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일 수요일

프랑스 , France. Republic. 2

1880년에는 한국어-외국어 사전의 효시인 ≪한불사전≫이 빛을 보았다. 원고는 프랑스선교사들이 집필한 것이며, 당시 우리 나라에 프랑스어 활자가 없어서 그러하였는지는 모르나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이듬해에는 역시 선교단에 의하여 ≪한국어문법≫이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외무성의 영사이며 중국어 통역관인 앵보 위아르(Imbault Huart,C.)는 ≪프랑스인을 위한 한국어 구어() 독본≫(1889)을 저술하였다.
1894년에는 샤이에 롱 베(Chaillé Long Bey) 대령의 ≪조선≫(1894)이 출판되었다. 그는 1890년대 초에 주한미국대사관의 서기관·총영사·공사대리를 지냈다. 그의 책에는 한국의 민속화가가 그린 소박한 민속판화 20점, 풍경 펜화 5점 및 제주도 지도 1점이 들어 있다. 그는 하멜 이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1894∼1895년에는 청일전쟁이, 1904∼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각각 발발하였다. 이 두 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두고 열강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양의 기자들이 종군하여 한국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시사 ≪화보≫와 여행관계의 ≪세계일주≫는 여러 편의 기사와 함께 한국의 인물 및 풍경 펜화 또는 사진을 실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책으로는 부르다레(Bourdaret,E.)의 ≪한국에서≫(1904)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중판에 재판을 거듭하여 인쇄되었다. A5판 357쪽에 25장의 사진이 들어 있고, 한국의 정치·사회 등 전반적인 분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민간신앙과 무속·미신에 관하여 상세히 언급하였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1903년과 1904년에 한국의 고인돌, 강화도의 선사유적, 한국인의 인종학적 고찰 등에 관하여 강연을 한 다음, 리옹의 인류학회지에 글로 발표하였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프랑스에 발을 디딘 사람은 홍종우이다. 그는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하여 1893년 7월까지 체류하였는데, 파리의 동양관계 기메박물관(Musée Guimet)에서 일하면서 지냈다.
그는 인종학자 및 지리학자들뿐만 아니라 동양에 관심이 있는 프랑스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대단한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많은 프랑스의 지식인·예술가·학자 등과 교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소설가 로니(Rosny,J.H.)는 ≪춘향전≫(1892)을 번안하여 당튀(Dentu)출판사의 문학문고 중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왜소한 책(7.5×13.5㎝, 140쪽)으로 조그만 글씨에 섬세하고 예쁜 펜화를 곁들였고, 역자는 작품에 관하여 간단한 서문도 썼다. 물론, 인물과 풍경은 서양 것에 가깝다.
홍종우가 프랑스를 떠난 뒤인 1895년에는 홍종우 번안의 판소리계 고전소설 <고목생화 >(1895)가 기메박물관의 도움으로 에르네스트 르루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기메박물관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떠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문학의 표본으로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책으로 낸다고 밝혔다. 이 두 번역작품은 우리 나라 문학이 처음으로 서구어로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1897년에는 홍종우와 슈발리에(Chevalier,H.)가 한국어로부터 번역한 <각 사람을 보호하는 별을 길조()로 만들며 한 해의 운수를 알 수 있는 안내서>라는 제목의 글을 기메박물관의 연보에 게재하였다. 우리 나라 점성술을 프랑스에 소개한 것이다. 홍종우는 바라(Varat,C.)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해 온 민속자료를 분류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또 1880년대 기메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고 온 극작가 겸 화가인 레가메(Régamey,F.)와도 교분이 있었는데, 레가메는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홍종우에 관한 글을 동양학 학술지 ≪퉁바오≫(1895.5.)에 썼다.
회화 분야에서는 프랑스 사람으로 여기지는 드 메지애르(De Méziéres)가 1890년대 말 또는 1904년 이전에 고종의 공식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2) 한국유물의 수집
프랑스인에 의한 본격적인 우리나라의 민예품과 도서의 수집은 바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888년 가을에 한국에 도착하여 다음해 초까지 머물렀다. 프랑스 문교성의 지원으로 한국을 탐험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관의 도움을 얻어 자료수집과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 작업이 끝난 다음 우리나라 조정으로부터 내지통행증을 발급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한반도 남반부를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종단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여행담을 ≪세계일주≫(1892)에 <한국여행>이라는 66쪽의 글로 실었다. 그가 여행중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풍경과 인물 펜화 103점, 서민생활을 그린 민속판화 39점, 한양지도 1점, 조선전도 1점이 글의 중간중간에 들어 있다.
글의 서두에서 그는 그 글이 여행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책으로 집필하여 낼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다음해(1893)에 죽고 말았다.
그의 수집품은 파리의 트로카데로인류박물관에 전시된 뒤 민예품의 일부와 서적 50권이 기메박물관에 들어갔고, 상당 부분은 분산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가 보르도대학교 의과대학 및 파리의 인류박물관에 있다.
프랑스 사람으로서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의 고서·골동·서화를 수집한 사람은 플랑시이다. 그는 서울주재 초대 프랑스공사로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간, 그 뒤 다시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0년간, 모두 13년간 한국에 근무하였다. 국립동양어학교 출신인 그는 이 학교 도서관에 고서 600권을 기증하였다.
특기할 것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서울의 서점에 나와 있던 고전소설이 빠짐 없이 들어 있어 흥미 있는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뒤 1911년 3월 27∼30일 나흘 동안 플랑시의 한국·중국·일본 관계 소장품 883점이 드루오경매장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이 컬렉션의 주를 이루는 것은 700여 점에 달하는 한국 것이었다.
그 중 책으로는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 ≫(약칭 )을 비롯하여 ≪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경국대전≫·≪대전속록≫·≪속대전≫·≪소학집성≫ 등 77권이었고, 그림 중에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초상화, 공조판서 정향복()의 초상화, 그리고 향로·식기 등의 동제품과 금속제품, 목제품, 칠기, 자개, 대리석 및 보석제품, 부채, 병풍, 비단, 가구, 2,500개의 동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77권의 고서 가운데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이 58권을 구입하였다. 고서 중에서 가장 귀중한 ≪직지심경≫과 ≪삼강행실도≫는 당시의 유명한 동양 골동품수집가 베베르(Vever)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43년 그가 죽은 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직지심경≫의 내용은 송나라 때 나온 <전등록 >에서 역대 불조()들의 법화()를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소실되어 없어진 청주 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어낸 상하 두 권의 책 중 현존하는 유일한 하권이다.
