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서원을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하였다. 이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아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았다.
본관 상주(尙州). 자 경유(景遊). 호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 시호 문민(文敏).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선생의 휘(諱)는 세붕(世鵬)이고 자(字)는 경유(景遊)이며 성은 주씨(周氏)이다. 그의 선조는 상주(尙州) 사람이었는데, 고조와 증조의 세대에 강좌(江左)의 합천(陜川)으로 이거하였다가 선생의 선친에 이르러 또다시 칠원(漆原)으로 이거하여 마침내 칠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조 주숙유(周叔瑜)는 고려조 진사(進士)이고, 증조 주상빈(周尙彬)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의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주장손(周長孫)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주문보(周文俌)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부호군(副護軍) 황근중(黃謹中)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선친은 돈후하고 선을 좋아하여 향당(鄕黨)의 존경을 받았으며, 황 부인(黃夫人)은 천부적인 성품이 뛰어나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평생 동안 사람을 속인 적이 없으므로 우리 자손이 마땅히 그 보답을 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선생은 명(明)나라 효종 황제(孝宗皇帝) 홍치(弘治) 8년(1495년) 10월 25일에 태어났다. 선생의 나이 7세에 어머니가 병환이 나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선생이 목욕하는 것으로부터 머리를 빗고 이를 잡는 데 이르기까지 시중을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어질게 여기며 효아(孝兒)라고 일컬었다.
선생은 명(明)나라 효종 황제(孝宗皇帝) 홍치(弘治) 8년(1495년) 10월 25일에 태어났다. 선생의 나이 7세에 어머니가 병환이 나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선생이 목욕하는 것으로부터 머리를 빗고 이를 잡는 데 이르기까지 시중을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어질게 여기며 효아(孝兒)라고 일컬었다.
선생은 놀 때에도 성인(成人)과 같아 말을 구차스럽게 하거나 망령되게 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을 줄 알았으며 장성하자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탁월하게 일찍 성취되었다.
가정(嘉靖) 원년이자 우리 중종(中宗) 17년(1522년)에 태학(太學)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여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해에 선생이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임명된 다음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전직되었다.
가정(嘉靖) 원년이자 우리 중종(中宗) 17년(1522년)에 태학(太學)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여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해에 선생이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임명된 다음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전직되었다.
5년 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이듬해인 정해년(丁亥年)에 여러 번 부수찬(副修撰)에 보임되었다. 그해 겨울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자 임금이 그에 대한 고사가 있는지 물으니, 선생이 ≪시경(詩經)≫의 시월편(十月篇)을 써서 올렸다. 그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휘두르고 임금이 너무나 후궁을 총애한 바람에 수찬(修撰)에서 군직(軍職)으로 전직되었다가 1년이 되어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에 병조(兵曹)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관동 도사(關東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인 경인년(庚寅年)에 내직으로 들어와 헌납(獻納)이 되었다. 그때 사간원에서 김안로의 일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자 계속해서 간쟁을 그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심언광(沈彦光)이 그 일을 중지시켜 김안로에게 아첨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따르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에 병조(兵曹)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관동 도사(關東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인 경인년(庚寅年)에 내직으로 들어와 헌납(獻納)이 되었다. 그때 사간원에서 김안로의 일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자 계속해서 간쟁을 그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심언광(沈彦光)이 그 일을 중지시켜 김안로에게 아첨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따르지 않았다.
김안로의 권력이 더욱더 커지자 선생이 조정에서 밀려나 2년간 복직되지 않았다. 심언광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벼슬에서 세 번 쫓겨나도 안색에 노기를 띠지 않으니, 어찌 고인1)(古人)보다 크게 손색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이 사양하기를, “30년간 글을 읽고 도리어 출세하기 위해 입으로 상관의 종기를 빨아주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있으니, 이 점이 화가 납니다.”고 하니, 심언광이 앙심을 품었다.
임진년(壬辰年, 1532년 중종 27년)에 전적(典籍)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묘소를 지키면서 곡하다가 야윈 바람에 수염과 두발이 모두 희어졌다. 삼년상을 끝마치고 다시 전적이 되었다가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그해에 김안로가 실각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32년 중종 27년)에 전적(典籍)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묘소를 지키면서 곡하다가 야윈 바람에 수염과 두발이 모두 희어졌다. 삼년상을 끝마치고 다시 전적이 되었다가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그해에 김안로가 실각하였다.
