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6일 토요일

이백 . 李白. 1


이백 . 李白.


이백의 위상()

이백은 성당() 때 농서(西) 성기(, 지금의 간쑤()성 티엔수이()) 사람으로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창명현() 또는 안서도호부() 소속의 쇄엽성()에서 태어났다. 또한 중종 신룡() 초에 촉의 검남도() 면주(綿) 창륭현() 청련향()으로 옮겨 산둥()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둥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자는 태백()이고, 호는 청련거사(), 적선인()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라 불렸고, 이백은 ‘시선()’이라 불렸다. 그 외에 기경인(), 적선인()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이라고도 한다.
그의 선조는 수나라 말에 서역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집은 간쑤성 농서현에 위치했고,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성적이며 용감한 것을 좋아한 인물로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했고, 25세에 촉 지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유랑생활을 하며 강남() 지역을 여행하였고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도교를 수양하기도 해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이라 말하거니와 이백()의 시는 꽃 중의 꽃이다. 
현전하는 그의 시는 문집에서 누락된 일부 작품을 포함해서 대략 1천여 수에 이르는데, 청나라 때에 출간된 『전당시()』에 수록된 시가 약 5만 수이고 시인 수가 2천2백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수량만으로도 그의 시가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양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중국 시가전통에서의 위상이다. 
이백은 이전의 시 전통을 집대성하여 찬란하게 빛나는 당시()를 탄생케 한 시인이다. 보고들은 모든 것, 나아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까지도 모두 자신의 시의 재료로 삼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연출해내는 비법을 지닌 듯하였다. 
그가 뿜어내는 다양한 빛깔의 언어와 그것들이 빚어내는 천의무봉의 자연스러움은 당시()의 성취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다.

시는 시인의 삶과 이상 그리고 절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백의 시를 낳은 그의 인생 행적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분분했다.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이백은 각종 경전을 읽고 검술을 익히며 혹은 도사를 찾아가 산 속에 은둔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이러한 독특한 배경은 그의 시에 넘치는 독특한 개성을 얼마간 설명해준다.

이백은 일생동안 크게 두 차례의 만유()를 하게 된다. 만유는 당나라 시대 문인들 사이에 성행했던 것으로, 풍광 좋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히고 각 지방의 문인들과 상호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문인들은 만유를 통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고 권력자와의 친분을 쌓아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기회로 삼곤 하였다. 
이백은 삼십대 중반의 첫 번째 만유 기간에 장강 유역의 각종 명승지를 다니면서 맹호연()과 같은 당대 유명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명성을 쌓아갔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42세 때인 742년에 드디어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한림대조()의 벼슬을 제수받게 된다.

현종은 이백의 문재를 높이 평가하였으나 한림원이라는 기구 자체가 실제 정치와는 동떨어진 '응제()'의 역할을 담당하는 부서였으므로 이백으로서는 적잖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제왕의 포고문에 윤색을 가하고 초안을 잡는 시신()으로서 때로는 연회에서 노래할 시를 쓰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황제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재상이 되는 것은 단지 이백 자신의 꿈이었을 뿐 그는 그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열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두보는 「음중팔선가()」에서 다음과 같은 간결한 몇 구로 이백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수, 장안의 저잣거리 주막에서 잠든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신은 술의 신선이오"하고 말한다네."

일반적인 관행과 권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술과 벗하여 살면서 모든 욕망과 불만을 시로 써냈던 이백. 결국 그는 만 2년이 채 못 되어 조정에서 쫓겨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치밀한 계책, 다양한 정치적 수단과 세련된 매너,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맑은 물 따라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흰 갈매기를 보고 "나 또한 마음을 씻었으니, 간교함 잊어버리고 그대 따라 놀리라"고 읊은 것은 이백의 진심이었으리라. 결국 짧게 마감한 벼슬살이였지만 이백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상상만 하던 황제와 황실을 직접 보았으며 냉정한 정치 현실을 몸소 체험하였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험한 세파에'

장안을 떠난 이백은 다시 한번 기나긴 만유의 길을 떠난다. 만유는 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정계 진출에 실패한 문인들이 마음을 달래고 재기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백 역시 안사의 난이 발발하기까지 약 십여 년간, 동쪽으로는 낙양()을 지나 노() 지방 - 지금의 산동성() - 까지, 남쪽으로 오월() 지방 - 지금의 강소(), 절강성() - 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상처받은 마음을 도교에 귀의하여 달래기도 하고 가무와 음주에 탐닉하면서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백은 동남부에 있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전쟁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안전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발생했다. 
새로 즉위한 숙종의 아우 영왕()이 장강 남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도하면서 이백을 끌어들인 것이다.
오래지 않아 영왕의 군대는 참패하고 이백은 도주하다 잡혀 투옥되었으며 다시 야랑()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정치적 실패였다. 결국은 지인()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았으나 만년을 장강 유역에서 유랑하다 762년 세상을 떠났다.



