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일 월요일

여호수아. 1

여호수아."

정치, 사회, 경제가 암울한 팔레스틴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오랜 기다림의 대상이다. 하나님 나라는 '나라'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종종 공간적 의미로 축소되지만 이것은 보다 넓은 개념을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이스라엘의 오랜 희망이다. 오랜 기간 고난에 시달린 이스라엘은 그들을 지배하는 악한 세상을 끝낼 하나님의 통치를 고대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에서 거대한 세력들과 맞서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지닌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러한 희망은 하나님 통치와 인간의 통치를 대립시키는 이스라엘의 사상 구조에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이 없던 시절, 이스라엘은 제사장이던 사무엘에게 왕의 통치를 요구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인 자신에 대한 거부라고 불쾌히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전도를 시작할 때의 복음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란, 본래는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를 의미하지만, 유대적 관념으로는 종교적 의미와 함께, 유대 왕국의 재흥이라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하느님의 나라는 순수한 종교적 의미의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한 민중의 실망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의 현실적 원인이 되었다.
원시교회에서는 예수의 재림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우 절박하게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미 지상에 와 있고, 하느님의 지배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교회가 그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중세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생각되었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I.칸트의 영향으로 리츨의 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구약성경은 왕의 통치에 대한 요구가 사무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왕이 없던 시절이란 왕 대신 하나님이 통치하던 시절을 뜻하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왕을 원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통치하던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전하신 복음 선포의 핵심 메시지였다. 동일한 표현으로 마태는 ‘천국’ 곧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마 3:2; 4:11; 5:19; 13:11).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기 두려워했던 유대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 표현이다. 

‘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권을 지닌 자’, ‘군주’, ‘백성의 지도자’란 뜻의 ‘바실레우스’에서 파생된 말로서, ‘왕권’, ‘통치’(눅 1:33; 행 1:6), ‘왕국’, ‘영토’(마 12:25; 눅 11:17), ‘메시야의 통치’(마 4:23; 약 2:5)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영역. 둘째, 그 통치자가 다스리는 백성. 셋째, 그 통치자의 다스림 그 자체. 성경에서는 위의 세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눅 16:16). 이 개념은 세례 요한의 사역 이후에 소개되었다. 세례 요한은 이 새로운 영역 안에 들어섰던 것이 아니라 그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그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복을 누린다(마 11:11). 한편, 이 영역은 현재가 되기도 하고 미래가 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 나라를 선포하시며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현재적 영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셨고(마 21:31; 23:13; 눅 16:16),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미래의 영역으로도 소개하셨다(마 18:23-35; 22:2; 25:1-30). 즉,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은 권세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한 증거가 된다(마 12:28; 눅 11:20). 그 같은 하나님 나라는 또한 교회 안에 현재 임하여 있다(눅 17:20).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장차 그 나라의 주인이요 완성자이신 메시야의 재림 때에 완성된 모습으로 임할 것이다(마 6:10, 33; 10:7; 막 14:25).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 백성을 뜻한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 자체가 나라이다(계 1:6; 5:10). 이유는,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왕권)에 참여하는 복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로서(눅 22:29), 거듭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요 3:3-5). 실로, 그 나라는 회개하는 자(마 3:2),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마 5:10; 행 14:22),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약 2:5), 의로운 자들이(마 25:34)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요(막 10:30),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마 19:16, 23-3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하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금 받고 있는 사람들만이 장차 임할 영원하고 복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막 10:15).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서 그 나라의 시민 된 우리를 다스려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 된다(마 6:33). 하나님의 다스림은 단순히 이상적인 내용이거나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나라와 악의 세력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해 가는 역동적인 것이다(마 12:28).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요, 하나님이 다스리기 위해 친히 택하시고 불러 세우신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통치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모든 영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영광되고 거룩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며(마 5-7장),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계 22:20), 늘 깨어 있어(마 25:1-13), 기도하고(마 6:10), 천국 복음을 전하며(마 24:14; 눅 9:60; 행 8:12), 모든 고난과 환난 중에서 인내하고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사 66:8; 행 14:22; 골 4:11; 살후 1:5).


구약성경은 인간의 통치에 따른 불의를 이스라엘의 모든 악이 시작된 길갈(사울이 왕으로 결정된 도시)에 돌림으로써, 인간의 통치가 불러일으키는 악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하나님의 통치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오랜 고통과 억압의 세월을 거쳐 로마라는 거대제국의 압제에 허덕이며 또한 한편으로 태생성에 발목 잡혀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밝힌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희망이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그의 기적에 놀란 민중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마도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이 싹트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언제'와 '어떻게'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었다. '언제'와 '어떻게'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한편으로 '언제' 하나님 나라가 올 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일어날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설명으로 대신한다. 이러한 설명들은 대체로 전쟁과 환란과 고통과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으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선포하는데, '이미' 온 하나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어떻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마지막 때의 환란과 전쟁과 고통이 오지 않았는데도 소리 없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것은 겨자씨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말한다. 겨자씨는 씨 가운데 가장 작지만 나중에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이 머물고 많은 사람에게 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보잘것없는 처음과 큰 열매를 거두는 마지막을 대조시키고 있다고 해석되거나 혹은 조그만 씨에서 큰 나무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양쪽의 해석에 차이가 있지만, 어느 한 쪽을 택하더라도 이 비유의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는다. 이 비유의 목적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시원과 그 결과를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겨자씨는 씨 가운데 가장 작지도 않고 자라난 나무도 나무 가운데 가장 크지도 않다. 과장이 섞인 이 비유의 초점은 조그만 씨에서 시작해 말할 수 없이 커지는 나무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강조점이 다르다 하더라도, 두 개의 해석은 씨에서 발아해서 나무로 자란 하나님 나라의 생명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땅 속에 묻힌 씨가 썩어서 순을 돋우며 땅으로 솟아나는 것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워도 그 순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어느 순간에 보면 그곳에 씨를 묻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순이 돋았을 뿐이다. 씨앗은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나무로 자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상징화된다.

그렇다면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전복적 가능성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도 과연 그렇게 혁명적일까? 예수의 혁명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가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염원을 하나님 나라에 투사했고 혁명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내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 질서와 그것을 일구어낸 방법의 차이를 지나쳤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혁명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여기서 혁명이란 사회 질서를 뒤집는 무력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견디면서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만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주된 특징이 있다. 