선생이 정사를 할 때 교화를 돈독하게 펼치고 세금을 적게 걷으려고 힘썼다. 이듬해인 무술년(戊戌年)에 이웃 고을에서 형벌을 남용한 일을 조사하였다가 일이 착오가 있어 파직되었다. 그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이 장례를 치를 때까지 반드시 거친 밥에 물을 마시고 3년간 상막(喪幕)의 짚자리에서 거처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누차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로 전직되었는데, 서울로 들어와 벼슬할 때마다 반드시 거처하는 객관(客館)에다 신위(神位)를 설치해놓고 사당(祠堂)의 예처럼 새 음식물을 보면 반드시 올리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살피고 출입할 때 참배하였다.
이듬해인 신축년(辛丑年)에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으로 있다가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나갔다. 마을마다 오륜(五倫)의 방도를 게시하여 ≪소학(小學)≫을 가르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구두(句讀)를 직접 바로잡았으며, 유생(儒生)들을 권장하고 일깨워 문학과 기예를 배우도록 하였다. 송사를 처리할 때마다 예의의 풍속으로 유도하고 지성으로 감동케 하니, 어떤 백성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신축년(辛丑年)에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으로 있다가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나갔다. 마을마다 오륜(五倫)의 방도를 게시하여 ≪소학(小學)≫을 가르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구두(句讀)를 직접 바로잡았으며, 유생(儒生)들을 권장하고 일깨워 문학과 기예를 배우도록 하였다. 송사를 처리할 때마다 예의의 풍속으로 유도하고 지성으로 감동케 하니, 어떤 백성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도 하였다.
옛 흥주(興州) 백운동(白雲洞)에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냄과 아울러 백가(百家)의 서적을 비치해놓고 학전(學田)을 마련해 놓았는데, 그 일이 ≪죽계지(竹溪志)≫에 실려 있으며 동방의 서원(書院)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남쪽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후한 혜택이 돌아가게 하고 반백(斑白)인 이 사람에게는 특별히 식량을 주어 봉양하도록 하였다. 어사(御使) 이해(李瀣)가 그 일을 보고하니, 임금이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품계를 승진시켜 권장하였다.
그 고을 보리밭에 한 줄기에 두 개의 이삭이 달린 보리가 있었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백성을 북쪽의 변방으로 이주시킬 때 선생이 그들에게 술과 풍악으로 접대하고 보내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베푼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인 을사년(乙巳年)에 사성(司成)으로 소환하니, 그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선생의 선정(善政)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웠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군자감 정(軍資監正) 겸 편수관(兼編修官)에 임명되어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두 조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여름에 응교(應敎)에서 전한(典翰)으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옮겼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선발되었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군자감 정(軍資監正) 겸 편수관(兼編修官)에 임명되어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두 조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여름에 응교(應敎)에서 전한(典翰)으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옮겼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선발되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강론할 적에 성학(聖學)을 개진하였는데, 특히 천리(天理) 인욕(人慾)이 소장(消長)하는 기미와 군자(君子) 소인(小人)이 진퇴(進退)하는 기미에 대해 누누이 말하였다. 그리고 심도(心圖)를 올리고 나서 만물을 살려내기를 좋아하는 성인의 덕에 대해 극구 말하니, 주상도 자세를 바꾸어 들어보았다. 이는 그때 이기(李芑)가 정권을 잡아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임금의 뜻을 동요하여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직되었다가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도승지(都承旨)에서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무개는 스승의 직책을 맡을 만하니, 외직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쪽의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직되었다가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도승지(都承旨)에서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무개는 스승의 직책을 맡을 만하니, 외직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쪽의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황해도는 바다와 접해 있어서 무술(武術)만 숭상한 바람에 풍속이 미개하였으므로 여러 군현(郡縣)에다 영을 내려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내고 농업에 힘쓰도록 하였는가 하면 효제(孝悌)의 의리를 거듭 강조하여 풍속과 교화를 독실히 하였다. 해주(海州)에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사당을 세워 학문의 제도를 한결같이 백운동(白雲洞)처럼 제정해 놓으니, 먼 곳에서 유학하러 온 선비들이 날로 불어났다.