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6일 토요일

두보 . 杜甫.

두보 . 杜甫.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호북() 양양() 사람이다. 사실 두보는 하남() 공현()의 요만()에서 태어났으나 선대()가 두릉()에서 양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당서()』는 두보를 양양 사람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시인 두심언()이었고, 아버지 두한()은 봉천령()이란 작은 벼슬을 하였으나, 집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 자미(). 호 소릉().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과 병칭하여 이두()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의 샹양[]이지만, 허난성[]의 궁현[]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의 위인 두예()이고, 조부는 초당기()의 시인 두심언()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의 친저우[] ·퉁구[]를 거쳐 쓰촨성[]의 청두[]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의 쯔저우[] ·랑저우[]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의 막료()로서 공부원외랑()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의 쿠이저우[]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라 불린다.
단시정형()의 금체()는 특히 율체()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 ·초당()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으로 조술()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의 한유() ·백거이()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의 왕안석() ·소식()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 《추흥()》 《삼리삼별()》 《병거행()》 《여인행()》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 왕수()의 《두공부집()》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의 《구가집주()》는 훈고(뭍)에 뛰어났으며, 청()의 전겸익()의 《두시전주()》는 사실()에 상세하며, 구조오()의 《두시상주()》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 ·이색()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 황학() 보주()의 《두공부시보유()》 등이 복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 때는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 《분류두공부시언해(:)》를 간행하였으며, 
이식()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 26권은 두시()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의 《두시언해비주()》(1958), 양상경()의 《두시선()》(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는 병도 많았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14~15세 때에 유명한 문사()들과 수창()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 
20세 되던 해에는 집을 떠나 3~4년 동안 남으로 오()·월()을 유람하며 역사 문물, 풍광에 심취하였다. 
24세 때에는 낙양()으로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실의에 잠겨 산동(), 하남() 일대를 장유()하였다. 이 시기 이백(), 고적() 등과 같은 일류 시인들과 창화()하며 시교를 맺기도 하였다.

두보는 35세 되던 해인 천보() 5년(746)에 다시 장안으로 가 10년 가까이 곤궁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품은 뜻을 펼 수 없어 울적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천보() 11년(752) 두보의 나이 42세 되던 해에 성대하게 제전()이 베풀어졌을 때 「삼대예부()」를 지어 올려 본인의 가세(), 학문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고 등용을 희망하였다. 
현종()은 두보의 글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재상에게 그를 집현전으로 불러들여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 뒤 두보에게 하서현위(西)를 제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우위솔부주조참군( = 무기고 관리)으로 임명하였다. 
두보는 장안의 10년 동안의 간고한 현실 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여인행()」, 「병거행()」, 「자경부봉선영회오백자()」 등과 같은 사실주의적 시를 써 나갔다.

안사()의 난은 찬란했던 당의 역사에 내리막길을 걷게 하였고, 두보 생활사에 있어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천보 15년(756) 6월에 동관()을 지키지 못하여 장안이 함락되자 두보는 봉선()을 떠나 부주( = 현 섬서(西) 부현())로 향하였다. 
섬서(西), 하남(), 산서(西) 등이 전화에 휘말려들었을 때 숙종()이 감숙() 영무()에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주에서 영무로 달려가는 도중 적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춘망()」, 「월야()」 등은 장안에 감금되었을 때에 지은 시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지 2년째 되던 해에도 두보는 장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춘망()」, 「애강두()」, 「애왕손()」 등의 시를 통하여 국가, 백성들의 고통을 여실히 묘사하였다. 「춘망()」을 예로 든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냥 있어, 장안()에 봄이 와서 초목이 우거졌다.
시세()를 슬퍼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란다.
봉화()가 삼월까지 계속하나니, 집의 편지는 만금()만큼 값지다.
흰 머리털 긁을수록 자꾸만 빠지나니,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하겠구나."
"國, , .
, , ."