이 책은 1234년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었다는 ≪고금상정예문 ≫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서양 최초로 구텐베르크(Gutenberg,J.)가 1450년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를 한 데에 비하더라도 8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유일한 물적 증거가 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 사용한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인 것이 틀림 없으나, 인쇄기술 자체는 아직도 목판인쇄나 다를 바 없는 것이므로,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서양학자들은 보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세종이 설순() 등에게 명하여 목판인쇄한 책이다. 효행의 본이 될 만한 중국과 한국의 인물 35명의 이야기를 그림을 붙여 한문제목을 달고 한글로 설명한 것인데, 이 책의 그림은 프랑스의 미술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친 바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귀중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 있다. 학자들은 두루마리로 된 이 자료를 9세기경 당나라 사람의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 앞뒤가 잘려나가고 제명도 저자명도 없으며, 한 줄에 30자씩 230줄, 총 6,000여 자의 짤막한 글이다.
당나라 승려 혜림()이 지은 <일체경음의 > 제100권 속에 들어 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간파, 곧 이것이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혜초의 여행기의 축약본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래 3권으로 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16세에 중국에 건너가 수학한 다음 뱃길로 인도에 도착하여 10년에 걸쳐 인도의 오국()과 인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한 다음 육로로 중국의 당나라 장안()에 돌아와서 그 행적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혜초는 이 글을 727년에 지었는데, 이 책의 제2·3권에 해당하는 이 두루마리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elliot,P.)가 1908년 중국 간쑤성() 둔황() 명사산() 천불동()의 석실()에서 다른 중국자료와 같이 발견하여 파리로 가져와, 현재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중국과 인도와의 여로() 실크로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사료적 가치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귀중한 문헌을 포함하여 프랑스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450여 권(고지도 35매를 빼고), 국립동양어학교에 630권, 기메박물관에 50권 등 전부 1,100여 권의 한국고서가 있다.
고서 이외에도 플랑시는 몇 점의 신라토기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도자기를 파리 근교의 세라믹박물관에, 책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민속유물은 인류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동양박물관인 기메박물관과 파리시립 체르누스키박물관에는 김홍도()의 산수도·신라토기·고려자·그림·병풍·가구 등 한국유물들이 있으나 빈약한 편이다.
3) 광복 이전의 한국연구
1864년 파리의 동양어학교(대학)에서 일본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본어 강사인 로니(Rosny,L.d.)는 그 해에 <한국어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동양학보≫에 썼는데, 이것이 프랑스 학자가 발표한 한국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다.
로니는 1868년 학교에 일본어과가 설치되면서 교수가 되어 1905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868년에 <한국의 지리에 대하여>를 역시 ≪동양학잡지≫에 썼고, 그 뒤에도 우리나라에 관하여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학문적으로 깊이 한국을 연구한 사람은 쿠랑이다. 그는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뒤, 1888년에서 1890년까지는 주북경 프랑스공사관에, 1890∼1892년 사이에는 주서울 프랑스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서울에 체류하는 2년 동안 규장각과 시내의 서점을 두루 찾아다니며, 한국의 도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파리에 돌아와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중국·일본·한국 책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서울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전3권에 달하는 ≪조선서지≫를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에, 증보판인 제4권은 1901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1899년까지 한국에서 나온 서적을 총망라한 것이다. 인용된 책의 수는 3,821권이며, 고전소설도 포함되어 있다.
도서의 내용 가운데 중요하거나 흥미 있는 부분, 특히 그림이나 도형은 그대로 복사하여 전재()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지학의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100여 쪽에 달하는 서문에서는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한국에 관하여 외국인이 쓴 글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프랑스국립학술연구원의 부셰(Bouchez,D.)는 평가한다.
쿠랑은 ≪조선서지≫ 이외에도 한국에 관한 글과 논문을 여러 편 남겼다. 특히, 한국의 음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서구에 소개하였으며, 1898년에는 광개토왕비에 대한 30쪽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한국이 참가하여 한국관에 한국의 전통물품을 전시하였다.
이때 쿠랑은 한국관을 소개하는 <1900년 서울의 추억>이라는 글을 써서 팜플렛을 만들었다. 이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한국의 공식적 홍보자료인 만큼 고종·왕세자(뒤의 순종)·플랑시, 한국관 관장 민영찬, 만국박람회 한국위원회위원, 조선 정부의 만국박람회 대표 알레백(Alévêque,C.), 고종의 막내아들, 내각총리 조병식(), 외무대신의 인물사진 외에도 덕수궁·서울시가·왕좌 및 풍경사진 30점이 실려 있다.
한국관에는 고서를 비롯하여 서화·병풍·가구·동제품·자개제품·칠기 등 많은 전통물품이 전시되었는데, 그 물건들은 팔려 흩어졌는지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쿠랑은 또 1904년에 관광안내서 ≪한국≫을 저술하였다. 이는 권위 있는 아새트출판사의 마드롤 관광가이드 컬렉션 중의 하나인 <중국 북부 및 한국>편에 들어 있으며, 한국 부분은 45쪽에 달한다.
