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일 수요일

프랑스 , France. Republic. 1

프랑스 , France. Republic.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양국의 접촉관계(1831∼1886)
조불관계의 시작은 평탄하지 못하였다. 양국간 최초의 접촉은 먼저 종교면에서, 그 다음은 이를 계기로 군사적인 충돌로서, 나중에 외교적인 국교수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831년 로마교황청이 조선교구()를 창설하고 조선에서의 포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탁함으로써 조선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되기에 이르렀고, 1836년 이래 3년에 걸쳐 앵베르(Imbert,L.M.J.)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조선에 몰래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39년 그 동안 포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되는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고, 나아가서 프랑스군함을 조선 해안에 파견시키는 계기가 되어 1846년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톈진 주재) 세실(Cécille)해군대령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나 조선 정부에 항의문을 보내고 다시 돌아갔다.
이에 대한 회답요구를 위하여 라피에르(Lapiérre) 대령은 2척의 군함을 이끌고 전라도 고군도()에 원정하였으나 난파당함으로써 실패하였다.
1866년 조선에서 12명의 프랑스신부 중 9명이 살해되는 박해가 일어나자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 로즈(Roze,P.G.) 제독은 박해 속에서 탈출에 성공한 리델(Ridel,F.C.) 신부와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조선원정을 결행하여 강화도까지 점령하였으나(병인양요, 1866.11.), 이는 결국 조선의 승리로 돌아감으로써 쇄국정책의 장본인인 흥선대원군을 더욱 의기양양하게 하였다.
2. 수교 후 한말의 조불관계(1886∼1910)
1)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관계발전:강화도에서의 조·불전쟁에 패퇴한 프랑스측(Napoléon Ⅲ)은 조선원정 실태의 책임을 물어 드 벨로네(de Bellonnet,B.) 주청공사대리를 소환하고, 뒤에 신미양요(1872)의 피해국인 미국이 프랑스 정부에 제의한 불미대한공동작전()에 대해서도 ‘조선에서의 무력행사에 대한 완전한 회피태도’를 취함으로써 미국의 공동정한제의()를 거부하였다.
프랑스는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필두로 영국·독일(1882)·러시아·이탈리아(1884)가 잇따라 한국과 수교하게 되고, 한반도에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프랑스는 1886년에 이르러 뒤늦게 교섭을 시작하여 선교문제로 논란 끝에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Cogordan,F.G.)과 조선측 한성판윤 김만식(), 고종의 외교고문관 미국인 데니(Denny,O.N.)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조약 체결 1년 후 비준서를 교환한 양국은 천주교문제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 지방관리, 교인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 조·불간의 외교문제로 확대됨은 물론, 이러한 불미스럽고 지루한 교안시대()는 교민조약(, 1899)과 선교조약(1904)이 성립되기까지 갈등이 컸으며, 이로 인하여 프랑스군함들의 군사적인 시위가 제물포(지금의 )를 비롯한 한반도 해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함께 3국 간섭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차관 공여 등 엄청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아관파천 중에는 고종이 주한프랑스 대리공사 플랑시(Plancy,V.C.d.)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세력이 물러가자 러시아 군사고문관 로미노프(Rominof)의 후임으로 프랑스의 포병대위 페이외(Peyeur,G.)가 임명되었다.
클레망세(Clémencet,E.)는 대한제국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12.)에 임명되어 한국체신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1900년 7월에는 우표·우편엽서를 프랑스에 의뢰하여 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프랑스우편협정이 체결되었다(1900.4.17.).
1900년 5월에는 법부 고문관으로 크레마지(Crémazy,L., 1905년 8월까지 재임)가 임명되었으며, 철도·광산 등 기술 분야에 라팽(Rapin)·트뤼슈(Truche)·푸샤르(Pouchard) 등 모두 15명의 프랑스인이 한국 정부의 중요 관직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프랑스관계는 일본측이 강요한 외국인 용빙협정(1904.8.22.)에 의하여 일본인으로 대치되게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한·프랑스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07년 불일협상()에 따라 인도차이나 식민지통치의 이권과 관련, 일제의 한국식민지화정책에는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서 다른 열강과는 달리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도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키고 계속 공관을 유지하였다.