두보는 지덕 2년(757)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봉상()으로 가 숙종을 배알하였다. 숙종은 두보를 좌습유(, 황제 명령의 타당성을 검토하여 간하는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친구 방관()의 죄를 옹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처자가 있는 부주 강촌()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의 비참한 정경이 「강촌()」, 「북정()」, 「삼리()」, 「삼별()」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건원() 원년(, 758)에 사사명()의 변란을 피하여 장안을 떠나 산물이 풍부한 사천()의 성도()를 찾아갔다. 성도의 생활은 엄무(), 배면(), 고적()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이였다. 성도 서쪽 교외의 완화계()에 초당()을 짓고 야로()들과 교유하였다. 
대종() 광덕() 2년(764)에는 서천병마사(西使) 서지도()의 난을 진압한 뒤, 두보는 절도참모() 겸 검교공부원외랑()의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뒤에 '두공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년 뒤에 엄무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호북(), 호남()의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초옥위추풍소파가()」, 「문관군수하남하북()」, 「우정오랑()」, 「제장()」, 「추흥()」 등의 시를 지었다.


두보()는 기주(, 사천성 봉절현())에서 그런 대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으나 풍토가 거칠고 친구가 적어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동생 두관()의 권고에 따라 백제성()에서 배를 타고 구당협(), 삼협()을 지나 형양()에 도착했으나 반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웠다. 
두보는 형양을 떠나 강릉(), 공안()을 거처 악주( = 호남성() 악양())에 이르러 얼마동안 머물렀다. 이 때에 「등악양루()」란 시를 지었다.
"옛날부터 들어온 동정호, 이제야 악양루에 올랐다.
오나라 초나라 땅은 동남으로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물 속에 떠 있다.
친구에게서는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나에게는 배 한 척 밖에 의지할 곳 없구나.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끊임없고,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줄줄 쏟아지는구나.'
"昔, , .
, , .'

악양에서도 살 수 없었던 두보는 대력() 5년(770)에 뇌양( = 호남() 형양동남())으로 향하였으나 상강()에 큰물이 져 강상을 오락가락하다가 배 안에 병져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백()을 '시선()', 왕유()를 '시불()'이라 하듯 두보()를 '시성()'이라 하는데, 혼란했던 역사의 현실적인 경험을 시로 썼기 때문에 '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존하는 두보의 시는 1,400여 수로 이백의 1,000 수보다는 많으나, 백거이의 3,000여 수보다는 적다.

최고의 시인 이백 만남

그가 33세 되던 해에(744년) 두보는 뤄양에서 당나라 때 저명한 현실주의 시인 이백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양 · 송 일대(현 허난성 카이펑, 상추 일대)를 여행한다. 이후 두보는 다시 제주(, 지금의 산둥성 지난)로 건너갔다가 4년 뒤 옌저우로 가서 이백과 다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신선을 찾아다니고 시와 문장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렇게 이백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두보는 이백과 아쉽게 헤어진 뒤에도 몇 년에 걸친 방랑생활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이두()’로 불려지며, 이상은과 두목을 ‘소이두()’라고 하고, 두보와 이백을 ‘대이두()’라고 구별한다. 
두보는 ‘노두()’라고도 불린다.


당나라 현실주의 시인, 당송팔대가,


집안 내력

두보는 경조() 두씨라는 북방의 큰 집안 출신이다. 자는 자미()이고, 호는 소릉야노()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두보의 본적은 후베이성 샹양()이며, 증조부 때 허난성 궁()현 동북으로 이주했다.
당나라 때의 같은 성을 가진 두목과 함께 진()나라 때 유명한 학자 두예의 후손이지만 후에 집안의 촌수는 멀어졌다. 두보는 두예의 둘째아들 두탐()의 후손이고 두목은 두예의 막내아들 두윤() 쪽이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초당시기의 시인 두심언이다.

청소년기의 여행과 과거 낙방

두보의 청소년 시기는 좋은 집안 환경 때문에 풍족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일곱 살 때 벌써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도 뛰어났고 자신감도 대단했다. 19세부터는 약 4년에 걸쳐 각지를 여행했다. 당시 두보의 부친이 산둥성 옌저우()에서 사마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보는 부친을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제나라 · 조()나라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23세 때 고향에서 향공에 응시했고, 24세 때는 허난성 뤄양으로 가서 진사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벼슬길

