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5일 금요일

독일 , Germany, 獨逸. 1

독일 , Germany, 獨逸.

독일_역사_국가기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 서(西)게르만계의 제부족, 즉 독일 제부족이 하나의 국가 밑에 통합된 것은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왕국에 의해서였다. 

라인강 중류를 점거했던 프랑크족은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까지 플랑드르 지방 및 마스· 모젤 두 하천 유역을 점령하고, 메로빙거왕조 때에 남서 프랑스로 진출하는 한편 남동쪽으로 나아가서 슈바벤·튀링겐·바이에른 등의 부족을 정복하였으며, 카롤링거왕조의 샤를마뉴(재위 768∼814) 때에는 최후까지 버티던 작센족을 굴복시켰다. 

독일 제부족이 그리스도교화하고, 또 독일 고래()의 정치체제인 렌(Lehn:) 제도의 기초를 굳히게 된 것도 그와 같은 부족통합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독일의 제부족은 공통의 국가적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그들은 단지 프랑크 대제국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다. 

샤를마뉴 때의 프랑크왕국의 판도가 동쪽은 엘베강·도나우강 상류 유역, 서쪽은 피레네산맥에 미치고, 또 샤를마뉴는 로마 황제의 제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지배력이 많은 민족에 미쳤기 때문이다.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왕국 분치()의 문제와 더불어 내란이 계속되었으며,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라틴적 전통이 강한 서프랑크(프랑스)와 게르만적 전통이 강한 동프랑크(독일)가 제각기 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독일의 축제

독일에서는 1년 내내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전통 민속 축제와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 뛰어난 음악가를 기념하는 음악제, 종교적인 축제 등 풍부한 행사들이 독일의 365일을 즐겁게 해 준다.

1) 옥토버페스트'

매년 9월 세 번째 토요일 정오부터 10월 첫 번째 일요일까지 뮌헨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이다. 독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에서 7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
독일 국민은 물론 전세계에서 7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다.
1810년 10월 바이에른 공국의 초대 왕인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에서 시작된 옥토버페스트는, 1883년 뮌헨의 맥주 회사들이 축제를 후원하면서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축제로 발전하였다.

축제 첫날에는 시민들이 분장하고 음악가 바그너가 세운 극장에서부터 시내를 행진한다. 동시에 시내 광장에서는 뮌헨의 6대 맥주 회사가 3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 술집을 열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이어 뮌헨 시장이 그해 첫 생산된 맥주를 선보이면서 축제의 개막을 선언한다. 이후 16일 동안 맥주를 마시고 즐기면서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 축제가 벌어진다.

2) 사육제'

독일에는 부활절 40일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근신하는 사순절이라는 기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실컷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셔 두자는 잔치가 바로 사육제(), 카니발이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기 1주일 전부터 축제는 최고조에 달하는데, '장미의 월요일'에는 거리에 성대한 가장 행렬이 이어지고 밤새 축제가 벌어지지만 축제의 마지막인 '재의 수요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온 나라가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2. 독일의 축구

축구는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이다. 독일 축구 협회는 약 2만 5천여 개의 산하 단체를 두고, 회원 수만도 600만 명이 넘는 독일 최대의 스포츠 단체이다.
1900년에 독일 축구 협회가 설립되었고 4년 후에는 FIFA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바이에른 뮌헨, FC 샬케 04와 같은 축구 명문 클럽들이 잇달아 창단되면서 독일 축구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축구의 인기는 잠시 주춤해졌으나 전쟁 이후에 다시 높아져, 등록된 축구 선수의 수도 1919년의 15만 명에서 1932년에는 무려 백만 명을 넘어선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축구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독일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1954년에는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지금까지 단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16강에 진출했다.
독일 축구 대표팀은 '전차 군단'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뛰어난 조직력과 팀워크, 빈틈없는 수비력과 힘 있는 경기를 펼치는 강력한 독일 축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독일의 프로 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1963년에 16개의 클럽으로 시작된 이후, 1974년에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세계 최강의 리그로 자리잡았다.

3. 독일의 음식

독일의 음식 문화는 실용적인 독일의 국민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리 과정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은 풍부한 맛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독일은 예로부터 각 지방의 특색이 강한 나라로, 이러한 특성은 음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각 지방마다 즐기는 음식은 물론 먹는 법과 요리법이 각각 달라 독일의 대표적인 음식인 소시지와 맥주도 지방마다 맛의 차이가 뚜렷하다.

동부 지역은 강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며, 바닷가를 접한 북부 지역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영향으로 청어와 같은 생선을 많이 먹는다. 라인 강 유역의 서부 지역은 양념이 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남부 지역은 소시지와 맥주, 감자를 이용한 요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일 요리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 독일 음식의 대명사, 소시지

소시지와 햄이 발달한 독일은 음식점뿐만 아니라 길에서도 다양하고 뛰어난 정통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 
독일어로 부르스트라고 한다. 재료는 돼지고기 외에도 간, 소의 혀 등을 쓰며, 야채와 카레를 첨가해 색다른 맛을 내고, 크기도 어른 팔뚝만 한 것에서부터 새끼손가락만큼 가는 것까지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종류가 많고 다양한 이유는 지역마다 강한 지방색을 갖고 각각 개별적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햄버거는 함부르크(Hamburg)에서 소시지를 빵 사이에 끼워 먹던 것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햄버거(hamburger)란 이름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주로 소시지 형태로 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1,500여 가지에 이르는 소시지 종류가 있다.