2) 사회·문화 관계:1886년의 조약체결로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파리외방전교회는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한반도에는 가톨릭문화가 들어왔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주교(Mgr.Mutel,G.C.M., , 1890∼1933 재임)가 내한하였을 때는 이미 프랑스 선교사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양로원·고아원·신학교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사영백서()를 발견, 프랑스어로 번역, 서양학계에 소개하였으며, 기해박해에 관한 ≪기해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또한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약현성당() 등을 준공시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식 건물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 최초의 사전인 ≪한불사전≫과 최초의 한국어문법책인≪한국어문법 Grammaire Coréenne≫이 1880년과 1881년에 프랑스 신부들에 의하여 발간되었으며, 1906년 10월 19일 드망즈(Demange,F., ) 신부는 순 한글로 된 주간지인 ≪경향신문 ≫을 창간하여 한국언론 창달에 이바지하였다. 프랑스 신부들에 의한 가톨릭문화는 교육·기술·저술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프랑스어교육기관이 1895년 10월 고종에 의하여 법어학교()로 설립되었는데, 마르텔(Martel,E., 1949년 서울에서 죽음)은 최초의 프랑스어 교사였다. 법부 고문관 크레마지는 ≪대한형법 ≫(1905)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여 한국 형법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한말을 통하여 한·프랑스 문화관계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주한프랑스 총영사관에 재직한 쿠랑(Courant,M., 1890∼1892 재임)이다. 그는 3,821권에 달하는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화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한국인 중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서는 15명의 프랑스대학교 유학생과 홍종우(, 1890∼1893 파리체류)를 들 수 있으며,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은 1901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한말 당시 여타의 열강과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였듯 수교 후 한·프랑스 외교도 프랑스의 일방적인 대한외교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1900년 4월 24일 파리에 주프랑스대한제국공사관( 공사 부임)을 설치하여 뒤늦게 대유럽외교에 힘을 기울이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의 외교적인 지도로 헤이그평화회의(1902.2.20.  공사 참석), 육전병상군인구호협정조인(1903.2.3.)을 비롯하여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로 한국의 문물을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는 문화외교도 벌였다는 것은 한·프랑스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일제시대 한·프랑스관계(1911∼1945)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그 정책의 중심이 한국의 독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선 기존의 극동 세력의 기초인 영일동맹을 깨뜨리고 팽창하여 가는 일본세력을 막아 어떻게든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해 나가는 데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불·일협상(1907.6.10.)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 망명객들이 상해()에 모여들게 되자 상해주재 프랑스총영사관 당국은 한인들의 망명·정치활동을 묵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3일 당시 1,000여 명의 한국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600여 명이 프랑스조계에 머무르게 되어 우리 독립운동의 해외구심점을 이루었으며, 그 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사건()에 이르기까지 2,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1919년 베르사유강화회담에는 상해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하여(3.13.)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대표로 위임장을 받고, 구미위원 부위원장을 겸하여 파리에서 대열강외교를 전개하였다.
파리위원부는 통신국()을 병설하여 1921년까지 <자유대한 La Corée Libre>·<한국의 독립 L’Indépendance de la Corée> 등을 한국어·영어·프랑스어로 발행하여 프랑스 및 유럽여론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5월 10일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Clémenceau,G.)에게 한국 국민의 독립공고서()를 제출하였으나, 회의가 끝날 무렵 강화회의 사무총장 두스타(Dusta)와 화이트(White)의 이름으로 한국문제는 세계대전 이전의 문제로서 강화회의에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 국제연맹에 문의하기를 바란다는 뜻의 회답을 받았을 뿐이다.
이처럼 김규식의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으나,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눈부신 바 있어, 이를 계기로 한국독립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회의 종료 후,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 등)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한국독립의 지원을 유럽인들에게 호소하였다.
미국에 있는 이승만() 임시정부대통령으로부터 소환을 받고 김규식은 김탕·여운홍을 대동하고 파리를 떠났다. 
김규식이 떠난 뒤 파리위원부는 황기환을 위원장서리로 하여 계속 활동하였는데, 1920년 1월 8일 프랑스인권옹호회와의 공동주최로 파리위원부는 대연설회를 개최, 이를 계기로 15일 한국독립후원동지회가 프랑스인 33명과 중국인 등 외국인을 포함하여 모두 40여 명으로 발족하여 파리위원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파리위원부가 1921년 말까지 약 2년간 파리에 존속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프랑스인과 유럽인들에게 한국문제를 인식시키려고 홍보책자를 간행하면서 노력한 사실은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프랑스에서의 우리의 독립운동은 제2차세계대전중인 1940년 6월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 파리를 비롯한 국토의 대부분을 나치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인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1945년 2월 28일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독선전포고()를 선언한 다음, 충칭주재 프랑스대사는 3월 8일자로 프랑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함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임시정부의 외교문서에 밝혀져 있으나 미국외교문서에는 이를 부인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프랑스외교문서가 공개될 때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충칭의 임시정부는 주법임정대표()로 파리의 교포인 서영해()를 임명함으로써 프랑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서영해는 파리의 숙소에 ‘Agence Korea’라는 간판을 내걸고 저술활동도 하였는데, 1929년에 역사소설을 프랑스어로 발행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은 10세 때에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1919년 툴루즈대학(Université de Toulouse)에 입학한 민원식()이다.
