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6일 토요일

이백 . 李白.

이백  . 李白.

자 태백(). 호 청련거사().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西]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장밍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서 장난[] ·산둥[] ·산시[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 ·남릉(:) 동로(:)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43세 되던해인 742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창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으로 향하여 뤄양[] ·카이펑[]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西)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현재의 ) ·금릉(:)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 영왕() 인()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西)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을 닦기도 하였다.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다. 두보의 오언율시()에 대하여, 악부() 칠언절구()를 장기로 한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와 신선()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생애

이백은 성당()때 농서(西) 성기(, 지금의 간쑤()성 티엔수이()) 사람으로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창명현() 또는 안서도호부() 소속의 쇄엽성()에서 태어났다.  
중종 신룡() 초에 촉의 검남도() 면주(綿) 창륭현() 청련향()으로 옮겨 산둥()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둥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자는 태백()이고, 호는 청련거사(), 적선인()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라 불렸고, 이백은 ‘시선()’이라 불렸다. 그 외에 기경인(), 적선인()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이라고도 한다.

방랑 을 자주했던 청년기.
선조는 수나라 말에 서역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집은 간쑤성 농서현에 위치했고,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25살 이후에는 촉나라를 떠나 장강을 따라서 강남과 산둥, 산시(西) 등지를 떠돌며 한평생을 보낸 인물로 안릉, 남릉() 동로(, 지금의 산둥성 일대)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자가 태백()이고 호는 청련거사()이다. 이백의 어머니가 태백성을 태몽으로 꾸어 이백을 낳자 자를 태백이라고 하였다. 청련향( = 사천() 면주(綿) 창명현())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청련거사라고 하였다. 
운몽()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그 사이 당의 명장인 곽자의()와 친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산동으로 옮겨 임성()에 거주하였다. 
배정(), 장숙명(), 도면분() 등과 조래산()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이라고 일컬었다.
벗들과 어울려 사천의 아름다운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이백 시의 바탕이 되었다. 26세 때에는 벼슬을 하기 위하여 사천을 떠나 동정(), 여산(), 금릉(), 양주(), 낙양(), 용문(), 숭산(), 태원() 등지를 돌아다녔다.
남성적이며 용감한 것을 좋아한 인물로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했고, 25세에 촉 지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유랑생활을 하며 강남() 지역을 여행하였고'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도교를 수양하기도 해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을 편력하는 동안에 이백의 시명()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되었던 도사() 오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드디어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그가 장안으로 가기 위해 문을 나서며 기뻐한 나머지 앙천대소()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심정을 살펴 볼 수 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 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은 이백의 시를 읽어 보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 주지 않아 장안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 이외에도 유랑 길을 올라 강남, 강북을 두루 돌아다닌 것은 더 이상 탈속적인 자유분방한 생활을 장안에서는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두보를 만난 이백은 고적()과 함께 양()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를 했었고 유람 생활을 많이 해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벼슬 궁정생활.

현종 천보() 원년(742년)에 장안(, 지금의 시안(西))으로 와 하지장을 만났는데, 하지장은 이백 시의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느낌과 주관적인 정감을 즉흥적으로 청신하고 화려한 시구에 담아내는 것을 보고 그를 적선인이라 칭했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아 자신의 재능을 정치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4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장의 인정을 받은 이백은 오균 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가 되었다.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그가 맡은 임무가 단지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한낱 궁정 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를 지어 올리며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이백이 궁정 시인일 때 현종과 양귀비의 연회장에서 지은 시이다. 이로 인해 그의 시명()은 장안에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결국 이백은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궁정 시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끼고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으며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술을 몹시 좋아한 이백은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다시 방랑의 길로

이백은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 때문에 현종의 충신 환관 고역사의 미움을 받고 권문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1년 만에 궁정을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장안을 떠난 그는 다시 긴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백은 안사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십여 년간, 동쪽으로는 허난성 뤄양()을 지나 노() 지방까지, 남쪽으로 오월() 지방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천보() 3년(744년) 뤄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두보와 석문()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했고 더 남하하여 광릉, 금릉(, 장쑤성 난징()시)에서 노닐었고 다시 회계를 찾았다. 
허난성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우정을 나누었다. 후에 산둥 지난()의 도관() 자극궁()에 들어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 도사()가 되기도 했다.