대붕()이 날아 세상 끝까지 흔들리는데, 중천()이 무너지니 구할 수 없구나.
남은 바람이라도 만 년은 떨치련만, 부상()을 노닐다 왼쪽 날개가 걸렸다.
후인들아 이 소식 듣거든 전해다오, 공자가 없으니 그 누가 눈물 흘릴까.2)
-「임로가()」

대붕()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히 자유롭고자 했던 이백의 상징이다. 온 세상을 뒤덮을 듯한 대붕의 기세는 임종에 이르러 부상에 날개가 걸린 꼴이 되고 말았다. 
늙고 병든 시인의 비감한 정조가 나타나 있지만 역시 임종의 순간까지도 '대붕'으로 자처했던 시인의 강한 자부심이 주된 메시지라 하겠다.

이백은 시선()이다.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에 떨어진 천사 미카엘처럼 이백은 인간세상으로 귀양온 신선, 즉 적선()이었다. 
그는 시의 신선인가. 우선 우리는 이백을 귀양온 신선이라 불렀던 하지장()의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지장은 이백의 「까마귀 홰치는 노래」를 읽고는 "귀신도 흐느끼게 할 수 있다"고 찬탄했다. 귀신도 흐느끼게 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시적 감동의 정도를 말한다.

"고소대() 위에 까마귀 홰를 치면, 오왕 궁전의 서시(西)는 취기가 오를 즈음이다.
오나라 노래와 초나라 춤, 즐거움 채 다하지 않았는데 청산은 반쪽 해를 삼키려 하는구나.
은 화살 장식의 금 물시계에선 수많은 물방울 떨어져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 달이 물결 속으로 진다. 동쪽 해는 점점 높이 떠오르니 환락은 어이 될꼬?"

저녁부터 새벽까지 밤새도록 이어지는 오왕 궁전의 사치와 환락은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을 암시한다. 쉼 없이 떨어지는 화려한 물시계의 물방울은 멸망을 재촉하는 듯 똑똑 떨어지며 긴장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백은 '오월동주()'라는 성어와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조차 너무나 익숙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역사적 고사()를 제재로 하여 두어 컷의 상징적 화면으로 구성하였다. 
역사 속의 고사를 시에 쓸 때 대부분 유적지를 방문하며 일어나는 회고적 감상을 눈앞의 경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이백의 시가 주는 감동은 세상만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에서 나오는 듯하다. 달, 구름, 산, 바다, 태양, 술, 친구, 여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사랑, 그것이 귀신도 흐느끼게 할 만큼 감동적일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자연스러움 속의 비범함

이백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를 마음대로 오르내리며 마치 온 우주가 내 집인 양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뮤직비디오의 찰칵찰칵 바뀌는 화면처럼 이백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눈이 현란하고 숨이 가빠짐을 느낀다. 문학 비평가들은 이런 것을 시공을 초월한 시적 경계라고 부르곤 한다. 
이백은 정말 신선처럼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부질없고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로운 순간에도 절망 속에 침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술잔을 들어 달에게 술을 권하며 함께 마시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룬 것 하나 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할 때에도 그는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하늘과 땅을 모두 묶어 꾸러미에 집어넣어, 혼돈과 더불어 방자하게 자유로우리라" 하고 크게 외칠 수 있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임을 거부하고 무한히 자유롭고자 했던 시인, 그의 시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비범했다. 은번()은 이백의 대표작 「촉으로 가는 길」을 읽고는 "기이하고도 또 기이하도다" 하고 감탄하였다. 
그 시는 다짜고짜 "오호! 깎아지른 듯 위태롭구나!"로 시작해서 산과 물로 첩첩이 막혀있는 험준한 사천의 풍경을 과장되게 묘사한다. "촉으로 가는 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구나"를 후렴구처럼 되풀이하면서. 이 모두가 당시의 일반적인 정석에서는 벗어난 것들이었다.



"하늘에서 한 자도 안 떨어진 봉우리 봉우리들, 기암절벽에 거꾸로 매달린 마른 소나무.
거친 물결 으르렁거리며 나는 듯 달려가고, 골짜기마다 우레 같은 돌 구르는 소리."

산의 높이를 말할 때에는 땅에서부터 얼마나 먼가를 따져서 높거나 낮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백의 계산법은 다르다. 그는 하늘에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보았다. 하늘로부터의 거리가 30cm가 채 못 되는 산, 정말 높다. 
나무 또한 범상한 자태가 아니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이 아니다. 절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소나무다. 이건 오히려 땅을 향해 두 팔 벌린 형국이다. 
물 역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아니다. 나는 듯한 물줄기가 으르렁거리며 거세게 흘러내려 양쪽 골짜기에는 마치 스릴 넘치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위들이 굴러 내린다. 비평가들은 이처럼 기이하고 신비한 시청각 이미지로 가득 차있는 시를 이백의 개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작품이라고 평한다. 그는 분명 시의 신선이었다.

이백의 비범함은 또한 너무나 인간적인 비범함이다. 외로우면 벗을 찾고 좋은 사람과 헤어질 땐 마냥 서운해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감동하고 슬픈 광경을 보면 가슴 아파한다. 희로애락이 뚜렷한 어린아이처럼 그는 천진난만하게 가슴속의 말들을 모두 쏟아낸다.