1920년에 정석해(, 전 연세대학교 교수)·김법린(, 전 문교부장관) 등을 비롯하여 1920∼1940년 사이에 약 20여 명이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며, 윤을수() 신부는 1939년 ≪한국에서의 유교≫라는 제목으로 한국인 최초로 소르본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4. 광복 후 한·프랑스관계
1) 한·프랑스 국교재개와 유엔 프랑스군의 6·25 참전 :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프랑스는 1944년 8월 25일 나치독일군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1년 전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드골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새로운 제4공화국의 출범준비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하에 있었으며, 우리도 미·소 양국의 군대 진주 및 좌우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양국의 이러한 상황하에서 정상적인 국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파리에는 10여명의 우리 교포가, 서울에는 한말부터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던 마르텔가(Emile Martel)와 역시 한말 프랑스상회를 경영하던 플레상가(Plaissant)의 두 가족을 비롯해서 프랑스 수녀·신부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프랑스 양국이 공식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8월 15일 우리 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우리의 대표단( 단장··· 등)을 파견하여 승인외교를 전개하던 중 프랑스대표단과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에서 비롯된다.
9월 1일에서 12월 21일까지 개최된 이 총회에서 한국은 프랑스의 유엔대표 쇼벨(Chauvel,J.)을 비롯하여 미국·영국·중국 등 20여개 국 대표들로부터 승인약속을 받아 12월 12일 유엔정치위원회에서 48 대 6이라는 절대다수로 대한민국이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됨으로써 우리는 정부수립 즉시 파리유엔총회에서 건국외교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1949년에 접어들면서 미국(1.1.)·중국(1.3.)·영국(1.18.) 등이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외교절차를 밟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2월 15일 한국을 정식승인함으로써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4월 주한프랑스공사관을 서울에 설치하고(초대공사 Henri Costiles), 이와 상응하는 조처로 한국도 공진항()을 초대공사로 임명, 파리에 대한민국공사관을 개설하고 오리올(Auriol,V.) 프랑스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양국은 43년 만에 다시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유엔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유엔군의 한국파병을 결의하고, 7월 22일 프랑스 국내의 여론이 찬반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서도 프랑스군의 한국파병을 발표하여 29일 먼저 라 그랑디에르호(La Grandiére)라는 소형구축함을 파견하여 유엔군 사령부 산하에서 작전중인 미해군함대에 배속시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8월 24일에는 유엔군 프랑스대대를 지원병으로 창설하여 유엔군 산하 프랑스지상군이라는 특수부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11.29. 부산상륙). 프랑스군은 유엔군 프랑스대대라는 이름으로 12월부터 휴전 때까지 전쟁에 투입되어, 비록 대대병력에 불과하였으나, 쌍터널전투·지평리전투·단장의 능선 격전·281고지전투 등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려, 유엔 16개 국 참전군대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군대로서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외인부대감독관 출신인 베르네(Bernet,M.) 중장이 대대장에 자원하여 프랑스대대를 지휘함으로써,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프랑스국민 특유의 국민성으로 사기가 드높았던 이 부대는 전쟁중 1개 대대만 참전하였으나(1952년 6월 30일 현재 1,185명, 1953년 7월 1일 현재1,119명), 연인원 3,421명이 동원되어 전사자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 포로 12명(휴전 후 송환됨)의 손실을 보았다.
휴전 후 10월 22일에서 11월 6일까지 모두 철수한 프랑스대대는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6·25참전의 상징으로 50명 정도의 분견대를 잔류시키다가 1965년 6월 전원이 한국을 떠났다.
귀국한 프랑스장병들은 1955년 9월 10일 프랑스군 중대장 출신인 드 카스트리(De Castris)를 회장으로 프랑스한국전참전용사회를 350명의 회원으로 발족시켜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중요한 친한단체로서 한·프랑스간의 유대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2) 한·프랑스 협력시대의 개막과 관계증진 : 6·25참전으로 한국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프랑스는 제4공화국 말엽에 제기된 국내 정치·경제의 혼란으로 휴전 후에 양국간의 관계는 특기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8년 10월 드골의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양국은 새로운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먼저 양국은 10월 10일 공사관에서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양국관계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은 국내적으로 5·16군사정변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확립과 국제적으로 아시아·아프리카·중동 세력의 등장 및 미·소의 데탕트에 의한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서구외교에 있어서 고위인사 및 사절단파견 등 방문외교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명분 위주의 1950년대 외교방식에서 탈피,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랑스·서독·영국 등 서구선진국들과 통상증대·경제협력 등 경제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양국간에는 상표협력협정(1961.2.)·관세협정(1963.4.)·특허권 상호보호협정(1963.4.)·사증면제협정(1967.4., 1980.8. 프랑스측 일방 폐기)·문화 및 기술협력협정(1968.5.)·한·프랑스기술초급대학설립협정(1971.12., 1972.11.29. 발효)·민간항공협정(1974.6.)·원자력의 평화적 이용협력협정(1974.10.)·투자보장(쌍무)협정(1975.1.)·투자보장(쌍무)협정 가서명(1975.11., 1977.12.8. 서명, 1979.2.1. 발효)·이중과세방지협정(1979.6.)·어업협정(1980.9.)·과학기술협력협정(1981.4.) 등을 체결하였다.