이는 서구에서 나온 최초의 전문적 관광안내서인 것으로 보이며,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10여 종의 프랑스어 한국관광안내서가 나올 때까지 이 분야의 유일한 프랑스어 책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한국과 주변정세·외교관계 등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동양어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기다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0년에 리옹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그는 말년을 쓸쓸하게 지내다가 1935년에 죽었다. 리옹3대학교 본관 계단의 벽에는 쿠랑의 대리석 흉상이 있다.
일제강점하에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어 김탕·여운홍()·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하여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반면, 1921년까지 ≪회람≫과 ≪자유대한≫이라는 정기간행물 발간을 통한 홍보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자유대한≫ 10책은 총 350쪽의 귀중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국권상실 이후부터 1921년까지의 한국사정, 외교사, 일본 및 한반도 주변정세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프랑스어서적 목록, 한국의 문화·언어 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다.
당시 뜻있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재프랑스 한인친우회(1921)가 결성되었다. 친우회의 조직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소르본대학 교수 샬래(Challaye,F.)는 1919년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탄압상과 인권유린을 폭로, 규탄하였다. 그는 1915년 ≪일본≫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끝의 17쪽은 한국에 관한 것이다.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강화조약 이후 황기환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는 중단되었고, 한인친우회의 활동도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는 주프랑스 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서영해를 임명하였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서영해는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역사소설(1929) 한 권과 한국민담집 한 권을 펴냈다.
역사소설은 자료로서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지만, 민담집 ≪거울, 불행의 씨 외 한국민담≫(1934)은 우리 고유의 대표적인 민담을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파리교외 센-생드니 도립 알베르 칸박물관의 영화컬렉션 가운데 2편의 한국관계 기록영화가 있다. 하나는 1926년 4월 26일 승하한 순종의 장례식을 찍은 것(Gaumont영화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황실 귀족으로 유럽을 여행한 이은()이 남프랑스의 칸(Khan,A.) 저택에서 칸을 만나는 장면(13초)을 찍은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글을 쓴 사람은 로티(Loti,P.)뿐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슬란드의 어부≫를 썼고,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 ≪국화부인 ≫은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250여 회나 재판되었다. 그는 프랑스한림원 회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해군장교 시절, 승선하고 있던 함정을 따라 1901년 6월 17일 중국으로부터 제물포에 도착, 26일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약 10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고종을 알현하는 포티에(Pottier) 제독을 수행하여 배석하였다.
이때 쓴 그의 기행 수필집 <매화부인()의 제3의 젊음>(초판 1905) 가운데 ‘서울에서’라는 제목의 20쪽의 글은, 거리의 풍경과 왕궁묘사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잔영을 잘 표현하였다.
피에르 라피트본(1923)에는 덕수궁의 옥좌를 구경하는 로티와 궁중무희를 그린 그림 2장이 들어 있고, 칼말-레비출판사본(1936)에는 담뱃대를 문 한 노인과 고종 및 황태자의 초상 천연색 삽화 2점이 곁들여 있다.
4) 광복 후의 본격적인 한국학
프랑스의 교육·연구 기관에서의 한국학은 멀리는 로니(Rosny,L.d.)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국어·문화의 교육과 한국연구는 이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쿠랑에서 시작되어 제도적인 토대를 이룩한 아그노엘(Haguenauer,C.), 그 위에 골격을 세운 이옥()에서 현재의 교수진으로 연결된다.
프랑스에서 제도적인 바탕 위에 한국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이다. 1956년은 연세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있던 이옥이 아그노엘의 초빙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대학(파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기 시작한 해이다. 소르본대학에는 그 전년에 일본학과가 설립되어 아그노엘 교수가 과장으로 있었다.
아그노엘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다음, 1924년에 동경()에 건립된 일불회관()의 최초의 장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1932년까지 일본의 고대사와 언어를 연구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공부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 것도 가르쳤고, 1928∼1956년 사이에 한국어와 한국고대사에 관하여 14편의 논문을 썼다.
일본학과는 1959년에 일본·한국학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어는 그 해부터 동양어학사학위 필수 3과목 중의 하나였고, 소르본대학에서 가르치는 17번째 외국어가 되었다. 1956년의 교수진은 아그노엘 외에 일본어 전임강사 모리()와 한국어 전임강사 이옥 등 셋으로 구성되었고, 1964년에 일본어 전임강사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1959년에는 동양어대학(프랑스혁명의 와중인 1795년에 설립)에도 42번째로 한국어강의가 개설되었다. 당시에는 같은 교수진이 양 대학에서 가르쳤다. 학생들은 3년과정을 마쳐야 동양어대학을 졸업하였으며, 3학년 때부터 소르본대학에도 등록하여 파리대학교의 동양학·한국어 학위과정을 이수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대학은 국립이며, 대학의 학위는 국가학위이다. 1968년 대대적인 대학학제개편이 있었다. 이와 때를 맞춰 1968년 5월에는 문화기술협력협정을 맺어 한·프랑스 문화관계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이때 파리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은 각기 독립하여 점차 종합대학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많은 수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르본대학의 일본·한국학과는 일본학과와 한국학과로 분리, 독립되어, 중국학과 및 베트남학과와 함께 1970년에 파리7대학교에, 동양어대학은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다.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 한국학과는 1970년대 초에는 이옥 과장을 중심으로 강사 2, 3명이었으나, 차츰 인원이 늘어나 1980년 말 교수진은 정교수 이옥(한국고대사), 부교수 프로스트(Prost,M., 언어학), 부교수 최승언(, 언어학) 외에 전임강사 2명, 강사 5명이었다. 그리고 교과과정은 1970년부터 교양과정(1·2학년), 학사과정(3학년), 석사과정(4학년), 박사과정까지이다.