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듬해인 신해년(辛亥年)에 불교 배척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반(西班)으로 전직되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다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전직되자 선생이 병을 이유로 극력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듬해인 신해년(辛亥年)에 불교 배척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반(西班)으로 전직되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다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전직되자 선생이 병을 이유로 극력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경연(經筵)의 직책을 겸임시키자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한 마디 말로 임금의 뜻을 깨우치려고 하였는데, 그때 이미 병환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해에 경복궁(景福宮)에 화재가 났는데, 선생이 혼자 탄식하기를, “하늘에 계신 중종의 영령이 오늘날 후회하실 것이다.”고 하였다. 중종이 일찍이 건물을 증축하려고 할 적에 선생이 간하기를, “선왕(先王)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기시면 점진적으로 자라나는 조짐이 매우 두렵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새로 지은 전각에 불이 났기 때문이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병환이 나 극력 사양하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그만두고 그해 7월 2일에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병환이 나 극력 사양하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그만두고 그해 7월 2일에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애도하고 특별히 관례보다 부조를 더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상여가 돌아갈 때 각 고을에서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해 11월 19일(병진)에 칠원(漆原) 저연(楮淵) 서쪽 선영의 아래 동향(東向)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선생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전부인 진주 하씨(晉州河氏)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하옥(河沃)의 딸인데,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전부인 진주 하씨(晉州河氏)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하옥(河沃)의 딸인데,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후부인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훈도(訓導) 안여거(安汝居)의 딸인데, 그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형의 아들 주박(周博)을 후사로 삼았다. 주박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우리 선조(宣祖)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주박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극창(周克昌)ㆍ주윤창(周胤昌)ㆍ주익창(周益昌)ㆍ주필창(周必昌)으로 모두 아들이 없이 죽고, 딸은 사인(士人) 정홍조(鄭弘祚)에게 시집갔다. 주윤창은 1녀를 낳아 윤후남(尹候男)에게 시집갔다. 주박이 측실(側室)에게서 2남을 낳았는데, 주낙창(周樂昌)ㆍ주오창(周俉昌)이다. 주낙창의 손자 주맹헌(周孟獻)이 선생의 제사를 맡았다.
선생은 도덕이 깊고 두터워서 정성이 상하를 감동하고 효제(孝悌)가 신명(神明)에게 통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일상생활 인륜의 법칙을 강조하였고, 학문을 일으키고 문학을 숭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주박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극창(周克昌)ㆍ주윤창(周胤昌)ㆍ주익창(周益昌)ㆍ주필창(周必昌)으로 모두 아들이 없이 죽고, 딸은 사인(士人) 정홍조(鄭弘祚)에게 시집갔다. 주윤창은 1녀를 낳아 윤후남(尹候男)에게 시집갔다. 주박이 측실(側室)에게서 2남을 낳았는데, 주낙창(周樂昌)ㆍ주오창(周俉昌)이다. 주낙창의 손자 주맹헌(周孟獻)이 선생의 제사를 맡았다.
선생은 도덕이 깊고 두터워서 정성이 상하를 감동하고 효제(孝悌)가 신명(神明)에게 통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일상생활 인륜의 법칙을 강조하였고, 학문을 일으키고 문학을 숭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책을 대하였다. 평생 동안 독실하게 믿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실천에 과감하여 기명(器皿)에도 명(銘)을 새기고 장옥(牆屋)에도 경계를 써놓았다.
고인의 가르친 말로 가사를 지어 날마다 외우게 하는 등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의 선친이 경계하는 말씀 중에 ‘입을 조심하고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조심하라’는 이 세 가지 훈계가 있었기 때문에 서실(書室)에다 신재(愼齋)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노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다.
노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다.
배우는 사람을 대하면 자세히 잘 이끌어서 기질(氣質)을 변화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는가 하면 임금을 섬길 적엔 반드시 그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려고 마음을 먹어 임금을 마땅한 길로 이끄는 바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직책을 맡아 일을 할 때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권장하고 벌을 주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다.
선생의 성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30년간 조정에 나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빈한한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좌석에 털방석이 없었고 마구간에 좋은 말이 없었으며 집을 임대하여 살았다.
선생의 성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30년간 조정에 나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빈한한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좌석에 털방석이 없었고 마구간에 좋은 말이 없었으며 집을 임대하여 살았다.