2) 맥주의 본고장, 독일

'맥주의 나라' 독일은 세계 1위의 맥주 소비국일 뿐만 아니라 5,000종 이상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나라이다. 
식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음료에 가까울 정도여서, 맥주는 액체 빵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소중히 여겨진다.
독일 맥주마개독일은 "맥주를 만들 때 보리, 홉, 물 이외의 것은 쓰면 안된다"는 '맥주 순수법'을 500여 년간 준수해 오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1년에 독일인 한 사람이 마신 맥주는 평균 127.4ℓ로, 하루에 350㎖정도를 마셨다고 할 수 있다. 독일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 맥주 양조장이 있어 각 지방마다 나름의 특색을 갖춘 독특한 맥주를 만날 수 있다.

맥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마시는 것은 황금색을 띤 필스너와 이보다 약간 쓴맛이 덜한 엑스포트, 달콤하고 색이 진한 흑맥주인 알트와 밝은 색의 쾰쉬 등이다.
독일의 맥주는 순수성으로도 유명하다. 1516년 빌헬름 4세는 '독일 순수법'을 제정해 맥주 양조를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했다.

이것은 맥주에 홉·엿기름·이스트·보리와 같은 순수 자연 원료 네 가지만을 사용하도록 한 것으로, 맥주의 순수한 맛을 유지하고 여러 재료가 섞였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국민들이 식음료로 사용하는 맥주에 해로운 성분이 첨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 법은 지금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목차

  1. 1. 독일의 음악가
  2. 1) 바흐
  3. 2) 베토벤
  4. 3) 바그너
  5. 4) 브람스
  6. 2. 독일의 문학가
  7. 1) 괴테
  8. 2) 그림 형제
  9. 3. 독일의 철학가
  10. 1) 칸트
  11. 2) 헤겔
  12. 3) 니체

1. 독일의 음악가

1) 바흐

독일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인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200여 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 가문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다.
서양 음악사를 집대성한 것은 물론, 우수한 제자를 많이 길러 내 후대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에는 그의 작품이 음악의 전통으로 여겨지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와 같은 대음악가들 모두 바흐의 음악을 존경하고 연구해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2)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고난을 극복한 베토벤의 정신력은 음악은 물론 생활 태도에서도 귀감이 되고 있다.

베토벤은 하이든·모차르트와 더불어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7세 때부터 연주회를 열었고, 11세 때는 최초의 작품을 발표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인 베토벤은 27세 무렵부터 느꼈던 난청이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귓병으로 악화되자,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교향곡 제3번 <영웅>, 교향곡 제5번 <운명>, 오페라 <피델리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피아노 3중주곡 <대공>,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교향곡 제9번 <합창> 등 수많은 걸작을 작곡하였고, 이후 거의 청각을 잃은 상태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56세로 세상을 뜬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가해 애도하였다고 한다.

3) 바그너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지휘자, 시인, 오페라 개혁자, 문화 철학자, 음악제 주최자를 겸한 종합 예술가이다. 바그너는 19세기의 노래와 춤에 치우친 오페라에서 벗어나 음악을 연극의 극적 전개에 결합시킨 악극을 창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음악 기법과 사상은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큰 지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예술관과 세계관은 철학자와 작가들을 비롯하여 문학인들에게도 다채로운 영향을 주었다.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한 바그너는 베토벤에 관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악극은, 그가 죽은 후에도 아내 코지마를 비롯해서 장남 지크프리트, 손자 발란트 등의 노력으로 매년 여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계속 상연되고 있다.

4)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19세기 후반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의 한 사람이다. 브람스는 자신만의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음악에 담아,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곡을 많이 남겼다.
브람스의 음악은 낭만적이지만, 음악적으로는 독일 음악의 전통을 따라 구성과 형식이 뚜렷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기악 작품에서는 전통 형식과 기법에 신선한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2. 독일의 문학가'

1) 괴테'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괴테는 고전파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가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궁정 극장의 감독·변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문학 작품 외에도 식물학·해부학·광물학·색채론 등에도 재능을 보인 자연 과학자였다. 괴테의 이러한 재능과 열정은 그를 단순한 작가나 예술가로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괴테 자체가 존경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청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에 공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살이 유행하기도 했다. 괴테가 57년에 걸쳐 쓴 대표작 <파우스트>는 괴테 인생의 경험과 그 당시의 모든 문화와 사상을 표현한 걸작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성, 자연과 신에 대한 뛰어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2) 그림 형제