"술 막 익어 산에서 돌아왔고 누런 닭은 가을 곡식 먹고 이제 살이 올랐구나.
아이 불러 닭 삶고 백주 따르니 아들, 딸 웃으면서 옷자락을 이끈다.
목청껏 노래하고 취하여 자축하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니 떨어지는 해도 빛을 발한다.
황제를 보필하는 것 빠르지 않으니 달리는 말 채찍질하여 먼 길 어서 가자.
어리석은 한 아낙이 있어 주매신을 무시했었지. 나 또한 집 떠나 장안으로 간다오.
하늘 우러러 크게 웃고 대문을 나서니 나 같은 사람이 어찌 평범할 수 있겠는가."

한림대조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백이 자축연을 베풀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린 시이다. 
마침 술도 익었고 가을이라 닭도 배불리 먹어 살이 올랐는데 술상 차려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셔보자. 목청껏 노래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문득, 그래, 황제를 보필하려면 어서 빨리 말을 달려 떠나야지 하고는 길을 나선다. 
대문을 나서며 하늘 우러러 크게 한 번 웃고는, 그러면 그렇지 나같이 능력 있는 사람이 평범한 생을 마칠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고 큰소리 땅땅 친다. 읽다보면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지는 이 시는 결코 일부러 꾸며낸 해학이 아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궁정에 들어가 황제 곁에서 벼슬을 하게 된 그의 감격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보면서 이백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에 핀 연"

이백의 비범함은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백이 누군가의 시를 읽고 나서 "맑은 물에 피어난 연꽃처럼,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다"고 칭찬한 구절이 있다. 이백은 연꽃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지녀야 좋은 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치관은 현실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존경하는 인물이란 곧 닮고 싶은 인물이며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그 모습에 다가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연꽃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은 후인들에 의해 이백이라는 시인의 풍격을 설명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약야 냇가의 연밥 따는 아가씨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뱃사공을 보고서
웃으며 연꽃 뒤로 숨고는 수줍은 듯 나오질 않네."

이 시는 한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여 시로 완성한 것이다. 
스무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짧은 시지만 이 간결한 몇 마디에 풍성한 이미지와 느낌을 담고 있다. 
사람과 배를 함께 감추어버리는 키 크고 널따란 연잎, 그 사이에서 연밥을 따는 처녀, 그녀를 보고서도 보지 못한 척 의연히 큰 소리로 뱃노래를 부르며 노 저어 오는 청년, 수줍어 커다란 연잎 사이에 숨어서는 불러도 나오지 않는 처녀. 강남 수향()의 따스하고 여유로우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민요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는 이백의 천재적인 관찰력 혹은 연상력의 소산이다. 중국의 역대 비평가들은 이백 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면모를 가리켜 "맑고 산뜻하다"거나 "소박하고 자연스럽다"고 평했다.

"놀라운 시구를 얻지 못하면, 죽어도 [시어 고르기를] 멈추지 않았다"던 두보와 달리 이백은 붓을 들면 단숨에 써 내려가 시를 완성했다. 송나라 때의 대표적 시론가() 엄우() 역시 이백 시에 대해 "시어가 갑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일필휘지로 시를 써냈다는 것은 시상이 시어로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매우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시상에 대한 가공이 적으므로 그만큼 시인의 생각과 느낌이 더욱 생생하고 절절하게 전달될 수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덜 다듬어진 데서 온 거칢도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이백 시에서 좋은 시와 나쁜 시가 반드시 가려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창작 과정과 작품과의 관계를 상기해본다면 이백 시의 개성은 바로 이 빠르게 써진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백 시를 나는 듯 자유분방한 호방표일()의 풍격과 맑고 참신한 청신자연()의 상이한 두 풍격으로 나누어 말한다. 그러나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며 거칠 데 없이 호탕한 면모나 맑고 참신하며 부드럽고 소박한 면모 모두가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가공하지 아니한 신선 이백의 참모습일 것이다.