봉록이 풍족하였으나 의식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종족을 도와주고 손님을 접대하였다. 선생이 항상 말하기를, “나의 분수에 있어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한 가마도 없었다.
조정의 사대부들 중에 선생을 아는 사람이나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말하기를, “조정이 한분의 현인을 잃었다.”고 하였으며, 서쪽의 학자들이 합동으로 빈소에 전(奠)을 드린 다음에 선생의 초상화를 그려가지고 갔다.
서쪽의 제자들이 남고(南皐)에다 선생의 사당을 세웠는데, 남고는 선생의 고향 시냇가의 지명이다. 선생이 산천에서 노니는 것을 즐거워하여 지금 사방의 유명한 산수(山水)에 남긴 발자취가 가끔 있다고 한다.
선생이 저술한 글로는 ≪죽계지(竹溪志)≫ㆍ≪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ㆍ≪심도(心圖)≫ㆍ≪이훈(彛訓)≫이 있고, 또 ≪무릉집(武陵集)≫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화평한 군자(君子)는 예악(禮樂)의 근본인데, 그러한 분이 남쪽에 태어났도다. 신에게 통하는 행실과 사물이 이르게 하는 인과 풍속을 변화하는 법칙이 있었도다. 학문을 효제(孝悌)에다 근본을 두니, 덕이 사람을 변동시키고 가르침이 성명(誠明)에 도달되었도다. 선친이 남긴 훈계를 노래로 지어 외웠는가 하면 장옥(牆屋)에도 경계를 써놓고 기명(器皿)에도 명(銘)을 새기었도다.
선생이 저술한 글로는 ≪죽계지(竹溪志)≫ㆍ≪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ㆍ≪심도(心圖)≫ㆍ≪이훈(彛訓)≫이 있고, 또 ≪무릉집(武陵集)≫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화평한 군자(君子)는 예악(禮樂)의 근본인데, 그러한 분이 남쪽에 태어났도다. 신에게 통하는 행실과 사물이 이르게 하는 인과 풍속을 변화하는 법칙이 있었도다. 학문을 효제(孝悌)에다 근본을 두니, 덕이 사람을 변동시키고 가르침이 성명(誠明)에 도달되었도다. 선친이 남긴 훈계를 노래로 지어 외웠는가 하면 장옥(牆屋)에도 경계를 써놓고 기명(器皿)에도 명(銘)을 새기었도다.
임금이 발탁하여 측근에다 두자, 안색을 엄숙히 하고 바른말을 하니,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두려워 움츠러들었도다.
외직으로 나가 백성을 위하여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거두니, 백성들이 본업을 즐겁게 여기었도다. 학교를 세워 제도를 정립하고 백성을 가르쳐 풍속을 바로잡아 덕행과 예절로 이끌었도다.
성인이 제사의 제도를 만들어 그 법을 백성에게 베푸니, 백세토록 그 보답을 누릴 것이도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았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관찰사 때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워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재차 대사성·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지내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 8수가 전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배향되고, 백운동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다.
정의
1495(연산군 1)∼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생애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
활동사항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조선 전기 때의 학자 · 문신. 고려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하였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 남고(南皐) · 무릉도인(武陵道人) · 손옹(巽翁). 아버지는 문보(文俌)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 · 수찬을 역임하였으며, 공조좌랑 · 병조좌랑 ·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 · 수찬을 역임하였으며, 공조좌랑 · 병조좌랑 ·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고,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는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군수가 되었다.
승문원교리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군수가 되었다.
풍기지방과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하여 중국의 서원과 갈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 · 전한 · 직제학 ·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여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사자(嗣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 ·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 ·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다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는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말 성리학을 도입하였던 순흥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풍기 사람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기구로 변모해 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경기체가형식의 〈도동곡(道東曲)〉 · 〈육현가(六賢歌)〉 ∙ 〈엄연곡(儼然曲)〉 ∙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경기체가형식의 〈도동곡(道東曲)〉 · 〈육현가(六賢歌)〉 ∙ 〈엄연곡(儼然曲)〉 ∙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한글로 쓰여진 이 노래들은 다분히 유교적인 사상을 띠고 있는데, 이를테면 《논어(論語)》의 한 구절인 “군자(君子)는 사실을 기록할 뿐이지 창조적인 창작행위는 아니하는 것이라(君子述而不作)”고 한 것이 그의 시정신(詩精神)이었다.