한국은 1959년부터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였고, 1960년대 초부터 양국 교역증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한국은 1960년대 아프리카 신생 제국의 대거 출현에 주시하여 주프랑스대사관을 아프리카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대아프리카외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1960년대 하반기부터는 프랑스의 대한경제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가추세에 있었는데, 1959∼1980년 사이의 프랑스로부터의 자본도입은 8억 1,000만 달러이다.
주요 내역은 어선건조차관(2,000만 달러), 어선차관(1,867만 9,678달러), 팔당수력발전소건설(1,500만 달러), 원유수송선도입(1,890만 달러), 선로개량사업차관(1,677만 달러), 원자력발전 제9·10호기, 포항제철3단계확장공사, 정유공장, 알루미늄공장 등이다.
원전 제9·10호기(17억 6,000만 달러 상당)를 프랑스 프라마통사(Pramatom)가 수주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앞으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소요되는 각종 기자재를 공급하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방위산업·철도·지하철·전화·전기 분야 등에서 대프랑스기술협력을 비롯하여 대프랑스 수입이 증가하리라는 전망이다.
프랑스는 우리의 중요한 교역상대국으로서 유럽국가 중 독일·영국·네덜란드·노르웨이에 이어 제5위의 수출국이다. 수입은 독일·영국에 이어 제3위이다. 통상은 1988년의 경우, 대한수출 11억 3,485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강), 수입 10억 6,989만 달러(송신기기·컴퓨터부품·섬유류·선박)를 기록하였다.
양국간의 교역량의 확대와 경제협력의 증진은 관세협정·문화 및 기술협력협정 등의 체결을 비롯하여 양국 각료급 고위인사들의 상호방문 및 경제외교에 힘입은 바 큰 것이며, 이러한 경제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1980년 11월에 열린 제5차 한·프랑스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에서는 건설·항공전자·전기·정보산업·공공토목·원자력 업체 등 프랑스에서 매출액이 최소한 연 10억 달러 이상이 되는 23개 주요 업체가 참가하여 구체적인 대한 경제협력사항에 상호협의하기로 합의하기도 하였다.
외교적인 면에서 1981년 5월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V)의 보수정권은 종래와 변함없이 경제협력 증진에 노력했으나, 사회당 정권 출범 이후 1984년까지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점차 대형화될 가능성이 있는 한·프랑스경제협력 등 현안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관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84년 12월 파리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격상시킴으로써, 이것이 프랑스의 북한승인의 예비단계조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짙게 하면서 한·프랑스 양국간의 앞날에 암운이 비치는 것으로 우려되는 바가 컸다.
1985년 4월 초 파비위스(Fabius,L.) 수상의 내한으로 프랑스가 북한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이 재확인되었으며, 양국 경제협력관계 증진·양국 대통령의 상호방문 합의 등 양국은 한·프랑스 관계사상 새로운 장을 펼칠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수상의 방한은 한·프랑스 외교사상 최초의 내한이었다는 점에서 외교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이상과 같은 1980년대까지의 양국의 협력발전은 그 동안 꾸준한 양국의 정책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양국은 쌍방간의 정책협의를 위하여 정책협의회를 정례화하였는데, 제1차 한·프랑스 정책회의가 1985년 11월 18일 파리에 개최된 2년 후인 1987년 3월 10일에서 11일에 걸쳐 제2차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제3차(1991.9.4., 서울)·제4차(1992.5.26., 파리)·제5차(1993.3.15., 서울)·제6차(1995.12., 파리), 제7차(1997.4.16., 서울)를 비롯하여 1999년 파리에서 제8차 한·프랑스 정책협의회 개최가 현재 논의 중에 있다.
이 밖에 한·프랑스 양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1차 한·프랑스 포럼이 1995년 11월 23일에서 24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제2차(1997.11.23.∼11.24., 파리)·제3차(1998.6.25., 서울)로 이어져 양국 지성인간의 폭넓은 이해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양국간의 교역규모는 그 동안 꾸준히 증가되어 왔으며, 1995과 1996년에는 약 34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중 1997년부터 감소하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1998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경제와 무역규모에 비추어 볼 때 양국간 교역은 확대될 여지가 많으며, 교역의 확대 균형을 위한 상호 노력 강화가 필요하다.