독일 설화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형 야코프와 동생 빌헬름 두 형제는 모두 언어학자로 게르만 언어학의 선구자이다. 그러나 낭만파 문학의 영향으로 향토적이고 서민적인 것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어 고대 게르만 문학이나 언어, 전설, 설화 등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에 전설과 설화를 모아 <그림 동화집>으로 알려진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를 출판하고, 이 책을 통해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림 동화집>은 동화로서의 역할 외에도 독일 민속학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독일의 철학가

1) 칸트
칸트는 서유럽 근세 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과 같은 3대 비판서로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독일 관념론 철학의 시초로 그 영향은 다시 영국과 프랑스의 이상주의 철학에까지 미쳤다. 이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적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 헤겔

칸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헤겔은, 동시대의 가장 큰 사건인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향을 받아, 이성과 자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철학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분열된 당시 유럽의 상황에 맞서, 역사와 문화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철학을 통해 설명하고 진리를 파악하려 했다.

3) 니체

19세기 목표 의식을 잃은 대중에게 '신은 죽었다' 라는 말로 자기 극복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와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친 서양 철학사의 거인으로 불린다. 
전통적인 서양 종교·도덕·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후세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 있다.
독일은 수백 년 동안 여러 연방 국가와 자치 국가로 나뉘어 있었어요. 19세기가 되어서야 프로이센 왕국이 나라를 하나로 통일했지요. 통일 이후에 독일은 해외로 세력을 넓히려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패배했어요.
1939년에는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스가 정권을 잡고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민주주의 국가인 서독과 공산 국가인 동독으로 나누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서독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토대로 1990년 통일을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독일은 두 차례에 걸쳐 세계 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 나라이기도 하지만 세계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이기도 해요. 특히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세계 음악사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들이 많답니다. 또 괴테 같은 문학가와 칸트, 헤겔 등의 철학가들은 근현대 서양 사상의 흐름을 이끌었지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많은 독일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들이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 냈어요. 그때 쾰른 대성당을 비롯한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세워졌지요. 18세기에 독일 왕가에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궁전을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베를린과 포츠담 지역에 있는 상수시 궁전이랍니다.

지금도 독일은 각 지방마다 높은 수준의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출판이 발달하여 매년 10월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열리고 있답니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1) 쾰른 대성당
쾰른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1248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80년에 완공하였다. 약 6세기 이상 건축이 진행된 이 건축물은, 여러 건축자들이 최초 설계에 대한 신념과 절대적인 충성으로 건축 작업에 임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쾰른 대성당은 고유의 특별한 가치와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간직한 걸작으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유럽 기독교의 영속적인 힘을 증명하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해 주었던 동방 박사 세 사람의 유골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가져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당이지요. 1248년 공사를 시작해서 무려 632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1880년에야 완공되었어요.
쾰른 대성당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졌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성당이기도 하답니다. 바로 중세의 건축가와 장인들이 설계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건축가와 장인들이 완성한 건축물이란 사실이에요. 그만큼 여러 세대의 정신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때까지 이렇게 거대한 종교 건축물은 대주교와 황제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세웠어요. 하지만 쾰른 대성당은 일반 시민들이 노동력은 물론, 경제적인 부분까지 크게 기여한 건축물이랍니다.
라인 강변에 우뚝 솟은 웅장한 모습 속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쾰른 대성당을 찾아가 볼까요?
중단된 성당 공사.
1164년 대주교 ‘라인란트 폰 다셀’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동방 박사 세 사람의 유골을 쾰른으로 가져오게 되었어요. 동방 박사의 유골은 당시 서양에 있던 그 어떤 종교 유물보다 소중히 여겨지던 것이었지요. 그래서 동방 박사의 유골을 잘 보관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역사적인 건축물을 짓기로 했고, 그렇게 세워지게 된 것이 쾰른 대성당입니다.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지금처럼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 평범하고 소박한 성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성당을 보다 크게 짓기로 하고, 당시 고딕 건축이 가장 발전했던 프랑스에서 게르하르트라는 건축가를 불러오게 되었답니다.
게르하르트는 동방 박사의 관과 성가대 자리를 완성한 뒤 대성당을 상징하는 거대한 탑 공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성가대석과 제단을 완성하기 전부터 공사 비용이 부족하게 되었지요. 결국 1560년,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쾰른 지역에는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속해 있던 집단이나 시민 단체를 위해서만 지원을 하고 대성당 공사는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요.