전과정의 학생 수는 해마다 다소의 변동이 있으나 100여 명 내외이다. 1980년대 말까지 20여 명이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과는 상당히 규모가 크고 독립된 도서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장서의 수는 2만여권에 달한다.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던 동양어대학은 1985년에 독립하였다. 이 대학에 있던 한국어과정은 학제개편시(1969)에 한국·일본학부 내의 한국학과로 되었다. 이때 파브르(Fabre,A., 언어학) 교수가 학과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파브르는 프랑스 사람으로는 최초로 1962년에 소르본대학에서 한국어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9년까지 한국·일본학부장도 겸하였다.
교수진은 1970년대 초부터 1988년까지 파브르 외에 전임강사 2명(·, 언어학)이며, 이듬해 전임강사 1명이 추가되었다. 교과과정은 교양과정에서 박사과정까지이고, 학생 총수는 역시 100여 명이며, 1988년까지 1명이 한국관계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지방대학으로는 최초로 1988년에 리옹3대학교의 교양과정에 한국어 전공(1·2학년)이 설치되었다. 이 대학에는 그 밖에 1983년부터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학생들과 일반인으로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같이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을 주 2시간, 3년 이수한 일반인에게는 4대학학위인 한국어·문화 이수증이 수여된다.
1988년까지 교수진은 책임자인 부교수 이진명(, 역사학)과 프랑스인 강사 1명, 한국인 강사 2명이고, 학생 수는 20여명이었다. 그밖에 한국어강좌가 설치되어 있는 학교는 지방의 보르도3대학교(1986)와 르 아브르대학교(1988)이다.
순수학문연구기관인 국립학술연구원에서 한국을 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원은 고전문학 전문가로서 쿠랑을 연구하였고, 1988∼1990년 2년간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장을 지낸 바 있는 부셰, 한국무속전문가인 기예모즈(Guillemoz,A.), 근대사 전공의 오랑주(Orange,M.)가 있고, 다른 연구원들도 부분적으로 한국을 연구한다.
이 세 한국전문가들은 파리7대학교와 국립사회과학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국립사회과학원에서는 인류학 전공 버트란드 정(Bertrand Chung) 후임에 1999년 현재 알렉산드 길렘즈(Alexander G.)가 임용, 재직하고 있다.
1959년에는 파리대학교 내에 한국연구소가 설립되어 아그노엘이 소장이 되었다. 설립목적은 한국의 고대 및 현대 언어·문학·문화에 관한 연구, 프랑스에서의 한국에 관한 연구논문의 발간, 한국학자들의 연구업적의 프랑스소개 등이다.
처음에는 이름뿐이었지 인원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변변한 연구실도 없었다. 그 뒤 1967년에 파리대학교 소속 동양관계연구소들이 윌슨가 22번지 ‘동양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연구소도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게 되었다.
1968년의 대학학제 개편에 따라, 이듬해부터 동양연구소들은 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에 예속하게 되었다. 1970년 아그노엘이 은퇴하고 이옥이 소장에 임명되어 1980년대 말까지 맡아왔다. 한국연구소는 다른 동양연구소들과 함께 1989년에 카르디날 드 르모안느가() 32번지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이사한 한국연구소는 전보다 넓은 면적에 사무실과 5,000권의 한국관계 책을 보유한 도서실도 갖추었다. 이옥 소장 외에 연구소의 일반 업무는 국립학술연구소 연구원 오랑주가 맡았다.
이 연구소는 논문집인 ≪카이에 Cahiers≫와 단행본 규모의 연구업적을 싣는 ≪메모아르 Mémoires≫ 두 시리즈에 전부 12권의 한국학 관계 서적을 출판하였고, 한국전문가의 프랑스 초청, 한국문학에 대한 학술대회도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한국관계 현대서적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5,000제명(), 동양어대학 도서관에 1,700제명(4,000권)이 있다. 이 두 도서관은 한국서적 담당 사서를 두고 있으며, 루브르박물관의 동양관인 기메박물관에는 한국유물전문가가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실을 개관할 예정이다. 기메박물관은 재단지원으로 오는 2001년 10월 한국실 “Arts de Coree”를 개장할 예정이다. 프랑스의 한국학 학자들은 유럽한국학회(AKSE)에서도 중추적 구실을 하고 있다.
이 학회는 프랑스의 이옥, 네덜란드의 포스(Vos), 영국의 스킬렌드(Skillend)가 창립위원이 되어 1976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에 제1회 유럽한국학대회가 개최된 이래 1991년 파리대회가 15회째가 되었다. 프랑스학자로 이옥·부셰가 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현회장 역시 프랑스의 파브르이다.
이 대회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가며 부활절 방학 때 열리는데, 서부유럽은 물론 소련을 포함한 동부유럽 학자들 및 다수의 한국학자와 3년 전부터는 북한의 학자들도 참가하여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 토론하고, 학자 상호간의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성황을 이루고 있다.
1969년에는 권위 있는 ≪크새주 Que sais je?≫ 문고에서 이옥의 ≪한국사≫가 나온 것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앞의 한국연구소 간행 서적을 포함하여 한국에 관한 1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는 한국의 언어·역사·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학작품의 번역, 관광가이드에 이르기까지 전체 분야에 걸쳐 있으며, 저자들은 학자·전직 외교관·언론인·문인 등이다.
5) 문화활동
1980년에 설치된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는 개원 당시부터 무료 한국어강좌(수강생은 일반인·학생 등 40여 명)를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강연회, 미술전시회, 영화상영, 음악회, 필름·슬라이드·도서의 열람과 대출, 지방순회전시 등 문화활동도 하고 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광복 후부터 김환기()·김흥수()·남관() 등 다수의 화가들이 수학하였다. 오늘날도 많은 신진화가들이 수학하며, 개인전도 열고 국제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 중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가로 이응로()를 들 수 있겠고, 미국에서 활약하는 백남준()이 퐁피두문화센터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음악인으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강동석() 등이 파리와 유럽무대에서 활약중이며,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적인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세계 최대·최신 규모의 바스티유오페라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989년 5월 정명훈()이 임명되었으며, 1991년 백건우가 황금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민주화와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프랑스에서의 한국어교육·한국연구·한국문화전파 활동은 앞으로 더욱 활발하고, 깊고, 알차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파리의 한인을 위한 대변지로 한인들이 운영하는 한위클리(Han-Weekly)지가 2000년 4월 20일 현재 156호를 맞고 있다. 1993년에 창간된 교포신문으로 오니바(Oniva)지가 1999년 현재까지 계속 발간되고 있다.
프랑스의 기후는 유럽 기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기후는 보통 해양성·대륙성·지중해성으로 나누어지는데, 프랑스에는 이 세 가지 기후가 모두 나타난다. 이는 산지의 위치·높이와 더불어 기후에 지역차가 나타나는 요인이 된다. 겨울에는 쥐라·알프스·마시프상트랄 등의 산지가 고기압 지역이 되는데, 때에 따라서는 아조르즈 고기압, 아시아 대륙 고기압과 연속하여 기압의 산맥을 형성한다. 이때 기압 산맥의 양쪽, 즉 영국·지중해는 저기압이 되고 사이클론성()의 바람이 자주 분다.