세계 무역에서 프랑스와 한국은 각각 4위, 11위의 교역국이며, 한국은 프랑스의 20위 교역 상대국이다. 최근의 한·프랑스 교역 현황은 1995년 35억 달러(수출 12억 달러, 수입 22억 달러)이고, 1997년에는 32억 달러(수출 14억 달러, 수입 18억 달러)이었다.
2015년 현재 한국의 대프랑스 수출액은 25억 8100만 달러고 주종목은 선박, 승용차, 축전지, 자동차 부품 등이다. 수입액은 61억 5700만 달러고 주종목은 항공기, 화장품, 의약품, 펌프 등이다.
프랑스의 대한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 중인데, 한국의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더욱 긴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보다 적극적인 투자가 기대된다.
양국간의 투자현황(1997년 누계)을 보면 프랑스의 대한투자는 113건에 8.5억 달러(유럽연합 기업의 대한투자의 13.6%로서 유리제조, 플라스틱·화학·기계·유통업·화학 부문)이며, 한국의 대프랑스 투자는 33건에 2억 달러(대유럽연합 투자의 10.2%로서 승용차·부품·섬유·전자·전기제품·C-TV·C-TV용 CP)이다.
1998년 4월 아시아태평양경제정상회담(ASEM) 및 양국 정상회담에서 약속된 유럽연합 회원국의 대한투자 사절단 파견계획에 따라 프랑스 투자사절단이 6월 29일에서 30일 사이 방한하였다.
이는 약 35명의 유수 기업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우리 정부 부처(외교통상부·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건설교통부 등)를 방문하고 개별상담회, 한·프랑스 최고경영자클럽 합동회의(주제발표회·투자환경 설명회)에 참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양국간에는 위와 같은 양국 협력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프랑스 이중과세 방지협정(1991.4.9.), 한·프랑스 환경협력 약정(1994.3.28.)·형사법 공조조약(1995.3.) 등을 체결하였다.
또한 양국 단기 파견근로자의 사회보장 기여금 이중납부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양국간 교역·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프랑스 사회보장 협정의 체결을 추진 중에 있다.
양국간의 협력증진은 양국 정상간의 상호방문으로도 상징된다. 1986년 4월 14일에서 16일 사이 전두환() 대통령의 방불에 이어 1989년 11월 30일에서 12월 2일 사이 노태우() 대통령도 방불하여 미테랑 프랑스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양국 관계증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98년 7월 10일에서 14일에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월드컵 폐막식 참석차 방불하였다.
프랑스측에서도 1990년 10월 18일에서 22일 사이 시라크 파리시장(현재 대통령), 1991년 5월 1일에서 3일 사이 로까르 총리의 방한에 이어 1993년 9월 14일에서 16일 사이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 한·프랑스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양국간의 관계증진에 따라 한국인의 프랑스 진출도 괄목할 만하다. 1997년 재프랑스 교민 수는 1만 1067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교민은 1,264명이고 장기 체류자는 9,803명(유학생이 전체 한인의 60%, 파리지역 거주 한인의 전체 70% 차지)이었다. 2014년 현재 재프랑스 한인은 1만 5000여 명이다.
한·프랑스간 주요 문화교류로서 아비뇽연극제 참가(1998.7.13.∼21.), 몽펠리에 국제무용제 참가(1999년 하반기), 디죵 국제민속제 참가(1998.8.31.∼9.60.) 등이 있다. 또한 파리 기메박물관 한국실 확장 개관이 1999년 국제교류재단의 지원하에 현 17평 규모의 한국실을 80평 이상으로 독립 확장하였다.

프랑스 한반도 정책과 북한

1) 프랑스 제5공화국의 한반도정책
프랑스의 한반도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긴장요인이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 여건하에서 남북한의 통일전망을 실제로는 요원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을 토대로 한 현체제가 한반도와 그 주변의 극동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는 우리의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정책을 현실적·합리적인 방안으로 지지해 오고 있다. 1991년 9월 유엔총회에서의 의결로 통과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찬성했으나, 그 동안 소련 및 중국의 거부권행사로 현실적으로 가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이를 제의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평가했었다.
사회당 정권은 실리관계를 토대로 한 기존 우호협력관계의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대북한승인문제는 한·프랑스우호협력관계 유지원칙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검토해 온 바 있는데, 
랭군테러사건으로 북한의 무력적 모험주의 및 한반도문제의 현실적인 심각성을 재인식하면서 북한승인문제는 1984년 12월 11일 파리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격상허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사회당 정권의 출범 후 4년간 미테랑 정부는 북한승인문제와 한·프랑스우호협력관계 유지원칙은 수정한 일이 없으므로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는 원칙상의 전제로 남아 있었으며, 이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원칙과 현실의 차이 때문이었다. 공익과 실리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방식임을 감안할 때 사회당 정부가 원칙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4월 초 수상의 방한을 계기로 북한불승인을 재확인함으로써 한·프랑스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게 되었다.
