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소수서원 . (榮州 . 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호이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꼬불꼬불 죽령을 넘어 닿는 곳에 풍기읍이 있다. 여기서 소백산 쪽인 동북 방향으로 접어들어 가노라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옮기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어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외방으로 나갔을 때에는 미신타파에 힘썼다.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고 독로화(禿魯花-토루카)로 선발되었다.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는데 이 해에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가 낭중(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곧 고려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1304년(충렬왕 30)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고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에 죽었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論)과 경(敬) 사상을 수용코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는 설립 동기가 적혀 있다.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宿水寺) 옛터로 안향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현재 서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論)과 경(敬) 사상을 수용코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는 설립 동기가 적혀 있다.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宿水寺) 옛터로 안향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현재 서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주세붕은 구름과 산, 그리고 강물이 골짜기에 가득한 곳에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황은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하였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 : 주세붕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면서 문신이다. 홍문관, 성균관 등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학문이 높은 인물로 숭상받았다.
풍기 군수가 되었을 때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지방 사림의 교화와 육성에 물꼬를 텄다. 풍기 읍사무소 안에 ‘周公善政碑’라고 새겨진 선정비가 있다.
주세붕은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하여 풍기인삼을 재배하게 하였다. 현재는 소백산 산삼이 멸종 위기에 이르러, 다시 산에 환원하는 뜻에서 매년 소백산에 종자를 뿌리고 풍기인삼 전진대회를 열면서 주세붕의 공덕도 기리고 있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면이 한 단 높아져, 이곳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인 사주문(四柱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으로는 성생단(省牲壇)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죽계수(竹溪水)가 내려다보이도록 지은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성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壇)으로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왔다.
경렴정 동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또 '경'자 위에 '백운동'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소수서원에는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교수의 숙소인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한 학구재(學求齋)·지락재(至樂齋)를 비롯하여 서책을 보관하던 장서각(藏書閣), 제수를 차리던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고, 최근에 세워진 건물로 유물관, 충효사료관 등이 있다.
경자바위" 경렴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는 주세붕이 쓴 '경(敬)', 이황이 쓴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명륜당소수서원 문성공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이다.
소수서원 장서각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
숙수사터 당간지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 있던 숙수사의 당간지주로 지금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숙수사터의 유물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숙수사터의 여러 석물 중 불상광배와 연꽃이 새겨진 석등 받침이다. 사료전시관 마당말고도 서원 곳곳에서 옛 숙수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당에는 안축(安軸, 1287∼1348)과 그의 아우인 안보(安輔, 1302∼1357)가 1544년(중종 39)에, 주세붕이 1633년(인조 11)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이다. 그가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景幾體歌)로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하지 않고 존속한 서원 47곳 중의 하나로,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사당에는 문성공 안향의 신위가 모셔져있다.
소수서원의 제향소수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지낸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서원 417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다. 또 전국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다. 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며 이와 같은 학문의 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서원으로서의 파격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 아니, 서원 영역에 웬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땅 위의 통치원리가 유교로 바뀌게 되자 힘이 미약해진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하나의 흔적인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말고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이 지주는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곧게 둥글렸다.
당간을 받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에 길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이다.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건물임을 말해준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
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가운데에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고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천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갔다고 한다.
일신재와 직방재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다른 서원들처럼 마주보고 있지 않고 연이어진 한 채로 되어 있다.
학구재와 지락재일신재와 직방재처럼 선비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매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다. 서원마다 어떤 선비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서원들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큰 선비를 모시려고 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안향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는데, 사당공간은 강당 왼편으로 담장 안에 있으며 이 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다. 이 사당에는 안향 선생말고도 뒤에 안보(安輔)와 안축(安軸) 주세붕을 함께 모셔 배향하고 있다.
사당 바로 뒤 나무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집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藏書閣)이고 그 뒷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안향 .安珦.
명륜당소수서원 문성공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이다.
소수서원 장서각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
숙수사터 당간지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 있던 숙수사의 당간지주로 지금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숙수사터의 유물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숙수사터의 여러 석물 중 불상광배와 연꽃이 새겨진 석등 받침이다. 사료전시관 마당말고도 서원 곳곳에서 옛 숙수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당에는 안축(安軸, 1287∼1348)과 그의 아우인 안보(安輔, 1302∼1357)가 1544년(중종 39)에, 주세붕이 1633년(인조 11)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이다. 그가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景幾體歌)로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하지 않고 존속한 서원 47곳 중의 하나로,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사당에는 문성공 안향의 신위가 모셔져있다.
소수서원의 제향소수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지낸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서원 417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다. 또 전국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다. 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며 이와 같은 학문의 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서원으로서의 파격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 아니, 서원 영역에 웬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땅 위의 통치원리가 유교로 바뀌게 되자 힘이 미약해진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하나의 흔적인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말고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이 지주는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곧게 둥글렸다.