19세기 이후 J.바이스, A.슈바이처 등의 종교사학파의 연구로, 예수가 전한 하느님의 나라는 단순히 윤리적 요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종말의 대망으로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신학은 이 종말론적인 이해에 근거를 두고 절망적인 세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해명에 힘쓰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뿐이며 그에 합당한 삶을 요구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복 행위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만들어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길갈을 만드는 것 밖에는 안 된다.

전복 행위를 요구하지 않은 채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 나라의 모순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바로 생명의 신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겨자씨 비유처럼 그것은 치열하지만 소리 없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답지 않다는 것은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른' 방법을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도 알 수 없다.

이 방법은 바로 씨가 썩는 것과 같다. 씨가 소리 없이 썩어야 치열하게 땅을 뚫고 순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썩는 행위를 통해서 소리 없이 이 땅에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행위는 바로 이 썩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 썩는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드러낸다.

문제는 '썩음'이라는 추상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 추상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을 때, 1세기의 팔레스틴에서 태동한 기독교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대 로마의 지배로 고난 받는 팔레스틴의 민중들에게 썩음을 말했다면 과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실제로 썩을 대로 썩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썩음이 과연 희망일 수 있는가? 이러한 썩어짐이 일종의 포기와 버림을 뜻한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 '무엇'에 대한 것이 예수의 행위와 말씀의 핵심이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정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 인자, 왕으로 부른다. 

이런 칭호는 예수에게 최상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칭호들이 지닌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칭호들은 보통 다른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은 예수에게 쓸 때도 같은 의미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적용한 칭호와 예수의 삶은 서로 상반되는 듯하다. 그는 왕이라 불렸지만 왕이기를 거부했고 그를 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떠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영광과 권세를 바라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신으로 불리지만 그 신의 모습이란 초라하게 대적자들에게 공격당하고 제자들조차도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의 칭호와 정체의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보다 '어떤' 그리스도인지 중요해진다. 신약성경에 있는 예수의 칭호는 확실히 보통 의미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고지가 따라오며,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 베드로가 비난받은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예수는 그의 삶을 통해서 그가 받는 칭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칭호와 예수의 정체 사이에 있는 괴리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권력 혹은 힘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에게 붙인 다양한 칭호는 그가 권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엑수시아(eksousia)'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드러낸다. 엑수시아는 권세, 힘, 능력 등을 뜻하는 헬라어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초월적 능력'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해 예수를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호칭들의 공통점은 그가 권력을 가진 자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는 그의 권력이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이 권력이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서로 크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방법은 보통 알고 있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예수 제자들의 삶과 비교되는, 일상과 상식의 본보기로 거론되는 자들은 이방인의 왕들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왕들이란 당시 집권층들을 상징한다. 이방인의 왕들은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며 그들에게서 은인이라 칭함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한다.

후원자제도 속에서 후원자는 피후원자를 '주관한다.' 여기서 주관한다는 것은 그들을 '임의대로 부려먹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힘의 사슬 속에서 그 능력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후원자를 은인이나 시혜자로 부르며 그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이방인의 왕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권력은 당시 사회 구조를 바탕으로 상식과 일상적 힘 관계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권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왕들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제자들에 대한 요구가 예수 자신에게도 적용됨은 물론이다.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음을 강조하며, 다스리는 자가 되고 싶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섬김과 낮아짐에 대한 예수의 요구는 당시의 사회구조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끝없이 버리고 낮은 자로 행동한다면, 그들이 당도할 곳은 뻔하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아래로 내려가라는 이 요구가 희망이 되기에는 너무나 빈약해 보일 수 있다. 예수가 제시한 가장 강력한 대안이다. 
폐쇄된 위계질서에 따라 귀족은 귀족을 낳고 노예는 노예를 낳는 암울한 사회 속에서, 누군가 그 고리를 끊으려는 의지를 실행하지 않으면 사회의 변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의 요구가 전복적이기는 하지만 혁명의 모양을 띄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버리거나 이미 자리 잡은 곳에서 낮아짐은 고정된 질서를 소리 없이 파괴한다. 
이 '단()'의 의지가 '아래'에서 일어나 '위'를 향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거스르는 혁명의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예수의 요구는 이와 다르다. 예수는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한다. 

예수의 제안은 언제나 기존의 질서를 공격하는 성향을 띤다. 기존의 질서를 공격한다는 면에서 그것은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태생으로 고정된 질서에 반동을 가함으로써 폐쇄된 사회를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래를 향한 움직임은 다른 이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서 역동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온유 . 溫, gentleness.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함.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자세 곧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주께 순종하는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마음가짐, 혹은 고통이나 억울함 심지어 굴욕 속에도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심령을 견지하고 겸손히 참아내는 고상한 인격을 뜻한다(민 12:3; 시 25:9).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묘사하며(갈 5: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닌 품성이라 소개하고 있다(마 11:29; 고후 10:1). 따라서 그리스도를 좇는 주의 백성은 마땅히 이 같은 거룩한 품성을 본받아야 한다(엡 4:2; 골 3:12; 딤후 2:25; 딛 3:2; 벧전 3:15). 온유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시 37:11; 마 5:5).

태의 열매 . fruit of the womb.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태의 열매'란 '자식'을 뜻한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3).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1:42). 여기서 '태중의 아이'는 '태의 열매'와 같은 말이다.

성령의 열매 . the fruit of the Spirit.

'육체의 일'과 대조를 이루는 말로서(갈5:19),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성도가 그 삶을 통해 맺어가는 열매(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등)를 말한다(갈5:22-23).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맺어지는 열매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생활 속에서 그 은혜에 보답하여 맺어가는 결실을 가리킨다.

사랑 . love음성듣기, affection.

아끼고 위하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 동정하여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특히, '사랑'은 하나님의 최고 본질(요일4:8,16)이며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이요(고전13:13)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신적()인 사랑, 곧 아가페적 사랑이다(요3:16). 이 사랑을 힙입을 때 비로소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게 된다(요일4:10).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이 사랑에 근거함으로써 성도는 이웃을 섬기며(갈5:13), 거짓 없는 사랑을 하고(롬12:9),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요일3:18).

참고로,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로, 

'에로스'(남녀간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됨), 

'필리아'(친구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 약4:4), 

'스트로게'(가족간 사랑, 부모 자식 간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롬5:5) 등이 있다. → '아가페'를 보라.