2) 북한과의 관계
프랑스는 1960년대 후반기부터 민간차원에서 대북한관계(주로 교역)를 시도하여 1968년 5월 프랑스민간무역사무소(1978.8. 폐쇄)를 평양에 설치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9월 북한의 파리주재 민간무역대표부가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허가되었다.
북한은 이 대표부를 근거지로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제국과 서독 등에 침투, 활동해 왔으며, 1976년 11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본부 상주대표부의 설치를 허가받아 파리에 2개의 대표부를 두게 되었다.
1991년 이후로는 일반대표부에서 업무를 흡수하여 유네스코(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 사무실은 유지하지만 평상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 본부사무국에는 북한 출신 직원 7명이 근무하고 있다.
1976년 6월에는 민간무역대표부를 통상대표부로 격상시켰으며 1984년 12월 다시 일반대표부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이는 사실상의 격상이다. 이러한 북한의 파리진출에 따라 파리에는 친북한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친북한단체의 활동으로 1982년 말 프랑스 상원의원이 평양과 서울을 다녀가 화제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다음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역시 서울과 평양을 다녀간 일이 있다.
교역의 측면에서 프랑스는 1970년대 초 석유화학 플랜트수출을 북한과 계약, 연간 20만 톤의 납사를 분해하여 베틸린 6만 톤과 프로필렌 3만 톤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의 대프랑스 중요수출품은 금·아연·연괴 등 광산물이며, 수입품은 기계 및 선반 등 각종 기계류·밀가루 등이다.
주요 경제협력으로는 프랑스·북한합작 호텔건설사업이 있다. 이는 1985년 2월 26일 프랑스의 캉프뇽·베르나르상사와 북한 제일설비사 사이에 평양시 호텔합작건설협정이 프랑스정부의 허가를 조건으로 서명되었다.
문화교류관계로서는 프랑스외무부 문화총국장 부테(Boutet)가 1984년 10월 평양에서 프랑스·북한문화교류의사록에 서명하였는데, 양국측 의사록을 초안하던 중 문화행사 제의와 서커스단 파견 등 구체적 사항을 삭제하고 일반적·의례적 문구만을 삽입하였으며, 북한어학연수생을 프랑스 정부가 접수할 것을 원칙으로 수락하였다.
프랑스와 북한간의 통상관계는 북한 기준 무역량으로 1990년 수출 1580만 달러(수입 1200만 달러)이고, 1991년에는 수출이 1240만 달러(수입은 820만 달러)이며, 1992년에는 수출이 1700만 달러(수입은 1130만 달러)이다. 그 뒤 1993년도에는 수출이 1930만 달러(수입은 6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주요 수출입(북한 기준) 품목 가운데 수출 부문은 산화마그네슘·박하유·합성제 의류 및 합섬사·우표 및 수입인지·기초컴퓨터 부품이며, 수입품은 금속가공기계 및 선반·의학기기 등 각종 기계류·항공기·계측기기·기관차 및 부품, 정유용 촉매·마그네틱 철판·천연고무·니켈·카드뮴·축전지 등이다.
한1992년 3월 16일에서 23일 사이 파리에서 조선영화 주간행사가 개최되었으며, 1992년 10월에서 12월 사이 북한 국립 서커스단이 방불하여 공연한 바 있다.
3) 전망
1980년대 중반기의 한반도정세가 남북대화 재개 등 내부적인 해빙에로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수상의 방한은 한·프랑스관계의 재조명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미묘한 한반도정세에 대한 서구 제국의 실질적 관심을 제고시키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국제환경이 조성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프랑스 국내정치에 따른 사태변화는 6·25참전국으로서의 전통적 우의와 경제협력을 부분적으로 퇴조시킨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 수상의 양국 관계사상 최초의 방한은 지난날의 한·프랑스관계를 반성하고 장래에 대한 양국의 공동적인 시각을 갖기 위한 양국 지도자간의 해후이며, 또한 양국 관계발전에 밝은 전망을 기약하는 의의를 갖고 있다.