당간을 받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에 길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이다.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건물임을 말해준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
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가운데에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고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천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갔다고 한다.
일신재와 직방재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다른 서원들처럼 마주보고 있지 않고 연이어진 한 채로 되어 있다.
학구재와 지락재일신재와 직방재처럼 선비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매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다. 서원마다 어떤 선비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서원들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큰 선비를 모시려고 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안향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는데, 사당공간은 강당 왼편으로 담장 안에 있으며 이 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다. 이 사당에는 안향 선생말고도 뒤에 안보(安輔)와 안축(安軸) 주세붕을 함께 모셔 배향하고 있다.
사당 바로 뒤 나무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집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藏書閣)이고 그 뒷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안향 .安珦.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운 인물이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윤곽이 뚜렷하여 매우 호방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안향(安珦, 1243~1306)"안유(安裕)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사람으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을 만큼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깊었다.
고려시대의 유학자로 좌부승지·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 등을 지냈으며,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도동묘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전남문화재자료 제29호. 안향을 기리는 사묘재실.
고려시대의 유학자로 좌부승지·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 등을 지냈으며,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풍을 직접 느끼고 주자서를 베껴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린다. 그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종하는 직책을 맡아서였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헤쳐나갈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때 명분을 중시하면서 주지적인 주자학을 만난 안향은, 주자학이야말로 새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사상, 새로운 철학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안향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백년여 뒤에는 마침내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와서 안향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안향(安珦, 1243~1306)"안유(安裕)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사람으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을 만큼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깊었다.
고려시대의 유학자로 좌부승지·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 등을 지냈으며,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도동묘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전남문화재자료 제29호. 안향을 기리는 사묘재실.
고려시대의 유학자로 좌부승지·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 등을 지냈으며,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풍을 직접 느끼고 주자서를 베껴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린다. 그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종하는 직책을 맡아서였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헤쳐나갈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때 명분을 중시하면서 주지적인 주자학을 만난 안향은, 주자학이야말로 새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사상, 새로운 철학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안향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백년여 뒤에는 마침내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와서 안향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의
1243(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개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글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안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생애' 활동사항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 2월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해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그해 3월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6년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그해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가 개혁되어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그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고, 이듬해 수국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1300년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장학기금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써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평가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그를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상훈과 추모
1306년 9월 12일 별세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을 유(裕)라고 부르다가 향(珦)으로 개명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따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을 처음 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따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을 처음 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안향초상〉, 작가미상, 비단에 채색, 87.0×52.7㎝, 국보 제111호, 소수서원.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안향의 초상화이다. 낮은 평정관을 쓰고 홍포를 입은 반신상이다. 이 그림은 고려 때 제작된 원본은 아니고 조선 중기에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의 초상화라는 점, 고려시대의 초상화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옮기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어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외방으로 나갔을 때에는 미신타파에 힘썼다.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고 독로화(禿魯花-토루카)로 선발되었다.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는데 이 해에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가 낭중(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곧 고려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1304년(충렬왕 30)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고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에 죽었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영정각에 모신 안향의 영정은 그 이모본을 조선 명종 때에 다시 고쳐 그린 것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후에 그려진 영정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그린 것이니만큼 영정에서 그의 품성이 엿보이는데,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매우 단단한 인상이다. 아울러 두건을 쓰고 붉은 겉옷을 입은 모습에서는 당시 학자의 풍모도 느껴진다.
영정각 안에는 보물 제485호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도 있다. 이는 공자를 향하여 여러 성인과 제후를 그리되, 문묘와 향교의 대성전 동·서무에 위패를 배향하듯이 인물을 배치한 그림이다.
사후에 그려진 영정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그린 것이니만큼 영정에서 그의 품성이 엿보이는데,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매우 단단한 인상이다. 아울러 두건을 쓰고 붉은 겉옷을 입은 모습에서는 당시 학자의 풍모도 느껴진다.
영정각 안에는 보물 제485호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도 있다. 이는 공자를 향하여 여러 성인과 제후를 그리되, 문묘와 향교의 대성전 동·서무에 위패를 배향하듯이 인물을 배치한 그림이다.
최초의 서원이니만큼 간직한 문화재도 많고 연구할 거리도 많아 소수서원은 전속 연구원을 두어 연구를 하게 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는 강학 모습, 제향 모습의 모형을 갖추어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도 있는데 반신상에 사모관대를 한 모습이다.