사랑의 종류와 가치.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 욕구와 종족 보존 욕구를 지닙니다. 자기 보존 욕구는 식욕이나 소유욕 등이며, 이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무래도 식욕입니다. 또 종족 보존 욕구는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한 욕구와 자녀에 대한 사랑의 욕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보존 욕구와 종족 보존 욕구의 본능적 사랑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이 종족 보존 욕구의 보편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능적 욕구는 생식 기관과 호르몬 작용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식 기관을 제거당하면 이성에게 흥미나 관심을 표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욕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의 고환이나 여성의 난소를 제거해도 얼마든지 이성에게 성욕도 느끼고 애정 표현도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완전히 본능에 예속되어 성선이나 호르몬에 불가항력적이고 그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반해, 인간은 본능적 압력을 받지만 반드시 그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경우는 인류가 원래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뇌에 새롭게 신피질계가 발달함으로써 이곳에서도 사랑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대뇌신피질계에서는 지성적인 행동을 관장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의지와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사람의 의지와 본능 사이의 어딘가에 그 사람의 윤리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은 다를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사랑의 분류법(Hendrick, C. & Hendrick, S., LASLoveAttitude Scale)이 대표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랑(eros)은 첫눈에 반하거나 연인의 신체적인 매력에 끌리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유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연인들은 자기를 빨리 개방하고 쉽게 감정적으로 동화하고 신체 접촉도 빠릅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생각하고(객관적인 사실은 중요치 않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유희적인 사랑(ludus)은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그 가운데서 사랑의 관계를 즐기는 유형입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갖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애인으로부터 얻어 내는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랑의 감정이 깊지 않고 쉽게 애인을 바꿉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평범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른이 되어서 종종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동료적인 사랑(storge)은 처음에는 형제자매나 놀이 친구 같은 관계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스토르게이(storgay)에서 비롯된 사랑의 유형입니다.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기 개방으로부터 생기는 편안한 친밀감을 서로에게 느끼는 관계로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오랜 우정에서 생긴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동료애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보통 대가족이나 서로 격려해 주는 분위기의 가족 문화 속에서 자랐거나, 안정적이고 우호적인 공동체 안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논리적인 사랑(pragma)은 그리스어 ‘프래그머틱(pragmatic)’에 어원을 둔 사랑입니다. 논리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쇼핑 목록을 작성하듯 상대에게 원하는 실용적인 자질의 목록을 다소 의식적으로 작성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잘 어울리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어울리는 상대를 구하는 데 논리적이고 사려 깊으며 흥분보다는 만족을 추구합니다. 이들이 애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도 애인에게서 그만큼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논리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신이 노력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유적인 사랑(mania)을 하는 사람들은 질투와 소유욕이 강하고 애인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고 애인에게 의존적입니다. 사랑의 기쁨에서 슬픔으로 변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항상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연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회상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외로워하며 자신의 일에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극도의 질투심을 보이고 상대방에게 더 많은 애정을 요구하는 유형의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agape)은 무조건적으로 배려하고 제공하는 타인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를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사랑의 방식에 미치는 영향

이렇듯 다양한 형태의 사랑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 윤리나 가치관에 맞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이성과 나누는 사랑 유형이 어릴 때 양육자와의 애착 유형과 관계가 깊다는 연구가 나와 흥미롭습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1)에서 어릴 때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회피 유형이었던 사람은 유희적인 사랑의 형태가 높은 분포를 보였고, 열정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의 유형이 낮은 분포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양육자와 회피 애착 유형을 형성하면, 자라면서 대인관계에서 타인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어려우며, 타인과 가까워지면 불편함을 느끼는 성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또 이성 관계에서는 유희적인 사랑을 하기가 쉽고, 열정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와 안정 애착 유형을 가졌던 사람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열정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을 하는 비율이 높았고, 유희적인 사랑을 하는 비율은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어릴 때 양육자와 안정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면, 타인과 비교적 쉽게 사귈 수 있고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타인이 자신에게 의지할 때에 편안함을 느끼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인성으로 자라게 되어, 이성과 사귈 때 열정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 쉽고, 유희적 사랑은 좀처럼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영유아기 때 부모나 돌봐 주는 사람과 갖는 관계의 질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애인과의 사랑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성과의 사랑을 ‘성인기 낭만적 애착’이라고 부르며 영유아기의 애착과 비교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위에서처럼 사랑하는 형태에 대한 연구도 있지만, 최근에는 사랑이 일어나는 과정을 연구(KBSTV의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생로병사의 비밀, 사랑 1;2005. 3. 15, 사랑 2;3.22, 사랑 3;3.29 등> 참고)하여 과학적으로 사랑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사랑이 변하는 이유.

이 연구에서는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커플의 뇌 사진을 조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대뇌의 미상핵 부위(1장에서 본능을 관장하는 시상하부로 언급된 부위의 일부)가 활성화되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혔습니다. 미상핵이 활성화되면 인간은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하게 되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치 않고 애정 표현에 과감해집니다. 
흥분과 쾌감, 주의 집중을 일으키는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활발해집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면 도파민의 분비가 많아지는데 도파민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자주 미소 짓게 만듭니다. 애인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입니다. 이것을 ‘핑크 렌즈 효과’라고 합니다.

만난 지 100일 정도 되는 연애 초기의 핑크 렌즈 시기를 지나 만나기 시작한 지 300일쯤이 되는 연인들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사랑은 변함없어 보일지라도 뇌 스캔 결과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뇌의 활성화가 본능의 중추 미상핵에서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대뇌 신피질 부위로 옮겨 간 것입니다. 6개월 전의 열정은 그 빛을 잃고 사랑에 상당히 이성적 측면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열정이 식고 동료 같은 친숙함이 생기는 것 역시 필요한 일로 봅니다. 왜냐하면 열정적 사랑의 상태는 너무나 강력하여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생겨 몰두의 대상이 바뀌고 열정적 사랑이 이타적 사랑으로 바뀌는 것 역시 자연의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데 열정적 사랑을 느끼는 기간은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열정적 사랑의 유효 기간은 900일’이라고 하나 봅니다.

열정이 급격히 약해지는 시기는 그보다 빠릅니다. 사귄 지 약 1년쯤 되는 때이며, 이 시기가 연인 사이에 가장 위험한 고비가 됩니다. 
열정의 농도는 대략 50% 떨어지는데 그 열정의 빈자리를 동료적 사랑을 위시한 다른 사랑으로 채우지 못할 때 이 연인들은 사랑이 식었다며 이별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정만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열정이 있는 동안에 사랑을 동료애나 정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두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이성을 존중하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로 자라난 성인은 본능의 힘보다는 자유의지로 사랑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삼각형 이론 . triangular theory of love.
사랑의 삼각형 이론은 사랑이 하나의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가지 구성 요소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에 의해 제안되었다.