평소 그의 작품에 대해서 “나의 시가(詩歌)들은 나의 지은 바가 아니다. 창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는 군자의 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옛 성현(聖賢)의 말씀들을 풀이(述)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예관(文藝觀)에 입각한 그의 시가들은 결과적으로 경기체가에 있어서는 고려의 그것들을 내용면에서 순조롭게 계승한 것이 되었고, 또한 국문사용의 세력에 힘입게 되어 외형적으로 변모된 경기체가를 마련한 것이 되었다 할 수 있으나, 지나친 유교적 이념과 군자연(君子然)한 작품 태도로 말미암아 예술적 창조의 향취는 높지 못하다.
이러한 문예관(文藝觀)에 입각한 그의 시가들은 결과적으로 경기체가에 있어서는 고려의 그것들을 내용면에서 순조롭게 계승한 것이 되었고, 또한 국문사용의 세력에 힘입게 되어 외형적으로 변모된 경기체가를 마련한 것이 되었다 할 수 있으나, 지나친 유교적 이념과 군자연(君子然)한 작품 태도로 말미암아 예술적 창조의 향취는 높지 못하다.
우리말을 사용한 면에서 그의 작품은 주목할 만한 것이며, 시조문학사상(時調文學史上) 16세기에 두드러지게 대두된 유교이념을 시조에 도입한 당시의 사조(思潮)가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시조에 붙여진 제목들도 이러한 경향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것으로 대개 도학(道學) 군자(君子)들의 법규(法規)와 같은 것들이다.
저서로는 《죽계지(竹溪志)》 ∙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 ∙ 《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고,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하였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考)》가 있다.
저서로는 《죽계지(竹溪志)》 ∙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 ∙ 《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고,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하였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考)》가 있다.
군자가(君子歌)
시조(時調). 작자가 풍기(豊基)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고 학생들을 위해 장가(長歌)와 단가(短歌) 몇 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죽계지(竹溪誌)》에 실려 있다.
“사 사마당 군자(君子)를 원(願), 밋디 못요믄 못보 타시이다. 실(實)노 원(願)커시든 이를 몬져 삼가쇼서”
시조작품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문상(汶上)애 아니가다 누항(陋港) 업시리아, 여곽(藜藿)의 됴 마 사마(駟馬) 올가, 춘풍(春風)에 욕기(浴沂)고 날노 삼성(三省)리”(〈門津歌〉) “사 사마다 이 말 드러라. 이 람 아니면 사이오 사 아니니, 이 말 닛디말오 호고야 마로리이다”(〈五倫歌〉) “양(養)고 양(養)쇼셔, 정시(靜時)예 양쇼셔, 제산(齊山)의 탁탁(濯濯)흠과 알묘도 우오니, 듯것 안보(安保)여 여흐디를 마르쇼셔” 《靜養吟》 “지션(至善)의 겨신 진실(眞實)노 아쇼셔, 인심(人心)과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픠샤, 나 것 드 거시 망(妄)을 업시 쇼셔” 《至善歌》 “지덕요도(至德要道) 션왕(先王)이 듯더시니, 민용화목(民用和睦)야 하(上下)이 무원(無怨) 니이다. 진실(眞實)노 올어니 효뎨(孝悌)이 다”(〈孝悌歌〉)
“사 사마당 군자(君子)를 원(願), 밋디 못요믄 못보 타시이다. 실(實)노 원(願)커시든 이를 몬져 삼가쇼서”
시조작품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문상(汶上)애 아니가다 누항(陋港) 업시리아, 여곽(藜藿)의 됴 마 사마(駟馬) 올가, 춘풍(春風)에 욕기(浴沂)고 날노 삼성(三省)리”(〈門津歌〉) “사 사마다 이 말 드러라. 이 람 아니면 사이오 사 아니니, 이 말 닛디말오 호고야 마로리이다”(〈五倫歌〉) “양(養)고 양(養)쇼셔, 정시(靜時)예 양쇼셔, 제산(齊山)의 탁탁(濯濯)흠과 알묘도 우오니, 듯것 안보(安保)여 여흐디를 마르쇼셔” 《靜養吟》 “지션(至善)의 겨신 진실(眞實)노 아쇼셔, 인심(人心)과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픠샤, 나 것 드 거시 망(妄)을 업시 쇼셔” 《至善歌》 “지덕요도(至德要道) 션왕(先王)이 듯더시니, 민용화목(民用和睦)야 하(上下)이 무원(無怨) 니이다. 진실(眞實)노 올어니 효뎨(孝悌)이 다”(〈孝悌歌〉)
도동곡(道東曲)
1541년(중종 31)에 경기체가(景畿體歌). 유도(儒道)의 내력과 학자 회헌(晦軒) 안유(安裕)선생의 덕을 노래한 것으로 경기체가를 답습했으나 형식은 많이 변모되어 있으며, 모두 9장(章)으로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실려 전한다.