근대인들이 완성한 고딕 걸작
약 300년 동안이나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던 쾰른 대성당이 다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설계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에요.
1814년 쾰른 남쪽에 있는 다름슈타트 성당 지붕 밑에서 쾰른 대성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정면 설계도가 발견된 데 이어, 1816년 프랑스 파리에서 나머지 설계도가 발견되었답니다. 이 일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젯거리가 되면서 대성당을 다시 짓는 계기가 되었지요.
대성당을 건축한다는 소식은 독일 국민들을 흥분하게 했어요. 쾰른 대성당을 다시 짓자는 여론이 시민들 사이에 퍼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대성당 복권’이라는 것을 발행했는데, 시민들은 복권도 적극적으로 구입했다고 해요.
대성당 공사는 30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842년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성당에서 가장 높은 남쪽 탑의 높이가 60m 정도였고, 나머지는 겨우 20m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공사를 다시 시작하기 전의 모습은 대성당 자료실과 성당 바로 옆에 있는 로마 게르만 박물관에 전시된 판화와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의 쾰른 대성당하고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답니다. 중세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쾰른 대성당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라인 강변에 웅장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독일 고딕 건축물

1880년 10월 15일 쾰른 대성당의 북쪽 탑을 완성하면서 632년에 걸친 대공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쾰른 대성당 정면에는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남쪽 탑은 156m이고 북쪽 탑은 157.38m로 쾰른 대성당은 당시 전 세계에 세워진 어떤 건축물보다 높았지요.
쾰른 대성당은 1889년 파리에 에펠탑이 건설되기 전까지 9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답니다. 성당이 완성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미사를 올리기 위하여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어요.
고딕 건축물의 특징은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탑과 높고 둥근 아치형 천장,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꼽을 수 있지요. 쾰른 대성당은 대표적인 고딕 성당인 프랑스 아미앵 대성당과 랭스 대성당을 참고하여 지어졌지만, 프랑스와 영국 고딕 양식에 비해 단순화된 것이 특징입니다.
고딕 양식이 시작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아미앵 대성당이 수평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 쾰른 대성당은 수직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겉모습도 복잡한 장식을 많이 하지 않고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지요.
쾰른 대성당의 내부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42m에 달해 하늘로 쭉 뻗은 수직 효과를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어요. 독일 고딕의 특징인 간결함과 단순함이 잘 드러나지요. 프랑스 아미앵 대성당을 참고하여 지었으나 아미앵 대성당처럼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당 안쪽 끝부분에 있는 성가대석은 참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3년이나 걸려서 만들었다고 해요. 미사를 올릴 때 성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곳으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문양인 꽃잎이 새겨져 있어요. 이 성가대석은 독일에 있는 성가대석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해요.
성가대석 바로 뒤편에는 성삼왕의 성소가 유리관 속에 보관되어 있어요. 성삼왕의 성소란 유물을 보관해 놓는 일종의 금고 같은 것으로 무척이나 화려한 유물이지요. 성삼왕의 성소는 처음부터 이곳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쾰른으로 가져온 것을 훗날 쾰른 대성당에 보관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성당 오른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동방 박사의 제단〉이라는 그림은 1445년경 슈테판 로흐너라는 화가가 그린 제단화입니다. 대성당에 보관 중인 수많은 그림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으로 꾸며진 스테인드글라스도 독일의 다른 성당에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고 있답니다.

시민들을 하나로 만든 성당

라인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쾰른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이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쾰른 대성당은 성 베드로 성당이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답니다.
우선 쾰른 대성당은 632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딕 건축의 특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중세 건축가와 장인들로부터 시작된 건축이 근대 건축가와 장인에 의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수백 년에 걸친 기술적인 전수가 완벽하게 이어졌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된 위풍당당한 모습과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진 건축 기술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면, 쾰른 대성당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쾰른 대성당은 독일 종교가 다시 태어난 것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되살리게 만든 건축물이었답니다. 독일 국민들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하면서 독일인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지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해 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1. 라인 강 유람선 여행.

유람선 위에서 강을 둘러보면서 즐기는 크루즈 여행은 라인 강 유람선이 대표적입니다. 독일의 젖줄인 라인 강에서는 마인츠에서 쾰른까지 약 200km에 달하는 구간에서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초호화 유람선부터 저렴한 유람선까지 종류도 다양하답니다.
라인 강 유람선 여행은 단순히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문화와 경제 발전도 한번에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입니다.
역대 독일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던 마인츠 대성당, 독일 시인 하이네의 시에 등장하는 로렐라이 언덕, 대문호 괴테가 즐겨 찾았던 곳이자 독일 통일을 기념하여 세운 게르마니아 여신상이 있는 뤼데스하임,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쥐의 탑과 수많은 고성들이 모두 라인 강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답니다.
또 쾰른을 향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분단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인 강 유람선 여행의 종착지인 쾰른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 경제 발전의 상징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 도시입니다.