개요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가 제시한 사랑의 삼각형 이론은 사랑이 하나의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가지 구성 요소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스턴버그에 따르면 사랑은 친밀감, 열정, 결심/헌신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세 요소의 균형 상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세 요소가 모두 균형 있게 발달했을 때 성숙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

연구 배경

사랑의 삼각형 이론은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J. Sternberg)가 1986년에 발표한 『사랑의 삼각형 이론(A Triangular Theory of Love)』에서 주장된 것으로, 사랑이 친밀감, 열정, 결정/헌신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친밀감 요소는 ‘정서적 투자’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열정 요소는 ‘동기적 몰입’에서, 결정/헌신 요소는 ‘관계에 대한 헌신과 그 안에서의 인지적 결정’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의 학자들은 세 가지 대조되는 측면을 각각 연인의 자아, 리비도, 초자아와 연결짓기도 한다.

스턴버그(Sternberg, 2002)는 이러한 세 요소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사랑의 많은 측면들을 실제로 연구해 보면 이러한 세 요소의 어느 한 부분이거나 이 요소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의사소통은 친밀감의 범주이며, 관심이나 동정심도 그렇다. 만약 친밀감, 열정, 헌신을 세분화하여 기술한다면 해당 이론은 너무나 많은 요소를 포함하게 되어 실제적인 이론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둘째, 연인들이 등장하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보면 사랑의 다른 요소는 특정 시대에 한정되거나 특수한 문화에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일반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세 요소가 모든 문화에서 똑같은 무게로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서나 일정한 무게로 다루어지고 있다.

셋째, 이러한 요소는 서로 연관성을 띠고 있으나 별개의 요소로 독립되어 있다. 실제 인간관계에서 세 요소 중 하나의 요소만을 가질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이론들이 말하는 사랑의 구성 요소들, 즉 양육과 보살핌 같은 요소들은 논리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구분짓기 어려워 독립된 요소로 보기 힘들다.

넷째, 사랑의 다른 많은 이론은 스턴버그의 이론과 비슷한 모양이거나 부분 집합일 뿐이다. 언어나 어조의 차이를 떠나면 이들 이론의 정신은 결국 자신의 이론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삼각형 이론은 감정과 행동을 함께 설명한다는 장점이 있다.
친밀감 요소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가깝고 연결되어 있으며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일컫는다. 스턴버그와 그래젝(Sternberg & Grajek, 1984)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친밀감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지표를 지적한다.

1. 사랑하는 이의 복지를 증진시키기를 열망함.
2.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행복을 경험함.
3. 사랑하는 이에 대해 존경심을 가짐.
4. 필요할 때 상대방에게 의지할 수 있음.
5.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이해함.
6. 상대와 자신 및 자신의 소유를 나눌 수 있음.
7. 상대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받음.
8. 상대에게 정서적 지지를 줌.
9. 상대와 친밀한 의사소통을 함.
10. 자신의 삶에서 사랑하는 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함.
11. 기타 등등...

열정 요소
사랑하는 관계에서 낭만, 신체적 매력, 성적인 몰입과 같은 것들로 이끄는 욕망을 말한다. 많은 관계에서 성적 욕구가 열정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지만, 다른 요구들, 자아존중감, 타인과의 친화, 타인에 대한 지배, 타인에 대한 복종, 자아실현 같은 욕구들이 열정이라는 경험에 기여하기도 한다.

결심 / 헌신 / 요소.
결심/헌신 요소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단기적인 것이고, 둘째는 장기적인 것이다. 단기적인 것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는 결심을 말한다. 장기적인 것은 그 사랑을 지속시키겠다는 헌신을 말한다. 사랑의 결심/헌신의 두 측면은 함께 갈 필요는 없다. 
사랑을 하겠다는 결심이 그 사랑에 대한 헌신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사랑에 대한 헌신이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내포할 필요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사랑한다는 또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과의 사랑에 헌신한다. 그러나 헌신 이전에 사랑에 대한 결심을 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앞서 언급된 세 요소들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결합을 시도해 보면 여덟 가지 하위 요소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하위 요소들이 삼각형 이론에 기반한 사랑의 분류에 기초가 된다. 
삼각형 이론에서 언급되는 여덟 가지 유형은 극단형을 표현하는 것으로, 실제 현실에서는 친밀감이 전혀 없는 열정을 경험할 수도 있고 친밀감이 전혀 없는 헌신 역시 가능하다.

사랑의 종류

좋아함.
사랑에서 열정과 결심/헌신 요소가 결여된 채 친밀감 요소만이 경험될 때 나타난다. 여기에서 ‘좋아한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의미가 아니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 지나치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단순히 좋은 감정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종류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강한 열정이나 장기적 헌신 없이도 상대를 향해 친밀감,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 따뜻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취성 사랑.
“첫눈에 빠진 사랑” 또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상화하는 망상으로 치우치는 사랑이다. 친밀감, 결심/헌신의 요소가 결여된 열정적인 흥분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다. 도취는 도취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잠시 생겨났다가 마는 것으로 비친다.  
거의 즉흥적으로 생겨났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 있다. 또 정신적, 육체적인 흥분이 상당한 정도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테노브(Tennov, 1979)는 도취성 사랑을 리머런스(limerence)라 칭했다. 그녀의 책을 읽어 보면 도취성 사랑의 속성과 과정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도취성 사랑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보기보다 이상화된 상대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다. 도취 상태는 미처 그 관계가 성숙되지 않았을 때나 관계에 어려움이 없을 때만 지속된다. 
도취 상태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그가 반한 상대의 실체를 알게 해서 실체와 자기가 만든 이상형을 비교해 보게 하는 것이다. 다른 치료법은 테노브(1979)가 지적한 것인데, 자기가 반한 이상형을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홀린 듯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에 잡아먹히고 소모되어서 다른 일에 투자해야 할 시간과 정력, 동기 등을 잃게 된다. 도취성 사랑의 이런 홀린 듯한 특성은 사랑받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상대의 사랑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기보다는 그 사람의 욕구가 투사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제는 도취성 사랑으로 인한 관계가 보통 비대칭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연구(Sternberg & Barnes, 1985)에서 나타난 바로는 이러한 비대칭성이 클수록 그 관계가 긴장에 노출되기 쉽다. 도취성 사랑은 상대를 이상화해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비대칭적 관계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욱 스트레스에 빠지기 쉽다.