비스케이만()에서 발생하는 사이클론은 이따금 카르카손 관문을 거쳐 지중해까지 도달하는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영국해협 쪽으로 향한다. 이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겨울에도 비가 오는 경우가 많으며, 미스트랄이라고 불리는 차가운 북풍이 부는 것도 이 사이클론 때문에 발생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고기압은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기간 동안 알프스에서는 비가 내린다. 이와 함께 사이클론의 경로도 북쪽으로 옮아간다. 따라서 프랑스의 중부나 동부에 내리는 여름비는 주로 국지적 대류() 현상에 의한 것이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지중해안에도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봄은 아주 짧으며 5월에 들어서면 이미 건조한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여름에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의 남서부로 밀려가는 안티아조르즈사이클론의 영향으로 서해안에 약간의 비가 올 뿐 일조량이 가장 커진다. 그러나 비스케이만의 냉수대() 때문에 기온은 그리 많이 올라가지 않는다. 한편 피레네의 서부에서는 가을에 강수량이 가장 많지만 여름에 호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또한 아키텐분지·파리분지의 한복판은 건조하며 주변지역으로 나갈수록 강수량이 많아진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2,000mm인데 강수량이 많은 곳은 피레네 서부, 마시프상트랄·보주·알프스 산맥 등의 높은 지대이다. 기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특히 리비에라 해안의 겨울 기온이 높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은 떨어진다. 이밖의 산지에서도 기온은 낮아진다. 연평균기온을 비교하자면 몽블랑산 정상이 -6.5℃로, 이는 샤모니몽블랑보다 23.6℃나 낮은 기온이다. 또한 클레르몽페랑(388m)이 10℃인 데 비해 퓌드돔산(1,468m)은 3℃이다.