유배' 죽음'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이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백은 동남부에 있었는데, 그곳은 지리적으로 전쟁의 중심부로부터 거리가 있어 안전할 수도 있었으나, 새로 즉위한 숙종의 동생 영왕() 이린()이 장강 남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이백을 그의 막료로 발탁하였고, 이로 인해 56세였던 이백도 참여하게 되었다.
영왕은 숙종과 대립하다 싸움에서 패했고, 결국 거사는 역모로 간주되어 이백 역시 연루되어 심양(, 지금의 장시(西)성 주장()시)의 옥중에 갇히었다. 
야랑(, 지금의 구이저우()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삼협(, 양쯔강 상류 협곡) 부근까지 왔을 때 곽자의 등 술 친구, 시 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 사면되어 강남으로 돌아왔다.
말년이 되어 그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고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61세에 안후이()성 당도()의 현령이었던 종숙 이양빙에게 의탁해 살며 빈객으로 있으면서 얼마 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강 채석기()에서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도 한다.

이백의 시 평가;

이백은 젊어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는데 그의 시가 보여주는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고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 
이백은 두보와는 크게 달랐는데,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비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이백은 고시()와 절구()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는 천래()의 재, 즉 ‘천재()’라고 했다.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백의 시는 그 꽃 중의 꽃이라고 평가받는다. 
일생 동안 가끔 불우한 처지를 당한 적도 있어 시 작품이 퇴폐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데 중국에서 굴원 이후로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꼽히고,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1천 여 편에 달하는 시문이 현존한다.
청나라 때에 출간된 『전당시』에 수록된 시의 수가 약 5만 수이고 시인 수가 2천2백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수량만으로도 이백의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고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이백의 시상은 협기()와 신선과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품으로 <정야사>, <행로난()>, <장진주>, <월하독작> 등이 『이태백집()』에 수록되어 있다.


시의 특징.

8세기 들어 중국 문학은 시()라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의 제 2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당나라의 전성기, 성당() 시기는 시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정치의 황금시대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시의 황금시대는 계속되어 200년 넘게 최고봉을 유지했다.
세계적으로 어떤 문학 작품도 다른 문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한시()만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설사 절세의 기막힌 재능을 가진 자가 다른 모든 나라의 시를 번역할 수 있다 해도 중국의 한시만큼은 번역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시는 세계에서도 번역이 불가능에 가까운 유일한 문학 작품이다. 한시의 단어들이 감추고 있는 의미가 너무 많아 번역할 때 주를 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시의 맛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한자는 중국 한시의 주요한 성분으로, 한자의 배열조합과 애매모호한 의미에 의지하여 일종의 그림과 같은 시의()를 만들어냈다. 한자를 포기하고 다른 문자로 번역하는 것은 마치 미녀가 얼굴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한시는 외국어로 번역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어인 백화로도 번역할 수 없다. 한시는 한문으로 발휘한 최고의 예술이다.
기원전 12세기 『시경』의 시대에 시는 세 글자(삼언) 또는 네 글자(사언)가 한 구절을 이루었을 뿐이다. 
4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다섯 글자(오언)가 한 구절을 이루는 단계로 진보했다. 6세기 수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다시 일곱 글자(칠언)로 진보하면서 시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7세기 여황제 무측천이 시를 과거시험의 주요 과목에 넣음으로써 시는 마침내 지식인의 필수 과목이 되어 활짝 꽃을 피웠고 또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의 절반 이상이 당 왕조 때 태어났다.