공허한 사랑
친밀감이나 열정이 전혀 없이 상대를 사랑하겠다고(사랑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함으로써 생겨난다. 몇 년 동안씩 서로간에 감정적 몰입이나 육체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체된 관계에서 가끔 발견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 
헌신은 의식적인 적응에는 비교적 민감하므로 사랑에의 헌신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랑은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공허한 사랑은 대체로 오래된 관계가 끝날 때쯤 나타나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장기적인 관계의 시작 단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조선 시대와 같은 중매결혼 사회에서 결혼 당사자는 서로 헌신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인데 거기서 모든 일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허한 사랑이 반드시 관계의 종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자러스(Lazarus, 1985)가 지적한 대로 결혼생활에 오로지 헌신만이 남아 있고 다른 요소들은 사라져 버렸을 때, 결혼을 생기 있게 회복시키기 위해 다른 요소들을 재생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가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임을 깨닫고 실망한다. 즉 그런 부부는 결코 서로에게서 친밀감이나 열정을 느낄 수가 없다.

다른 종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사랑도 일반적인 사랑일 수 있다. 한 사람은 상대에게 진정한 밀착과 유대를 유지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헌신만을 느끼는 수가 있다. 
비대칭적인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몰입하지 않는 사람이 더 몰입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빚지고 있다는 죄책감이 더해질 때 특히 어려워진다.

낭만적 사랑
낭만적 사랑은 육체적 매력이나 그 밖의 매력들이 첨가된 좋아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낭만적 사랑은 서로에게 육체적,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헌신은 낭만적 사랑의 필수 부분이 아니다. 연인들은 영원성이 있을 것 같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단순하게 생각해 버린다. 가령 여름 한때의 사랑 같은 것은 매우 낭만적이지만 여름이 지난 후의 둘 간의 지속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고전문학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두 연인은 너무나 열정적으로 서로를 느끼고 또 서로에게 자신의 영혼이라도 다 보일 수 있을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 사랑은 하트필드와 월스터(Hatfield & Walster, 1981)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낭만적 사랑이란 도취적 사랑과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턴버그(Sternberg, 1986)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라 주장한다. 도취된 사랑은 어떤 경우 그 단계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가령 두 연인이 처음에는 단지 육체적인 이유로 서로간에 매력을 느끼지만 차차 육체적 매력보다 서로의 공통점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 또는 반대로 서로간에 공유점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낭만적 사랑은 반드시 도취적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우정으로 시작된 좋아하는 관계에서 서로를 열정적으로 끌어당기는 사랑으로 갈 수도 있다.

우애적 사랑
열정의 주된 원천인 육체적 매력이 약해진 오래된 우정 같은 결혼에서 자주 발견되는 사랑이다. 우애적 사랑은 덕(Duck, 1983)이 가까운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해 쓴 『인생의 친구들(Friends for Life)』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애적 사랑은 버샤이드와 월스터(Berscheid & Walster, 1978)가 말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낭만적 사랑은 차츰 우애적 사랑으로 변하면서 남게 된다. 즉 열정은 없어지기 시작하나 친밀감은 남아 있다. 열정은 오래 지속되고 깊게 느껴지는 헌신으로 거듭 대체된다. 우애적 사랑에 만족을 느끼는 정도에 있어서는 개인마다, 커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사랑을 원하지 않고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그런 낭만적 로맨스가 계속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불만족감을 경험하거나, 결혼은 유지하면서 외도를 하거나, 결혼생활을 점점 소홀히 하고 새롭고 신선한 낭만을 찾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다.

얼빠진 사랑
헐리우드 영화나 급행 구혼에서 접하게 되는 종류의 사랑으로, 친밀감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남녀가 어느 날 만났다. 곧 서로 약혼하고 또 곧 결혼한다. 둘의 관계가 발전해가는 데 시간을 요하는 상대에 대한 몰입 없이 열정에 근거해서 헌신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체가 없어 보인다.

얼빠진 사랑은 우울에 매우 민감하다. 열정이 식어갈 때(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남아 있는 것은 헌신뿐이다. 그러나 그 헌신은 장기간에 걸쳐 성숙되고 심화된 헌신이 아니라 아직 어리고 얕은 수준이다. 간혹 여기서 친밀감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 그 커플이 원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기대가 친밀감을 발달시키기보다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 이들은 천상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결혼을 원한다. 
그런 희망을 유지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정말로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관계의 기초를 열정에 두었고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실망한다. 그들은 속았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가 지불한 것보다 덜 받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제는 한 가지(열정)를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다른 한 가지(친밀감)는 부족하게 지불했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랑
성숙한, 또는 완전한 사랑은 사랑의 세 요소가 모두 존재할 때 생긴다. 우리 모두가, 특히 낭만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을 얻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는 모든 사랑 관계 또는 대부분의 관계에서 성숙한 사랑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사랑은 가능하면 가까이 도달하고 싶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사랑이 아닌 것
사랑이 아닌 상태는 사랑의 세 요소가 부재한 상태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다수의 대인관계에 나타난다. 그 관계는 사랑도, 심지어는 우정조차도 심각한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는 단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과정