생각' 문제들,

이백의 삶을 주도한 것은 유가사상인가, 도가사상인가?
이백은 제왕을 보필하여 천하를 바로잡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유가적 정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불합리한 현실에 스스로의 원칙을 꺾고 적응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허위와 가식을 싫어하고 순수와 열정을 지향했던 그는 도가의 자연주의를 자신의 삶을 통해 체현했다. 따라서 이백을 유가사상 혹은 도가사상 어느 한쪽의 문인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중국시의 양대 산맥인 이백과 두보는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고 또 직접 만나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던 두 시인은 시가 풍격면에서는 매우 대조적인 경향을 보인다. 
창작 스타일 면에서 이백은 일필휘지로 단순에 시를 완성하였던 반면 두보는 한 자 한 자를 조탁하여 경구()를 만들어내고자 고심하였다. 또한 영원한 자유를 꿈꾸었던 이백과 비교할 때 두보는 보다 현실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시인이다.
이백의 시에 나타나는 쾌락주의적 경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백은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절망하기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었던 낙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술과 연회, 꽃과 풍류는 현실의 고뇌를 극복하기 위한 그 나름의 분출구이자 시적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래가 된 시.
《신당서》〈이백열전〉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백이 세상을 떠난 후 문종(; 827~840 )은 조서를 내려 "배민()의 검무(), 장욱()의 초서(), 이백의 가시()를 삼절(; 최고의 경지)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노래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중국 시이기에, '가시'라는 용어의 기원은 한대(; B.C.206~A.D.220)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통용되지 않았으며, 시인의 음악적 소양이 부족했던 남북조시대(420~581) 이후로 앞뒤 글자를 도치시킨 '시가()'라는 용어의 쓰임이 우세해지면서, '가시'라는 용어는 이백(; 701~762), 이하(; 791~817), 나은(; 833~909), 우교(; 890년 전후), 오융(; ?~903 무렵) 등 노래와 연관이 깊은 당대(; 618~907) 시인들의 시를 일컫는 경우에 한정되어 쓰였다.

'가시' 작가들 중에서도 이백이 최우선적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아마도 시문집을 펼치기만 하면 등장하는 '제멋대로 노래한다.', '호탕하게 노래한다.', 
'오() 지방 노래를 불러 본다.', '금()을 타며 노래한다.' 같은 구절들을 통하여 악곡()이 일상화되었던 그의 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과 악곡 간의 관계를 규명해 내는 작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가음()'이라는 항목에 속한 41제() 81수()의 작품들은 호칭에서부터 노래와의 연관성을 짙게 시사하고 있어서 상호 관계를 추적해 볼 만 하다.

이백이 애초에 가음()이라는 분류 항목을 설정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7언() 장단구() 위주에 근체() 작품도 간간이 섞인 가음 작품들은, 5언 고체() 형식만으로 이루어진 고풍()시와 쉽게 구분되며, 새로운 제목으로 된 가음 작품들은 옛 제목을 답습한 악부()시와도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등,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 「○○」, 「○○」, 「○○」, 「○○」과 같은 제목의 외양만으로도 다른 시가들과 쉽게 구분되는데, 이 같은 여러 유형의 제목은 각기 특정한 작시 상황이나 정서적 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전체 81수 중 59수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류는 의연하고 호방한 정서적 기조에, 묘사 대상에 대한 예찬이 중심을 이룬다. 그 외에 기성 곡조에 붙인 가사 성격의 여덟 수의 「○○」류, 비장하고 침울한 기조의 「○○」류 5수, 긴 시간적 흐름을 조망하며 인물의 일대기나 가치관을 노래한 「○○」류 4수, 특정 장소의 주변을 다니며 관찰하고, 그 정경과 유래를 중점적으로 묘사한 「○○」 3수가 있으며, 기타 2수가 있다.

이들은 노래[]라는 글자가 들어간 '가음()'이라는 명칭 자체만으로도 가창()과의 연관성을 의식한 '가사성() 시제()'라고 불리고 있지만, 글자로만 남은 시에서 노래의 자취를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여, 이백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의 송포우구()조차도 악부나 가음은 단지 노래를 '연상하며' 쓴 작품, 즉 읽는 시일 뿐이라 보았다. 
더 살펴보면 드물기는 해도 가창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소중한 단서들을 작품 안팎에서 찾아볼 수 있다.

풍류시대. 음악의 재능

이백이 살았던 개원(; 713~741), 천보(; 742~756)년간은 당 현종의 태평정국과 맞물려, 전국에 춤과 음악이 넘치던 시대였다. 남북조시대 악부의 곡조들은 사라져가고, 국경의 확장에 따른 외래 음악의 유입이 왕성해지면서, 옛 가락과 새 곡조가 뒤섞인 음악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왕실에서는, 선왕()의 덕을 기리는 당대의 아악() 외에도, 지난 왕조의 음악인 청악()에 여러 서역 음악들을 더한 연악()이 연주되었다. 여기에 당 현종이 특히 애호한 호악()인 법곡() 등이 더해져, 궁궐 안의 이원()과 궁궐 밖 좌우() 교방()에서는 밤낮으로 연주가 이어졌다.

음악에 문외한인 대다수 문인들의 시는 낭송 수준에 머물렀지만, 개중에는 이백처럼 음악적 재능을 겸비하여 악기를 연주하거나 악곡에 맞춘 가사를 지은 작가들도 있었다. 
강흡(; 742 전후) 등 몇몇 작가들은 새로운 가사를 지어 연회 자리 같은 특별한 공개석상에서 사용하였고, 궁궐의 이원재자()들은 뇌물까지 써가며 시인들이 지은 새 가사를 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이렇게 구한 가사를 악곡에 맞추어 손질한 후, 노래로 만들어 연주하고 궁궐과 세상에 유포시켰다. 
이교()의 〈분음행()〉 마지막 네 구절을 잘라 만든 〈수조가(調)〉가 촉()으로 피난 간 당 현종의 감회를 돋우었다는 고사()나, 고적(; 706~765), 왕지환(; 688~742), 왕한(; 678?~726?) 등이 기방에 모여 기생들이 부르는 노래가사가 누구의 시인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고사, 
왕유()의 〈위성곡()〉이 양관삼첩()이 된 과정, 그리고 이보다 다소 뒤에 활동했던 원진()이나 백거이()의 악부가사()들이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는 기록들도 음악이 넘치던 시대 풍조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당시 민간에서는 기성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지어 넣는 곡자사()들이 유행하였고, 궐내에서는 《교방기()》의 285곡이 연주되었으므로, 당시에 유행했던 곡조는 줄잡아 1,000 내지 2,000곡으로 추정된다.