1. 에펠 탑

에펠 탑은 파리는 물론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인 1889년에 세운 높이 320.75m의 탑으로, 구스타프 에펠이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운 파리의 상징이다. 건립 당시에는 보기 흉한 철조물이라고 반대한 이가 많았다.
특히 에펠 탑과 소설가 모파상에 얽힌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알려 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에펠 탑 건립을 반대하던 모파상은 에펠 탑이 건립되자 에펠 탑이 보기 싫어 파리 외곽으로 이사했고, 부득이 파리에 올 경우에는 꼭 에펠 탑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이유는 파리 어디서나 보이는 에펠 탑이 유일하게 안 보이는 곳이 에펠 탑 내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개선문

파리에는 에투알 개선문과 카루젤 개선문이 있다. 흔히 사람들이 개선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에투알 개선문인데 둘 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승전을 기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첫 번째 것은 1806년의 승전을, 두 번째 것은 1805년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각각 1836년, 1808년에 완성되었다.

3. 몽마르트 언덕

몽마르트는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 두었던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언덕 정상에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으로 인해 종교적으로도 의의 있는 곳이며, 오래된 주거 지역이기도 하여 옛 파리의 골목길을 걷는 듯한 정취도 느낄 수 있다. 요즘도 몽마르트 언덕에는 많은 화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4. 콩코드 광장

콩코드 광장은 파리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역사적인 광장이다. 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다 1789년 대혁명 후 대혁명 광장으로 불렸다.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결혼했고,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혁명군 지도자였던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를 포함한 1,300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5. 프랑스의 테제베(TGV)

'Train a Grande Vitesse'의 줄인 말로 굉장히 빠른 기차란 뜻이다. 1981년 처음 개통되었고, 프랑스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시속 300km의 속력으로 운행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서 리옹, 주네브, 디종 등을 운행한다.
최고 속도 515 km 를 자랑하는 TGV 보통 시속 300 km 를 달린다.

루브르 박물관 . Louvre Museum.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외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품은 오늘날 30만 점가량에 이른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관심 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해 미리 동선을 짜두는 것이 좋다.

루브르 정문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돼 있다.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에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 당시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면 지하에 신설된 나폴레옹 홀로 이어진다. 안내 센터, 매표소, 서점, 물품 보관소, 뮤지엄 숍 등이 있다. 안내 센터에서 한국어 팸플릿을 받아 두도록 하자. 컬러판으로 주요 작품의 위치가 명기되어 있어 크게 도움이 된다. 전시관은 리슐리외(Richelieu)관, 드농(Denon)관, 쉴리(Sully)관으로 나뉜다.

각각의 전시관은 1층에서 3층까지로 이뤄져 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므로 가능한 한 같은 층에서 다른 전시관으로 옮겨 다니며 감상하는 편이 낫다. 반지하층(Entresol)에는 고대 오리엔트·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스페인·북유럽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프랑스 조각품은 리슐리외(Richelieu)관의 반지하층과 1층에 전시돼 있다. 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

1층(Rez-de-chaussée)에는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 미술품도 전시돼 있다.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층(1 er étage)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스파냐·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헬레니즘 조각의 걸작인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돼 있다.

3층(2 éme étage) 역시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놓았다.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무척 인기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플랑드르·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다. 렘브란트,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 Chateau de Versailles, ─殿.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거울의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다.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 때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내부장식을 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이어진다.

전쟁의 방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 모양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남쪽에 있는 평화의 방 역시 유럽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거울의 방에서 행해지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구·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부분은 오늘날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프랑스식 정원의 걸작인 정원에는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중심으로 꽃밭과 울타리, 분수 등이 있어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을 배치하였다.

대운하 북쪽 끝에는 이탈리아식 이궁()인 그랑트리아농(1687년)과 프티트리아농(18세기)이 루이왕조의 장려함과 섬세한 양식으로 세워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7세기에 건축된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프랑스 왕들이 거주했던 궁전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건축가·조각가·장식가·조경사들이 아름답게 장식한 이 궁전은 유럽에서 한 세기 넘게 가장 이상적인 왕궁의 모델로 알려졌다.