한바퀴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은 건물들이 놓인 방식이 자유롭다. 강당에 견주어 사당공간은 왼쪽 뒤켠으로 치우쳐 있고 특히 사당의 자리가 매우 어정쩡하기까지 하니 최소한 사당을 뒤에 놓고 강학공간을 앞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도산서원의 엄격한 계층성도, 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으며, 어떤 위계질서가 주는 엄숙함의 카리스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롭다 못해 시시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것은 아마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어서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환경과 어우르면서 건물들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서원의 담장 밖으로 나와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다. 건너편 개울을 보며 시원한 물소리에 젖다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자가 보인다. ‘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敬’자는 웬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敬’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얘기며,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요즈음의 소수서원은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식 비디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선남선녀들로 가득하다. 소수서원 주변의 더없는 풍광과 더불어 이곳이 ‘영귀포란형’(迎貴抱卵形) 지세라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부추긴 이 시대 문화의 한 단면일까.
죽계천과 취한대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서원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지었는데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며 휴식하던 곳이다.
한바퀴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은 건물들이 놓인 방식이 자유롭다. 강당에 견주어 사당공간은 왼쪽 뒤켠으로 치우쳐 있고 특히 사당의 자리가 매우 어정쩡하기까지 하니 최소한 사당을 뒤에 놓고 강학공간을 앞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도산서원의 엄격한 계층성도, 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으며, 어떤 위계질서가 주는 엄숙함의 카리스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롭다 못해 시시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것은 아마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어서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환경과 어우르면서 건물들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서원의 담장 밖으로 나와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다. 건너편 개울을 보며 시원한 물소리에 젖다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자가 보인다. ‘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敬’자는 웬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敬’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얘기며,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요즈음의 소수서원은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식 비디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선남선녀들로 가득하다. 소수서원 주변의 더없는 풍광과 더불어 이곳이 ‘영귀포란형’(迎貴抱卵形) 지세라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부추긴 이 시대 문화의 한 단면일까.
죽계천과 취한대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서원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지었는데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며 휴식하던 곳이다.
소수서원 가까이 있는 금성단은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금성단을 둘러보려면, 순흥 면사무소 또는 소수서원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면 담당직원이 나와 문을 열고 안내해준다.
백운동 글자가 새겨진 죽계천 건너에는 취한대라 부르는 정자가 있고 정자 오른쪽 숲속에는 돌탑이 있다. 취한대는 원래 터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 다시 복원한 것이며 돌탑은 인근 청구리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모여 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현재 죽계천 건너 취한대와 돌탑은 소수서원 관리상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백운동 글자가 새겨진 죽계천 건너에는 취한대라 부르는 정자가 있고 정자 오른쪽 숲속에는 돌탑이 있다. 취한대는 원래 터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 다시 복원한 것이며 돌탑은 인근 청구리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모여 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현재 죽계천 건너 취한대와 돌탑은 소수서원 관리상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여행에 필요한 정보'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다. 성혈사에서 다시 쌍용정유 순흥주유소가 있는 사거리로 나와 왼쪽 부석사로 난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 0.8㎞ 가면 길 오른쪽에 소수서원이 나온다. 서원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서원 앞에서 부석사 쪽으로 약 150m 가면 길 왼쪽에 금성단으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금성단 입구에서 부석사 쪽으로 약 150m 더 가면 나오는 다리가 청다리인데, 현재 ‘제월교’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승용차로는 금성단과 청다리 두 곳 모두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일 경우 소수서원 주차장에 주차해두고 돌아보는 것이 편리하다. 영주에서 풍기, 순흥을 거쳐 소수서원 앞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하루 16회 다닌다.
금성단 입구에서 부석사 쪽으로 약 150m 더 가면 나오는 다리가 청다리인데, 현재 ‘제월교’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승용차로는 금성단과 청다리 두 곳 모두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일 경우 소수서원 주차장에 주차해두고 돌아보는 것이 편리하다. 영주에서 풍기, 순흥을 거쳐 소수서원 앞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하루 16회 다닌다.
영주에서 순흥으로 하루 8회 다니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되는데, 순흥에서 서원까지는 걸어갈 만하다. 서원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순흥에는 음식점과 여관이 있으며 교통시간과 숙식시설은 앞의 읍내리 벽화고분, 석교리 석불상과 동일하다.
유익한 정보'
소수서원에서 성혈사로 가다보면 배점교 바로 못미처 배점리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는 초암사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소백산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초암사로 가는 길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죽계계곡이 펼쳐진다.
죽계계곡은 고려 말의 문신인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었으며 퇴계 이황도 계곡의 굽이굽이를 헤아려 죽계구곡이라 이름 지을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소백산의 숨은 명소이다(사람들이 모이는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항상 한적하다). 배점리 삼거리에서 초암사까지는 3.5㎞이다.
승용차는 초암사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배점리 삼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성혈사와 같으며, 배점리 삼거리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죽계계곡과 초암사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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