▶ 감상 포인트 쾰른 대성당 성가대석
위풍당당한 모습만큼이나 매력적인 볼거리가 가득한 쾰른 대성당에서 놓치기 쉬운 곳이 있습니다. 바로 대성당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성가대석입니다. 쾰른 대성당 성가대석은 외부는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지만 내부는 아무 때나 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입구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가 가이드가 안내하는 투어에 참가해야 합니다.
약간의 비용을 지불한 다음 반드시 어떤 언어로 설명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시간에 따라 가이드가 설명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언어로 설명하는 투어가 없기 때문에 자신 있는 다른 언어를 선택해야 하지요. 물론 멋진 조각과 아름다운 성화는 눈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설명을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투어에 참가하면 밖에서는 볼 수 없던 꽃잎 모양이 새겨진 조각과 성가대석 내부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성가대석 안쪽에 새겨진 꽃잎 조각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그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벽을 장식하고 있는 성화도 환상적입니다. 특히 성가대석 바로 앞에 걸려 있는 슈테판 로흐너의 〈동방박사의 제단〉도 놓칠 수 없는 성화입니다.
2. 복권. 
공공 기관 등에서 사업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발행하는, 당첨금을 주는 표를 복권이라고 해요. 요즘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복권을 발행하거나 구입하는 목적은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최초의 복권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다시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발행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을 짓기 위해 복권을 발행했지요.
중세 시대에는 항구와 성당을 지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복권을 발행했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로또 복권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하수도 정비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로또라고 불리는 복권을 발행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시기에 처음으로 추첨을 통해 당첨금을 현금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쾰른 대성당도 복권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어 가던 19세기 중반, 공사 비용이 모자라자 복권을 발행하여 건축비를 마련한 것이지요. 
시민들에게 복권을 판매하여 모은 금액은 662만 달러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3억 유로, 우리 돈으로는 1조 8천억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18~19세기에는 종교 건축물, 학교 등을 설립하기 위해서 복권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버드와 예일 같은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발행한 복권입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공공의 이익이나 시설을 건축하기 위해서보다는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식민지라는 의미를 가진 도시, 쾰른

‘쾰른’이란 지명은 식민지를 의미하는 라틴 어 콜로니아(colonia)에서 유래되었어요. 기원전 38년, 로마 군대가 쾰른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다스렸기 때문이에요. 이후 5세기 말에 프랑크 왕국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차츰 종교적인 도시가 되어 갔어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쾰른을 아헨 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종교가 중시되었던 중세 시대가 되자 쾰른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어요. 
12곳에 달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들어섰고, 이어 고딕 양식의 성당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답니다.
독일의 상업 동맹이었던 한자 동맹의 핵심 도시가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했어요. 
경제력을 바탕으로 1368년에는 대학이 세워졌고, 쾰른은 진정한 대도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730년~1916년에 포츠담에는 공원 500ha와 건물 150동이 모인 복합지구가 건립되었으며, 이곳의 건축물과 정원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예술 단지로 자리 잡았다. 
이 건축물과 공원은 베를린·첼렌도르프 지역까지 이어져 하벨(Havel) 강의 제방과 글렌니케(Glienicke) 호숫가에 늘어서 있다.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은 프리드리히 2세가 1745년〜1747년에 건축했으며, 볼테르(Voltaire)가 머물기도 했다.
독일의 포츠담에는 상수시라는 궁전이 있어요. 상수시는 프랑스 어로 ‘근심 없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요. 이름에 걸맞게 상수시 궁전에 가면 여유와 푸근함을 느낄 수 있어요.
흔히 상수시 궁전이라고 하면 포츠담에 세워진 상수시 궁전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부속 건물과 정원, 멀리는 수도인 베를린 외곽까지를 말해요. 엄청나게 넓어 포츠담 시에 궁전이 있다기보다 도시가 궁전 안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랍니다.
원래 이곳은 포도밭이었는데, 1745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새로운 별궁을 원해서 상수시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재상과 건축가들은 호화로운 궁전을 지으라고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궁전을 원했답니다.
처음 지어진 궁전은 아담하고 작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씩 다른 궁전과 부속 건물이 들어서면서 자그마치 150여 개의 건물을 갖추게 되었지요. 1745년 여름 별궁을 짓기 시작한 이후 1917년 마지막으로 완성된 체칠리엔호프 궁전까지 172년 동안 세워진 건물과 정원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답니다.

상수시 궁전을 지은 이유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엄격했던 아버지와 다르게 예술과 철학을 무척 좋아하는 왕이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와 영토를 두고 싸웠던 슐레지엔 전쟁에서 승리하자 포츠담에 자그마한 별궁을 짓기로 마음먹고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라는 무척이나 긴 이름을 가진 건축가에게 그 일을 맡겼답니다.
이탈리아에서 건축 공부를 한 게오르크는 지금의 모습보다 웅장한 2층짜리 궁전을 건설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좀 더 빨리 궁전이 완성되기를 원했지요.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담은 2장의 도면을 직접 그려서 게오르크에게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의 상수시 궁전이 지어졌다고 해요.
프리드리히 2세는 내부 공사가 끝나기도 전인 1747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겨 와 지낼 정도로 이 궁전에 애정이 많았어요. 공사는 왕이 옮겨 온 지 1년 뒤에야 끝을 맺게 되었지요.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상수시 궁전을 지으라고 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어요. 어떤 학자는 엄격한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프리드리히 2세가 결혼 생활이 싫어져 왕비와 떨어져 지내기 위하여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다른 학자들은 예술과 철학을 좋아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철학자, 예술가, 문인 들과 모여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건설했다고도 합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답니다.

