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4일 목요일

소수서원 . 안향 . 安珦.

안향 . 安珦.

안향()의 처음 이름은 안유()이며 흥주(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사람이다. 부친 안부()는 주리()로 의술()에 종사하다가 벼슬에 올라 밀직부사(使)까지 지내고 사직했다. 

안향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원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교서랑()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으로 승진해 내시()에 소속되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 상주판관()으로 나갔는데, 당시 여자 무당 세 명이 요망한 귀신을 모셔놓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합주(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로부터 군()과 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허공에서 나오는 듯한 사람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어찌나 큰지 마치 갈도()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 뒤질세라 제사를 지냈는데, 수령()까지도 합세했다. 

그들이 상주(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오자 안향이 곤장으로 때리고 칼을 씌우니 무당이 귀신의 계시라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상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안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무당이 용서를 빌기에 그제야 석방하니 그 요망한 사술이 사라지고 말았다.

안동(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가서는 읍리()를 시켜 자기의 발을 씻게 하자 그 읍리가 “나는 읍리인데 당신이 어째서 나를 욕보이는 거요?” 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전들과 의논해 그를 타박하려 하자 어떤 늙은 아전이 안향의 풍모를 보고 나오더니,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이 분은 훗날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를 터이니 쉽게 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3년 뒤에 안렴사(使)가 그의 행정이 청렴하다고 추켰으므로 내직으로 불러들여 판도좌랑()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전중시사(殿)로 승진시켰다. 

뚤루게[禿]로 뽑혔으며 예에 따라 국자사업()으로 승진하고 우사의()를 거쳐 좌부승지()로 임명되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정동행성 원외랑()이 되었고 곧이어 낭중()에 올라 본국의 유학제거()가 되었다. 뒤에 부지밀직사사()로서 합포(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주둔군의 지휘관이 되자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니 고을들이 그의 덕으로 편안해졌다. 이후 승진해 첨의참리()가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행동경유수()·집현전대학사(殿)·계림부윤()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참리()가 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한 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가게 되자 안향이 따라갔다. 어느 날 황제가 왕을 급히 부르자 왕이 영문을 몰라 겁에 질렸다. 

승상()이 나와서, 따라온 신하 가운데 우두머리 되는 자가 들어와서 뵈오라고 전갈하므로 안향이 들어갔다. 승상이 황제의 말이라며, 고려왕이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안향은

“규방의 일은 밖에 있는 신하가 알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물으시니 어찌 만족하시도록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승상이 그대로 보고하자 황제는

“이 사람은 요점을 알고 있으니 어찌 먼 나라의 사람이라고 무시하겠는가?”
라 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

충렬왕 26년(1300)에 찬성사()가 되자 권력을 잡은 자가 그를 꺼리게 되었고 결국 왕에게 몰래 귀띔해 중찬()으로 올려준 후 나이를 이유로 사직하게 했다. 그러나 곧이어 찬성사로 복직했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나날이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양부()에 건의했다.

삼별초()의 난 때 적에게 사로잡히자 평소 그의 명망을 듣고 있던 적이 그를 이용하려고 달래고 으르면서 군중에 “안한림()을 놓아주는 자는 벌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안향이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상을 주었다. 12년(1271)에 왕명을 받들고 서도(西)로 가서는 청렴으로 이름났다. 이후 내시원()으로 소환되자 내시원의 묵은 폐단을 글로 써서 보고해 없앴으며, 곧이어 감찰어사로 승진했다.

“재상의 직무 가운데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는데, 지금 양현고()가 텅텅 비어서 선비를 기를 수 없습니다. 6품 이상으로부터는 각각 은 한 근을, 7품 이하로부터는 베를 차등 있게 갹출한 다음 그것을 양현고로 보내어 기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만 받아서 섬학전()으로 삼도록 해주십시오.”

양부가 이를 승인하고 보고하자 왕은 내고()의 돈과 곡식을 내어 기금의 조성을 도왔다. 밀직() 고세()가 자신은 무인()이라 하여 출자를 꺼리자 안향이 재상들에게 말했다.

“공부자()의 도()가 천추만대의 헌장이 되었으니 신하가 왕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동생이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그런데도 ‘나는 무인인데 무엇 하러 괜스레 돈을 내어서 너희 문인들의 후진들을 기를 것인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공자를 무시한 것이니 과연 옳은 태도이겠습니까?”

고세가 그 말을 듣자 크게 부끄러워하며 바로 돈을 내놓았다. 안향은 또 기금을 조성하고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鼎)등에게 주어 중국으로 파견해 공자와 그 칠십 제자의 초상을 그려 오도록 하고 아울러 제기()와 악기(), 6경() 및 제자서()와 사서()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밀직부사로 벼슬을 마친 이산(imagefont)과 전법판서 이진(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使)로 삼았다. 그리하여 금내학관()·내시()·삼도감()·오고()의 관리 중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칠관()과 십이도()의 생도들로서 경서()를 가지고 수업을 받는 자가 거진 수백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유생들 가운데 어떤 자가 선배에게 예를 갖추지 않자 안향이 노해 벌을 주려고 하였다. 그 유생이 사죄하자 안향은, “내가 생도들을 내 아들과 손자처럼 대하는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이 늙은이의 마음을 깊이 새기지 않는가?”
고 훈계하고는 집으로 데리고 가 술자리를 열어주었다. 

유생들이, “공이 우리를 이처럼 정성껏 대하시는데 만약 그 감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사람이겠는가?”
고 반성했다. 