명문가 출신에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였던 두보는 젊은 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이 있었고 포부가 남달랐다. 또 힘들게 사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 · 순 시대를 갈망하는 정치적 이상도 품었다. 현실 정치의 문제와 추악한 면도 실감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종의 통치는 후반기로 갈수록 부패에 찌들었고 두보의 생활도 실망과 빈곤으로 치달았다.
현종의 조서에 따라 그도 장안(현, 시안(西))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의 권신 이임보의 농간으로 시험에 참가한 응시자 모두가 낙방했고, 과거길이 막힌 두보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권문세족의 집안을 전전하며 글을 써주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장안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 현종에게 올린 <대례부()>란 글이 현종의 눈에 들어 조정에 나갈 기회를 잡았으나 역시 이임보 때문에 관직을 얻지 못했다. 두보가 44세 되던 무렵에 겨우 말단 관리직을 받았으나 그때 어린 아들이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 두보의 일생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터진 안록산의 난은 두보를 더욱 더 곤경에 몰아넣었다.


전란 . 수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쳤다. 태자 이형이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현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이때 두보는 집을 옮겨 난을 피했다가 숙종의 즉위 소식을 듣고 혼자 숙종이 거처하고 있는 영무(, 지금의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시)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함께 포로로 잡힌 왕유와 달리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두보는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고난을 겪으며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시로 표출했다.
그가 46세 되던 해인 757년, 정부군을 이끄는 곽자의가 장안 북쪽으로 진격하자 두보는 장안을 빠져나가 마침내 숙종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숙종은 두보에게 좌습유()라는 벼슬을 내렸다. 재상 방관의 석방을 건의했다가 숙종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화주로 쫓겨나 허드렛일을 맡았다.
화주에 온 두보는 고뇌에 시달렸다. 이 무렵 지은 시는 실의에 빠진 자신의 처지, 싸늘한 세대, 간신배들에 대한 울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방관은 재상 장호()가 힘을 써서 구하기는 했지만 한번 돌아선 숙종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숙종은 그 뒤 다시는 두보를 찾지 않았다.

유랑 . 일시 정착



47세 되던 해인 758년, 두보가 화주를 떠나 뤄양과 허난성 등지를 떠돌던 중 업성5)에서 당나라 군대가 반란군에 대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보는 뤄양에서 화주로 돌아오던 중 전란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삼리()>와 <삼별()>로 불리는 유명한 역사시 세 편을 남긴다. 바로 ‘신안리()’, ‘석호리()’, ‘동관리()’의 ‘삼리’와 ‘신혼별()’, ‘수노별()’, ‘무가별()’의 ‘삼별’이 그것이다.
759년에는 화주와 관중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뜩이나 힘든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두보는 가망이 보이지 않는 벼슬을 내던지고 서쪽 간쑤성 일대로 갔다가 각지를 전전한 끝에 마침내 청두()에 이르렀다. 여기서 두보는 당시 청두 절도사로 있던 엄무 등의 도움을 받아 성 서쪽 완화계 옆에 초당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훗날 ‘두보초당’ 또는 ‘완화초당’으로 불린 곳이다.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검교공부원외랑()이란 벼슬을 받고 엄무의 참모가 되었다. 두보는 이 벼슬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두보의 생활이 보기에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비바람에 초당이 쓰러지고 가족이 굶주리는 등 힘든 생활은 여전했다.
죽음
엄무가 죽자 두보는 청두를 떠나 각지를 전전했다. 기주(, 지금의 쓰촨성 펑제()현) 도독 백무림()의 보살핌으로 잠시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두보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2년 안에 4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57세 때인 768년, 두보는 향수 때문에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후난성 웨양()을 거쳐 담주(, 지금의 후난성 상탄()시)에서 다시 형주(, 지금의 후난성 형양()시 일대)로 갔다가 다시 담주로 돌아왔다.
59세 때인 770년, 담주에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형주로 가서 외삼촌에게 몸을 맡기려 했으나 강물이 불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굶주렸다. 두보는 생각을 바꾸어 다시 담주로 돌아오려다가 담주에서 웨양으로 가는 작은 쪽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보의 죽음에 관해서는 역대로 많은 설들이 있었다. 병사를 비롯하여 처형, 투신자살, 식중독사 등이 있으나 병사로 보는 설이 우세한 편이다.
평가
그는 중국 고전 시가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시인 중의 하나로 후인들은 그를 ‘시성()’이라고 부르고, 그의 시를 ‘시사()’라고 일컫는다.
759년에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쓰촨()으로 피난 갔을 무렵을 전후로 <춘망()>, <북정()>, <삼리()>, <삼별()> 등 주옥같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는 약 1천5백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대부분 『두공부집()』에 실려 있다.
두보의 시풍
이백과 나란히 거론되는, 그렇지만 신세는 이백보다 훨씬 처량하고 서글펐던 위대한 시인 두보의 시풍은 그의 고단한 삶의 역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는 이백보다 열한 살 아래였고, 문하성에서 좌습유라는 보잘것없는 하급 관리를 지냈다. 중년 이후 안사의 난을 맞이하여 더욱 빈궁하게 지냈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굶어죽을 정도였다.
그의 시는 극악무도하게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권문귀족과 평민들이 받는 박해에 대해 침통해하는 등 대부분의 시가 소리없이 흐느끼는 듯하다. 두보의 시는 단순히 그의 천재성에만 기대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가 뼈를 깎는 듯한 고심의 산물이다. 이런 그의 시풍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석호리()>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이 시는 중국 역사상 제2 황금시대로 불리는 당나라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혼란에 빠져들 무렵에 만들어졌다.