이백의 대표작

장진주(將進酒)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 물이 하늘에서 흘러내려 세차게 바다로 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고대 왕실 밝은 거울 앞에 하얗게 센 머리 슬퍼하고 있는데 아침에는 푸른 실 같던 것이 저녁에는 눈처럼 변한 것을?
인생이란 잘 나갈 때 즐겨야만 하는 것이니 금 술잔 부질없이 달이나 쳐다보고 있지 않게 하게나. 하늘이 나라는 인재를 내신 것은 쓰일 데가 있기 때문이니
돈이란 있는 대로 다 써버린다 해도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네.
양 삶고 고기 잡아 놓고는 그저 즐길 일이니 모름지기 한 번 마셨다 하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잠형! 단구군! 술잔 권하노니 멈추지 말고 들이키게나!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 부를 것이니 부디 날 위해 귀 기울여 주시게나!
풍악 울리며 귀한 음식 먹는 일이야 소중한 일 아니니 다만 늘 취하여 다시 깨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네.
예부터 성현들 있었다지만 모두 이름 잠잠해지고 오직 술 마신 사람들만 이름 남기고 있네.
진왕 조식이 옛날 평락에서 잔치할 적엔 천만금 나가는 술도 몇 말이고 마시며 즐기게 했다네.
주인장은 어찌 하여 돈 타령을 하는가? 당장 술 받아다가 모두 함께 대작해야지.
오색 명마와 천금 갑옷 내줄 것이니 아이 불러 가지고 나가 좋은 술과 바꿔 오도록 하게. 그대들과 함께 마시며 만고의 시름 녹여보려 하네.

월하독작(月下獨酌)

하늘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있었겠는가
땅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 주천()이 없었을 것이다.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 술을 즐기는 것이 부끄러울 것 없다.
청주()를 성인에 비유한단 말을 들었고 독주()를 현인과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현도 이미 술을 마셨거늘 하필 신선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석 잔 술을 마시면 도를 통하고 한 말 술을 마시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술에 취하여 얻어지는 것 술 깬 사람을 말하지 말아라.

상삼협(上三峽)

무산()은 푸른 하늘을 끼고 파수()는 이렇게 세차게 흐르는구나.
파수는 문득 끝날 수 있겠지만 푸른 하늘에는 이를 수가 없구나.
사흘 아침을 황우산에 오르더니 사흘 저녁은 이리도 더디게 가는구나.
사흘 아침, 사흘 저녁 귀밑머리가 실처럼 변한 것도 몰랐더라.

협객행(俠客行)