이백이 743년부터 장안에서 햇수로 삼년간 맡았던 한림공봉()이란 직책은 제왕의 갖가지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현종 초에 설치된 한림대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한림대조만큼의 정치적 권한은 없었지만, 적지 않은 음악적 소양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이백의 선배로서 한림학사를 맡았던 장열(; 667~730)이 39수나 되는 〈교묘가사()〉의 곡사를 지은 것, 이백보다 다소 뒤에 한림봉공을 맡았던 백거이()가 신악부()를 지어 노래하였다는 사실이 한림공봉직과 음악적 소양간의 밀접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실제로, 당 현종이 봄날 양귀비와 모란꽃을 구경하며 한림공봉 이백을 불러 〈청평조사(調)〉를 짓게 하여 새로운 가사로 된 노래를 들었다는 《송창잡록()》의 기록은, 악곡에 대한 이백의 재능이 제왕 측근에서 일익을 담당할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현악기의 연주기법 중에 하나인 전조(調 : 음조를 바꾸어 연이어 연주하는 것)를 나타내는 '집()'이라는 전문용어가 등장하는 〈유간천()〉, 작품 제목에 음조를 표시한 〈이칙격상백구불무사()〉, 노래에 한을 실어 표현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동무음()〉, 〈예장행()〉 등의 악부 작품들은, 의고() 형식의 고악부()임에도 악곡과의 밀접성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적 소양을 강하게 뒷받침해 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제 실제 가음 작품 내에서 선율의 자취를 찾아보기로 하자.
산자고사().

당 현종이 봄날 양귀비와 모란꽃을 구경하며 한림공봉 이백을 불러 〈청평조사(調)〉를 짓게 하고, 이원제자(; 궁궐 안의 과 )들로 하여금 청평조(調) 악곡의 길이를 조절하여 명창() 이구년()에게 노래를 명하고, 그 자신도 옥 피리()로 반주를 넣었다는 《송창잡록()》의 기록은 '「○○」' 형태의 제목으로 된 이백 가음의 가창가능성을 시사해준다.

흥미롭게도, 이백이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산자고사()〉의 제목은 〈청평조사〉와 같은 유형이면서, 성당()대에 유행했던 곡조의 명칭과 겹친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고죽령() 머리에 가을 달이 밝았는데 / 고죽 남쪽 가지에 자고새 나네.
연산() 북쪽 기러기에 시집을 왔더니만 / 나를 물고 안문()으로 돌아가려 하네.
산닭과 꿩이 와서 서로 충고하길 / 남녘 새는 북쪽 새에 곧잘 속는다 하네.
북방 요새의 찬 서리는 창칼처럼 독할테니 / 창오산()에 살고픈 맘 저버리기 어렵네.
"제 마음은 죽어도 떠날 수 없어요." / 애절한 울음, 놀란 외침,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 , . , . , . , .)"

이백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최령흠(; 749 전후)은 당 현종 치세(712~756)에 대궐 안팎의 교방()에서 노래되었던 악곡들을 회고하며 285개의 제목을 《교방기()》에 수록하였는데, 그 중에 〈산자고()〉가 들어있다. 
《교방기》가 762년 이후에 나왔으므로, 이백(701~762)의 생존 시기에 이 곡조가 유행했음이 분명하다. 송() 곽무천도 역대() 악부를 모아 분류한 《악부시집》 중에 당대() 유행하던 악부, 〈근대곡사()〉 항목에 무명씨 작 〈산자고〉 두 수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곡조가 당대 유행곡임은 확실하다.