친밀감.
친밀감의 발달 과정은 가까운 사람들 간의 정서 변화 과정에 대해 쓴 버샤이드(1993)의 책에 나타난다. 버샤이드의 견해는 맨들러(Mandler, 1980)의 보다 일반적인 정서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 친밀감은 처음에는 꾸준히 증가하다가 점차 더디게 성장하고 마지막에는 감소한다. 친밀감의 변화 추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드러나고 관찰 가능한 친밀감과, 관찰 불가능한 친밀감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서로를 더 많이 예측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은 전에 경험했던 만큼의 가까운 느낌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덤덤해지는 경험이 실제로는 두 가지 경우 중 한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 관계가 정말로 소멸해 버리는 것으로, 이 경우 두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간다. 다른 하나는 관계가 더 잘 이루어져 두 사람이 더욱 친해지는 경우인데, 이때는 자연스럽게 성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들은 둘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잘 알지 못한다. 성공적인 관계에서는 관찰 가능한 친밀감의 수준이 낮아질지라도 잠재적인 친밀감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성공적이지 못한 관계에서는 잠재적 친밀감과 관찰 가능한 친밀감 모두가 다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관계에 속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관찰 가능한 친밀감에서의 경험은 같기 때문이다. 보통 서로간에 일종의 중단, 즉 서로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 또는 가족의 상실(별거나 이혼 등)을 통해 그들이 서로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커플은 이혼한 후에야 그들이 실제로는 친밀했고 서로에게 의존적이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열정.
낭만적 관계에서 시간에 따른 열정의 변화 과정은 표준 패턴을 따른다(Solomon, 1980). 열정이 급속하게 발달한 다음에는 습관화가 나타난다. 그래서 상대가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자극이 되지 않는다. 중독 증상의 메커니즘과 유사하게 일단 습관화가 되면 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각성 효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잃게 되면 우울, 흥분, 초조 같은 금단 증상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기저선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인데, 기저선이란 그 사람이 상대를 만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대신 그 사람은 기저선 이하로 떨어지면서 금단 증상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면서 차차 다시 기저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결심/헌신.
요소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은 그 관계의 성공 여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그 반대 역시 성립한다). 일반적으로 그 수준은 두 사람이 만나서 알게 되기 이전의 0이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증가한다. 장기적 관계에서 보통 결심/헌신 요소의 헌신 수준은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점점 속도가 빠르게 증가한다. 
관계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헌신의 양은 대체로 감소한다. 관계가 김빠지기 시작하면 헌신의 수준은 감소기에 접어든다. 관계가 실패하면, 즉 종말을 향해 다가가면 헌신 수준은 영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랑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측정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스턴버그(1986)는 사랑의 세 가지 요소의 측정을 위한 도구를 개발했다. 이러한 측정 도구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지적하고, 변화가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지적함으로써 어떤 행동이 효과적일 수 있는지 제시하는 치료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척도의 개발과 타당도 검증을 위해 스턴버그는 미국 뉴헤이븐 지역의 성인 남녀 101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역 신문의 광고란을 이용해 연구를 수행했다. 참여자들의 연령은 18세에서 71세 사이였으며, 평균 나이는 31세였다. 그들이 연인, 부부 등의 관계를 맺은 기간은 1년에서 42년이었으며, 평균 기간은 6년 3개월이었다.

최초로 만들어진 삼각형 사랑 척도는 스턴버그(1998)에 의해 수정ㆍ보완되었으며, 정민아(2004)의 연구에서 예비조사를 거쳐 재구성되었다.


한계
사랑의 삼각형 이론은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 발달하는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확히 관계 형성의 어떤 시점에 이러한 단계들이 발달하는지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관계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관계의 지속 기간에 따라 사랑의 다른 요소들이 각기 다르게 발달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도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애커와 데이비스(Acker & Davis, 1992)는 18-20세 대학생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관계의 지속 기간이 사랑의 요소들의 발달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관계의 지속 기간이 정확히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보편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는데, 모든 연인들과 모든 개인들은 자신들의 관계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애커와 데이비스는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지각하는 사랑의 삼각형이 세 개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현실적인 삼각형이며, 둘째는 이상적인 삼각형, 마지막 하나는 지각된 삼각형이다.

현실적인 삼각형은 연인들이 자신들의 관계의 깊이와 추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반영하며, 이상적인 삼각형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파트너/관계에 대해 바라는 이상적인 특성을 반영한다. 지각된 삼각형은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바라보는 파트너의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이러한 세 개의 삼각형 중 하나라도 상대방의 삼각형과 불일치하면 관계의 불만족감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삼각형 이론은 연인이나 친구 관계, 배우자 관계 등에서 관계의 구성원들이 서로가 가진 사랑의 감정의 균형 상태를 확인하고 행동을 수정해 나가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관계에서 나의 감정의 강도나 형태와 상대가 가진 감정의 강도나 형태가 언제나 동일하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통해 자신이 인지하는 삼각형과 상대방이 인지하는 삼각형의 형태를 비교하고 어떤 유형의 불일치가 일어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사랑의 종류와 가치.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 욕구와 종족 보존 욕구를 지닙니다. 자기 보존 욕구는 식욕이나 소유욕 등이며, 이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무래도 식욕입니다. 또 종족 보존 욕구는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한 욕구와 자녀에 대한 사랑의 욕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보존 욕구와 종족 보존 욕구의 본능적 사랑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이 종족 보존 욕구의 보편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능적 욕구는 생식 기관과 호르몬 작용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식 기관을 제거당하면 이성에게 흥미나 관심을 표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욕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의 고환이나 여성의 난소를 제거해도 얼마든지 이성에게 성욕도 느끼고 애정 표현도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완전히 본능에 예속되어 성선이나 호르몬에 불가항력적이고 그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반해, 인간은 본능적 압력을 받지만 반드시 그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경우는 인류가 원래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뇌에 새롭게 신피질계가 발달함으로써 이곳에서도 사랑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대뇌신피질계에서는 지성적인 행동을 관장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의지와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사람의 의지와 본능 사이의 어딘가에 그 사람의 윤리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사랑은 다를 수'

학계에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사랑의 분류법(Hendrick, C. & Hendrick, S., LASLoveAttitude Scale)이 대표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랑(eros)은 첫눈에 반하거나 연인의 신체적인 매력에 끌리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유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연인들은 자기를 빨리 개방하고 쉽게 감정적으로 동화하고 신체 접촉도 빠릅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생각하고(객관적인 사실은 중요치 않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유희적인 사랑(ludus)은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그 가운데서 사랑의 관계를 즐기는 유형입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갖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애인으로부터 얻어 내는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랑의 감정이 깊지 않고 쉽게 애인을 바꿉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평범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른이 되어서 종종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동료적인 사랑(storge)은 처음에는 형제자매나 놀이 친구 같은 관계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스토르게이(storgay)에서 비롯된 사랑의 유형입니다.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기 개방으로부터 생기는 편안한 친밀감을 서로에게 느끼는 관계로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오랜 우정에서 생긴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동료애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보통 대가족이나 서로 격려해 주는 분위기의 가족 문화 속에서 자랐거나, 안정적이고 우호적인 공동체 안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논리적인 사랑(pragma)은 그리스어 ‘프래그머틱(pragmatic)’에 어원을 둔 사랑입니다. 논리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쇼핑 목록을 작성하듯 상대에게 원하는 실용적인 자질의 목록을 다소 의식적으로 작성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잘 어울리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어울리는 상대를 구하는 데 논리적이고 사려 깊으며 흥분보다는 만족을 추구합니다. 
애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도 애인에게서 그만큼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논리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신이 노력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유적인 사랑(mania)을 하는 사람들은 질투와 소유욕이 강하고 애인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고 애인에게 의존적입니다. 사랑의 기쁨에서 슬픔으로 변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항상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자신과 연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회상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외로워하며 자신의 일에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극도의 질투심을 보이고 상대방에게 더 많은 애정을 요구하는 유형의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agape)은 무조건적으로 배려하고 제공하는 타인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를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관계' 사랑의 방식에 ..영향