전 세계의 수많은 궁전 가운데 가장 화려한 곳은 어디일까요? 참으로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지요. 세계 여러 나라에는 우리들이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답고 멋진 건축물이 많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건축학을 공부한 전문가들은 대부분 프랑스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으로 꼽는답니다.
태양의 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화려한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어요.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과 끝없이 이어지는 정원을 보고 유럽의 여러 왕과 왕족들이 감탄하여 앞 다투어 비슷한 궁전을 건설할 정도였지요.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프랑스 절대 왕정을 상징하는 궁전, 베르사유 궁전.
절대 권력의 상징.
베르사유는 원래 궁전이 아니라 루이 13세의 전용 사냥터와 별장이 있던 곳이었어요. 루이 13세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은 루이 14세는 파리 루브르 궁전을 대신할 새로운 궁전을 짓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여러 장소를 놓고 고심한 끝에 사냥용 별장이 있던 베르사유에 궁전을 짓기로 했답니다.
루이 14세는 ‘태양의 왕’으로 불렸는데, 하늘에 있는 태양만큼 높은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왕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형태를 절대 왕정이라고 해요. 루이 14세는 이 절대 왕정을 대표하는 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답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베르사유 궁전을 루브르 궁전보다 더 크게 짓기로 마음먹었어요. 왕과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과 많은 관리들, 그 가족들까지 모두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귀족이나 관리들을 궁전 안에 머물게 하여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해요.
베르사유 궁전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남쪽과 북쪽에 누각이 세워져 있었어요. 이 누각은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설계로 세워졌는데,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돌이 촘촘히 박혀 있는 광장과 베르사유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솟아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답니다. 지금은 누각은 사라지고 누각이 있던 자리는 궁전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어요.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 건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왕실 예배당이에요. 왕실 예배당은 단순히 예배만 보았던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답니다.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화려한 코발트 벽화를 중심으로 모자이크 바닥과 황금으로 도금된 다양한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어요.
왕실 예배당은 중앙 홀만 보면 1층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는 2층으로 되어 있어요.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은 2층에서, 귀족이나 관리들은 1층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해요.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1층보다 2층이 훨씬 화려하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곳이 화려하지만 특히 2층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곳이에요. 베르사유 궁전의 2층에는 오페라 극장, 비너스의 방, 전쟁의 방, 거울의 방, 왕비의 침실 등이 있지요.
2층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오페라 극장은 루이 15세 때 완성되었어요. 건축가 가브리엘이 설계했는데 무엇보다 소리가 잘 전달되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고 해요. 그래서 오페라 극장 내부는 울림이 많은 대리석 대신 나무를 사용했어요.
또 오페라 극장은 바닥을 제외한 전체가 황금색을 띠고 있어요. 왕과 왕족의 관람석뿐만 아니라 귀족과 관리들의 관람석과 공연을 펼치는 무대까지도 황금색이어서, 마치 거대한 황금 상자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오페라 극장도 신분에 따라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좌석이 달랐다고 해요.