이백 〈산자고사〉의 가창 가능성은, 남방 나그네가 부른 산자고사 노래에 감동하여 지은 〈추포의 청계 눈 온 밤에 술 마시며 어느 객이 자고새 노래 부르는 것을 듣다()〉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 더욱 높아진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담비 웃도리를 입고 / 그대의 백옥 술단지를 마주하였네.
눈꽃은 술 위에 스러지고 / 문득 찬 밤기운이 사라졌음을 알겠네.
객 중에 계양에서 온 이가 있어 / 산자고를 잘 읊조리데.
맑은 바람이 창 가 대나무를 흔들고 / 월의 새들은 날아오르며 서로 우짖네.
이를 간직하고 즐기면 그만, / 생황과 피리로 요란스러울 필요 무에 있으리.
(, . , . , . , . , .)"
이 작품의 제목과 내용을 《교방기》, 《악부시집》 수록 악곡명 등과 종합해 볼 때, 당시 유행하였던 여러 형태의 〈산자고〉 곡조가 그의 가음 〈산자고사〉와 관련되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백 이전에 「○○」(B형)의 제목은 만사() 외에 그다지 흔치 않았는데, 이백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맹호연(; 689~740), 
왕한(; 713 전후), 왕지환(; 742전후) 같은 시인들이 당시 유행곡에 가사를 붙여 〈양주사()〉, 〈답가사()〉를 지은 것을 보면, 〈산자고사〉처럼 이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이백 가음도 기성 멜로디에 붙인 노랫말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같은 추정은 같은 유형인 〈옥진선인사()〉와 〈횡강사()〉 6수에까지도 확대 적용시켜볼 수 있다. 이백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 고적(; ?~765)에게는 742년 전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옥진공주가()〉가 있다. 
옥진공주는 당 현종의 넷째 여동생인 공주 신분으로서 도사가 되기를 청하였고, 
743년에도 지영법사()라는 호를 받아, 왕유(; 699~759)가 〈봉화성제행옥진공주산장()〉을 짓고, 저광희(; 742전후)가 〈옥진선인산거()〉를 짓는 등, 그당시 많은 정치 지망생들이 그녀의 고상한 선택에 찬사를 보내는 시를 지었다. 
고적() 작품의 제목에 가창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 ''자가 들어 있고, 730년 경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백의 가음 〈옥진선인사〉의 제목이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유사한 성격의 기성곡, 
선악()이나 진곡()과 같은 도가() 성향의 곡조를 바탕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산자고사〉나 〈옥진선인사〉와 같은 계열인 〈횡강사()〉 6수도 기성곡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작품 내에 암시되고 있는 악곡의 요소들은 그 가창 가능성을 높여준다. 

총 여섯 수 중에 첫 번째 작품이 가장 특징적이다.
"남들은 횡강()이 좋다고들 하지만 / 나는 횡강이 사납다 하겠네.
바람이 한 번 불면 사흘 동안 산을 뒤집고 / 허연 물결은 와관각()보다도 높은 것을.
(, . , .)"
횡강은 안휘성() 화주() 역양현() 동남으로 흐르는 강이며, 안휘성은 강소성()과 함께 오() 땅에 속한다. 
시 중에 '나'라는 뜻의 농()은 오() 지방 사투리이다. 중심 소재와 사투리라는 양면에서 오의 민가()의 영향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남조의 양()대 시인 포조(; 421전후~465전후)의 〈오가() 3〉과도 매우 닮았다.
"남들은 형강이 좁다지만 / 형강은 정녕 절로 넓어지네.
뱃머리 오량소리 아예 들리지 않는데 / 바람은 윙윙대고 어이 건너리.
(, . , .)"

'남쪽의 강'이라는 공통된 소재, '거센 풍파 속의 기다림'이란 유사한 주제, '남들은······라 말하지만/실제로는······'식의 같은 첫머리 등, 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보인다. 
'남들은······/나는······'식의 첫머리는 또한 남조() 오() 지방에서 유행한 노래, 〈자야변가() 1〉의 시작 부분과도 겹친다.
"남들이 그대 마음 바뀌었다 말해도 / 나만은 그런 것 본 적이 없었건만.
삼경에 문 열고 나가니 / 그제사 자야가 변했음을 알았네.
(, . , .)"

이러한 자료들 외에, 성당대 교방()에서 수집한 민가의 곡조명 중에 〈오초가()〉도 있고, 당대() 이강성()이 '근래의 오가이다()'
몇몇 악부를 예시하고 있는 《악부시집》의 내용, 이백보다 후배인 유우석(; 772~842) 역시 오성곡()인 〈삼각사()〉를 지은 사실 등을 미루어볼 때, 〈횡강사()〉가 당대() 강소, 안휘성 일대의 오가() 곡조에 붙여진 가사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백의 사후()에 여러 시인들에게서 B형의 작품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도 유우석(; 772~842)의 경우, 민가 곡조 〈죽지()〉, 〈양류지()〉에 가사를 붙인 〈죽지사()〉, 〈양류지사()〉 등이 있다. 
이백의 〈산자고사()〉, 〈옥진선인사()〉, 〈횡강사(橫江詞) 6수〉가 유우석의 작품처럼 널리 유행되지는 못하여, 전래 가사를 수집한 송()대 《악부시집()》에 실리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의 세력 확장과 함께 활발하게 유입된 서역(西)의 음악, 장강 유역에 잔존하던 고곡(),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한 곡자() 등 악곡이 만연하던 당대 분위기를 감안해 볼 때, B군()의 이백 가음 작품들은 기성곡을 수반한 가사였을 가능성이 무엇보다 높다고 하겠다.

추포가().