도동(道東)은 《논어(論語)》에서 유래한 말로 도가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갈다.
“복희신농(伏羲神農) 황제요순(黃帝堯舜), 위 계천입극(繼天立極)ㅅ경, 긔 엇더니잇고.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 위 주거니 밧거니,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이 다믄 잇븐니이다……”
“복희신농(伏羲神農) 황제요순(黃帝堯舜), 위 계천입극(繼天立極)ㅅ경, 긔 엇더니잇고.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 위 주거니 밧거니,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이 다믄 잇븐니이다……”
엄연곡(儼然曲)
1541년(중종 31)에 지은 전 7장의 경기체가(景幾體歌). 〈엄연가(儼然歌)〉라고도 한다. 《무릉집(武陵集)》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을 많이 혼용하였으며 도학적인 정신을 찬양한 작품으로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놉흐나 높으신 하헤, 두터우나 두터우신 헤, 나 신 일월에, 춘하츄동은 눌 여 흘너가고. 위 일원순환(一元循環) 유구(悠久) 경긔하여(景幾何如)‥‥‥”
“놉흐나 높으신 하헤, 두터우나 두터우신 헤, 나 신 일월에, 춘하츄동은 눌 여 흘너가고. 위 일원순환(一元循環) 유구(悠久) 경긔하여(景幾何如)‥‥‥”
육현가(六賢歌)
1541년(중종 31)에 지은 경기체가. 모두 6장. 중국의 정이천(程伊川) ∙ 장횡거(張橫渠) ∙ 소요부(邵堯夫) ∙ 사마공(司馬公) ∙ 한위공(韓魏公) ∙ 범문정(范文正) 등 여섯 사람의 도학자(道學者)를 찬양한 것이다.
이들은 도학(道學)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무릉집(武陵集)》에 전한다.
태평곡(太平曲)
경기체가라지만 이 무렵에 와서는 그 전형적인 형태가 무너지고 거의 가사 형태에 가까운 경향을 띠게 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지선가(至善歌)
시조 1수.
《죽계구지(竹溪舊志)》에 전한다. 인간 본연의 선한 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죽계지(竹溪誌)
저자가 편찬한 백운동서원지(白雲洞書院誌). 백운동서원에 관련된 문자로서 안씨행록(安氏行錄) ∙ 풍기속상기(豐基俗尙期) ∙ 고적기(古蹟記) · 백운동서원기(白雲洞書院記) 등과 시부(詩賦)가 수록되어 있다.
초간본(初刊本) 권1 행후록(行後錄)에 〈도동곡(道東曲)〉 ∙ 〈육현가 (六賢歌)〉 ∙ 〈엄연곡(儼然曲)〉 ∙ 〈군자가(君子歌)〉 ∙ 〈학이가(學而歌)〉 ∙ 〈문진가(問津歌)〉 ∙ 〈욕기가(浴沂歌)〉 ∙ 〈춘풍가(春風歌)〉 ∙ 〈지선가(至善歌)〉 ∙ 〈효제가(孝悌歌)〉 ∙ 〈정양음(靜養音)〉 ∙ 〈동찰음(動察音)〉 ∙ 〈태평곡(太平曲)〉 등 한글로 지어진 시가(詩歌)가 실려 있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간본(初刊本) 권1 행후록(行後錄)에 〈도동곡(道東曲)〉 ∙ 〈육현가 (六賢歌)〉 ∙ 〈엄연곡(儼然曲)〉 ∙ 〈군자가(君子歌)〉 ∙ 〈학이가(學而歌)〉 ∙ 〈문진가(問津歌)〉 ∙ 〈욕기가(浴沂歌)〉 ∙ 〈춘풍가(春風歌)〉 ∙ 〈지선가(至善歌)〉 ∙ 〈효제가(孝悌歌)〉 ∙ 〈정양음(靜養音)〉 ∙ 〈동찰음(動察音)〉 ∙ 〈태평곡(太平曲)〉 등 한글로 지어진 시가(詩歌)가 실려 있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순조 3년(1803)에 안시중(安時中)에 의해 6권 3책으로 간행되었으며, 다시 순조 24년(1824)에 안병렬(安昞烈)에 의해 3권 1책으로 간략(簡略)하여 재간되었다.