양국은 먼저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현 국제정치적 인식에 있어서 맥을 같이해야 된다고 보는 것인데, 한반도의 분단을 이용하여 경제협력의 실리를 추구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예를 들면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와의 새로운 차원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전략으로서 먼저 프랑스와의 제휴에 의한 한국의 제3세계에의 합작진출 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프랑스 합작투자방식을 통한 한국의 수출시장 다변화와 대아프리카진출은 양국간의 이상적인 협력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양국간의 협력은 성실한 자세로 양국의 상호이익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며, 양국수교 100주년을 넘어선 역사적인 대전환기에서 양국 관계증진의 밝은 전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 방불시 미테랑 대통령이 언급한 바와 같이 더 이상 북한에 대하여 호의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한 바가 있다. 
현재 좌우 동거정부에 있어서 프랑스의 대한반도 정책은 1998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88년 7월 7일 대통령 선언에 다른 대북한 대화추진 노력 등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하여 프랑스는 계속 지지하고 있다.
특히 대북한 관계개선 문제는 북한의 기본적인 정책변화가 이뤄지고 남북대화의 의미있는 진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또한 유럽연합 제국 및 한국과 긴밀한 협의하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 동거정부의 입장이다.
거시적 관점에서의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18세기 이후 미국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협력관계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럽-지중해 연안국가간의 협력관계 구축은 프랑스외교의 핵심축이 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서의 평화협상도 지역전체의 안보·정치적 안정, 경제발전을 위한 결정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와 병행해서 프랑스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제무역과 현대사회의 변화에 중추적 역학을 하게 될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도 강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랑스의 대한반도 정책은 모든 부문의 협력관계를 더욱 다질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내의 우리 문화

프랑스는 우리나라가 외국과 대외관계를 수립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초엽부터 가톨릭을 통하여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나라이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 프랑스는 명실공히 유럽 한국학의 중심지라고 부를 수 있게까지 되었다.
1) 1910년 이전의 한국관계 문헌
프랑스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표현의 시초는 ≪하멜표류기≫의 번역출판이라 하겠다. 이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지 2년 후인 167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파리에서 작은 단행본으로 나왔다.
네덜란드어(플래밍어)보다 세력이 강한 프랑스어본이 나옴으로써 영어로 번역이 되는 등 당시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데 큰 구실을 하였고, 19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유일한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다.
그 이후에 나온 백과사전류와 여행관계 서적들은 모두 ≪하멜표류기≫의 내용을 베껴 썼던 것이다. 
1736년에 나온 샤를르보아(Charlevoix) 신부의 ≪일본사≫ 제2권에는 ≪하멜표류기≫의 제2부에 해당하는 ‘조선 왕국 서술’ 부분을 전재()하였다.
듀 알드(Du Halde) 신부는 조금 다르게 1735년에 4권으로 출판된 그의 ≪중국 및 대달단국지≫의 제4권에 35면에 걸쳐 중국자료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지리에 대하여 썼다.
한반도가 어느 정도 실제지형과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프랑스의 지리학자들이 만든 지도에 등장하는 것은 모르티에(Mortier,P.)의 <청제국도 >(1650년경), 장 블로(JanBleau,J.)의 <일본도 >(1655), 벨랭(Bellin,J.)의 <일본 및 캄차카도>(1735) 등이고, 프랑스 신부들이 과학적으로 측량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당빌(d’Anville)이 제작한 대형 <중국신지도첩 >(1737) 중의 달단도에는 한반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과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루이 16세가 세계탐험을 위하여 파견한 항해가 라 페루즈(La Pérouse) 대령이 1787년 5월 동해안을 지나다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다쥬레(Dagelet)도로 명명하였으며,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이를 리앙쿠르도(바위섬)라 하였다. 이 명칭들은 20세기 중엽까지도 서양지도에 사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해군함정들이 서해안과 남해안에 출현하였는데, 이때 프랑스의 해군함정들이 작성한 해도()들이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이들 지도에는 동해가 오늘날의 ‘일본해’와는 달리 동해의 번역인 ‘Mer de l’Est’로 나타나 있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 있던 프랑스 신부의 밀입국 때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1846년에 작성하여 보낸 조선전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옆에 따로 우산도라 하여 조그만 섬이 있는데, 이는 독도를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이름과 위치를 혼동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프랑스가 한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83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파리외방전교회에 한국에의 가톨릭 전파 임무를 맡김으로써이다. 따라서, 중국을 통하여 1836년에 모방(Maubant,P.) 신부가 최초로 숨어들어와 우리나라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그 몇 달 뒤인 1837년에는 앵베르·샤스탕(Chastan,J.) 신부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때부터 조선의 내부사정이 가톨릭 잡지인 ≪신앙전파≫를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선의 왕정과 관리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당시의 조선의 내부사정을 부분적이나마 알리고 있었다.