노래 가사에 그것이 가사임을 알리는 표시를 구태여 넣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상과 같은 단서들은 이백 가음 전체의 가창 가능성을 여는 소중한 열쇠인 셈이다. 
서정()을 위주로 하는 노래의 속성에 비해, 서사성()이 강한 그의 가음의 곡조는 비슷한 성격의 악곡들을 연이어 붙이거나, 혹은 단일 곡조를 반복하거나, 즉흥적으로 변형시켰을 것이다. 노래불린 사실이 기록된 악부 〈청평조사(調)〉의 제작과 연주 과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당 현종은 이백이 지은 가사에 맞추어 이원제자()들로 하여금 악곡을 짤막하게 변주토록 하고[調], 이구년()더러 노래하게 하면서, 본인도 옥피리로 합주하면서 매 곡편()이 바뀔 때마다 끝소리를 길게 끌어 멋을 부렸다."는 대목은, 기존 악곡에 대한 변형과 즉흥적인 애드립(ad libitum)의 기교가 용인되던 당대 연주 양상을 짐작케 한다.

이들에 비해 「○○」의 용도는 그 폭이 다소 넓다. 악기 반주 없는 산자고 노래를 듣고 쓴 그의 〈〉에서는 제목 중의 '/가 내용에서는 '/'로 변하면서, 음()은 도가(; 육성()만으로 부른 노래) 형태의 '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 남방의 객이 불렀다는 〈산자고〉는 당시 교방() 악곡 제목이기도 하였으므로, 이 때의 음()에는 일정한 선율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외에 "〈양원가()〉를 짓는다" 
내용의 〈양원음()〉, "멋대로 노래하고 어슬렁대며 읊조리노라()"한 〈산수벽화가()〉, "옥 단지를 두드리며 높은 소리로 읊조린다()"는 〈옥호음()〉, "'침울하게 읊조린다()"는 〈월하음()〉 등, 이백 가음에서 「」의 쓰임은 도가()로부터 웅얼거림에 이르는 너른 스펙트럼을 보이는데, 이는 근인() 임이북()이 《당성시()》에서 "당대() '음()'의 용례는 가창()에서 낭송()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라 한 견해와 부합한다.

기성곡에서 즉흥곡에 이르는 다양한 가락에, 호탕한 발산과 침울한 움츠림이 뒤섞인 이백 가음()은, 이 천재 시인의 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출세한 친척 형에게 자신의 가난을 하소연한 〈빈가행()〉이나, 아는 이에게서 호화로운 가죽 옷을 받아들고 신이 나서 노래 부른 〈오운구가()〉 같은 작품에는 찌푸리거나 희희낙락한 그의 꾸밈없는 표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의춘원으로 당 현종을 수행하여 명을 받아 궁정의 봄을 노래한 〈신앵백전가()〉, 정치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임금 자리를 노리는 영왕() 린()을 예찬한 〈영왕동순가() 11수〉, 현종의 서쪽 남경 순방을 노래한 〈상황서순남경가(西) 10수〉에는 공명심이 꿈틀댄다. 
당시()를 읊조리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애송하는 〈아미산월가()〉와 〈양양가()〉, 신선을 그리는 〈회선가()〉, 기생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며 시재를 뽐낸 〈강상음()〉 등에는 호기롭고 낭만적인 기개가 넘실대어, 가음이 그의 재주와 열정이 마음껏 발휘된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제목이나 내용, 혹은 부제()에 묘사 대상, 주변 환경, 제작 배경 등이 적시()된 가음은 고전적인 고풍()이나 악부()와 구별되는, 사실적이고 개인적 성향이 강한 노랫말이 분명하다. 
다양한 가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인생의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고 나서 양자강 가에 와, 강가의 정경을 말쑥하고 담담하게 노래한 〈추포가()〉 10여 수를 꼽겠다. 
술기운을 빌려 분방하게 펼쳐낸 대다수 가음 작품과는 달리, 이들은 맑은 거울처럼 고요하게 그의 고독을 비추고 있다. 
송()대 시인 황정견(; 1045~1105)도 새로 지은 정자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이백의 추포가 열다섯 수를 초서()로 써 내려갔다고 한다.


중국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이백과 두보는 대조되는 삶과 시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조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했다.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담겨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당나라를 중국 시문학의 황금시대로 평한다.

이백은 중국문학사상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다. 자()는 태백()이며 호()는 청련거사()이다. 당대에 함께 활동한 두보()와 더불어 ‘이두()’라고 불린다. 또한 ‘시선()’으로 불리는 낭만주의시인이다. 
그의 시풍은 풍부한 상상력과 호방하고 스케일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천여 수가 『이태백시집()』에 전하고 있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라고 말하고 있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
제1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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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이에서 놓인 술 한 단지,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네.
달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르는구나.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니 즐겁기가 모름지기 봄이 된 듯한데.
내가 노래하니 달이 배회하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술 깨었을 때는 함께 즐거움을 누리지만,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니.
영원히 정이 끊어지지 않는 교유를 맺으며, 저 멀리 은하수 저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리."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2
제2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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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이 없었겠지.
천지가 원래부터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으리.
듣자하니 청주는 성인에 비견할 만하고, 또한 탁주는 현자와 같다하네.
성현들도 원래부터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랄 것이 있겠는가?
세 잔을 마시면 큰 도와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합해지니.
술 마시는 흥취를 알면 될 뿐,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게나."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샘()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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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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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의 변()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명고가()