주소(奏疏)
한문문체의 일종. 임금에게 올리는 글. 진(秦)나라 이전엔 상서(上書)라 했으나 진나라에 들어와 이를 주(奏)라 부르게 되었다.
한(漢)대에 와서는 이것이 장(章) ∙ 주(奏) ∙ 표(表) ∙ 의(議)의 네 가지로 갈리었다. 그 뒤로는 '주소'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이 더욱 생겨나서 위 ∙ 진(魏晋)대 이후엔 표(表)와 계(啓)란 말이 많이 쓰였고, 당(唐)대에는 표(表)와 장(狀)이란 말이 흔히 쓰였으며, 송 ∙ 원(宋元)대에는 차자(箚子)란 말이 잘 쓰였다.
그 밖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는 대책(對策) ∙ 사책(射策) ∙ 진책(進策) ∙ 첩괄(帖括) ∙ 전(牋) ∙ 봉사(封事) ∙ 탄문(彈文) ∙ 노포(露布) 등의 명목이 있다.
→ 〈책(策)〉, 〈의(議)〉, 〈차자(箚子)〉, 〈주의(奏議)〉, 〈소(疏)〉, 〈표(表)〉, 〈장(狀)〉
→ 〈책(策)〉, 〈의(議)〉, 〈차자(箚子)〉, 〈주의(奏議)〉, 〈소(疏)〉, 〈표(表)〉, 〈장(狀)〉
주소(注疏)
《한문학》
1. 경서(經書)와 고전원문에 후인(後人)들이 설명과 해석을 다는 일.
2. '주(注)'는 경전을 해석한 것으로 전(傳) ∙ 전(箋) ∙ 해(解) 등의 이름이 있고, '소(疏)'는 '주'에 대하여 다시 이를 부연하고 해석을 추가한 것이다.
'정의(正義)'류가 여기에 속한다. '주'와 '소'가 합쳐진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데, 남송(南宋) 이전에는 십삼경의 '경주(經注)'와 '소' 가 각기 따로 별행(別行)되던 것이 송말(宋末)로부터 비로소 합하여 간행되었다. 《십삼경주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논어주소(論語注疏)〉(20권. 魏 何晏集解 : 宋 邢昺疏)
2) 〈이아주조(爾雅注疏)〉(10권. 晋 郭璞注 : 宋 邢昺疏)
3) 〈맹자정의(孟子正義)〉(14권. 漢 趙岐注 : 宋 孫奭疏)
4) 〈모시정의(毛詩正義)〉(70권. 漢 毛亨傳, 漢鄭玄箋 : 唐 孔熲達疏)
5) 〈예기정의(禮記正義)〉(63권. 漢 鄭玄注 : 唐 孔熲達疏)
6) 〈춘추좌씨전정의(春秋左氏傳正義)〉(60권. 晋 杜預集解 : 唐 孔熲達疏)
7) 〈주례정의(周禮正義)〉(42권. 漢 鄭玄注 : 唐 賈公彦疏)
8) 〈주역정의(周易正義)〉(10권. 魏 王弼, 晋 韓康伯注 : 唐 孔熲達疏)
9) 〈상서정의(尙書正義)〉(20권. 漢 孔安國傳 : 唐 孔熲達疏)⑦〈의례주소(儀禮注疏)〉(50권. 漢 鄭玄注 : 唐 賈公彦疏)
10)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28권. 漢 何休解詁 : 唐 徐彦疏)
2. '주(注)'는 경전을 해석한 것으로 전(傳) ∙ 전(箋) ∙ 해(解) 등의 이름이 있고, '소(疏)'는 '주'에 대하여 다시 이를 부연하고 해석을 추가한 것이다.