1837년에 천주교박해로 세 프랑스신부가 순교하고, 1845년에 마카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Ferréol,J.J.)·다블뤼(Daveluy,M.A.N.) 두 신부가 밀입국하여 당시에 순교하고, 리델·페롱(Féron,S.)·칼레(Calais,A.) 세 신부는 숨어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하였다. 리델 신부는 이 사실을 주북경 프랑스공사 드 벨로네에게 알렸다.
리델은 1878년에 다시 조선에 들어와 전교하다가 잡혀 감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추방되었는데, 프랑스에 돌아와 1879년에 ≪옥중기≫를 썼다. 이는 당시의 감옥생활을 소상히 알리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작성 당해인 1801년의 박해 때 압수당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에 발견되어 조선교회 주교인 뮈텔의 손으로 넘어갔다.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순교복자 79명의 사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에는 우리 나라에 가 있던 프랑스 신부들이 써 보낸 많은 서한과 순교한 프랑스신부 및 한국인 교인들의 유품들이 있다.
프랑스는 영국(1842)에 이어 1844년 중국과, 1858년에는 일본과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극동에 진출하고 있던 유일한 가톨릭국가였으므로 극동의 가톨릭보호국으로 자처하였고, 영국과 함께 중국에 극동함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박해소식을 전해 들은 드 벨로네 공사는 조선정부를 응징하기 위하여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전함 3척을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프랑스함대는 리델 신부의 안내를 받아 1866년 9월 18일 중국을 떠나 강화도에 도착, 11월 22일 철수할 때까지 약 2개월간 강화도에 머물렀다. 프랑스해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강화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책 342권을 가져갔다. 그 중 297권은 필사본이고 45권은 인쇄본이다.
의궤()가 그 주를 이루는데, 이 책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주어졌다. 오랫동안 베르사유의 도서관 별관에 방치되었다가, 1970년대에 그 가치가 인정, 보수되어 파리의 본관 동양서적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1993년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의 김영상 대통령에게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시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협의를 거치다가 2010년 11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합의하면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1년 5월 26일 3차분의 의궤가 들어옴으로써 총 297책 전부가 국내에 들어왔다. 병인양요 때 약탈된 뒤 정확히 145년만의 일이다. 현재는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해군의 강화도 파병을 보여주는 펜화() 8장이 주간 시사 ≪화보≫에 1867년 1월과 2월 3회에 걸쳐 실렸다. 아직 사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19세기 말까지 화보의 그림들은 필화였다.
이 그림들은 강화도 파병에 참가한 주베르(Zuber,H.)의 크로키를 바탕으로 그린 것들이다. 주베르는 그 뒤 풍경화가로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데, 현지에서 직접 보고 그린 그의 그림은 묘사가 생생하고 사진으로 보는 것만큼 현실적이다.
그림은 정장을 한 사회 각 계층의 남자를 그린 것(평민, 군복을 입은 , 양반, 병졸), 프랑스해군함정의 강화도 도착장면, 강화도 전경, 강화아문의 프랑스해군 열병, 강화도 전투장면, 강화산성, 화포와 조총 등 9점의 무기와 갑옷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풍물의 실상을 깊이 있고 생동감 있게 그린 그림으로 서구에 소개한 최초의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베르는 그 뒤 자신이 그린 펜화를 곁들여 강화도 파병 당시의 자신의 체험기를, 세계 풍물을 화보로 소개하는 정기간행물 ≪세계일주≫(1873)에 실었다. 
인물, 강화도 풍경과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펜화 9점과 당시 조선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조선전도 1점도 들어 있다. 
전투에 참가한 해군대위 주앙(Jouan)도 전투 상황과 한국에 관한 글을 두 편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인 1874년에는 ≪하멜표류기≫ 이래 한국을 가장 상세하고 정확히 서구에 소개하는 데 이바지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Dallet,C.) 신부의 ≪조선교회사≫가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A5판 2권으로 된 이 책은 총 982쪽인데, 제1권의 192쪽에 달하는 서문에서 한국의 지리 및 토질에서부터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한글로 훈과 음을 단 천자문, 한글발음표, 한글 천주경, 한글 성모경의 복사전재 및 조선전도(24×40㎝)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도 울릉도 바로 옆에 우산도(독도)가 나와 있는데, 위치와 명칭이 잘못 잡혀 있다. 본문에서는 가톨릭 전래 이래 병인양요까지의 조선천주교회사를 다루었으며, 당시의 조선사정도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선교사들의 수난과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에 관한 소책자 및 순교한 프랑스선교사들의 전기 몇 권이 나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로네(Launay,L.) 신부가 <조선과 프랑스선교사들>(1901)을 썼는데, 달레의 ≪조선교회사≫ 내용의 요약이고, 끝 부분에 1866년 이후의 조선실정을 소개하였다. 그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풍물을 그린 펜화 21장과 김대건을 포함한 프랑스순교자들의 초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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