아담한 상수시 궁전

진한 상아색의 상수시 궁전은 다른 유럽 왕가에서 세운 별궁에 비해 무척 소박하고 아담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궁전의 정원은 왕의 권위를 보여 주듯이 절제된 각과 선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상수시 궁전의 정원은 마치 농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답니다.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로코코 양식의 궁전이 주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상수시 궁전이에요. 
로코코 건축 양식은 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이전에 많이 지어졌던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비해 곡선을 강조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아하고 섬세한 것이 특징이에요. 
상수시 궁전은 우아한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로코코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답니다.
상수시 궁전은 여러 면에서 프랑스 궁전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궁전을 지은 것을 비롯해 독특한 모양의 정원과 다양한 조각상, 울창한 숲에 이르기까지, 비록 건물과 정원 모양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답니다.
상수시 궁전이 프랑스풍으로 지어진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해요.

예술을 사랑한 왕,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만큼 여러 별명을 가진 황제도 드물 거예요. 사색의 황제, 철학자 황제, 예술가 황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요. 

프리드리히 2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궁전을 둘러보다 보면 왜 그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궁전이 완성되자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를 초청했어요. 그리고 3년 동안 상수시 궁전에 머물게 하면서 계몽주의 사상을 공부했지요. 뿐만 아니라 수시로 루소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와 문인을 초대하여 토론을 하고 가르침을 받았답니다.
또 서재에는 2200권에 달하는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대부분 프랑스 책이라고 해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문화에 깊이 빠져 독일어 책보다 프랑스 어로 된 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음악회가 열리는 날이면 직접 플루트를 연주했다고 해요. 상수시 궁전을 찾았던 독일의 음악가 바흐도 프리드리히 2세의 뛰어난 연주 실력에 감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아담한 음악실에는 갈색 그랜드 피아노와 악보 받침대 등이 남아 있어 프리드리히 2세가 음악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연주했던 플루트도 음악실에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양한 양식이 모여 있는 건축 박물관

상수시 궁전과 정원은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다양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기 때문이지요. 우선 상수시 궁전 좌우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부터 살펴볼까요?
궁전의 오른쪽인 동쪽에는 바로크 양식의 파빌리론이란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작품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독일 최초의 박물관입니다. 
박물관보다 회화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이 건물은 주변의 정원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 편안한 별장에 온 듯한 기분을 갖게 해 줍니다.
궁전 서쪽에는 상수시 궁전을 찾은 귀한 손님들이 머물렀던 노이에 캄머른이란 로코코 양식의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상수시 궁전과 같은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직선을 강조하여 다른 양식의 건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세련된 조각과 나무들이 늘어선 정원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신궁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겨울 궁전으로도 불리는 신궁전은 프리드리히 2세가 왕족과 귀한 손님들을 위하여 만든 건물입니다.
길이가 213m에 달해 상수시 궁전 안에 세워진 어떤 건축물보다도 웅장한 궁전이지요. 아름다운 천장화와 조개껍데기로 장식해 놓은 방,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든 대리석의 방, 황금빛 헤르메스 상으로 장식된 극장 등 200여 개나 되는 방이 있습니다.
신궁전은 3명의 건축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프리드리히 2세가 자주 찾아와 계획을 바꾸는 바람에 완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상수시 궁전과 신궁전 사이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인 샤를로텐호프 궁전을 비롯하여 중국풍 다실, 로마식 욕탕, 오랑제리, 평화의 교회 등 여러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답니다. 
중국풍 다실은 왕족이나 귀한 손님들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곳으로 화려한 도자기와 섬세한 장식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자그마한 인공 호수 앞에 자리한 로마식 욕탕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아담한 빌라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오랑제리는 상수시 궁전을 찾은 다른 나라의 왕과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후기 르네상스 건축물입니다.

드넓은 정원

상수시 궁전의 자랑거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뭇가지 하나까지 정성껏 관리해 놓은 정원입니다. 궁전의 전체 면적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넓은 정원은 처음 조성되었던 모습하고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처음 상수시 궁전에 정원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경관을 중시하는 영국식 정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정원의 모습이 바뀌고 아름다워진 것은 페터 요제프 레베라는 정원사 덕분이에요. 페터 요제프 레베는 평생 동안 150곳에 달하는 정원을 설계했는데 인공적인 프랑스풍 정원보다는 자연적이고 회화적인 분위기의 정원을 추구했다고 해요.
이전까지 대칭으로 이루어졌던 정원은 넓은 잔디밭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물길, 나무, 섬 등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갖게 되었지요. 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울창하게 가꾸었답니다. 왕과 많은 귀족들은 새롭게 달라진 정원을 무척 좋아했다고 해요.



