화구호라 부른다. 주위에는 산림이 무성하여 풍경이 매우 아름다우며, 서쪽은 현무암 절벽을 이루고 있고,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도 있다.
백두산은 백두산 화산 원추체, 협의적 백두산, 광의적 백두산의 3개 지구물리적 구조로 되어 있다.
백두산 화산 원추체
백두산은 화산 원추체와 화구, 후관의 3개 구조로 조성되었다. 화산 원추체는 해발 고도가 1,800~2,750m이며 평면은 타원형으로 북서-동남 방향으로 긴 직경 길이가 30km, 짧은 직경 길이는 20km이다. 총면적은 600km2이고 상부 경사도는 30°이다. 화산 원추체는 주로 조면암과 유문암, 조면암질 부석 화산쇄설물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협의적 백두산
백두산의 협의적 개념은 중심부에 백두산 원추체와 보천(중국 군함산) 현무암 융기 부분으로 구성된다. 해발 1,100~2,750m 높이의 산록경사 현무용암고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남북 길이는 140km이고, 동서 너비는 120km이며 총면적은 16,800km2이다.
광의적 백두산
백두산의 광의적 개념은 백두산 원추체와 산록경사 현무용암고원, 해발 600~1,100m의 백두산 현무용암대지가 포함된다. 산록경사 용암고원과 백두산을 포함한 총면적은 45,600km2이다.

지구의 중력 이상대.
백두산 지역에서 중력 이상대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세 방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부게 이상은 -105mmγ이다. 세 방향의 중력 부게 이상대 중 첫 이상대는 백두산에서 북동 방향으로 중국 안도까지의 이상대로 길이는 약 90km이다. 
높은 이상대 수치는 북동 방향으로 점점 낮아지며 안도 지점에서는 -40mmγ이다. 두 번째 이상대는 백두산에서 북서 방향으로 중국 정우현까지 뻗어 있으며 길이는 150km이다. 이 이상대의 수치는 서북 방향으로 점점 낮아지고 정우현 일대는 -25mmγ이다. 부게 이상대는 부면에서 무송현 일대에 이르러 휘어지는데, 이상대 동쪽은 급격히 낮아지고 서쪽 이상대는 완만하다.

세 번째 이상대는 백두산에서 동남 방향으로 마천령 심부 단열을 따라 길주 무수단까지이다. 이상대의 길이는 320km이다. 백두산에서 동남 방향으로 중력 이상이 낮아져 무수단의 이상 수치는 -25mγ이다. 이 세 갈래 방사상 심부 단열대는 맨틀 상부 연약권까지 이르렀고 초기의 단열대로 마그마 분출의 통로였다.
지각의 열류량
백두산 지각의 열류량은 대륙지각 열류량의 몇십 배이다. 백두산은 열량을 두 가지 경로로 방출하고 있다. 지열은 지각암석층의 열전도 방출이다. 이러한 지열 방출은 명확히 백두산을 중심으로 환대 열류방출대를 형성하고 있다. 백두산 화구의 열류가 가장 높고 그다음은 화산 원추체다. 화산 중심부에서 바깥 쪽으로 나갈수록 열류량이 적어진다. 백두산 화구로부터 40~50km 떨어진 지역의 지각 열류량은 점차 낮아지고 변화가 적다. 백두산의 높은 열류량은 마그마의 위치가 깊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백두산의 지각이 얇음을 보여 준다.
열류량 증가. 
백두산은 1702년 분출 이후에도 소규모로 계속 분출하였다. 화산의 폭발적 분출은 열량의 폭발적 방출을 의미한다. 백두산 화구와 원추체의 온천 온도 상승은 지하 마그마 온도의 상승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온의 마그마가 상승하는 것이 원인이다. 백두산 원추체 하부의 마그마 증가는 열류 증가이다. 백두산의 온도 상승으로 지각 밑 마그마가 증가되어 압력이 커지고 지각 열류가 계속 증가하는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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