충렬왕 32년(1306)에 다시 첨의중찬()으로서 사직하고 죽으니 나이 예순 넷이었으며 시호를 문성()이라고 하였다. 장사를 치를 때 칠관과 십이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

안향은 성품이 장중하고도 자상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공경했다. 상부()에 재직 중에는 일을 잘 기획하고 단안을 잘 내려 동료들이 순순히 따르고 조심할 뿐 감히 다투지 못했다. 항상 학문을 진흥해 인재를 길러내는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한시도 그 일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손님 맞기를 좋아하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문장은 맑으면서도 굳세어 읽을 가치가 있었고 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김이()와 백원항()이 아직 출세하지 못했을 때 안향이 그들을 보고는 훗날 반드시 모두 벼슬이 높고 현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제현()과 이이()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해 함께 이름이 났는데, 안향이 불러서 시를 짓게 하고는 “이제현은 필시 귀한 신분이 되고 오래 살 것이나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하겠다.”고 예언했는데 과연 들어맞았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지극히 경모했으며 자신도 회헌()이라 자호했다. 유금() 하나를 장만해 두고는 선비 가운데 배울 만한 자를 만날 때마다 배우기를 권했다. 

고려사 - 안향


고려사 - 안향


고려사 - 안향


고려사 - 안향


충숙왕 6년(1319)에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안향의 건의에 따라 섬학전이 설치되긴 했으나 이것만으로 어찌 문묘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했으나 그의 문생() 신천()이 힘껏 주청해 마침내 그를 종사하였다.

안향(1234~1306) : 안유(安裕)라고도 하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집안은 보승별장(保勝別將)에서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으로 추봉된 안향의 증조부 안자미(安子美)가 순흥(順興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본관으로 삼았다. 

조부는 추밀원 부사에 추봉된 안영유(安永儒), 부친은 안부(安孚)이며, 모친은 단양 우씨 우천규(禹天珪)의 딸이다. 한남 김씨(漢南金氏)로서 원종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우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김녹연(金祿延)의 딸과 결혼하여 안우기(安于器) 등을 낳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안향이 주리(州吏)로서 의업(醫業)으로 출세하여 관직이 밀직부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고 하였지만, 『안자연보(安子年譜)』에 안부는 과거에 급제하여 판도판서에 올랐다가 태사·문하시중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안향의 가계는 증조부 안자미가 호장(戶長) 출신으로 주현군의 지휘관이었던 점과 모친 우씨 부인 역시 단양의 향리집안인 우천규 가계 출신인 점을 보면 향리집안으로 기록된 『고려사』의 내용은 신빙성이 높다. 

가문은 본읍(本邑)에서 호장을 세습하다가 원간섭기에 안향이 상경종사하면서 신진사대부로 성장하였다. 즉 안부—안향—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으로 이어지면서 모두 과거를 통해 관인으로 진출하여 세족의 기반을 갖추었고, 이제현·이조년·이곡·권보 등과도 학문적 사우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원 염씨·광주 김씨·파평 윤씨·원주 원씨·경주 이씨·문화 유씨·황려 민씨·전주 최씨·안동 김씨·동래 정씨 등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한 후 거듭 승진해 국학전주() 우승지()가 되었으며 밀직부사로 승진하였다. 

충선왕은 안향이 자신을 호종해 원나라에 갔다가 곧 돌아와 버린 것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다가 안우기를 처벌하려 했으나 마침 사면령이 내려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밀직부사 겸 대사헌()으로 임명했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시키고 원윤() 조후()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후는 당시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반면, 안우기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았으나 조정 안에 돕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식자들은 그의 파직을 애석하게 여겼다. 

합포(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대를 지휘할 때는 청렴하고 재간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충숙왕 16년(1329)에 검교찬성사()로서 죽자 유언에 따라 소박하게 장례를 치렀다. 아들은 안목()이다.

안우기(1265~1329)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허중(虛仲)이다. 비서한림원(秘書翰林院)·통례문지후·밀직부사·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등을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충렬왕 27년(1301) 7월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승보시(升補試)를 주관하여 최응(崔凝) 등 150인, 그리고 같은 왕 31년(1305) 3월에 우승지(右承旨)로서 국자시를 주관하여 이문언(李文彦) 등 73인을 선발하였다. 
원종 때 전첨(典籤)·비서랑(秘書郞) 등을 역임한 최충약(崔冲若)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고, 둘째 부인 이씨(李氏)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안향() 부 안목()

안목()은 과거에 급제한 후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가 되었다. 한때 자기 처를 쫓아내었는데, 마침 그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 원나라 사신 투멘[禿]이 내막을 묻자 안목이 길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투멘이, “부인네들이 머리털은 길지만 마음이 짧은 법인데 무엇을 그리 탓할 수 있겠소? 속담에 ‘한 여자가 하늘을 원망하면 유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으니 그대는 잘 생각하시오.” 하고 충고하니 안목이 그 말에 느낀 바 있어 다시 부부로 합치게 되었다. 

거듭 승진해 밀직부사(使)가 되었다가 공민왕 때 순흥군()으로 봉해졌고, 죽은 후 시호를 문숙()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안원숭()이다.

안목 . 安牧.

이칭별칭 익지(),  겸재(), 시호 문숙()
유형인물
시대고려
출생 - 사망미상 ~ 1360년(공민왕 9)
성격문신
성별
본관순흥(: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대표관직(경력)판전교시사, 밀직부사, 경사도감제조, 서연관.

정의 . ?∼1360(공민왕 9).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순흥(). 자는 익지(). 호는 겸재(). 할아버지는 삼중대광도첨의()안향()이고 아버지는 검교찬성사()안우기()이다.

활동사항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를 거쳐, 1330년(충숙왕 즉위년) 대언()이군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밀직제학()·밀직부사(使)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서연관()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순흥군()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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