문화 공간'

철학자 황제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가 지은 상수시 궁전은 아주 매력적인 문화 공간입니다. 서양의 궁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건축 양식과 정원 양식을 한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지요.
궁전 출입구에 있는 세련되고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정원부터 마치 들판과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정원 역시 여느 궁전과 확연히 다르답니다.
또 2500여 종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어느 궁전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 식물원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은 오늘날 독일이 숲의 왕국으로 우뚝 서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답니다.
황제와 철학자들이 토론을 나누고 음악을 감상했던 궁전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의 현장인 체칠리엔호프 궁전 등 상수시 궁전은 어느 곳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매력적인 곳이랍니다.

1.  체칠리엔호프 궁전

상수시 궁전에서 마지막으로 완성된 궁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에 완성된 체칠리엔호프 궁전입니다. 궁전이라기보다 별장에 더 가까운, 예쁜 정원이 있는 소박한 궁전이지요.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마치는 포츠담 회담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답니다. 미국, 영국, 소련을 대표하는 트루먼, 처칠, 스탈린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이곳에 모여 전쟁 처리에 대한 회의를 열고 ‘포츠담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했는데,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다시 확인했던 ‘포츠담 선언’이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낭만적인 영국의 전원 주택처럼 지어진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빌헬름 왕과 체칠리 왕비는 1945년 봄까지 살았습니다.

2. 네덜란드 지구

상수시 궁전과 체칠리엔호프 궁전 사이에 있는 포츠담 구도심에는 네덜란드보다 더 네덜란드 같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네덜란드 노동자들을 포츠담으로 이주시키면서 건설한 네덜란드 지구입니다.
네덜란드 지구에는 18세기 초 전통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134개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아직도 280여 년 전 모습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포츠담을 찾는 방문객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사람들도 이곳에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옛 건물들에 카페와 레스토랑을 비롯하여 장인들이 만든 토산품을 판매하는 가게 등이 있어, 네덜란드의 흔적을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답니다.





상수시 궁전 음악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드넓은 상수시 궁전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프리드리히 2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음악실입니다. 
갈색 그랜드 피아노와 플루트, 가구, 그림으로 장식된 음악실에 들어서면 먼저 편안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음악실 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한번 둘러보면 프리드리히 2세가 얼마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담한 정원과 북쪽 창문을 통해 보이는 숲은 어떤 궁전에서도 볼 수 없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음악실이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느껴지지요.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50cm 정도의 작은 플루트와 악보는 무척 소박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던 황제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답니다.
음악실 안에는 프랑스 출신 궁정 화가 앙트완느 페슨이 그린 벽화가 있는데 이것 역시 다른 곳보다 휠씬 소박하고 아담합니다.
상수시 궁전 음악실을 둘러보다 보면 왜 오늘날까지 많은 독일 사람들이 프리드리히 2세를 철학자, 예술가 황제이자 진정한 대왕으로 존경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포츠담 회담'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전(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인 미국 · 영국 · 소련의 수뇌부가 독일 포츠담에 모여 개최한 회담이다.  
그 전에 점령한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와 패망이 확실한 일제에 대한 처리가 주된 내용이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담은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포츠담협정 . Potsdam Agreement.
1945년 영국·미국·소련 3개국 수뇌 사이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조인된 독일의 전후처리 방침에 관한 협정.
회담에는 영국의 처칠(뒤에 애틀리와 교체),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하여 독일에 대한 포츠담협정이 조인되었다. 일본에 대한 포츠담선언에는 중국의 장제스도 참석했다.

이 협정은 연합국의 독일점령 목적을 독일의 무장해제, 비()군사화, 비나치화, 민주화에 있음을 명시하고 그 가운데서도 독일산업의 비군사화에 중점을 두었다.

협정은 첫째, 당분간 독일에는 중앙정부를 두지 않고 독일을 단일 단위로서 다루며, 분할을 궁극의 방침으로 하지 않는다. 둘째, 독일문제의 처리에 관한 외무장관이사회를 설치한다. 셋째, 독일로부터의 배상금 징수 등을 정하였다. 또한 오데르 강()·나이세 강을 독일의 동부국경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강화회담에서 영국·미국·소련 3개국은 이를 지지한다는 것 등을 약정하였다. 
The Potsdam Agreement (German: Potsdamer Abkommen ) was the agreement between three of the Allies of World War II, the United Kingdom,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It concerned the military occupation and reconstruction of Germany, its borders, and the entire European Theatre of War territory. It also addressed Ger...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 등이 정상 회담에 참가하여, 일본의 항복을 권고함과 동시에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방침을 표명한 선언이다.

회담 참석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패전국 독일의 즉각 통치와 오스트리아 점령, 폴란드 서부 국경, 동유럽에서의 러시아 역할, 배상금, 일본과의 전쟁 등이었는데, 전시 상황에서 치러진 회담에서 볼 수 있었던 우호와 친선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각 나라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편 포츠담 회담에서는 1945년 5월 8일에 항복한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 방침을 정한 포츠담 협정도 체결되었다. 또한 소련을 대표한 스탈린 서기장은 하루 늦게 이 회담에 참가하여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요청에 따라 스탈린이 약속했던 바대로 1945년 8월 8일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항복을 선언하고 〈포츠담 선언〉에서 정한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죄를 뉘우쳐라!
1. 미국 대통령과 중국 총통과 영국 수상은 수억 명에 달하는 우리 동포들을 대표하여, 일본에게 이 전쟁을 종식할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점에 대해 협의한 결과, 의견 일치를 보았다.