이렇듯 다양한 형태의 사랑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 윤리나 가치관에 맞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이성과 나누는 사랑 유형이 어릴 때 양육자와의 애착 유형과 관계가 깊다는 연구가 나와 흥미롭습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어릴 때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회피 유형이었던 사람은 유희적인 사랑의 형태가 높은 분포를 보였고, 열정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의 유형이 낮은 분포를 보였습니다. 
어릴 때 양육자와 회피 애착 유형을 형성하면, 자라면서 대인관계에서 타인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어려우며, 타인과 가까워지면 불편함을 느끼는 성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성 관계에서는 유희적인 사랑을 하기가 쉽고, 열정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와 안정 애착 유형을 가졌던 사람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열정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을 하는 비율이 높았고, 유희적인 사랑을 하는 비율은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어릴 때 양육자와 안정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면, 타인과 비교적 쉽게 사귈 수 있고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타인이 자신에게 의지할 때에 편안함을 느끼게 됨을 의미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인성으로 자라게 되어, 이성과 사귈 때 열정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 쉽고, 유희적 사랑은 좀처럼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영유아기 때 부모나 돌봐 주는 사람과 갖는 관계의 질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애인과의 사랑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성과의 사랑을 ‘성인기 낭만적 애착’이라고 부르며 영유아기의 애착과 비교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위에서처럼 사랑하는 형태에 대한 연구도 있지만, 최근에는 사랑이 일어나는 과정을 연구(KBSTV의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생로병사의 비밀, 사랑 1;2005. 3. 15, 사랑 2;3.22, 사랑 3;3.29 등> 참고)하여 과학적으로 사랑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사랑. 변하는 이유'

이 연구에서는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커플의 뇌 사진을 조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대뇌의 미상핵 부위(1장에서 본능을 관장하는 시상하부로 언급된 부위의 일부)가 활성화되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혔습니다. 미상핵이 활성화되면 인간은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하게 되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치 않고 애정 표현에 과감해집니다. 
흥분과 쾌감, 주의 집중을 일으키는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활발해집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면 도파민의 분비가 많아지는데 도파민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자주 미소 짓게 만듭니다. 애인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입니다. 이것을 ‘핑크 렌즈 효과’라고 합니다.

만난 지 100일 정도 되는 연애 초기의 핑크 렌즈 시기를 지나 만나기 시작한 지 300일쯤이 되는 연인들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사랑은 변함없어 보일지라도 뇌 스캔 결과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뇌의 활성화가 본능의 중추 미상핵에서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대뇌 신피질 부위로 옮겨 간 것입니다. 6개월 전의 열정은 그 빛을 잃고 사랑에 상당히 이성적 측면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열정이 식고 동료 같은 친숙함이 생기는 것 역시 필요한 일로 봅니다. 왜냐하면 열정적 사랑의 상태는 너무나 강력하여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생겨 몰두의 대상이 바뀌고 열정적 사랑이 이타적 사랑으로 바뀌는 것 역시 자연의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데 열정적 사랑을 느끼는 기간은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열정적 사랑의 유효 기간은 900일’이라고 하나 봅니다.

열정이 급격히 약해지는 시기는 그보다 빠릅니다. 사귄 지 약 1년쯤 되는 때이며, 이 시기가 연인 사이에 가장 위험한 고비가 됩니다. 이때 열정의 농도는 대략 50% 떨어지는데 그 열정의 빈자리를 동료적 사랑을 위시한 다른 사랑으로 채우지 못할 때 이 연인들은 사랑이 식었다며 이별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정만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열정이 있는 동안에 사랑을 동료애나 정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두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이성을 존중하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로 자라난 성인은 본능의 힘보다는 자유의지로 사랑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 간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문제에 집중하다보면 양자가 지닌 차이가 간과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감각적으로든 아니면 이성적으로든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그 차이를 극복하고 양자를 결합시키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은 차이가 있는 그리고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통일 감정이라서 대립이나 분열을 싫어한다. 
대립이 배제되는 일체감과 통일이라면 차이와 구별의 가치를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이것은 동등성의 참된 의미 또한 사라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차이를 '결핍'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는 '불완전성'이 부각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와 반대로 '차이'가 있음으로 해서 상대방과 구분되는 자신의 '장점'–상대방에게 결핍되어 있는데 자신에게는 충분하게 갖춰져 있는 측면인 장점 –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 안에는 양자가 서로 다르고 차이를 지닌다는 데서 오는 특수성이 담겨 있고, 특수성을 독자적으로 지니는 인간 각자의 개별성이 담겨 있다. 특수성과 개별성은 차이를 지니는 양자를 구별지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원동력이다.
결핍을 보완하는 맥락에서 본다면, 사랑은 인간들 간에 드러나는 열등성과 불완전성을 해소하여 완전성을 형성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분열과 대립은 경원시되며, 개인적 이해관계를 부각시켜서 구별을 첨예하게 만드는 것은 통일로부터 일탈하는 이기적인 것이다. 헤겔도 초기 저작에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든 대립을 배제하며, 차이가 있는 분열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니는 차이는, 서로가 동등한 가치와 동등한 존재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밝혀주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차이와 구별을 희석시키려 한다면, 즉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양자의 동등성과 동등한 인정 가능성도 지워버리는 부정적 결과를 낳게 된다. 
때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자유와 독자성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경우도 있다. 정신적 교감과 동료애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때 타인은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초월적 절대자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광범위하다. 타인과 절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열정은 '희생적 사랑' '헌신적 사랑(sacrificial love)'이라는 '아가페(Agape)'로 개념화된다.

아가페는 그리스도교 이전에는 명사로 구체화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동사 형태로 사용되던 것을 성경에서 명사 형태로 분명하게 정착시켜 사용했기 때문에, '아가페'는 기독교의 정신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그들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예수'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메시아'로서 기독교 정신을 전파했다. 이때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의 핵심은 '사랑'이다.