천보() 5년(746) 겨울, 송성(; 지금의  ) 청령지()에서 벗 잠징군()을 전별()하며 지은 〈명고가1()〉은 제목에서뿐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도 가창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아! 명고산() 그리운 사람이 있건만, 
쌓인 눈이 가로막혀 가슴 답답하네. 큰 강물이 덜덜 뗠려 건널 수 없고,
얼음장이 용 비늘 같아 거룻배도 못 띄우네. 신선 사는 산, 멀고도 가파름이여,
하늘이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린다네 서리 언덕 새하얗게 저 멀리 펼쳐지면, 
마치 긴 바람이 바다를 부채질하여 푸른 바다 파도가 솟구쳐 오르는 듯,
검은 잔나비와 푸릇한 큰곰이 날름날름 위태위태, 
가지 꼭대기에서 바위를 울리면서 간담이 서늘하여 벌벌 떨리도록, 
떼 지어 소리치며 서로를 부른다네. 봉우리 삐죽삐죽 길은 끊어지고, 
까마득한 벼랑 위엔 별들이 걸렸네. 돌아가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명고산 새 노래를 연주하나니. 북과 피리에 거문고도 울리면서, 
청령() 연못 누각에서 권커니 자시거니. 그대 안 떠나고 무엇을 기다리나, 
마치도 누른 학이 뒤돌아보는 듯. 양원의 뭇 꽃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동쪽 낙양에서 큰 포부 펼치고는 수레에 포장 씌워 험한 길을 넘어, 
깊은 곳을 찾아서 험한 산을 넘을 테지. 희고 너른 바위 위 흰 달빛 속에 앉아, 
송풍곡()을 몰아 타면 온 골짜기 고요하리. 바라봐도 뵈지 않아 마음만 어지럽고 , 
덩굴 풀 얼기설기 싸락눈 푸슬푸슬 계곡물은 아래로 맑아 너르게 펼쳐져,
잔물결 소리 위에까지 들리겠네. 골짜기에 범이 울어 바람이 일고, 
계곡에 용이 숨어 구름을 토하겠네. 숨은 학은 맑게 울고, 
주린 청솔모 찌푸리며 끽끽대고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잠자코 있노라면, 
빈산이 시름겨워 서글퍼지리. 닭들은 모여 먹을 것을 다투지만, 
봉황은 홀로 날며 이웃조차 없도다. 도마뱀붙이가 용을 비웃고, 
물고기 누깔이 진주와 뒤섞였다. 못난 모모()가 비단옷을 걸치고, 
고운 서시(西)가 땔나무를 등에 졌다. 소보()와 허유()더러 벼슬을 살게 함은,  
기()와 용()이 진창에 빠진 것과 무에 다르랴. 슬피 울어 초()나라를 구해본들 무엇 하며, 
담소하며 진()나라를 물리친들 무엇 하랴. 나 진실로 이 두 사람을 배워, 
명예 사고 허리 굽혀 낯내는 일 못하겠다. 그저 한 세상 버리고, 이 한 몸도 내던지고 흰 갈매기여 너희 날아오면, 
오래도록 너와 함께 친해 보리라."
이 긴 작품의 중간에 "돌아가는 그대를 배웅하며 명고산 새 노래를 연주하노라.[.]"하는 시구는 이 작품의 제작 동기와 표현양식을 말해주고 있다.

이백 시문집 안에서 ".[찬하루 위에서 신선의 음악을 연주하니, 재재대는 게 난새 봉새 우짖는 것 같구나.]"〈〉, ".[청악으로 제천()을 연주하니, 높다란 소나무 절로 애달피 웅얼대네.]"〈〉 등과 같은 경우, '동()'은 연주나 노래를 '시작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러한 용례는 노래 가사를 수록한 곽무천()의 《악부시집()》 이후로 드물지 않게 등장하지만, 이러한 쓰임은 아직 주장된 바 없다.

이백에게는 명고산()을 소재로 한 〈〉과 같은 송별시도 있고, 〈〉와 같은 가음도 있지만, 잠징군을 전송하는 '새로운' 명고의 노래란 이들과는 '다른' 작품, 곧 이 〈〉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지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서의 ""은, "새로 지은 이 작품을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뜻이 된다.

작품에 사용된 악곡의 형태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북과 피리에 거문고도 울리면서'라는 구절로 볼 때, 이 작품이 북. 피리. 거문고 등 반주를 곁들인 노래 가사임은 분명하다(이를 A형이라 불러 본다). 
그가 지은 〈수군의 연회에 참석하여 위사마 다락배에서 기예를 감상하다()〉라는 시에서 "시는 북과 피리에 실려 펼쳐지고, 술은 검가를 힘차게 돋우노라.[.]"라는 구절은, 연회석상에서 악기 반주로 시를 노래하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은 이백 '가음'이 단지 곡조를 상상하기만 한 읽는 시의 형태가 아니라, 실제 노래된 것임을 시사해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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