'정의(正義)'류가 여기에 속한다. '주'와 '소'가 합쳐진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데, 남송(南宋) 이전에는 십삼경의 '경주(經注)'와 '소' 가 각기 따로 별행(別行)되던 것이 송말(宋末)로부터 비로소 합하여 간행되었다. 《십삼경주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논어주소(論語注疏)〉(20권. 魏 何晏集解 : 宋 邢昺疏)
2) 〈이아주조(爾雅注疏)〉(10권. 晋 郭璞注 : 宋 邢昺疏)
3) 〈맹자정의(孟子正義)〉(14권. 漢 趙岐注 : 宋 孫奭疏)
4) 〈모시정의(毛詩正義)〉(70권. 漢 毛亨傳, 漢鄭玄箋 : 唐 孔熲達疏)
5) 〈예기정의(禮記正義)〉(63권. 漢 鄭玄注 : 唐 孔熲達疏)
6) 〈춘추좌씨전정의(春秋左氏傳正義)〉(60권. 晋 杜預集解 : 唐 孔熲達疏)
7) 〈주례정의(周禮正義)〉(42권. 漢 鄭玄注 : 唐 賈公彦疏)
8) 〈주역정의(周易正義)〉(10권. 魏 王弼, 晋 韓康伯注 : 唐 孔熲達疏)
9) 〈상서정의(尙書正義)〉(20권. 漢 孔安國傳 : 唐 孔熲達疏)⑦〈의례주소(儀禮注疏)〉(50권. 漢 鄭玄注 : 唐 賈公彦疏)
10)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28권. 漢 何休解詁 : 唐 徐彦疏)
11)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20권. 晋 范寗集解 : 唐 楊士勛疏)
12) 〈효경주소(孝經注疏)〉(9권. 唐 玄宗御注 : 宋 邢昺疏)
이칭별칭 | 자 경유(景游), 호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손옹(巽翁), 시호 문민(文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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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시대 | 조선 |
출생 - 사망 | 1495년(연산군 1) ~ 1554년(명종 9) |
성격 | 문신, 학자 |
출신지 | 칠원(이설에는 합천) |
성별 | 남 |
본관 | 상주(尙州) |
저서(작품) | 죽계지, 해동명신언행록, 진헌심도, 무릉잡고 |
대표관직(경력) |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올바른 도리로 벼슬하다가 세 번 쫓겨난 유하혜(柳下惠)를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유하혜가 옥(獄)의 관리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났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는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없는가?” 하니, 유하혜가 말하기를, “올바른 도리로 사람을 섬길 경우 어디로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으며, 올바른 도리를 외면하고 사람을 섬길 경우 부모의 나라를 떠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음. 조선시대의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 사림의 자제 교육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 서원의 시초가 백운동서원이다. 중종 때(1543) 풍기 군수인 주세붕이 안향이 살던 경상도 순흥면의 백운동에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자제들의 교육 장소로 삼은 데서 '백운동서원'이라고 하였다. 그 후 명종 때는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아 경제적인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많은 서원들이 지방에 설치되었는데, 선현을 받들고 교육과 연구를 하던 서원은 향교와 다르게 각기 다른 선현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그 운영에서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원의 증대에는 특히 이황과 그 제자들의 노력이 컸다. 선조 때는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 서원만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에는 700여 개소, 고종 때는 1,000여 개소나 되었는데 그중 사액 서원이 약 1/3을 차지하였다. 이 서원은 영조 때와 대원군 때 대폭 정리되었다.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사당으로, 1542년(중종 37)에 세웠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문성공(文成公) 회헌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안축(安軸),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을 배향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식 맞배지붕집으로,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 왼쪽과 뒤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전면에 툇간을 두었다.
장대석 낮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 부분에는 주두 아래에 도리 쪽으로 첨차를 두고 보 방향으로는 쇠서를 내고 안쪽으로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쳤다.
가구는 2고주 오량(五梁)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창호는 전면에 매칸 쌍여닫이 세살문을 설치하였다. 지붕에는 모로단청을 올려 품위 있어 보이는 건물이다.
현판 글씨는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사방에 흙담을 둘러 다른 공간과의 위계를 구분하고 정면에 일각문, 오른쪽에 협문을 두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린다.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한다.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하는 안향의 초상화(국보 111),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가 안치되어 있다.
명호를 사(祠)가 아닌 묘(廟)로 지칭하는 몇 안 되는 사당 중의 하나로, 문성공묘의 격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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