"날 저물어 석호촌에 머물렀는데 관리가 밤에 사람 잡으러 나왔네.
할아비는 담 넘어 도망치고 할미는 문 앞에 나와 보는데
관리의 호통이 어찌나 노엽고 할미의 울음은 얼마나 서럽던지!
들으니 할미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하네. ‘세 아들 업성으로 수자리 살러 갔는데
한 아들 부쳐온 글에 두 아들이 싸우다 죽었다 하지 뭐요.
산 놈은 구차하게라도 산다지만 죽은 놈들은 영영 끝장이지요.
집안에 사람이라곤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뿐인데,
손자가 있어 어미는 가지 못했지만 나들이 하려해도 온전한 치마 한 벌 없다오.
늙은 이 할미의 힘 노쇠하긴 했지만 나으리 따라 밤도와 가리다.
급히 하양 전쟁터로 때맞추어 갈 수 있다면 그래도 아침밥은 지을 수 있을게요!’
밤 깊자 말소리 끊어지고 흐느껴 우는 소리 같은 것만 들렸는데
날 밝아 길 떠날 적에는 오직 할아비와 작별하였네.'

두보가 말단 관리를 지냈고, 중년에 안사의 난을 잔혹하게 치렀던 당시의 심경과 처지를 <춘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한다.
봉홧불이 석 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흰 머리를 빗으니 다시 짧아져서 온통 비녀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구나."

관련 유적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허난성 궁셴의 무덤, 쓰촨성 청두의 두보초당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많이 남아 있다.
두보의 고향인 허난성 정저우 공의시에는 두보가 어린 시절 살던 옛 집 ‘두보고리()’가 기념관을 중심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두보의 무덤도 이곳에 잘 정돈되어 있는데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1963년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청두를 비롯한 네 곳에 두보의 사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후난성 형양에 있는 레이양()에는 허난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서 두보의 무덤과 사당 및 서원 유지 등이 지정되어 있다.
두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두보가 거처했던 두보초당이다. 두보초당은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완화계 가에 위치하고 있다. 두보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청두로 흘러 들어와 머물던 집이다.
759년 12월 안사의 난을 피하여 두보는 장안에서 간쑤를 거쳐 청두로 도망왔다. 이듬해 3월 친구의 도움으로 이곳에 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초당’이라 이름 지었다.
두보는 3년 넘게 이곳에서 살면서 240편이 넘는 시를 창작했는데, 초당을 소재로 한 시가 아주 많다. ‘만리교 서쪽 초당 하나’라든가 ‘만리교 서쪽 백화담 북장’ 등이 모두 초당의 위치를 가리키는 시 구절들이다. 
‘완화계 물이 서쪽 끝으로 흐르면서 춘강이 마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구나’라는 구절은 초당의 환경을 묘사한 것이다. ‘초당이 가을바람에 부서진다’는 시는 훗날 사람들이 천고의 절창으로 꼽는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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