오페라 극장에서 몇 개의 방을 지나면 비너스의 방을 만날 수 있어요. 비너스의 방이라고 하면 흔히 비너스 조각상이나 그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에는 루이 14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요. 루이 14세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전쟁을 소재로 꾸며진 전쟁의 방 벽에도 말을 타고 달리는 루이 14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답니다.
비너스의 방과 전쟁의 방을 지나 북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거울의 방이 나와요.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큰 방으로, 궁전을 찾은 외국 왕이나 특사를 만날 때, 국가의 공식 행사를 할 때 사용했던 장소예요.
거울의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로 커다란 회랑 형태를 갖추고 있어요. 이 방이 거울의 방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어두운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하여 창문 건너편을 온통 거울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거울의 방에는 17개의 커다란 창문이 설치되어 있고 반대편에 거울이 있어,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밝은 빛이 방을 밝혀 준답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설치되어 있는 거울은 한 장의 높이가 약 10m에 이르고 폭도 5m나 돼요. 이런 거대한 거울을 17장이나 설치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답니다.
거울의 방은 역사의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프랑스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1871년 1월 18일 거울의 방에서 취임식을 가졌어요. 베르사유 궁전에서 치러진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을 보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답니다.
이 사건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프랑스 정부에서는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장소로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을 선택했다고 해요.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배상을 독일에 강요하였고, 이는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럽 정원의 표본으로 알려진 드넓은 정원이에요. 당시 최고의 정원 설계사였던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이 정원은 매우 넓어서 다 둘러보려면 족히 하루는 걸어야 한답니다.
베르사유 정원은 궁전 뒤편에 해당하는 서쪽에 조성되어 있어요.
독특한 형태를 자랑하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크고 작은 정원, 루이 14세와 15세가 뱃놀이를 즐겼다는 운하, 화려하고 웅장한 조각상이 물줄기를 뿜어내는 조각분수, 아담한 저택이 떠오르는 별궁 프티 트리아농과 그랑 트리아농, 프랑스 농촌을 고스란히 담아낸 농가들에 이르기까지 각 공간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고 있답니다.
처음 이곳에 궁전을 지을 당시 주변은 온통 모래 언덕과 늪지대였다고 해요. 루이 14세는 여러 지역에서 나무를 옮겨 심고 늪지대를 파 운하를 건설하도록 했어요. 늪지대를 파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결코 만만한 공사가 아니었지요.
어려운 대공사 끝에 완성된 운하에서 루이 14세와 15세는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곤돌라를 타고 주변을 감상하기도 하고, 곤돌라에서 내려 산책을 즐기기도 했답니다.
베르사유 정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분수랍니다. 요즘에는 분수를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몹시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해요. 운하에서 물을 끌어 와 수력학을 이용하여 만든 분수는 훗날 프랑스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해요.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과 멋진 정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평온하고 여유로운 장소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중 한 곳이 루이 14세, 15세, 16세가 애인과 어린 왕비와 시간을 보냈던 프티 트리아농과 그랑 트리아농이랍니다.
주변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은 일종의 별궁으로 프랑스 정원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정원과 달리 영국과 중국 정원 양식으로 꾸며져 있지요.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 외곽에는 프랑스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농가들이 들어서 있어요. 왕이 사는 궁전과 대조적인 소박한 분위기의 농가들이 들어서게 된 것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연적인 생활을 유별나게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자주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베르사유 궁전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어요. 거울의 방, 비너스의 방, 왕실 예배당 등 화려한 건축물과 더불어 과학을 이용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빌헬름 1세의 취임식이 열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던 거울의 방은 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면 결국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 장소이기도 해요.
서양 정원의 표본을 제시해 준 베르사유 정원도 과학의 발달과 서양 정원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답니다. 특히 새롭게 조성한 운하와 분수는 이것과 관련한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였고, 오늘날 수리학과 상하수도 시설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게 되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이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의 호화로운 생활이나 무리한 계획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만든다는 사실이에요.
루이 14세에서 16세까지 프랑스 왕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프랑스 혁명을 불러왔고, 절대 권력자는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베르사유 궁전이 완성되자 이것을 보고 감탄한 유럽의 많은 절대 권력자들은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궁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상수시 궁전, 헤렌킴제 궁전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은 대표적인 궁전이지요. 궁전 건물이 높은 곳에 세워진 것은 물론이고 화려한 실내 장식, 기하학적인 정원과 숲, 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은 호화로운 궁전의 모습과 태양의 분수, 넵튠의 분수 등 많은 분수와 조각상이 베르사유 궁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답니다.
독일 바이에른 왕인 루트비히 2세는 헤렌킴제 궁전에 아름다운 정원과 베르사유 궁전을 그대로 모방한 ‘거울의 방’과 ‘천사의 계단’ 등을 만들었어요. 흥미롭게도 지금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라진 천사의 계단이 헤렌킴제 궁전에 남아 있어, 이것을 보려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헤렌킴제 궁전을 찾고 있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 관해 쓴 책은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을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루이 14세가 직접 쓴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가 있답니다. 바로 《베르사유 정원 관람 방법》이란 책이에요.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690년대 중반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어떤 순서로 관람하는 것이 좋은지를 알려 주고 있지요. 이 책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현관을 빠져나와 테라스에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고, 물이 보이는 정자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분수를 지나, 언덕 위에서 여러 조각상과 분수를 보고, 아폴론 운하를 따라 산책한 뒤, 궁전을 바라보며 돌아올 것’이라고 쓰여 있지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찾는 방문객 중에는 이 책을 들고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여유롭게 관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요. 1951년 플롱 서점이란 출판사에서 만든 얇은 책자가 지금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원본은 파리 국립 도서관 판화실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이른 아침의 베르사유 정원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에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답니다. 공기가 신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안개와 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건물과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정원과 숲을 감상한 뒤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전에 얼른 궁전 건물에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원하는 곳을 충분히 보기 힘들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잘 감상하려면 아침 일찍 서두르는 것이 좋습니다. 태양 왕 루이 14세의 동상이 서 있는 궁전 가운데로 이동하여 아침 햇살이 비치는 궁전을 감상한 뒤, 궁전 뒤쪽으로 가서 기하학적인 모양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것을 추천합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재위 1774년~1792년)으로 1770년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1774년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오랫동안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때에 왕위에 올라, 재정적 위기에서 벗어나고 국정의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튀르고와 같은 뛰어난 재무 총감들을 등용하였지만, 사제와 귀족 등 특권층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1789년 국민의 협력과 동의를 얻기 위하여 삼부회를 소집하였지만, 이 모임이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파리 시민에 의하여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왕은 베르사유 궁에서 파리로 옮겨져 국민의 감시를 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791년 국외로 도망치려다 바렌에서 붙잡혀,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빵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텐데."라는 말로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요제프 프란츠 오스트리아 황제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4세 때 정략 결혼으로 루이 16세와 결혼하고 왕비가 되었지만 검소한 국왕 루이 16세와는 달리 사치를 일삼아 왕국의 재정을 바닥나게 했다.
화려함과 사치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그녀의 일생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된다. 1792년 8월 10일의 시민봉기로 그녀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고,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절대주의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대혁명이 일어난 당시 프랑스 국토의 90% 이상이 왕과 귀족들의 차지였으며, 그들은 일반 시민과 농민들을 착취하며 사치만을 일삼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으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혁명을 일으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뒤 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 대혁명은 세계 모든 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자유화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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