조()의 나그네 호영()이 서릿발처럼 빛나는 오구(, 검)를 휘두르며 은빛 안장의 백마에 높이 올라타고 유성처럼 천하를 누비다.
열 걸음마다 한 사람을 죽이고 천 리를 달려도 멈출 줄 모르더니 할일이 끝나면 소매를 떨치고 떠나며 자신의 이름을 숨기다.
신릉군의 식객인 주해와 후영()은 항상 검을 뽑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이더니, 석 잔의 술을 마시며 쾌히 승낙하면 그 약속은 오악()보다 무겁고 술이 얼큰해지면 그 위엄이 무지개처럼 뻗쳐나다.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금추(, 쇠망치)를 휘두르니 먼저 한단 땅이 놀라 진동하다.
천추에 이름을 빛낼 두 장사는 대량성()에서 혁혁한 명예를 드날리다.
그 협골()의 향기 영원히 남아 후세의 영웅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 누가 그들을 말할 때 머리 숙여 감탄하지 않으리"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의 비상()’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두보()는 「기이십이백이십운()」에서 "옛 한 미친 손이 있었더니, 귀양 온 신선이라 했네. 붓을 놓으면 비바람이 놀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이 운다.(.)"라고 하였다. 
그는 귀신을 울릴 천재적 시인을 만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술 취해 춤추며 양원의 밤을 즐기고, 사수의 봄을 노래한다.(.)"고 하였다.
태백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까지도 그것을 혼돈화()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이백은 정치적 큰 이상을 갖고 있었으나 꿈이었을 뿐 끝내 이룰 수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크게 기뻐하며 장안으로 향하였던 그였으나, 실망한 나머지 장안을 떠나 두루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빠짐없이 찾았다. 
자연을 통하여 체득한 진리를 시로 표현하였다. 「망여산폭포()」를 예로 든다.
햇빛은 향로 비치어 안개 일고 있는데,
멀리 폭포를 바라 보니 앞내에 걸려 있구나.
날아 흘러 3천 척을 곧장 떨어지나니,
은하가 구천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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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여 유선()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구선()의 마음은 진실하였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유랑자로서 과거나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오로지 현재의 인생의 쾌락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돈 쓰기를 꺼려하지 않고,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 생활을 하였는데, "만리 주인이 없고, 한 몸 홀로 객이 되어()"라고 고적한 심경을 노래하였다. 또한 "어느 해에나 돌아갈 것인가? 비 오듯 눈물이 외로운 배에 떨어진다.(.)"라고 향수를 달래었다. 
이 무렵부터 더욱 정치에 대한 불만이 커 정치인들을 풍자한 시들을 쓰기도 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와 함께 피난, 여산()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 = 영왕())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 = 현 귀주() 동재())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 현 안휘() 당도())의 이양빙()을 찾아가 얹혀 살았다. 여전히 통음()하는 날들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의 일생은 참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이렇듯이 잡다한 교류를 가져 시의 내용 및 격조가 매우 다양하였다. 특히 유명한 하지장(), 맹호연(), 두보(), 고적(), 장욱(), 공소문(), 오균() 등과의 시교()가 대단히 깊었다. 이백에게는 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두보의 「주중팔선가()」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라고 하였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월하독작()(기일())」을 예로 든다.
꽃 사이에 한동이 술을 놓고, 홀로 잔 기울이는데 대작할 벗이 없구나.
잔을 높이 들어 밝은 달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가 합하여 셋이 되었네.
달은 원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나를 따라 마신다.
잠깐이나마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이 즐거움 봄까지 미치리라.
내가 노래하면 달빛도 춤을 추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덩실덩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기쁨을 나누지만, 취해서는 제각기 흩어진다.
언제까지나 세속을 떠나 사귐을 맺자고, 서로 기약하자 먼 은하수 다시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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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혼자서도 술을 잘 마신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게 술을 마신다. 그러나 속으로는 고독의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백은 중국 시사에 있어서 제일의 천재 시인으로, 굴원의 뒤를 이어 낭만주의 시가의 꽃을 활짝 피웠다. 
내용을 보면 영회(), 영사(), 유선(), 철리(), 전원(), 산수(), 음주(), 회고(), 등고() 등 거의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으며, 시정은 유창하고 거침이 없다. 「자야오가()(추가())」를 예로 든다.
장안에 조각달이 걸렸는데,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또닥또닥.
가을 바람 끊임없이 불어 오는 것은, 결국은 옥문관의 정일러니.
어느 날에야 오랑캐 평정할 것인가? 우리 님 전장에서 돌아올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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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백이 말하기를, “예전 제도가 이 시대에 적당한 것은 의창과 같은 것이 없으니, 풍년이면 그 남은 것을 얻어가고 흉년이면 그 부족한 것을 구제하였다.” 하였다. ; 李太白曰 古制之宜於時 莫若義倉 豐年則損其有餘 歛年則救其不足 [세종실록 권제87, 14장 앞쪽, 세종 21년 11월 6일(경술)] 
전교하기를, “선비를 뽑을 때에는 그 제술이 두목•백거이•이태백과 기상•습성이 닮은 자를 뽑으라.” 하였다. ; 傳曰 取士時 其製述與杜牧白居易李太白 氣習相近者 取之 [연산군일기 권제57, 21장 뒤쪽, 연산군 11년 3월 22일(정미)].
심각한 취업난으로 이십대의 절반이 일정한 직장을 얻지 못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태백이란 말은 최근 국제 금융 위기로 한층 어려워진 국내 경제를 반영하듯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십대라 해도 언제 퇴직하여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의미의 ‘이퇴백’이란 말로 변형되었다.

이백과 두보, 시를 노래하다"
중국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이백과 두보는 대조되는 삶과 시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조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했다.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담겨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당나라를 중국 시문학의 황금시대로 평한다.

구세력. 신흥세력. 갈등 민생 안정을'
당 현종은 예종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이융기이다. 
당시 이씨의 황실은 할머니 측천무후가 시작한 새로운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야망에 가득찬 여성들, 중종의 비인 위황후와 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 그들 뒤에 버티고 선 명문 구세력과 과거로 진출한 신흥 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위황후는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했다. 이때 25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큰어머니 위황후를 제거하고 아버지 예종을 복위시킨 실력자가 바로 현종이다. 
황위를 계승한 현종은 실력자인 고모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타고난 총명함과 정성으로 정무를 돌봐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8세기 전반 성당기의 번영을 구가했다. 민생안정을 꾀하고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신병제를 정비하고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현종, 양귀비사랑에 빠져 향락을'