예수가 설파하는 기독교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신의 말씀을 따르는 '신의 왕국의 시민'이 되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저 인간을 사랑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차원까지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이전의 사랑'을 '종교적 사랑'과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다. 아가페는 '종교적 헌신과 희생'이 담겨 있는 '신의 사랑'이며 신약의 핵심 단어이다.

신이 인간에게 행하는 헌신적 사랑이 아가페라면 도대체 어디에 '신의 헌신과 신의 희생 행위'가 놓여 있는가? 그것은, 신이 자신과 삼위일체적 지위를 지니는 '예수'를 타락한 인간에게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데에 놓여 있다. 예수의 희생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신의 희생'이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신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신의 '희생적 사랑' '헌신적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헌신'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헌신'도 '헌신적 사랑'의 의미로 확장된다. 이때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에게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그가 당신이라도 되는 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사랑'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좀더 강도 있게 말하면 이웃을 '자신의 형제라도 되는 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희생적 사랑'이며, 일상생활에서 마치 '형제애'와 같은 사랑의 감정을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부모 형제를 위해서 희생정신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형제애는 헌신적 사랑과 관련하여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헌신'과 '희생'에 대한 요구 때문에, 형제애로 귀착하는 사랑은 '이웃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즉, 아가페는 이웃에 대한 봉사를 견지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가 강조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측면이 '이웃의 빈곤함'에 대한 배려이다. 부자가 예수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기독교의 도덕적 명령을 잘 실천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아가페의 의미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의 희생'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의미로까지 나아간다. 구원의 궁극적 결과는, 인간들이 신을 알고, 신의 희생을 알며, 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의 왕국의 시민'이 되기 위한 장치로서 '신에게 경배'하고 '신의 존재를 믿는 행위'가 요구된다. 달리 말하면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이웃을 마치 내 형제처럼 간주하면서 선행을 베풀고 '봉사'를 하는 데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 신앙'과 '타자에 대한 선행'은 일치한다. 이웃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이웃을 내 형제처럼 생각하며, 이방인조차도 내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이 희생적 사랑과 헌신적 사랑의 핵심이다.

앞에서 인간관계가 '친구관계'와 같을 경우에 양자의 동등성을, 동등한 권리와 인격성을, 동등한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할수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필리아의 내용을 상기하면 형제애를 강조하는 예수의 말씀은 '정신적 사랑'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러므로 정신적 사랑과 관련하여 '희생적 사랑'이라는 아가페의 위치를 재조명해볼 수 있다. 
위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랑의 형태가 '친구관계에서 나타나는 우정'으로서 '필리아'이고, 종교에서 기원하는 '아가페'가 '헌신적 사랑과 희생적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이웃을 '친구'처럼 그리고 '형제'처럼 생각할 것을 요구하므로, 헌신적 사랑은 필리아로서 정신적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희생적 사랑' '헌신적 사랑'은 필리아라는 정신적 사랑에 기초하며, '정신적 사랑으로서 인격적 사랑'을 근저로 삼고 있다.

인격적 사랑은 나와 상대방 간의 동등성과 차이를 감지하면서 상대방이 나와 동등하게 인격체이고 자유로운 선택권과 권리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가페에서 '신의 사랑' '절대자의 사랑'은 '인간들끼리의 사랑'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신의 사랑이 '인간들끼리의 사랑'과 동등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인간들끼리의 동등성'은 '신과 인간의 동등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연관하여 헤겔은 청년기에 종교에 대해 탐구하면서 헌신적 사랑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초월적 절대자에게 헌신하는 인간의 태도는 '동등성'을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월적인 것을 상정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외적 권위를 상정하고 외적 권위에 기초하는 규범들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의 자발성과 내면적 자유를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에는 '권력 집중'을 낳는다. 권력 집중은 당연히 문제를 야기한다. 인간 모두가 동일한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목적과 그에 상응하는 존재를 거부할 수 없고, 그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권력이 한 점으로 집중될수록 여타의 사람이 지닌 권리와 지배력은 점점 더 상실되므로, 각각의 개별자는 집중되는 신의 권력 앞에서 자신의 가치와 권리와 자립성을 잃게 되며 사랑의 관계항으로 정립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사라지게 된다. 
권력이 집중되는 신은 우리와 교감하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낯선 권력을 통해 우리를 떨게 하거나 감사와 은총을 구걸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양자의 '동등성'은 자연스럽게 '망각'된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나타난다.
헌신적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관계없이 미덕으로 간주되며 가장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불우한 사람을 위해 출세를 포기하고 사회 봉사자가 되거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적진으로부터 날아온 폭탄을 자기 몸으로 덮치거나, 자식을 위해 헌신적 뒷바라지를 하거나, 남편을 위해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고 칭송된다. 
아무리 존경과 미덕의 대상이라고 해도,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는 일이 한쪽에서만 이루어지면, 즉 한쪽만이 지속적으로 희생하다보면, 양자의 '동등한 위상'이 '망각'될 위험이 있다.
헌신적 사랑은, 비록 그 태생은 종교적 헌신과 절대자에 대한 사랑이지만, 예수가 강조하는 '사랑'은 '이웃 간의 사랑'이고 '이웃을 위한 헌신과 봉사'이므로, 헌신적 사랑은 '인간들끼리의 사랑'으로서 친구애와 형제애로 실현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권력 집중을 낳게 된다.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꿈과 희망과 직업적 성공과 생명은 자연히 뒷전이 되고,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여지는 좁아진다. 우리 주변에는 헌신적 사랑에 주어지는 가치 때문에 헌신적 사랑을 결단하거나 희생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를 찾아보면 주로 여성에게서 나타나거나, 여성적 특징이라고 지칭된다.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과 배려, 즉 이타적 사랑은 어머니나 아내의 사랑으로 상징된다.

헌신적 사랑은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한쪽의 '일방적 희생'으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으로, 그리고 만약 헌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족과 사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로 변질될 위험이 농후하다. 
'헌신적 사랑은 미덕'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능력과 동등성을 사장시키고 여성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헌신적 사랑은 여성뿐만 아니라 헌신적 사랑이 이루어지는 어떤 곳에서든 헌신하는 사람의 인격권, 선택권, 동등성을 망각시킬 위험이 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헌신과 포기를 감사하게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면 상대방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나아가 어느 시점에서 상대방이 나를 위해 헌신하지도 그의 권리를 포기하지도 않으면, 마치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망각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의 참된 의미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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