2. 미국과 영국과 중국의 막강한 육해공군이 수시로 서방측으로부터 병력과 항공 함대를 보충 받으면서 일본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일본이 저항을 멈출 때까지 전쟁을 지속한다는 연합국 전체의 결의에 따라 이러한 군사력은 유지됨과 동시에 강화되고 있다.
원자폭탄(atomic bomb)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원자 번호가 큰 중원소의 원자핵이 분열할 때 갑자기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이용하여 엄청난 폭발력을 내는 무기이다. 최초의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에서 맨해튼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최초의 원자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미국은 이 폭탄을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렸고, 순식간에 34만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도시의 심장부를 폐허로 만들었다. 두 번째 원자폭탄은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졌고, 일본은 이튿날부터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1950년대 초 수소폭탄이 개발되자, 핵 보유국은 원자폭탄과 핵무기를 전술적인 작전에 사용하게 되었다.

3. 세계의 자유 국가 국민들이 들고 일어선 위력 앞에 독일이 쓸데없이 저항하다가 무기력하게 항복한 결과가 일본 국민에게 본보기로서 매우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제 일본에 집중되고 있는 위력은 나치가 저항하고 있었던 당시에 영토와 산업과 독일 국민의 생활 터전을 황폐화시켰던 위력보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우리의 결의에 따라 우리의 군사력을 충분히 동원할 경우, 일본의 군사력은 어쩔 수 없이 완전히 파괴당할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초토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 일본이 어리석은 속셈 때문에 자국을 전멸시킬 위험에 빠뜨리는 오만방자한 군사 전문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통제될 것인지 아니면 이성적인 길을 따라갈 것인지에 대해 결정을 내릴 시점이 다가왔다.

5.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 조건을 끝까지 요구할 것이다. 대안은 없다. 촌각을 지체할 수 없다.

6. 무책임한 군국주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평화와 안보와 정의가 보장되는 새로운 질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계 정복을 꿈꾸는 길로 일본 국민을 잘못 이끌었던 당사자와 세력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한다.

7. 우리가 여기서 밝히고 있는 기본 목표의 달성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본 영토의 요충지가 장악되고 난 다음에 그러한 신질서가 확립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 세력이 격퇴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될 것이다.

8. 〈카이로 선언〉의 조건은 이행되어야 하고, 일본의 주권은 혼슈 섬과 홋카이도 섬과 규슈 섬과 시코쿠 섬과 우리가 이미 결의한 바와 같은 소규모 섬들로 제한되어야 한다.

9. 일본의 군사력은 완전히 무장 해제된 다음에 평화롭고 생산적인 생활을 꾸려 나갈 기회를 제공받도록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

10. 우리는 일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예속을 당하거나 하나의 국가로서 파괴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포로에게 잔혹 행위를 가한 자를 포함하여 모든 전범자에 대해 엄중한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의 민주적 성향을 되살리고 강화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든 장애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기본적 인권이 존중될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11. 일본이 자국의 경제를 유지하면서 현물 배상을 할 수 있는 산업을 유지하도록 허용해야 하지만, 재무장하여 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산업을 유지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원자재에 대한 관할권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 원자재에 대한 이용권만 허용되어야 한다. 세계 무역 관계에 대한 일본의 참여는 최종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12. 연합국 점령 세력은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고,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평화를 지향하고 신뢰할 만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일본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

13. 우리는 이제 일본 정부가 모든 일본 군사력의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하고 그러한 조치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타당하고도 적절한 방안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지금 당장 전멸을 파괴당할 따름이다.

군국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의한 대외적 발전에 두고,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국민 생활 속에서 최상위에 두려는 이념 혹은 그에 따른 정치 체제. 고대의 로마 제국, 근대의 프로이센 제국,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 따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 일본은 죄를 뉘우쳐라! -

트루먼(Harry S. Truman .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1884년~1972년)은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연합의 제제 조치와 함께 미군을 한반도에 파견했어. 내가 재임하는 동안 미국은 중국·소련의 공산주의와 대결 상태에 있었고, 나는 루스벨트와 비교되며 약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으나, 
임기가 끝난 후 내가 추구했던 노력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어. 특히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에 대항한 봉쇄 정책과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소수 민족에게 시민권을 확대시키기 위한 개혁 정책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미래의 정책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어.”




체칠리엔 호프 궁전 '
독일 포츠담. 포츠담회담 협상테이블.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수뇌 사이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조인된 독일의 전후처리 방침에 관한 포츠담 회담을 하던 방으로 지금은 호텔로 사용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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