즐겨 시를 짓고 서역의 음악까지 흡수하여 음악을 작곡하는 등 예술적 감각과 재능이 뛰어났던 현종은 점차 정치에 싫증이 났다. 
노년의 그는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정치를 도맡긴 채 도교에 빠지고 양귀비와의 사랑 놀음에 빠졌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이고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비의 칭호다. 황제의 부인들은 황후, 귀비, 부인, 육의, 미인, 재인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다. 
그녀는 백거이의 《장한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구름 같은 머리카락, 꽃 같은 얼굴에, 눈동자를 돌려 한번 웃으면 백 가지 사랑스러움이 생기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다. 
궁중에서 그녀의 경쟁자들이 '뚱뚱보 계집'이라고 불렀다 하니, 그녀는 당삼채 도용에서 보는 것처럼 풍만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서는 고아였다고도 하고, 당시 장안에 들어와 있었던 수많은 서역의 미인들 중의 한 명이 아니었겠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본래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였는데, 현종은 그만 그녀의 미모와 훌륭한 가무에 정신을 빼앗겨, 급기야 그녀를 여도사로 만들었다가 다시 귀비로 삼고 화청궁()에서 환락에 젖은 나날을 보냈다.

현종, 당의 영화와 몰락을 함께'

대당 제국의 영화와 몰락을 상징하는 시점에 현종이 서 있다. 
그의 지배기에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계획도시 장안은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모인 인종 전시장과 같았으며 당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의 말년에는 제국 몰락의 서곡인 안사의 난이 일어났으며 당의 국력은 다시는 전과 같은 영화를 회복할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사랑과 그 비극적 말로를 주제로 삼아 몰락하는 제국의 쓸쓸한 황혼을 즐겨 노래했다.

두보, 부패. 정계. 고통. 민중을 시로 표현'

어느 날, 시성 두보는 길을 지나다가 화청궁에서 벌어진 이들의 향락적인 주연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두보의 뇌리에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민중의 고달픈 삶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장안 네거리에 굶어 얼어 죽은 시체가 연상되었다. 
이를 '부잣집엔 술 고기 썩어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 널렸네'라는 단 두 줄의 세련되고 생동적인 시어로 표현했다.
화청궁당 태종과 양귀비가 환락에 젖은 나날을 보낸 화청궁.
자연 의 아름다움 . 애국적 열망'
중국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이백과 두보는 모두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태백이라는 자로 더 유명한 이백은 두보보다 10살 위였고, 두 사람이 대조되는 삶과 시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명승지를 주유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말단의 이름뿐인 관직에 올라서 백성들의 고통 치유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부패한 정계를 목도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모두 조국의 웅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했으며,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애국적 열망을 갖고 관계에 진출하여 조국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짧은 벼슬생활' 천하를 주유~
어느 날 이백은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회에 궁정시인의 자격으로 불려와 작시를 요구받았다. 굴욕감과 분노에 가득 찬 그는 당대의 유력한 권신인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백
이백인간의 기쁨을 노래한 이백의 모습을 담은 이백음행도.
고력사와 양귀비의 미움을 산 이백은 짧은 벼슬생활을 마치고 다시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이백 . 두보,  삶 과 시 세계'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백이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드높이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이 침잠하여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이백이 두보의 표현대로 '한 말 술을 마시면 곧 백 편의 시'를 짓는 격렬하고 낙천적인 성품으로, 인생과 자연의 불가사의를 즐겁게 노래하는 도가적 경향의 시인임에 비해, 두보는 '티끌만한 유감도 남길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전에는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 엄정함을 지닌 유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다. 
이백을 시선()으로, 두보를 시성()으로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백이 부유한 상인의 가계에서, 두보가 빈궁한 관료의 가계에서 자랐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중국, 시. 문학 황금시대를'

'달과 술과 노래'로 지칭되는 이백의 삶은 사람들에게 그가 받아 온 사랑만큼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낳았다.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그의 사망에 대한 전설은 그의 이러한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보는 조국의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사실주의적 시 안에서 민중과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탁월한 시어와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귀족시인들에게 민중들의 처절한 삶과 사회적 모순에 관심을 쏟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이백은 구비문학과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 온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립했으며, 두보는 시경과 악부 민요의 전통을 확장하여 사실주의의 경지를 개척했다. 
후세 사람들은 당나라를 중국 시문학의 황금시대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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